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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이중성과  헛된 명칭으로부터 자유로운 요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중성의 세계이다. 한 때는 여름의 무더위가 있고 다른 한 때에는 겨울의 혹한이 있다. 한 때 행복하다가도 곧 불행을 느낀다. 한 때는 명예롭다가 다음에는 불명예스럽게 된다. 이중성으로 이루어진 물질계는 상반되는 것 없이 어떤 현상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불명예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명예를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불행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불행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이런 이중성을 넘어서야 하지만, 우리의 육신이 이곳에 있는 한 이중성은 함께 할 것이다.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개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자는 이런 이중성을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 2장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중성은 오직 육신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주신다. 그것은 피부병 또는 간지러움과 유사하다. 간지럽다고 긁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된다. 모기가 물었다고 우리의 의무를 포기하거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는 견뎌내야 하는 이중성이 가득하지만, 마음이 끄리쉬나 의식에 고정되어 있으면 이런 이중성들은 하찮게 여겨진다.

그런 이중성을 어떻게 참아낼 수 있는가?

갸나-비갸나-뜨립따뜨마 jñāna-vijñāna-tṛptātmā
꾸따-스토 비지뗀드리야하 kūṭa-stho vijitendriyaḥ
육따 이띠 우쨔떼 요기 yukta ity ucyate yogī
 사마-로쉬뜨라스마-깐짜나하 sama-loṣṭrāśma-kāñcanaḥ

“습득한 지식과 깨달음의 덕으로 완전한 만족에 이른 자를 요가행자(혹은 신비론자)라고 하며, 자아 인식을 이루었다고 하느니라. 그런 자는 초월의 경지에 있고 자신을 통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갈이든, 돌이든, 황금이든 모든 것을 하나로 본다.” 《바가바드 기따 6.8》 갸나(Jñāna)는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하고 비갸나(vijñāna)는 ‘실증적인 지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과학도는 이론적 과학 개념은 물론이고 응용과학도 공부해야 한다. 이론 지식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이론을 실제에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요가에서도 이론적 지식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지식도 얻어야 한다. 단순히 “나는 이 몸이 아니다”고 이해만 하고 엉터리 행동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회원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감각적 삶을 즐기면서 베단따 철학을 심각하게 논하는 수많은 협회가 있다. 이론적인 지식만을 가졌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 지식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나는 이 몸이 아니다”라고 진정 이해한 자는 실제로 육체에 필요한 물품을 최소한으로 줄일 것이다. “나는 이 몸이 아니다”고 생각하면서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늘릴 때 그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갸나와 비갸나가 나란히 함께 할 때만 우리는 만족할 수 있다.

영적 깨달음의 실제적 단계에 있을 때 진정으로 요가에 있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인생 전반에 거쳐 나아진 것 하나 없이 똑같이 살면서 계속해서 요가 수업에 나가서는 안 된다. 실제적인 깨달음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깨달음의 징후는 무엇인가? 마음이 차분하고 침착해 세속의 끌림에 더는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통제한 사람은 물질적인 화려함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이는 모든 것, 자갈, 돌, 황금 등을 똑같이 본다. 오늘날의 물질문명에서 단지 감각을 만족하게 하려고 수많은 물품이 생산되었다. 이것들은 물질적 진보라는 기치 아래 생산되고 있다. 요가에 임한 자는 이런 것들을 길에 나뒹구는 수많은 쓰레기로 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수흐린-미뜨라류다시나 suhṛn-mitrāry-udāsīna-
마댜스타-드베샤-반두슈 madhyastha-dveṣya-bandhuṣu
 사두쉬바삐 짜 빠뻬슈 sādhuṣv api ca pāpeṣu
 사마-붇딜 비시샤떼 sama-buddhir viśiṣyate

“정직한 후원가, 친구 또는 적, 시기하는 자, 경건한 자, 죄인, 냉담한 자, 공정한 자 등 모든 사람을 동등한 마음으로 여길 때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 6.9》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친구가 있다. 수흐리뜨(suhṛt)는 천성적인 후원가로, 항상 다른 사람의 행복을 염원한다. 미뜨라(mitra)는 보통의 친구를 의미하고, 우다시나(udāsīna)는 중립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속계에서 누군가는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일 수 있고, 혹은 그저 친구이거나 친구도 적도 아닌 중립의 관계에 있을 수 있다. 다른 누군가는 나와 적 사이를 중재해주는 조정자일 수 있는데, 이 절에서 마댜스타(madhyastha)라고 불린다. 우리는 자신의 잣대로 누군가는 경건하고, 다른 누군가는 사악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초월적 경지에 있는 자에게는 친구, 적 혹은 다른 무엇 등, 이 모든 관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학식 있는 자는 사실상 “누구도 내 적이 아니고, 누구도 내 친구가 아니며 누구도 내 아버지, 어머니도 아니다.”라고 이해했으므로 아무도 적으로, 혹은 친구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저 생명체로서 무대 위에서 아버지, 어머니, 자식, 친구, 적, 죄인, 성인 등의 옷을 입고 연기할 뿐이다. 드라마에서 많은 등장인물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무대 위에서는 적이나 어떤 다른 관계를 연출하지만, 무대에서 내려가면 모든 연기자가 친구다. 마찬가지로 이 육신으로 우리는 물질적 본성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있고 서로 간에 수많은 관계로 역할 지우며 집착한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이 내 아들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우리 스스로 어떤 자식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자식이라는 몸을 얻을 뿐이다. 생명체를 생기게 하는 일은 인간 능력 밖의 일이다. 단지 성교만으로 생명체가 생기는 것이 아니며, 생명(영혼)이 분비의 유화(乳化) 안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헛된 명칭에 대한 스리마드 바가바땀의 평결이다. 따라서 육체 간의 다양한 관계는 연극과 아주 비슷하다. 실제로 깨달았고 진정한 요가를 달성한 사람은 이런 육체 간의 관계를 더는 구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