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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몸과  마음을 통제하는 요가

바가바드 기따 전반에 걸쳐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그는 전사이며 싸우는 것이 그의 의무라며 일어나 싸우라고 격려하신다. 비록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 6장에 명상적인 요가 체계에 대해 설명하셨지만, 그것을 강조하시지 않을뿐더러 아르주나에게 그 길을 가도록 권장하시지도 않는다. 끄리쉬나께서도 명상의 과정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인정하신다.

스리 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아삼샤얌 마하-바호 asaṁśayaṁ mahā-bāho
 마노 둘니그라함 짤람 mano durnigrahaṁ calam
 아뱌세나 뚜 까운떼야 abhyāsena tu kaunteya
 바이라계나 짜 그리햐떼 vairāgyeṇa ca gṛhyate

“신성한 스리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 꾼띠(Kuntī)의 힘센 아들아,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몹시 어렵지만, 지속적인 수행과 초연함으로 가능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6.35》

여기서 끄리쉬나께서는 마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수행과 단념을 강조하신다. 하지만 단념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물질적 감각 만족에 익숙해 있어서 어떤 것 하나 포기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무절제한 감각 탐닉의 연속된 삶을 살면서도 요가 수업에 참여해 성공을 꿈꾼다. 요가를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규칙과 규정을 따라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담배 피우는 것 같이 작은 습관조차 포기하지 못한다.

명상적인 요가 체계에 대한 담론 중에서 끄리쉬나께서는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적게 먹는 자는 요가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하신다. 굶주린 자는 요가를 바르게 행할 수 없다. 필요 이상 먹는 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먹는 과정은 도를 지나치지 말아야 하고, 육체와 영혼을 유지하기에 딱 적당한 양만큼만 먹어야 한다. 혀를 즐겁게 하려고 먹어서는 안 된다. 맛 좋은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우리는 한 번만 먹지 않고 두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먹는 데 익숙해 있다. 혀는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른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요가행자들이 하루에 반 수저의 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광경 또한 보기 드물지 않다. 너무 잠을 많이 자거나 충분히 자지 않아도 명상적인 요가를 행할 수 없다. 꿈을 꾸지 않는 수면이 있다고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다. 잠에 빠져들자마자 우리가 비록 기억하지는 못할지라도 꿈을 꿀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자는 동안 꿈을 너무 많이 꾸는 자는 요가를 바르게 행할 수 없다고 주의를 주신다. 하루에 6시간 이상을 자서는 안 된다. 밤에 잠을 못 자는 불면증에 시달려도 성공적으로 요가를 행할 수 없으므로 육체는 항상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는 육체를 훈련하기 위한 아주 많은 필요조건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하지만 이 모든 필요조건은 네 가지 기본 규정으로 집약될 수 있다. 즉,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성관계 금지, 정신을 취하게 하는 것의 사용 금지, 육식 금지, 도박 금지이다. 이 네 가지가 모든 요가를 수행함에 필요한 최소 규정이다. 현 시대에 누가 이런 활동들을 삼가겠는가? 따라서 요가 수행에 성공하려면 이 조건들을 따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요기 윤지따 사따땀 yogī yuñjīta satatam
아뜨마남 라하시 스티따하 ātmānaṁ rahasi sthitaḥ
에까끼 야따-찟따뜨마 ekākī yata-cittātmā
 니라시라빠리그라하아 nirāśīr aparigrahaḥ

“초월주의자들은 항상 마음을 절대자에 집중하려고 노력해야 하느니라. 외딴곳에서 혼자 살아야 하며 늘 조심스레 마음을 통제해야 한다. 욕망과 소유욕에서도 자유로워야 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6.10》 이 절에서 알 수 있듯이 요가행자의 의무는 혼자 남는 것이다. 적어도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명상적인 요가는 여럿이 모여 행할 수 없다. 명상적인 요가 수행을 할 때 외딴곳이 아니면 절대자에 집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도에는 쿰바 멜라(Kumba Melā)에 모이는 요가행자들이 여전히 있다. 대개는 은둔하며 살지만, 아주 가끔 특별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인도에는 수천 명의 요가행자와 현인(賢人)이 있고 매 12년 혹은 다른 일정 시기마다 알라하바드(Allahabad) 같은 특정 성지에서 만난다. 사업가들이 컨벤션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가행자는 외딴곳에 사는 것 이외에도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며 물질적인 어떤 능력을 얻기 위해 요가를 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또한 사람들한테 선물이나 호의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이 명상적 요가를 올바로 행하는 자는 정글이나 숲 속, 또는 산에 기거하며 사회와의 접촉을 전적으로 피한다. 한편 누구를 위해 요가행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믿음이 늘 확고해야 한다. 빠람아뜨마(Paramātmā, 초영혼)가 항상 자신과 함께하고 있으므로 혼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현대 사회에서 명상적인 요가를 제대로 행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깔리 유가를 사는 현대 문명에서 홀로 있기와 욕망과 소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실로 불가능하다.

이제 명상적인 요가 수행법에 대해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더욱 상세히 설명해주신다. 스리 끄리쉬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슈짜우 데셰 쁘라띠시타뺘 śucau deśe pratiṣṭhāpya
 스티람 아사남 아뜨마나하 sthiram āsanam ātmanaḥ
 나뜟차리땀 나띠-니짬 nāty-ucchritaṁ nāti-nīcaṁ
짜일라지나-꾸숏따람 cailājina-kuśottaram
따뜨라이까그람 마나하 끄리뜨바 tatraikāgraṁ manaḥ kṛtvā
야따-찟뗀드리야-끄리야하 yata-cittendriya-kriyaḥ
 우빠니샤사네 윤잗 upaviśyāsane yuñjyād
요감 아뜨마-비슏다예 yogam ātma-viśuddhaye

“요가를 행하기 위해서는 외딴곳에 가서 땅 위에 꾸샤(kuśa) 풀을 놓고, 그 위에 사슴 가죽과 부드러운 천을 덮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 자리는 너무 높아서도, 너무 낮아서도 안 되며 성지여야 한다. 이제 요가행자는 아주 꼿꼿이 앉아 마음과 감각을 통제함으로써 정신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6.11~12》보통 요가행자는 호랑이 가죽이나 사슴 가죽에 앉는데, 그 이유는 그런 가죽 위로는 파충류가 기어오르지 않아 명상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는 나름의 쓸모가 있는 듯하다. 비록 우리가 그게 무엇인지 잘 몰라도 모든 종류의 풀과 허브는 쓸모가 있고 어떤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요가행자들이 뱀이 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대비를 해 주셨다. 인적이 드문 장소에 좋은 자리를 찾았다면 이제 요가행자는 아뜨마, 즉 몸과 마음, 영혼을 정화하기 시작한다. 요가행자는 이제 놀랄만한 힘이나 능력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요가행자가 특정한 싣디(siddhis, 능력)를 얻기도 하지만, 이것은 요가의 목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진정한 요가행자는 이 능력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진짜 요가행자는 지금 이 물질적 분위기로 더렵혀졌으니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통제하는 일은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처럼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 안에 있으면 이런 규정들은 쉽게 따를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성생활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이 상당히 의욕적인데, 사실 이것 또한 그만둘 수는 없다. 우리가 이 물질적인 몸을 가진 이상 성욕은 항상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육신을 가진 이상 먹어야 하고, 몸을 유지해야 하며 적당한 수면을 취해 몸이 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런 활동을 부정할 수 없지만, 베다 문헌은 먹고 자고 성생활 등을 통제할 수 있도록 여러 지침을 내려준다. 요가 수행에 성공하고자 한다면 무절제한 우리 감각 기관이 그 대상물을 향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므로 그에 맞는 지침이 마련되었다. 스리 끄리쉬나께서 마음은 규정을 통해 다스려질 수 있다고 충고하신다.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지 않으면 마음은 우리를 더더욱 선동한다. 행위를 멈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끄리쉬나 의식에 깃들게 함으로써 규제할 수 있다. 끄리쉬나와 관계되는 행위에 늘 종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마디(samādhi, 황홀경)이다. 사마디에 들었을 때 먹지도, 자지도, 일하지도, 전혀 즐기지도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마디는 끄리쉬나를 향한 생각에 몰입한 채 규정된 행위들을 수행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아삼야따뜨마나 요고 asaṁyatātmanā yogo
두시쁘라빠 이띠 메 마띠히 duṣprāpa iti me matiḥ
 바샤뜨마나 뚜 야따따 vaśyātmanā tu yatatā
샤꼬 밥뚬 우빠야따하 akyo ’vāptum upāyataḥ

“마음에 고삐를 채우지 않은 자에게,” 끄리쉬나께서 나아가 말씀하신다. “깨달음이란 어려운 일이다.” 《바가바드 기따 6.36》 고삐 없는 말에 타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모두가 안다. 그 말은 아무 속력으로 목적 없는 방향을 향해 달릴 것이기에 말을 탄 자는 분명 다치고 말 것이다. 마음에 고삐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요가수행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 끄리쉬나께서도 동의하신다. “하지만,” 끄리쉬나께서 덧붙이신다. “올바른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리고자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 이것이 나의 뜻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6.36》 올바른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언급된 네 가지 기본 규정을 따르고 끄리쉬나 의식에 열중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에서 요가를 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다른 의무나 활동이 지나침이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일만 해서는 안 된다. 지나침 없이 일하고, 적정한 양만큼만 먹으며, 감각 또한 적당히 만족시켜 가능한 한 걱정 없는 삶을 유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요가 수행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러면 요가를 완성한 자의 징후는 무엇인가? 끄리쉬나께서는 의식이 완벽히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자가 요가 안에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야다 비니야땀 찟땀 yadā viniyataṁ cittam
아뜨만예바바띠시타떼 ātmany evāvatiṣṭhate
니스쁘리하 사르바-까메뵤 nispṛhaḥ sarva-kāmebhyo
육따 이띠 우쨔떼 따다 yukta ity ucyate tadā

“요가행자가 마음의 움직임을 잘 다스려 물질적 욕망이 하나도 없는 초월의 경지에 이를 때에야 비로소 요가를 달성했다고 한다.” 《바가바드 기따 6.18》 요가를 달성한 자는 마음의 명령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그의 통제 아래 있다. 마음을 내쫓거나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항상 끄리쉬나 혹은 비쉬누를 생각하는 게 요가행자의 임무다. 요가행자는 마음이 밖으로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끄리쉬나 의식으로는 가능하다. 항상 끄리쉬나 의식에 임하고 끄리쉬나를 위해 봉사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끄리쉬나를 떠나 방황할 수 있겠는가? 끄리쉬나를 향한 봉사에 임할 때 마음은 저절로 통제된다.

요가행자는 물질적 감각 만족에 대한 어떠한 욕망도 없어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자는 끄리쉬나 이외에는 어떤 욕망도 없다. 하지만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 상태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감각 만족을 향한 욕망은 정화를 통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지만, 끄리쉬나를 향한 욕망은 배양되어야 한다. 단지 욕망의 대상을 전환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생명체에게 욕망은 끊임없는 동반자이므로 욕망이 제거될 여지는 전혀 없다. 끄리쉬나 의식은 욕망을 정화하는 과정이다. 감각 만족을 추구하는 대신 끄리쉬나를 위한 봉사에 필요한 것을 원하면 된다. 예를 들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할 때 우리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끄리쉬나를 위해 준비하고 끄리쉬나께 바칠 수 있다. 행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의식이 내 감각을 위한 생각에서 끄리쉬나를 위한 생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끄리쉬나를 위해 맛있는 유제품과 채소, 곡물, 과일과 다른 훌륭한 채식 요리를 준비해서 바치고 “이 물질적 육신은 무지 덩어리이고 감각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굴레입니다. 모든 감각 기관 중에서 혀는 가장 탐욕스럽고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혀를 정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맛있는 쁘라사다(Prasada, 영적 음식)를 저희에게 주시어 혀를 정복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기쁘게 이 쁘라사다를 취하게 해 주시고, 스리 스리 라다와 끄리쉬나의 위대함을 찬양하게 해 주시며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와 니땨난다 쁘라부의 도움을 사랑으로 요청합니다.”라고 기도한다. 이런 식으로 끄리쉬나를 위해 음식을 바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까르마(karma)는 봉헌물이 된다. 그러나 이때 음식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은 조금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끄리쉬나는 당신의 큰 자비로 우리가 음식을 먹도록 내어 주신다. 이렇게 하여 음식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성취된다. 자신의 욕망을 끄리쉬나의 바램에 맞추는 방식으로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가면 요가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심호흡하고 운동을 조금 하는 것이 요가가 아니다. 의식의 완전한 정화가 필요한 것이다.

요가를 수행하는데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야타 디뽀 니바따-스토 yathā dīpo nivāta-stho
넹가떼 소빠마 스므리따 neṅgate sopamā smṛtā
 요기노 야따-찟따샤 yogino yata-cittasya
 윤자또 요감 아뜨마나하 yuñjato yogam ātmanaḥ

“바람 없는 곳의 등잔불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통제된 초월주의자들은 초월적 자아에 대한 명상에 항상 꾸준히 정진한다.” 《바가바드 기따 6.19》 바람이 없는 곳에 놓인 촛불은 불꽃이 똑바로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도 불꽃처럼 여러 물질적 욕망에 영향 받기 쉽고 아주 사소한 자극에 움직이기도 한다. 마음의 작은 움직임이 전체의식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는 진지하게 요가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전통적으로 브라흐마짜리 혹은 독신자로 남는다.

두 가지 유형의 브라흐마짜리가 있다. 완전 독신자 브라흐마짜리와 그리하스타-브라흐마짜리(gṛhastha-brahmacārī)로, 그리하스타-브라흐마짜리는 결혼은 하되, 다른 여성과 전혀 교제하지 않으며 자기 부인과의 관계 또한 엄격히 규제된다. 이런 식으로 완전 독신자이거나 제한된 부부생활을 통해 마음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완전 독신자로 남을 것을 맹세하더라도 성적 욕구로 마음이 여전히 동요될 수 있기에 인도에서는 엄격한 맹세를 하고 전통적인 요가를 행하는 독신자의 경우, 심지어 혼자서는 어머니, 여자 형제, 딸과도 함께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마음은 아주 변덕스럽기 때문에 사소한 연상도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요가행자는 비쉬누에 집중함으로써 명상하던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 곧바로 다시 마음을 붙잡는 식의 수련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진정한 행복은 초월적인 감각 만족을 경험할 때 맛볼 수 있는 것이지, 물질적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다. 감각과 욕망이 희생되어선 안 되지만, 감각과 욕망의 만족은 모두 영적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감각적 경험을 초월한다. 만약 이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분명 마음이 동요되어 수행에 실패할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감각에서 얻으려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실제 요가행자들은 진정으로 즐거운데, 그 즐거움이란 어떤 것일까? 라만떼 요기노 난떼(Ramante yogino 'nante). “그들의 즐거움은 무한하고, 그 무한한 즐거움이 진정한 행복이며, 그런 행복은 영적인 것으로 물질적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구송할 때 듣는 단어인 진정한 의미의 라마(Rama)이다. 라마는 영적 삶을 통한 즐거움을 의미한다. 영적 삶은 즐거움으로 가득하고 끄리쉬나는 완전한 즐거움이다. 우리는 즐거움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지만, 올바르게 즐겨야 한다. 환자는 인생을 즐길 수 없다. 그가 느끼는 즐거움은 거짓 즐거움이다. 하지만 치유되어 건강해지면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물질적 개념의 삶을 사는 한 진정으로 즐길 수 없음은 물론이고 물질적 속성에 점점 더 얽히게 될 뿐이다. 환자가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먹으면 실제로 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물질을 향유하면 할수록 이 세상에 더 휘말려 들어 그 덫에서 빠져 나오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모든 요가는, 속박된 영혼이 이 속박의 덫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물질을 통해 얻는 거짓 즐거움이 끄리쉬나 의식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으로 전환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스리 끄리쉬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뜨로빠라마떼 찟땀 yatroparamate cittaṁ
니룯담 요가-세바야 niruddhaṁ yoga-sevayā
야뜨라 짜이바뜨마나뜨마남 yatra caivātmanātmānaṁ
빠샨 나뜨마니 뚜샤띠 paśyann ātmani tuṣyati
수깜 아땬띠깜 얏 딷 sukham ātyantikaṁ yat tad
붇디-그라햠 아띤드리얌 buddhi-grāhyam atīndriyam
 베띠 야뜨라 나 짜이바얌 vetti yatra na caivāyaṁ
스티따스 짤라띠 땃뜨바따하 sthitaś calati tattvataḥ
얌 랍드바 짜빠람 라밤 yaṁ labdhvā cāparaṁ lābhaṁ
만야떼 나디깜 따따하 manyate nādhikaṁ tataḥ
 야스민 스티또 나 두께나 yasmin sthito na duḥkhena
 구루나삐 비짤랴떼 guruṇāpi vicālyate
땀 비댣 두카-삼요가 taṁ vidyād duḥkha-saṁyoga
비요감 요가-삼기땀 - viyogaṁ yoga-saṁjñitam

“요가 수행으로 사마디(samādhi), 즉 황홀경이라 하는 완성의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물질적 정신 활동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이 상태에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자아를 볼 수 있고, 그 자아 속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희열의 경지에서는 초월적 감각을 통해 무한한 초월적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여기에 이르면 결코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이것을 얻는 순간 더 이상의 큰 성취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위치에 오르면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물질적 접촉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이다.” 《바가바드 기따 6.20~23》

어떤 요가는 더 어렵고, 어떤 것은 더 쉬울지 모르나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존재를 끄리쉬나 의식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정화해 나가야 한다.

야다 히 넨드리야르테슈 yadā hi nendriyārtheṣu
 나 까르마스바누샷자떼 na karmasv anuṣajjate
 사르바-상깔빠-산냐시 sarva-saṅkalpa-sannyāsī
 요가루다스 따또쨔떼 yogārūḍhas tadocyate
욷다렏 아뜨마나뜨마남 uddhared ātmanātmānaṁ
나뜨마남 아바사다옏 nātmānam avasādayet
아뜨마이바 히 아뜨마노 반둘 ātmaiva hy ātmano bandhur
아뜨마이바 리뿌라뜨마나하 ātmaiva ripur ātmanaḥ

“모든 물질적 욕망을 버리고, 감각 만족을 위해 행동하지 않으며, 결과 지향적 행위에 임하지 않을 때 요가를 달성한 자라고 일컫는다. 마음의 도움으로 반드시 자신을 구제해야 하며, 타락하지 말지어다. 마음은 제한되고 속박된 영혼의 친구인 동시에 적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6.4~5》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영적 단계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은 자신의 친구이자 동시에 적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짜나꺄 빤디따(Canakya Pandita)가 아주 훌륭한 시를 읊었다. “누구도 당신의 친구가 아니며, 누구도 당신의 적이 아니다. 오직 그 사람의 행동으로 친구인지 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누구도 우리 적으로 태어나지는 않으며 친구로도 태어나지 않는다. 이 역할은 서로 간의 행동으로 결정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일상적 관계를 맺듯이 그렇게 개개인은 자기 자신을 대한다. 스스로 자신의 친구 혹은 적처럼 행동할 수 있다. 친구로서의 나는 영혼으로서의 나를 이해할 수 있고, 어떤 연유로 물질적 속성과 접촉하게 되었지만,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물질적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한다. 이 경우에 나는 나의 친구이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잡은 후에도 그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가장 큰 적으로 여겨야 한다.

반둘 아뜨마뜨마나스 따샤  bandhur ātmātmanas tasya
예나뜨마이바뜨마나 지따하 yenātmaivātmanā jitaḥ
아나뜨마나스 뚜 샤뜨루뜨베 anātmanas tu śatrutve
 바르떼따뜨마이바 샤뜨루-밧 vartetātmaiva śatru-vat

“마음을 정복한 자에게 마음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지만, 정복하지 못한 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된다.” 《바가바드 기따 6.6》자신의 친구가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 또한 여기에 설명되어 있다. 아뜨마(ātmā)는 ‘몸’과 ‘마음’, ‘영혼’을 의미한다. 아뜨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육체적 개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육신’을 언급한다. 그러나 육체적 개념을 넘어서 정신적 단계에 오르면, 아뜨마는 ‘마음’이라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진정한 영적 단계에 오르면 아뜨마는 ‘영혼’이라 불린다. 사실상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다. 이런 식으로 영적 발전 정도에 따라 아뜨마의 의미는 달라진다. 니룩띠(Nirukti) 베다 용어 사전에 따르면 아뜨마는 몸, 마음, 영혼이라 정의된다. 하지만 바가바드 기따의 이 절에서 아뜨마는 ‘마음’이라 정의된다.

요가를 통해 마음이 훈련된다면 마음은 우리의 친구다. 하지만 마음이 훈련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 가능성은 없다. 영적 삶에 대한 생각이 없는 자에게 마음은 적이다. 자신을 단지 육신이라 생각하는 자의 마음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육신 전반에 봉사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생명체를 더욱 구속하여 물질적 속성 안에 가둘 것이다. 하지만 육신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치를 영혼으로 이해한 자에게 마음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마음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훈련되도록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교제(交際)를 통해 가장 잘 길들여질 수 있다. 욕망은 마음의 작용으로,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욕망하는 것이 달라진다. 따라서 마음이 친구처럼 작용하기 위해서는 좋은 교제가 필수적이다.

가장 좋은 교제는 사두(sadhu, 깨달은 자)와의 교제로 끄리쉬나 의식에 임한 사람이거나 영적 깨달음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과의 사귐이다. 일시적인 것(아삿, asat)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물질과 육신은 일시적이어서 육체적 즐거움에만 관여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것들에 의해 속박되게 된다. 하지만 자아에 대한 깨달음에 관여하는 사람은 영구적인 것(삿, sat)에 임한다. 지적인 사람이라면 분명 다양한 요가 과정 중 하나를 통해 깨달음의 단계로 자신을 향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과 교제할 것이다. 그 결과, 사두는 물질을 향한 우리의 집착을 끊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좋은 교제의 큰 혜택이다. 예를 들면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물질적인 것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아르주나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끄리쉬나께서 이를 과감히 끊어주신다. 무언가를 자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도구가 필요하고, 집착으로부터 마음을 잘라내기 위해서는 종종 날카로운 말이 요구된다. 사두나 스승은 물질적인 것에 끌리는 제자의 마음을 잘라내기 위해 아무런 자비도 베풀지 않고 혹독하고 날카로운 말을 한다. 단호하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제자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가바드 기따의 첫 시작부터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가 학식 있는 자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날카롭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속세의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영적 스승에게 그런 신랄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타협과 아첨은 아무 효과도 없지만 강한 말은 필요하다.

바가바드 기따 여러 곳에서 물질적 개념에 사로잡힌 삶은 비난 받는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존경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 성지에 가서도 그곳에 있는 사두를 무시하는 자는 고집 세고 우둔한 자로 당나귀에 비유된다. 항상 해칠 생각만 하는 적과 마찬가지로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우리를 물질의 덫에 더욱 깊숙이 말려들게 할 것이다. 속박된 영혼은 마음과 감각으로 말미암아 몹시 어려움을 겪는다. 마음이 다른 감각들을 지휘하기 때문에 마음을 친구로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지따뜨마나하 쁘라샨따샤 jitātmanaḥ praśāntasya
 빠람아뜨마 사마히따하 paramātmā samāhitaḥ
 시또쉬나-수카-두흐께슈 śītoṣṇa-sukha-duḥkheṣu
 따타 마나빠마나요호 tathā mānāpamānayoḥ

“마음을 정복한 자는 평온함에 도달한 것이므로 이미 초영혼과 함께하고 있다. 이러한 자에게 행복과 불행, 더위와 추위, 명예와 불명예는 모두 하나이다.” 《바가바드 기따 6.7》 고삐를 채우지 않은 말이 마부를 위험한 길로 이끌듯이 마음은 우리를 항상 영원치 않은 것에 끌고 다니므로 마음을 훈련하면 평온함에 이른다. 우리는 원래 불변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연유로 영구적이지 않은 것들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끄리쉬나에 집중하면 마음은 쉽게 훈련될 수 있다. 위대한 장수들이 방어하는 요새가 안전한 것처럼 끄리쉬나가 마음의 요새에 자리하시면 적이 들어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물질적인 교육과 부, 권력은 마음을 통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위대한 헌애자가 이렇게 기도한다. “언제쯤 제가 당신을 한시도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제 마음은 저를 항상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지만 제가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면 깨끗해지겠지요.” 마음이 깨끗해지면 초영혼을 두고 명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빠람아뜨마는 개별 영혼의 가슴 안에 항상 자리잡고 계신다. 요가 과정은 마음을 집중하고 가슴 안에 있는 빠람아뜨마에 초점을 맞추는 일을 수반한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인용된 앞 절은 마음을 정복하고 일시적인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을 극복한 자가 빠람아뜨마에 대한 생각에 열중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그렇게 열중하는 자는 모든 이중성과 헛된 명칭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