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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ort

스리 이쇼빠니샤드

우리를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께 가까워지게 하는 지식

개요

옴 뿌르남 아다 뿌르남 이담 oṁ pūrṇam adaḥ pūrṇam idaṁ
뿌르낫 뿌르남 우다쨔떼 pūrṇāt pūrṇam udacyate
뿌르나샤 뿌르남 아다야 pūrṇasya pūrṇam ādāya
뿌르남 에바바시샤떼 pūrṇam evāvaśiṣy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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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격신은 완벽하고 완전하다. 그리고 당신은 완전히 완벽하므로 이 현상계처럼 당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완전한 전체로서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완전한 전체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라도 그 자체로 완전하다. 절대신은 완전한 전체이므로 당신에게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완전한 단위가 나오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완전한 균형을 유지한다.

Purport

완전한 전체, 즉 최고의 절대 진리는 완전한 인격신이다. 비인성적 브라흐만(impersonal Brahman)이나 빠람아뜨마(Paramātmā), 즉 초(超)영혼의 깨달음은 절대적 전체를 불완전하게 깨닫는 것이다. 최고인격신은 삿-찟-아난다-비그라하(sac-cid-ānanda-vigraha)이다. 비인성적 브라흐만 깨달음은 절대신의 삿 측면, 즉 당신의 영원성, 그리고 빠람아뜨마 깨달음은 절대신의 삿과 찟의 측면, 즉 영원성과 완벽한 지식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신이 인성이 있다고 깨닫는 것은 당신의 모든 초월적 특징, 즉 삿, 찟, 아난다(행복) 깨달음이다. 최고 인간을 깨달으면 절대 진리의 이 모든 측면을 완전하게 깨닫게 된다. 비그라하(Vigraha)란 ‘형상(形象)’을 의미한다. 따라서 완전한 전체는 무형(無形)이 아니다. 만약 절대 진리가 무형이라면 당신이 창조한 창조물보다 열등한 것이 되므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한 전체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하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신을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한 전체, 최고인격신은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그 모든 능력은 당신처럼 완전하다. 따라서 이 현상계 역시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이 물질계는 24개의 요소로 우주의 지탱과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끔 창조되었다. 어떤 우주도 존재의 유지를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우주는 스스로 그 자체의 시간에 따라 작용하고 이 시간은 완전한 전체의 에너지로 결정되었으며 일정 기간이 다하면 일시적 현상계는 완전한 전체의 완전한 계획에 따라 소멸할 것이다.
작지만 완전한 개체, 이름하여 생명체는 완전한 전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모든 편의를 부여받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형태의 불완전함은 완전한 전체에 관한 불완전한 지식 때문이다. 인간 형태의 삶은 생명체 중 완전한 의식의 구현이며 8,400,000종의 삶과 죽음의 순환을 거친 후 얻게 되는 삶이다. 완전한 의식을 가진 인간의 삶을 사는 동안 생명체가 완전한 전체와 연결된 자신의 완전함을 깨닫지 못하면 깨달음의 기회를 잃고 물질계의 법칙에 따라 또다시 진화의 순환 속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유지를 위해 완전하게 마련된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탓에 이른바 감각을 만족시키는 이른바 ‘완전한 삶’을 얻고자 자연 자원을 활용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생명체는 완전한 전체와 아무 관련 없이 감각적 삶을 즐길 수 없게 되어 있기에 우리를 오도하게 하는 이런 삶에서 얻는 즐거움은 환영에 불과하다. 손은 몸에 온전히 붙어있을 때만 완전한 하나의 개체로서 의미를 지닌다. 손이 몸에서 분리되면 손같이 보일지라도 손의 기능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생명체는 완전한 전체의 부분으로서, 완전한 전체에서 분리되면 겉으로는 완전하게 보일지라도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인간 삶의 완전함은 오직 완전한 전체를 위해 봉사할 때 깨달을 수 있다.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적, 국제적 또는 심지어 행성 간의 봉사, 즉 세상의 모든 봉사는 완전한 전체와 관련을 맺지 않는 한 불완전한 채로 남는다. 완전한 전체와 관련을 맺을 때 부속된 부분 그 자체도 완전해진다.
이샤바샴 이담 사르밤 īśāvāsyam idam sarvaṁ
얏 낀짜 자가땸 자갓 yat kiñca jagatyāṁ jagat
떼나 땩떼나 분지타 tena tyaktena bhuñjīthā
마 그리다 까샤 스빋 다남 mā gṛdhaḥ kasya svid dha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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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안에 있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은 주(主)가 다스리고 소유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몫으로 정해진, 자기를 위해 필요한 것만을 취해야 하며 모든 것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이해해 다른 것을 함부로 취해서는 안 된다.

Purport

베다의 지식은 주(主)에서 시작해 영적 스승들의 완벽한 사제전수를 통해 이어져 왔으므로 오류가 없다. 베다 지식의 첫 구절을 주가 말씀하셨기에 이 지식의 원천은 초월적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아빠우루쉐야(apauruṣeya)라고 하며 이것은 세속인이 한 이야기가 아님을 나타낸다. 속계에 사는 인간에게는 네 가지 결함이 있다. (1)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2) 환영에 빠진다. (3) 남을 속이는 성향을 지닌다. (4) 불완전한 감각을 지닌다. 이 네 가지 결함이 있는 누구라도 완벽한 지식을 전할 수 없다. 베다는 그러한 불완전한 창조물이 짓지 않았다. 베다 지식은 주가 최초로 창조한 생명체, 브라흐마의 가슴에 맨 처음 전해졌고 브라흐마가 이 지식을 이어서 그의 아들과 제자들에게 전했으며 그들 또한 역사를 통해 후손들에게 전했다.
주는 뿌르남, 즉 전적으로 완벽하므로 당신이 다스리는 물질계의 법칙에 종속되는 일은 없다. 생명체와 무생물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주의 지배를 받는다. 이 이쇼빠니샤드는 야주르베다의 부분이므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소유권에 관한 정보를 담는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주의 소유권은 바가바드 기따(7.4~5)의 7장에 나와 있고, 거기에 빠라(para)와 아빠라 쁘라끄리띠(aparā prakṛti)가 거론된다. 자연의 구성요소인 흙, 물, 불, 공기, 정기(精氣; ether), 마음, 지성, 그리고 자아(ego)는 모두 주의 하위 에너지, 즉 물질적 에너지(아빠라 쁘라끄리띠)에 속하는 반면, 생명체, 즉 유기 에너지는 당신의 상위에너지(빠라 쁘라끄리띠)이다. 이 두 쁘라끄리띠, 즉 에너지는 주에게서 나왔고 궁극적으로 당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통제자이다. 이 우주 안에 빠라 또는 아빠라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지고한 주의 소유물이다.
지고한 주, 최고인격신은 완전한 사람이므로 당신은 다른 여러 능력으로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완전하고 완벽한 지성을 갖고 있다. 최고 존재는 종종 불에 비유되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은 불의 빛과 열에 비유된다. 불이 빛과 열의 형태로 에너지를 전하듯 주는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에너지를 드러내신다. 따라서 주는 모든 것의 궁극적 통제자, 유지자 그리고 전제자(專制者)로 머무른다. 당신은 모든 능력의 소유자, 전지자(全知者), 그리고 모든 이의 은인이다.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와 힘, 명성, 아름다움, 지식과 초탈함(renunciation)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주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어떤 것의 소유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총명해야 한다. 그리고 주가 정해주신 각자의 몫에 만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는 우유를 공급하지만 그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소는 풀과 짚을 먹고, 우유는 인간의 식량으로 지정되었다. 그런 것이 주가 마련해 주신 조화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누구에게 속하는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주택은 흙, 나무, 돌, 철, 시멘트와 다른 여러 재료로 만들어졌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관점으로 볼 때, 이 건축 자재 중 어떤 것도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노동으로 이 물질을 결합해 그저 다른 모양들로 바꿀 뿐이다. 노동자가 집을 지으려고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집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간에 큰 분쟁이 있고 이 분쟁은 점점 커져 국제 문제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적대감으로 서로 맞서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댄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개나 고양이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짜리아(ācārya, 신성한 스승)를 통해 절대신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하고자 한다. 인류는 스리 이쇼빠니샤드 같은 베다의 지혜를 구해야 하며 물질적 소유권을 두고 싸워서는 안 된다. 인간은 주의 자비로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특권이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든 자본주의자든 또는 어떤 주의자든 전적으로 주의 재산인 자연 자원을 두고 소유권 주장을 한다면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정치적 술책으로 자본주의자가 공산주의자를 억제할 수 없으며 공산주의자 또한 도둑맞은 빵을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 자본주의자를 물리칠 수 없다. 최고인격신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이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모든 재산은 훔친 것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 벌 받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 모두 핵폭탄을 갖고 있고, 양자 모두 절대신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핵폭탄이 결국 모두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구제와 세계 평화를 위해 양자 모두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인간은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으로 사는 삶의 목적과 중요성을 깨달을 만큼 총명해야 한다. 베다 문헌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개나 고양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개나 고양이는 먹잇감으로 다른 동물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절제할 줄 모르는 혀를 만족시키려 동물을 죽이면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결과적으로 죗값을 치르게 된다.
인간 삶의 표준을 동물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호랑이는 동물의 살점을 먹게끔 되어 있어 쌀이나 밀 또는 우유를 먹지 않는다. 많은 동물 중 일부는 채식, 일부는 육식하지만 어떤 동물도 주의 뜻에 따라 정해진 자연의 법칙을 어기지 않는다. 새, 파충류, 곤충과 다른 낮은 종의 동물은 엄격히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죄는 있을 수 없고 베다의 가르침 또한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인간의 삶에서만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채식주의자가 된다고 해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채소 역시 생명이 있고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므로 인간이라면 절대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자랑스러울 것은 없다. 동물은 절대신을 깨달을 수 있는 발달된 의식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베다 문헌을 배울 수 있는 충분한 지능이 있고, 그러한 공부를 통해 자연의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으며 그런 지식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만약 인간이 베다의 가르침을 소홀히 한다면 인생은 매우 위태롭다. 따라서 인간은 지고한 주의 힘과 권위를 인정해야 하며 당신의 헌애자가 되어야 한다. 당신을 섬기는 데 모든 것을 바쳐야 하며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주께 먼저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9.26)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순수한 헌애자가 바친 채식을 받아들인다고 직접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절대신의 헌애자가 되어 준비한 음식을 당신께 먼저 바친 다음 쁘라사담(prasādam: 절대신의 자비, 절대신이 먼저 취하고 남겨주시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자만이 인간 삶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절대신께 먼저 음식을 바치지 않으면 그저 죄를 먹을 뿐이고 죄의 결과에 따라 여러 가지 불행을 겪게 된다《바가바드 기따 3.13》.
죄의 뿌리는 주의 소유권을 무시하고 자연의 법칙에 의도적으로 불복종하는 데 있다. 자연의 법칙과 주의 질서를 어기면 인간은 파멸을 맞게 될 것이다. 반대로 분별력 있게 자연의 법칙을 알고 불필요한 집착이나 혐오감에서 벗어나면 주께 당연히 인정받게 되고 그 결과 영원한 고향, 절대신께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꾸르반 에베하 까르마니 kurvann eveha karmāṇi
지지비쉑 차땀 사마하 jijīviṣec chataṁ samāḥ
에밤 뜨바이 난야테또 ‘스띠 evaṁ tvayi nānyatheto 'sti
나 까르마 리뺘떼 나레 na karma lipyate n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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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렇게 삶을 이어가면 수백 년을 살고자 희망해도 된다. 그런 삶은 까르마의 법칙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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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나 가능하면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이 경향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사회 그리고 국가에서도 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베다는 이를 두고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한다. 생명체의 본성은 영원하지만 물질적 존재로 속박되어 거듭 몸을 바꿔야만 한다. 이 과정을 영혼의 전이(轉移), 즉 까르마-반다나(karma-bandhana)라고 하며 업(業)에 따른 속박을 의미한다. 생명체는 생계유지를 위해 일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물질계의 법칙이다. 만약 규정된 의무에 따라 일하지 않으면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고, 결국 삶과 죽음의 쳇바퀴 속에 빠져 많은 종류의 삶을 거치게 된다.
다른 형태의 삶 역시 이 삶과 죽음의 순환을 겪게 되지만 생명체가 인간의 모습을 얻으면 까르마의 사슬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까르마(karma), 아까르마(akarma), 비까르마(vikarma)가 바가바드 기따에 매우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경전에 언급된 대로 규정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까르마’라고 하고, 삶과 죽음의 순환을 벗어나게 하는 행위를 ‘아까르마’라 하며 주어진 자유를 남용해 더 낮은 삶의 형태로 떨어지게 하는 행위를 ‘비까르마’라고 한다. 이 세 가지 행위 중 총명한 자는 까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위를 선호한다. 보통 사람들은 남의 인정을 받거나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어떤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더 현명한 자들은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한다. 총명한 자는 선업(善業)과 악업(惡業) 둘 다 동등히 인간을 물질계의 불행에 묶이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따라서 그들은 선업과 악업 둘 다의 결과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위를 하고자 한다. 그런 해방을 낳는 행위가 여기 스리 이쇼빠니샤드에 설명되어 있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가르침은 바가바드 기따에 더욱 상세히 설명되어 있고, 바가바드 기따는 때때로 기또빠니샤드(Gītopaniṣad), 즉 모든 우빠니샤드의 정수라 불린다. 바가바드 기따(3.9~16)에서 최고인격신이 말씀하시기를, 베다 문헌에 언급된 규정 의무를 다하지 않고서는 나이쉬까르먀(naiṣkarmya), 즉 아까르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베다 문헌은 인간으로 하여금 바르게 일하도록 규제하여 점차 주의 권위를 깨닫게 한다. 인간이 최고인격신 바아수데바(Vāsudeva), 즉 끄리쉬나의 권위를 깨달을 때 올바른 지식을 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화된 경지에 이르면 자연계의 세 가지 본성, 이름하여 선성(goodness), 동성(passion), 암성(ignorance)이 더 작용하지 않고 나이쉬까르먀의 토대에서 일할 수 있다. 그런 행위가 인간을 삶과 죽음의 순환에 묶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주께 봉헌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낮은 의식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서 당장 봉헌만을 할 수는 없으며 결실을 낳는 일을 완전히 중단할 수도 없다. 속박된 영혼은 당장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해서나, 더 나아가 확대된 이기적 이해관계를 위해 일하는 데 익숙하다. 보통 인간은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해 일하고 이 감각 만족의 원칙이 사회, 국가, 인류로 확대되면 이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 등과 같은 여러 그럴싸한 이름을 만들어낸다. 이 ‘주의(ism)’라는 것은 분명 매우 매력적인 형태의 까르마-반다나(인과응보에의 속박)이다. 그러나 베다의 가르침,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위에 언급한 어떠한 주의든 진정으로 그것을 따르고자 한다면 절대신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샤바샤, 즉 절대신을 중심에 두고 행동하면 가족주의, 이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 등 어떤 주의를 따르더라도 해 될 것은 없다.
바가바드 기따(2. 40)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절대신을 중심으로 한 행위는 무척 가치 있어 이렇게 한 약간의 행위가 인간을 가장 큰 위험에서 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삶의 가장 큰 위험이란 8,400,000종에 이르는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몸을 받고도 영적 기회를 놓치고 또다시 그 순환고리로 떨어진다면 가장 불행한 인간임이 틀림없다. 불완전한 감각 때문에 어리석은 인간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우리에게 모든 에너지를 이샤바샤 정신이 되는 데 쓰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행동하면 우리는 오래 살기를 소망해도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오래 사는 것 자체만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 나무는 수백 년을 살지만 나무처럼 오래 살거나 풀무처럼 열심히 숨 쉬는 것도, 개나 돼지처럼 자식을 많이 낳는 것도, 낙타처럼 많이 먹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겸손하게 절대신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무신론적 이타주의나 사회주의에 헌신하는 거대한 속임의 삶보다 훨씬 값지다.
이타주의적 행동이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의식으로 수행되면 일종의 까르마-요가가 된다. 그런 행위는 행위자를 삶과 죽음의 순환고리로 빠져드는 위험에서 구하므로 바가바드 기따(18.5~9)는 그런 행위를 권장한다. 비록 절대신을 중심으로 한 행위가 완성을 보지 못하더라도 다음 생에 다시 인간의 몸을 받도록 보장하므로 여전히 행위자에게 이득이다. 이런 식으로 해방의 길을 가는 자기 위치를 향상시킬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된다.
절대신을 중심으로 하는 행위를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지는 스릴라 루빠고스와미(Śrīla Rūpa Gosvāmī)가 쓴 박띠-라삼리따-신두(Bhakti-rasāmṛta-sindhu)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영어판, 헌애의 감로(Nectar of Devotion)로 출판되어 있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의식으로 행동하는 데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귀중한 책을 읽을 것을 권장한다.
아수랴 나마 떼 로까 asuryā nāma te lokā
안데나 따마사브리따하 andhena tamasāvṛtāḥ
땀스 떼 쁘레땨비갓찬띠 tāṁs te pretyābhigacchanti
예 께 짜뜨마-하노 자나하 ye ke cātma-hano janā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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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죽인 자는 누구든지 믿음 없는 자들의 세계로 알려진, 어둠과 무지로 가득 찬 행성에 반드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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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막대한 책임 때문에 동물의 삶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책임을 알고 그런 의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수라(sura, 신을 숭상하는 자)라 하고, 이러한 책임을 무시하거나 아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아수라(asuras, 악마)라고 한다. 전 우주를 통틀어 오직 이 두 부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리그베다에 수라들은 항상 절대신 비쉬누(Viṣṇu)의 연꽃 같은 발을 목표로 삼고 그에 따라 항상 행동한다고 적혀 있다. 그들이 가는 길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만큼이나 찬란하다.
현명한 인간이라면 우리의 영혼이 윤회를 거듭하며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모습을 얻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물질계는 때때로 대양(大洋)에 비유되고 인간의 몸은 바로 이 대양을 건너려고 만든 견고한 배에 비유된다. 그리고 베다 경전과 아짜리아, 즉 성인다운 스승들은 노련한 뱃사공에 비유되고 인간의 몸이 하는 여러 기능은 순풍과 같아 배가 원하는 목적지로 부드럽게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이 모든 편의를 갖춘 인간이 자아 인식을 위한 자신의 삶을 완전히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뜨마-하(ātma-hā), 즉 영혼의 살인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영혼의 살인자는 가장 어두운 무지의 세계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고 분명히 경고한다.
개나 돼지, 낙타, 당나귀에게도 경제적 필수품이 있고 우리만큼이나 그들에게도 그것이 중요하지만, 동물들의 경제적 문제는 더럽고 불쾌한 상황에서 해결된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보다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간은 안락한 삶을 위한 모든 편의를 부여받았다. 왜 인간이 돼지나 다른 동물보다 더 나은 삶을 부여받았는가? 왜 고급 정부 관료는 일반 직원보다 훨씬 좋은 시설을 제공받는가? 그 답은 높은 지위의 관리가 더 높은 의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는 항상 주린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한 동물의 것보다 훨씬 중대하다. 그러나 현대의 영혼 죽이는 문명은 오직 주린 배를 채우는 문제만 늘렸다. 현대 문명의 탈을 쓴 세련된 동물에게 자아 인식에 관심을 가지라고 청하면 그는 그저 배를 채우는 데만 관심 있을 뿐 자아를 인식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매우 가혹해 그가 자아 인식의 필요성을 비난하고 배를 채우려 열심히 일하고 싶더라도 항상 실직의 위협이 있다.
우리는 당나귀나 개, 돼지처럼 죽도록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높은 삶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이 몸을 받았다.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원치 않더라도 자연의 법칙이 죽도록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강요한다. 이 시대의 인간은 무거운 짊을 끄는 노새나 황소처럼 억지로 일해야만 한다. 이 절에 아수라(악마)들이 사는 곳에 대한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설명이 있다. 사람이 인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아수라 행성으로 떨어지게 되고 무지와 어둠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낮은 종의 생명체로 태어나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6. 41~43)에서 이르기를, 인간이 자아 인식의 길에 들어서 자신과 절대신의 관계를 깨달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완성을 보지 못하면 수찌(śuci)나 스리맛(śrīmat) 가문에 태어날 기회를 얻게 된다고 했다. ‘수찌’란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브라흐마나(brāhmaṇa)를 의미하고, ‘스리맛(srimat)’이란 바이샤(vaiśya), 즉 상업에 종사하는 가문을 의미한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는 데 실패한 사람이라도 이생에서 진심으로 노력한 덕분에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기에 더 좋은 기회를 잡게 된다. 깨달음에 실패한 사람이 명문 가문에 태어날 기회를 얻게 된다면 깨달음에 성공한 사람이 얻을 위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절대신을 깨닫고자 하는 시도만으로 인간은 부유한 가족이나 명문가문에 태어나는 것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너무나 물질적이고 물질적 즐거움에만 집착해 환영에 덮여 살고자 하며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베다 문헌 전반에 걸쳐 확증된 바대로 지옥의 가장 어두운 영역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 물질주의적 아수라들은 종교로 쇼하지만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물질적 번영일 뿐이다. 바가바드 기따(16.17~18)는 그런 인간은 속임수로 명예를 얻고 무지한 자들의 투표로 권력을 얻으며 자신이 축적한 물질적 부로 권세를 누리는 아뜨마-삼바비따(ātma-sambhāvita)라고 질책한다. 자아 인식과 이샤바샤, 즉 주의 우주적 소유권에 관한 지식이 없는 그런 아수라들은 어둠의 영역에 반드시 떨어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인 우리는 위태로운 기반 위에서 경제적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종속된 물질적 삶에서 오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아네잗 에깜 마나소 자비요 anejad ekaṁ manaso javīyo
나이낟 데바 압누반 뿌르밤 아르샷 nainad devā āpnuvan pūrvam arṣat
딷 다바또 ‘냔 아뗴띠 띠쉬탓 tad dhāvato 'nyān atyeti tiṣṭhat
따스민 아뽀 마따리스바 다다띠 tasminn apo mātariśvā dadh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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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당신의 거처에 계속 머무르지만 최고인격신은 마음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모든 것을 앞지를 수 있다. 강력한 데바들조차 당신께 접근할 수 없다. 한 곳에 계시면서도 공기와 비를 공급하는 데바들을 통제하신다. 당신은 모든 존재를 훌륭하게 능가하신다.

Purport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 할지라도 정신적 사색만으로는 최고인격신인 지고한 주를 이해할 수 없다. 오직 당신의 자비로 당신의 헌애자들을 통해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브라흐마 삼히따(5.34)에서 말하기를, 비헌애자 철학자가 마음의 속력으로 우주를 수백만 년 여행해도 절대 진리가 여전히 그에게서 멀리, 아주 멀리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한다.  
브라흐마 삼히따(5.37)가 더 말하기를, 최고인격신은 당신의 이해 불가한 능력으로 초월적 거처 골로까에 계속 머무시며 유희를 즐기지만 동시에 당신이 창조한 에너지 전역에 모두 계실 수 있다고 상세히 설명한다. 비쉬누 뿌라나(Viṣṇu Purāṇa)에서 절대신의 능력은 불에서 발생한 열과 빛에 비유된다. 비록 한곳에 있지만 불은 빛과 열을 멀리까지 발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최고인격신은 당신의 초월적 거처에 머무르지만 당신의 다른 에너지들을 모든 곳에 퍼지게 한다.
당신의 에너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주요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내적 에너지와 경계 에너지, 그리고 외적 에너지이다. 각각의 범주 에너지는 수백, 수천만 가지의 에너지로 분류될 수 있다. 공기, 빛, 비 같은 자연 현상을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권능을 부여받은 주요 데바들은 모두 절대 인격의 경계 에너지 범주에 속한다. 인간을 비롯한 더 낮은 생명체 역시 주의 경계 에너지에 속한다. 물질계는 주의 외적 에너지이다. 그리고 절대신의 왕국이 있는 영계는 당신의 내적 에너지의 발현이다.
따라서 주의 다양한 에너지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주와 당신의 에너지는 다르지 않지만 이 에너지들을 지고의 진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지고의 신이 모든 곳에 비인성적으로 퍼져있거나 당신의 인성적 존재를 잃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결론을 짓는 데 익숙하지만 지고의 신은 한정적인 우리 이해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빠니샤드는 자신의 한정적인 능력으로 주께 다가갈 수 없다고 경고한다.
바가바드 기따(10.2)에서 위대한 리쉬들(ṛṣis)과 수라들(suras)조차 주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주를 이해할 길이 없는 아수라들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네 번째 만뜨라가 절대 진리는 궁극적으로 절대 인격이라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상세하게 당신의 여러 인성적 특징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가 가진 무한한 능력의 부분인 개별 생명체 역시 당신의 모든 자질을 가지지만, 활동 영역이 제한되어 있어 모두 한계가 있다. 부분은 전체와 절대 같을 수 없으므로 당신이 지닌 완전한 능력을 이해할 수 없다. 물질적 본성의 영향 때문에 주의 일부이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생명체는 당신의 초월적 위치에 관해 추측하려 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관념적 사색으로 주의 정체성을 알려고 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라고 경고한다. 초월성에 관해 당신만이 완전한 지식을 갖추고 계시므로 베다의 최고 원천인 주께 직접 초월성을 배우려고 애써야 한다.
완전한 전체의 각 부분은 주의 의지에 따라 행위하게끔 어떤 특정한 에너지를 부여받았다. 부분인 생명체가 주의 의지에 따라 지정된 각자의 특정 행위를 잊을 때 그 생명체는 마야, 즉 환영 속에 있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맨 처음부터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주께서 우리에게 지정하신 역할을 아주 신중히 수행하라고 경고한다. 그렇다고 개별 영혼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주의 부분이므로 당신의 결정에 반드시 동참해야 한다. 모든 것이 주의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결단력, 혹은 활동적인 본성을 지혜롭게 잘 활용할 때 외적 에너지인 마야와 접촉하면서 잃은 우리 본래의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
모든 힘은 주께 받았으므로 각각이 지닌 특정한 힘은 당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데 사용되어야지 달리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순종적인 봉사 태도를 지닌 자만이 주를 이해할 수 있다. 완벽한 지식은 당신의 특징과 당신의 능력을 아는 것과 이 능력이 당신의 의지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앎을 의미한다. 이런 사항들에 관해 모든 우빠니샤드의 정수(精髓)인 바가바드 기따에 당신이 직접 설명하신다.
딷 에자띠 딴 나이자띠 tad ejati tan naijati
딷 두레 딷 반띠께 tad dūre tad v antike
딷 안따르 아샤 사르바샤 tad antar asya sarvasya
딷 우 사르바샤샤 바햐따하 tad u sarvasyāsya bāhyataḥ

Synonyms

Translation

지고의 신은 걷지만 걷지 않는다. 당신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아주 가까이 있다. 당신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 밖에 있다.

Purport

바로 여기에 지고한 주의 이해 불가한 능력들로 이루어진 초월적 행위 일부가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묘사된 모순적 표현들은 이해 불가한 당신의 능력을 증명한다. “당신은 걷지만 걷지 않는다.” 보통사람이 걸을 수 있는데 걸을 수 없다고 하면 비논리적이다. 그러나 절대신에 관한 한 그런 모순은 당신의 이해 불가한 힘을 가리키는 하나의 예를 나타낼 뿐이다. 우리의 제한적인 지식으로 그런 모순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는 항상 좁은 이해의 견지에서 주를 상상한다. 예를 들어, 마야바다 학파의 비인성주의 철학자들은 주의 비인성적 행위만을 인정하고 당신의 인성적 모습은 부정한다. 주에 관해 완벽히 이해하는 바가바따(Bhāgavata) 학파의 철학자들은 당신의 이해 불가한 능력을 인정하므로 주께는 인성적 측면과 비인성적 측면이 모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이해 불가한 능력 없이 “지고의 신”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바가바따들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육안으로 절대신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당신에게 인성적 형상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주는 아주 멀리 있지만 동시에 가까이 있다고 함으로써 이 주장을 논박한다. 당신의 거처는 물질계를 훨씬 넘어서지만, 우리는 이 물질계조차 제대로 측정할 수 없다. 만약 물질계가 그렇게 널리 뻗어있다면 모든 물질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영계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영계가 물질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은 바가바드 기따(15.6)가 확증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람이나 마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 초도 안 되어 즉시 우리 앞에 나타나실 수 있다. 당신은 또한 아주 빨리 달릴 수 있어 누구도 당신을 앞지를 수 없다. 이것은 앞 절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그러나 최고인격신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우리는 당신을 등한시한다. 바가바드 기따(9.11)는 어리석은 자들이 주를 우리처럼 죽을 운명이라 여기고 비웃는다며 그런 어리석은 부주의를 질타한다. 주는 죽는 존재가 아니며 물질로 만들어진 몸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주가 일반 생명체와 같이 물질로 된 몸으로 내려온다고 주장하는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은 당신의 이해 불가한 능력을 모르고 주를 보통 인간과 똑같이 취급한다.
절대신은 이해 불가한 능력으로 가득하므로 어떠한 매체를 통해서도 우리의 봉사를 받을 수 있으며 당신의 의지에 따라 여러 다양한 능력을 전환하실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절대신이 화신으로 절대 내려올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화신으로 온다면 물질적 에너지의 형태로 내려온다고 한다. 우리가 주께 이해 불가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면 이러한 주장은 무효가 된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 앞에 물질적 에너지의 형태로 나타나실지라도 당신은 물질 에너지를 영적 에너지로 쉽게 바꿀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에너지의 원천은 하나이며 똑같기 때문에 에너지는 그 원천의 뜻에 따라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는 아르짜-비그라하(arcā-vigraha) 형태, 즉 흙과 돌, 나무로 만들어진 신상(神象)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다. 신상의 모습이 비록 나무, 돌, 또는 다른 물질로 새겨지더라도 성상 파괴자들이 생각하는 우상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불완전한 물질적 존재의 상태이므로 불완전한 시각을 지녀 지고의 신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물리적 시각을 가졌지만 진정으로 당신을 보고자 갈망하는 헌애자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헌애자들의 봉사를 받아들이기 위해 소위 물질적 형상 안에 당신이 모습을 드러내신다. 따라서 봉헌의 단계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임하는 헌애자들은 주로 신상 숭배만을 하는데 이런 헌애자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를 실제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아르짜 형상이 숭배자들 마음대로 꾸며낸 모습 또한 아니다. 주의 이 형상은 당신의 모든 비품과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 이것은 무신론자들이 아닌, 오직 진정한 헌애자들만이 실제로 느낄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4.11)에서 주는 헌애자들의 항복 정도에 따라 당신의 헌애자를 대한다셨다. 주는 아무나 또는 모든 사람이 아닌, 당신께 항복한 영혼들에게만 당신을 드러낼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항복한 영혼들에게 당신은 항상 가까이 계시지만 항복하지 않은 영혼들에게는 아주 아주 멀리 계셔 접근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밝혀진 경전들은 두 단어로 주를 묘사한다. 그것은 사구나(saguṇa: 자질을 보유한)와 니르구나(nirguṇa: 자질을 지니지 않는)로, 이 두 특징은 매우 중요하다. ‘사구나’라는 말은 주께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 물질계의 법칙에 종속되는 물질적 형상을 하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신이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므로 당신에게는 물질적 에너지와 영적 에너지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의 통제자인 주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처럼 물질적 에너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물질적 에너지는 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므로 주는 각 에너지가 지닌 어떤 특징에도 구애받지 않고 당신의 목적을 위해 그 에너지를 사용하실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니르구나, 즉 ‘자질을 지니지 않는’ 존재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당신은 영원한 형상을 지닌 원초적 주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무형의 존재가 되지 않는다. 당신의 비인성적 측면, 즉 브라흐만 광채는 마치 태양신의 몸에서 태양광선이 나오는 것처럼 당신의 인성적 형상에서 나오는 빛일 뿐이다.
어린 성자 쁘라흘라다 마하라자(Prahlāda Mahārāja)는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절대신이 어디에 있는냐?”라고 질문하자, 그는 모든 곳에 계신다고 대답했다. 화가 난 쁘라흘라다 마하라자의 아버지는 그가 그럼 궁전의 기둥 안에도 있느냐고 되물었고 아이는 그렇다고 답했다. 무신론자 왕인 아버지가 자기 앞에 있는 기둥을 부수자 주께서 즉시 반인반사자의 모습을 한 느리심하(Nṛsiṁha)로 나타나셔서 무신론자 왕을 죽였다. 그러므로 주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당신의 여러 에너지로 모든 것을 창조한다. 당신의 이해 불가한 능력을 통해 당신의 헌애자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나타나실 수 있다. 주 느리심하는 무신론자 왕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헌애자 쁘라흘라다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려고 기둥 안에서 나타나셨다. 무신론자는 주께 현신(現身)을 명령할 수 없지만, 주는 당신의 헌애자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나타나실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4.8) 역시 주가 무신론자들을 없애고 신앙심 있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다고 했다. 물론 당신에게는 무신론자들을 없앨 수 있는 다양한 에너지와 대리인들이 있지만 직접 당신의 헌애자들에게 호의를 베풀러 오시는 데 기쁨을 느끼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여러 화신으로 내려오신다. 실제로 주는 다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헌애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강림하신다.
브라흐마 삼히따(5.35)는 태초의 주 고빈다(Govinda)는 당신의 전체적 부분으로서 모든 곳에 들어가신다고 한다. 당신은 우주에 들어가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원자 속에도 들어가신다. 당신은 비랏(virāṭ) 형상으로 외부에 계시면서 동시에 안따랴미(antaryāmī)로서 모든 것의 내부에 존재하신다. ‘안따랴미’로서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증인이며 우리가 한 행위의 결과, 즉 까르마-팔라(karma-phala)를 부여하신다. 우리는 전생에 한 행위들을 잊지만 당신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목격하시므로 우리 행위의 결과는 항상 존재하며 이에 따라 인과응보를 겪어야만 한다.
사실 안과 밖에는 오직 절대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열처럼 모든 것은 당신의 다른 에너지의 발현이고, 이렇게 주의 다양한 에너지는 하나다. 하나이지만, 인성적 형상을 하신 주는 당신의 작은 일부인 생명체들이 조그맣게 누리는 모든 즐거움을 무한히 즐기신다.
야스 뚜 사르바니 부따니 yas tu sarvāṇi bhūtāny
아뜨마니 에바누빠샤띠 ātmany evānupaśyati
사르바-부떼슈 짜뜨마남 sarva-bhūteṣu cātmānaṁ
따또 나 비주굽사떼 tato na vijugupsate

Synony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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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지고한 주와 연관 지어 체계적으로 보고, 모든 생명체를 당신의 부분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 안에 지고한 주를 보는 자는 절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증오하지 않는다.

Purport

이것이 마하-바가바따(mahā-bhāgavata), 즉 모든 것을 최고인격신과 연관 지어 보는 위대한 인격에 대한 묘사다. 지고한 주의 존재를 깨닫는 세 단계가 있다. 까니쉬타-아디까리(kaniṣṭha-adhikārī)는 가장 낮은 단계의 깨달음을 얻은 자들로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 절, 교회 또는 모스크 같은 숭배 장소에 가 문헌이 지시하는 대로 예배한다. 이 단계의 헌애자들은 주가 예배의 장소에만 존재하고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누가 어떤 봉헌의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며 누가 지고한 주를 깨달았는지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런 헌애자들은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방식을 따르며 때때로 특정한 헌애 방식이 다른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서로 간에 싸우기도 한다. 이런 까니쉬타-아디까리들은 사실 물질주의적 헌애자로서 물질적 한계를 뛰어넘어 영계에 도달하려고만 애쓴다.
깨달음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을 마댜마-아디까리(madhyama-adhikārī)라 부른다. 이 단계의 헌애자들은 네 부류의 존재를 구분 짓는다. (1) 지고한 주 (2) 주의 헌애자 (3) 주에 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순진한 사람들 (4) 주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고 당신의 봉헌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증오하는 무신론자를 구분한다. 마댜마-아디까리는 이 네 부류의 사람을 각기 달리 대우한다. 그들은 주를 숭배하고 신(神)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봉헌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친구로 지낸다. 또한, 순진한 자들의 가슴 속에 있는 신(神)을 향한 잠자는 사랑을 일깨우려고 하고 신이라는 말 자체를 비웃는 무신론자들을 멀리한다.  
마댜마-아디까리 위에 모든 것을 절대신과 연관 지어 보는 웃따마-아디까리(uttama-adhikārī)가 있다. 그런 헌애자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절대신의 부분으로 본다. 전생에 서로 다른 자질로 한 행위 때문에 서로 다른 몸속에 갇혔지만 모두 절대신의 부분이므로 매우 학식 있는 브라흐마나나 길거리의 개나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절대신의 브라흐마나 입자는 당신이 부여하신 조그만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않았고, 개 입자는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 자연의 법칙으로 처벌받아 개 형태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웃따마-아디까리는 브라흐마나나 개가 하는 특정 행동만을 고려하지 않고 둘 다를 존중한다. 그런 뛰어난 헌애자들은 물질적 육신에 오도되지 않고 모든 존재 안에 있는 영적 불꽃에 이끌린다.
모든 이가 하나 혹은 친구라는 사상을 과시하지만 육체적 개념으로 행동하는 웃따마-아디까리 모방자들은 사실 가짜 박애주의자이다. 보편적 형제 개념은 진정한 웃따마-아디까리에게 배워야 하지, 개별 영혼이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지고한 주의 초영혼 확장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배워서는 안 된다.
여섯 번째 만뜨라는 ‘관찰’, 즉 ‘체계적으로 봐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는 이전의 아짜리아들, 즉 완벽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아누빠샤띠가 관찰을 의미하는 정확한 산스끄리뜨어로 이와 관련하여 쓰였다. ‘아누’는 ‘따르다’라는 뜻이고 ‘빠샤띠’는 ‘관찰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산스끄리뜨어 ‘아누빠샤띠’는 우리 육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이해해서는 안 되며 이전 아짜리아를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물질적 결함이 있는 육안으로는 어떠한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더 높은 출처를 통해 듣지 않으면 올바로 이해할 수 없고, 가장 높은 출처는 주께서 직접 말씀하신 베다의 지혜이다. 베다의 진리는 주에서 브라흐마, 브라흐마에서 나라다, 나라다에서 비아사, 비아사에서 그의 많은 제자에게로 전해져 사제 계보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보다 앞선 먼 옛날에는 사람들이 훨씬 더 총명하고 예리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베다의 메시지를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진정한 영적 스승의 입을 통해 한 번 듣는 것만으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밝혀진 경전들에 대한 많은 주해서가 있지만 대부분은 베다 지혜의 원 편찬자인 스릴라 비아사데바에서 나온 사제전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스릴라 비아사데바의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베단따 수뜨라의 자연스러운 주해서이며 그의 저술 중 가장 최종적이며 완벽하고 장엄한 문헌이다. 그리고 바가바드 기따는 절대신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비아사데바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 두 경전은 밝혀진 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바가바드 기따와 스리마드 바가바땀의 원칙에 어긋나는 어떤 주해서라도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우빠니샤드와 베단따 수뜨라, 베다, 바가바드 기따, 그리고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상호 완벽히 일치하며 스리 이쇼빠니샤드에 설명되어 있듯이 최고인격신과 당신의 다양한 에너지들을 믿는 비아사데바의 제자 계보에 속한 스승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않고 아무나 함부로 베다에 관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바가바드 기따(18.54)에 따르면 깨달음의 경지(브라흐마-부따: brahma-bhūta)에 이미 오른 자만이 웃따마-아디까리 단계의 헌애자가 될 수 있으며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형제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시각은 항상 어떤 물질적 이득을 좇는 정치인들이 가질 수 없다. 웃따마-아디까리의 특징을 모방하는 자들은 물질적 목적과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겉옷, 즉 육신을 섬기지만 그 안에 깃든 영혼을 섬기지는 않는다. 이러한 모방자는 영계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다. 진정한 웃따마-아디까리는 물질적 육신 안에 깃든 영혼을 보고 영혼으로서의 존재에 봉사한다. 따라서 물질적 측면도 저절로 혜택을 입는다.
야스민 사르바니 부따니 yasmin sarvāṇi bhūtāny
아뜨마이바붇 비자나따하 ātmaivābhūd vijānataḥ
따뜨라 꼬 모하 까 쇼까 tatra ko mohaḥ kaḥ śoka
에까뜨밤 아누빠샤따하 ekatvam anupaśyataḥ

Synonyms

Translation

모든 생명체를 주와 질적으로 하나인 영적 불꽃이라고 보는 사람이 바로 모든 것을 진정으로 아는 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어찌 환영이나 불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Purport

위에서 논의한 마댜마-아디까리와 웃따마-아디까리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생명체의 영적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없다. 생명체는 지고한 주와 질적으로 하나이며 이는 마치 불과 불꽃이 질적으로 하나인 것과 같다. 그러나 불꽃 속에 존재하는 빛과 열이 불 전체와 같지 않으므로 양적으로 볼 때 불꽃이 불과 같을 수 없다. 위대한 헌애자, 마하-바가바따는 모든 것을 지고한 주의 에너지로 똑같이 본다. 에너지 원(源)과 에너지에는 아무 차이가 없으므로 단일성의 개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분석적 측면에서 볼 때, 빛과 열은 불과 다르지만 빛과 열이 없다면 ‘불’이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도 없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빛과 열, 불은 똑같다.
이 만뜨라에서 ‘에까뜨밤 아누빠샤따하’라는 단어는 밝혀진 경전의 관점에 맞게 모든 생명체의 동일성을 봐야 함을 가리킨다. 최고 전체(主)의 개별적 불꽃은 우리에게 알려진 전체의 자질, 즉 주가 지닌 자질의 거의 80%를 소유하지만 양적으로 지고한 주와 똑같지 않다. 생명체는 최고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서 이 자질은 아주 적게 존재한다. 다른 예를 들면, 바닷물 한 방울에 든 소금의 양은 전 대양에 존재하는 소금의 양과 절대 비교할 수 없지만 바닷물 한 방울에 든 소금은 대양에 든 전체 소금과 화학적 구성면에서 질적으로 같다. 개별 생명체가 지고한 주와 질적으로, 양적으로 모두 같다면 물질적 에너지의 영향에 좌우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이전 만뜨라에서 어떤 생명체도, 심지어 강력한 데바들조차 절대적 존재를 어떤 면에서도 능가할 수 없다고 이미 논의했다. 그러므로 ‘에까뜨밤’은 생명체가 모든 점에서 지고한 존재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관심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가족 안에서 가족 구성원의 관심사가 하나이거나 국가 안에 비록 다른 여러 개별 국민이 있지만 국가적 관심사가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명체는 같은 지고한가족의 모든 구성원이므로 그들의 관심사와 지고한 존재의 관심사는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체는 지고한 존재의 자식이다. 바가바드 기따(7.5)가 말하듯이, 새, 파충류, 개미, 수생동물, 나무와 그 외 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경계 능력(경계 에너지)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 지고한 존재의 가족에 속하고 이 모두의 관심사는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영적 생명체는 베단따 수뜨라(1.1.12)에 명시되어 있듯이 즐거우려고 존재한다. 아난다-마요 ‘비아삿(ānanda-mayo 'bhyāsāt). 본원적으로 지고한 주와 당신의 부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영원한 즐거움을 위해 존재한다. 물질적 육체에 갇힌 생명체는 끊임없이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다. 물질계와는 별도로 지고한 존재가 당신과 당신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반자와 즐기는 영계가 있다. 그곳에는 물질적 특징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에 ‘니르구나’라 불린다. 니르구나 위치에서는 즐거움의 대상을 두고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이곳 물질계에서는 즐거움의 올바른 중심부를 잃었기에 항상 다른 개인 간의 충돌이 있기 마련이다. 진정한 즐거움의 중심부는 숭고한 영적 라사(rāsa) 춤의 중심인 지고한 주이다. 우리는 모두 당신과 함께 어떤 충돌도 없이 하나의 초월적 관심사를 가지고 삶을 즐기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영적 관심사의 가장 높은 경지이며 이 완벽한 하나 됨을 이해하자마자 환영(모하)이나 비탄(쇼까)의 여지는 사라진다.
신(神)을 믿지 않는 문명은 환영에서 생겨났고 그런 문명의 결과는 비탄이다. 현대 정치인들이 지지하는 무신론적 문명은 어느 순간에도 박살 날 수 있어 현 문명은 항상 불안으로 가득하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바가바드 기따(7.14)에 명시되어 있듯이, 지고한 주의 연꽃 발에 항복하는 사람만이 엄격한 자연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망상과 불안을 없애고 모든 다양한 관심사에서 하나 됨을 이룩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속에 반드시 절대신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 행위의 결과는 어떠한 목적도 아닌 주의 관심사를 위해 바쳐져야 한다. 오직 당신의 관심사를 섬김으로써 여기에 언급된 아뜨마-부따 관심사를 인식할 수 있다. 이 만뜨라에 언급된 아뜨마-부타 관심사와 바가바드 기따(18.54)에 언급된 브라흐마-부따 관심사는 하나이며 똑같다. 최고의 아뜨마(영혼)는 주 당신이고, 조그만 아뜨마는 생명체이다. 최고의 아뜨마, 즉 빠람아뜨마 홀로 모든 조그마한 개별 존재를 유지하고 이들의 사랑을 통해 즐거움을 얻으시고자 한다. 아버지는 자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고 즐거움을 얻으려고 자식을 돌본다. 만일 자식들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다면 가정사는 하나의 관심사로 순조롭게 흐르며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 찰 것이다. 같은 상황이 빠라-브라흐만, 즉 지고한 영혼의 절대적 가족 안에서 초월적으로 이루어진다.
빠라-브라흐만은 각각의 생명체처럼 인성을 갖고 있다. 주도, 생명체도 비인성이 아니다. 그런 초월적 인격들은 초월적 행복과 지식, 그리고 영원한 삶으로 가득하다. 그것이 영적 존재의 진정한 위치이며 이 초월적 위치를 완전히 깨달을 때 즉시 지고한 존재 스리 끄리쉬나의 연꽃 발에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마하뜨마, 위대한 영혼은 매우 드문데 그런 초월적 깨달음은 오직 수많은 생을 거친 다음에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깨달음을 얻으면 현재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환영이나 비탄, 물질적 존재의 고통 또는 생과 사의 반복을 더는 겪지 않는다. 그것이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이다.
사 빠랴갓 추끄람 아까얌 아브라남 sa paryagāc chukram akāyam avraṇam
아스나비람 슏담 아빠빠-빋담 asnāviram śuddham apāpa-viddham
까비르 마니쉬 빠리부후 스바얌부르 kavir manīṣī paribhūḥ svayambhūr
야타따탸또 ‘르탄 뱌다닷 차스바띠뱌 사마뱌하 yāthātathyato 'rthān vyadadhāc chāśvatībhyaḥ samābhyaḥ

Synonyms

Translation

그런 사람은 모든 존재 중 가장 위대한 최고인격신이 육체에 속박되지 않고, 전지전능하며 불명예를 초월하고, 혈관이 없으며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으며 태곳적부터 모든 이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 자급자족하는 철학자임을 실제로 이해했음이 틀림없다.

Purport

여기에 최고인격신의 초월적이며 영원한 형상에 대한 묘사가 있다. 지고한 주는 무형이 아니다. 당신은 속계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당신만의 고유한 초월적 형상을 한다. 이 세상에 있는 생명체들의 형태는 물질적 본성에 속박되며 마치 기계처럼 움직인다. 물질적 육신을 해부학적으로 보면, 혈관과 여러 기관으로 구성된 기계적 구조이지만 지고한 주의 초월적 몸에 혈관 같은 것은 없다. 여기에서 분명히 당신은 육체에 속박되지 않는다고 명시하며 그 말은 당신의 몸과 당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또한, 당신은 우리처럼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강제로 몸을 받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속박된 삶 속에서 영혼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지고한 주는 당신의 몸과 마음에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완전한 전체이며 당신의 마음과 몸, 그리고 당신 자신은 모두 하나이며 똑같다.
브라흐마 삼히따(5.1)에 지고한 주에 관한 비슷한 묘사가 있다. 거기에 당신은 ‘삿-찟-아난다-비그라하(ac-cid-ānanda-vigraha)’, 즉 초월적 존재이자 지식과 행복으로 가득한 초월적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당신은 물질적 존재인 우리처럼 분리된 몸과 마음이 필요하지 않다. 베다 문헌은 주의 초월적 몸은 우리 몸과 완전히 다르다고 명백히 말하며 이런 이유로 때때로 당신이 무형의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말은 당신은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지 않으며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브라흐마 삼히따(5.32)는 당신 몸의 각 부분은 다른 감각 기관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더 상세히 설명한다. 이것은 주는 당신의 손으로 걸을 수 있고 다리로 어떤 것을 받을 수 있으며 눈으로 드실 수 있는 것 같은 기능을 한다는 의미다. 여러 스루띠 만뜨라 또한 주는 우리와 같은 손과 발이 없고 우리가 당신께 바치는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시고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손과 발이 있다고 말한다. 이점은 여기 여덟 번째 만뜨라에서 사용된 ‘슈끄람(전능한)’이란 단어를 통해 확증된다.
주를 깨달은 권위 있는 영적 스승들이 사원에 안치한 신상(아르짜-비그라하)은 우리가 당신을 숭배할 수 있는 형상으로, 만뜨라 7에 따르면 이는 주의 본래 형상과 다르지 않다. 주의 본래 형상은 스리 끄리쉬나의 형상이고 스리 끄리쉬나는 발라데바(Baladeva), 라마(Rāma), 느리심하(Nṛsiṁha), 바라하(Varāha)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형상으로 확장하신다. 이 모든 형상은 하나이며 똑같은 최고인격신이다. 마찬가지로 사원에서 숭배되는 아르짜-비그라하 또한 확장된 당신의 형상이다. 아르짜-비그라하를 숭배함으로써 우리는 즉시 주께 다가갈 수 있고, 당신은 당신의 전능한 에너지로 헌애자의 봉사를 받아들이신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나 다른 스루띠 만뜨라에 관해 아무 지식도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 순수한 헌애자들이 숭배하는 아르짜-비그라하를 물질적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라 여긴다. 이 형상이 어리석은 자들 혹은 까니쉬타-아디까리들의 불완전한 눈에는 물질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런 자들은 전지전능한 주께서 당신의 뜻대로 물질을 영적인 것으로, 또한 영적인 것을 물질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가바드 기따(9.11~12)에서 주는 당신이 인간처럼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에 당신을 자기들과 똑같다고 여기며 비웃는 얕은 지식을 가진 인간들의 타락한 상태를 애석히 여기신다. 그런 지식이 얕은 사람들은 당신의 전능함을 모른다. 따라서 당신은 관념적으로 사색만 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는다. 당신께 항복한 정도만큼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생명체가 타락한 상태에 놓인 것은 오로지 절대신과의 관계를 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만뜨라와 다른 여러 베다 만뜨라는 주께서 태곳적부터 생명체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한다. 생명체가 무언가를 바라면 주께서 각자의 자격에 맞게 그 대상물을 공급해 주신다. 만약 누군가가 대법관이 되고 싶다면 필요한 자격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직책을 부여할 수 있는 권위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자격만으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떤 높은 권위자에게서 자리를 부여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는 생명체에게 각자의 자격에 맞는 즐거움을 부여하시므로 각자가 지닌 좋은 자격만으로 상을 받기에는 불충분하다. 주의 자비 또한 필요하다.
보통 생명체는 주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어떤 위치를 바라야 할지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체가 자신의 본원적 위치를 깨닫게 되면 주께 초월적 사랑을 바치고자 당신의 초월적 동반자 무리에 속하게 해 달라고 기원한다. 불행하게도, 물질적 본성에 영향받는 생명체는 다른 많은 것을 청하고 이에 대해 바가바드 기따(2.41)는 ‘갈라진, 혹은 흩어진 지성’이라고 묘사한다. 영적 지성은 하나이지만 세속적 지성은 여러 가지이다. 스리마드 바가바땀(7.5.30~31)은 외적 에너지의 일시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절대신께 돌아가는 삶의 진정한 목표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이것을 잊고 다양한 계획과 방법으로 상황을 조정하고 맞추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이미 씹은 것을 다시 씹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주는 너무나 친절하시어 망각하는 생명체에게 간섭 없이 이런 식의 삶을 계속하도록 허락하신다. 따라서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는 주께서 생명체의 욕망에 맞게 보상하심을 가리키는 ‘야타따탸따하’라는 매우 적절한 단어를 사용한다. 만일 생명체가 지옥에 가고자 한다면 주는 간섭하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시고, 본원의 고향인 절대신께 돌아가고자 하면 그를 도와주신다.
절대신은 여기서 ‘빠리부후’, 즉 모든 존재 중 가장 위대한 존재로 묘사된다. 아무도 당신보다 위대하거나 같을 수 없다. 다른 생명체는 여기서 생필품을 구걸하는 거지로 묘사된다. 주께서 생명체가 바라는 것을 공급하신다. 만일 생명체가 주와 같은 능력을 지녔다면, 그리고 전지전능하다면 당신께 소위 해방마저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해방은 절대신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비인성주의자들은 해방을 신화라고 생각하고 감각 만족만을 구걸하는데, 이들이 자신의 본원적 위치를 깨닫고 영적 존재가 되지 않는 한 영원히 쾌락을 구걸해야 할 것이다. 
오직 지고한 주만이 자급자족한다. 주 끄리쉬나께서 5천 년 전 이 지구 상에 나타나셨을 때 다양한 행위를 통해 당신이 최고인격신임을 완전히 보여주셨다. 유년기에 아가수라(Aghāsura), 바까수라(Bakāsura), 샤까따수라(Śakaṭāsura) 같은 여러 강력한 악마를 죽이셨고 그런 능력을 어떤 외적 노력을 통해 얻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신은 역도 연습조차 한 적 없이 고바르다나(Govardhana) 언덕을 들어 올렸다. 사회적 제약이나 비난 없이 고삐(gopī)들과 춤췄다. 고삐들이 비록 연인 같은 감정으로 당신께 다가갔지만 고삐들과 주 끄리쉬나의 관계는 엄격한 산냐시(sannyāsī)이자 엄정한 규율을 따랐던 주 짜이따냐(Caitanya)의 숭배를 받았다. 주는 항상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당신을 슏담(방부제)과 아빠빠-빋담(예방약)이라고 설명한다. 부정한 것도 당신과 닿음으로써 순수해진다는 점에서 당신은 방부제이다. 예방약이라는 단어는 당신이 함께할 때의 힘을 일컫는다. 바가바드 기따(9.30~31)에 언급되었듯이 헌애자가 수-두라짜라(su-durācāra), 즉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옳은 길에 있으므로 순수하다고 여겨야 한다. 이는 주와 함께하는 예방약과도 같은 본성 때문이다. 또한, 죄는 주께 접근할 수 없으므로 당신은 아빠빠-빋담이다. 당신의 행위가 죄짓는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은 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모두 좋은 행위다. 모든 점에서 당신은 슏담, 즉 가장 순수하므로 주를 종종 태양에 비유한다. 태양은 지구에 있는 여러 불결한 장소의 수분을 추출하지만 여전히 순수하다. 실제로 태양은 살균력으로 불결한 것들을 정화한다. 물질적 개체에 지나지 않는 태양이 그렇게 강력하다면 전적으로 강력한 주의 정화 능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안담 따마 쁘라비샨띠 andhaṁ tamaḥ praviśanti
예 ‘비댬 우빠사떼 ye 'vidyām upāsate
따또 부야 이바 떼 따모 tato bhūya iva te tamo
야 우 비댜얌 라따하 ya u vidyāyām ratāḥ

Synonyms

Translation

무지한 행위에 몰두하는 자들은 무지로 가득 찬 가장 어두운 세계로 떨어질 것이다. 소위 지식의 배양에 몰두하는 자들은 이들보다 더 나쁘다.

Purport

이 만뜨라는 비댜(vidyā)와 아비댜(avidyā)의 비교 분석을 제공한다. 아비댜, 즉 무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위험하지만 비댜, 즉 지식은 오해하거나 오도되면 더욱 위험하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는 과거 어느 때보다 현재에 더 잘 적용된다. 현대 문명은 공교육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불행해졌다. 그 이유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정신적 측면을 도외시하고 물질적 발전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비댜에 관한 한, 첫 번째 만뜨라에서 명백히 설명했듯이 절대신이 모든 것의 주인인데도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곧 무지이다. 삶에서 이 사실을 잊으면 잊을수록 인간은 더욱 암흑 속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神)을 잊는 문명이 소위 교육 발전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덜 배운 문명보다 더욱 위험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 즉 까르미(karmīs), 갸니(jñānīs), 그리고 요기(yogī) 중 까르미는 감각 만족을 위한 행위에 몰두하는 사람을 말한다. 현대 문명에서 99.9%의 사람들은 산업주의, 경제 개발, 이타주의, 정치 활동 등의 깃발 아래 감각 만족을 위한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은 첫 번째 만뜨라에서 설명되었듯 신(神)에 관한 의식을 배제한, 대개 감각 만족에 근거한 행위이다.
바가바드 기따(7.15)의 말을 빌리면, 철저히 감각 만족에 몰두하는 사람을 무다(mūḍha), 즉 당나귀라고 한다. 당나귀라는 동물은 어리석음의 상징이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에 따르면,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감각 만족만을 좇는 사람들이 아비댜를 신봉한다. 교육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이런 종류의 문명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실제로 철저히 쾌락만을 쫓는 사람보다 이 사회에 더 해를 끼친다. 신(神)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룩한 교육의 향상은 코브라 후드 위에 놓인 값진 보석만큼이나 위험하다. 값진 보석으로 장식된 코브라는 그렇지 않은 코브라보다 더욱 위험하다. 하리-박띠-수도다야(Hari-bhakti-sudhodaya 3.11.12)에서 신(神)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룩한 교육 발전은 시체를 장식한 것에 비유된다.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일부 사람들이 장례식에서 애도하는 가족을 위로하고자 장식한 시체와 함께 행렬 지어 나가는 풍습이 있다. 이처럼 현대문명은 물질적 존재의 숙명인 영원한 불행을 감추기 위해 다양한 행위로 정신을 분산시키는 임시변통에 불과하다. 그런 모든 행위는 감각 만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감각 위에 마음이 있고, 마음 위에 지성이 있으며 지성 위에 영혼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은 영혼의 영적 가치를 깨닫는 자아 인식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 않는 교육은 아비댜, 즉 무지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의 배양은 무지로 가득 찬 가장 어두운 세계로 내려 감을 의미한다.
바가바드 기따(2.42, 7.15)에 따르면, 오도하는 세속의 교육자들을 베다-바다-라따(veda-vāda-rata)와 마야야빠흐리따-갸나(māyayāpahṛta-jñāna)라고 한다. 그들은 무신론적 악마이며 가장 낮은 부류의 인간이기도 하다. 베다-바다-라따인 자들은 스스로 베다 문헌에 박식한 체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베다의 근본 취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바가바드 기따(15.15)는 베다의 목적이 최고인격신을 아는 것이라고 하지만 베다-바다-라따들은 최고인격신에는 전혀 관심 없다. 오히려 천국을 얻는 것 같은 인과응보적 결과에 사로잡혀 있다.
만뜨라 1에 언급된 것처럼 최고인격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생필품에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베다 문헌의 목적은 망각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이러한 신(神)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이고 어리석은 인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같은 취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 여러 다른 경전에 설명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절대신께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다-바다-라따들은 베다의 목적이 망각에 빠진 영혼과 최고인격신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대신, 애초에 인간을 물질계에 속박되게 한 원인인 감각 만족을 위해 천상의 즐거움을 얻는 것 같은 부수적 사안이 당연히 베다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들이 베다의 문헌들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오도한다. 가끔 그들은 일반인을 위해 마련된 권위 있는 베다 설명서, 뿌라나마저 비난한다. 그러한 베다-바다-라따들은 위대한 스승(아짜리아)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베다를 설명한다. 또한,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파렴치한 자를 뽑아 베다 지식의 선두 주자로 내세운다. 그런 베다-바다-라따들을 이 만뜨라에서는 특히 매우 적절한 산스끄리뜨 단어 비댜얌 라따하를 사용해 비난한다. 베다는 모든 지식(비댜)의 원천이므로 비댜얌은 ‘베다 연구’를 일컫고, 라따하는 ‘종사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비댜얌 라따하는 “베다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짜리아들에게 순종하지 않고 실제 베다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자칭 베다 연구가들이 여기에서 비난받는다. 그런 베다-바다-라따들은 베다의 모든 단어에서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들은 베다 문헌이 사제 전수만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특별한 책들의 집합임을 알지 못한다.
베다의 초월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것은 문다까 우빠니샤드(Muṇḍaka Upaniṣad 1.2.12)의 지시 사항이다. 그러나 베다-바다-라따들은 초월적 계보 선상에 있지 않은 자기만의 아짜리아를 둔다. 따라서 베다 문헌을 곡해함으로써 무지로 가득 찬 가장 어두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베다를 전혀 모르는 자들보다 훨씬 더 깊은 무지 속에 빠진다.
마야야빠흐리따-갸나 부류의 사람은 “신”이라 자칭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신이니까  다른 신을 숭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이라도 아주 부유하다면 숭배하는 데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이들이 최고인격신을 숭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그런 자들은 신(神)이 당신 고유의 환영 에너지인 마야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만약 신(神)이 마야의 영향을 받는다면 마야가 신(神)보다 더 강력한 것이 된다. 그런 자들은 신(神)이 전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전능한 신(神)이 마야에 압도당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자칭 “신”들은 이러한 질문 모두에 명백한 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을 “신”이라 부르는 데 만족할 뿐이다.
안얃 에바후르 비댜야- anyad evāhur vidyayā-
냗 아후르 아비댜야 nyad āhur avidyayā
이띠 슈스루마 디라남 iti śuśruma dhīrāṇāṁ
예 나스 딷 비짜짝쉬레 ye nas tad vicacakṣire

Synonyms

Translation

어떤 결과는 지식의 배양에서 생겨나고, 또 다른 결과는 무지의 배양에서 비롯된다고 현인(賢人)들이 설명했다.

Purport

바가바드 기따(13.8~12)의 13장에서 조언하는 것처럼 인간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지식을 배양해야 한다.
(1) 완벽한 신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적절한 존경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
(2) 단지 이름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종교인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3) 몸으로 하는 행위, 마음으로 하는 생각 또는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4) 다른 사람이 화나게 하더라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5) 사람을 대함에 있어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 된다.
(6) 자신을 점차 영적 깨달음의 단계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영적 스승을 구해야 하며 그런 스승에게 순종하고 봉사하며 올바른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한다.
(7) 자아 인식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밝혀진 경전들에 나온 규정 원칙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8) 밝혀진 문헌의 계율에 충실해야 한다.
(9) 자아 인식에 방해되는 습관을 완전히 삼가야 한다.
(10)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11) 자신을 물질적 육신으로 잘못 인식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육체와 관련된 사람들을 자기 소유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12) 물질적 육신을 가진 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불행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물질적 육신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불행을 없애려고 하는 어떠한 노력과 계획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가장 현명한 길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13) 영적 진전을 위해 생필품 이외 어떠한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14) 밝혀진 경전의 규정보다 부인, 자식 그리고 가정에 더 많이 집착해서는 안 된다.
(15)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해 행복해하거나 괴로워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감정은 단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16)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의 순수한 헌애자가 되어야 하며 관심을 집중하여 당신을 섬겨야 한다.
(17) 영적 배양에 도움되는 고요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외딴곳에 살고 싶은 마음을 발전시키고 헌애자가 아닌 사람들이 모이는 복잡한 곳은 피해야 한다.
(18) 영적 지식은 영구적이지만 물질적 지식은 육신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며 영적 지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이 열여덟 항목은 점진적 과정이고 이를 통해 진정한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방법은 무지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위대한 아짜리아 스릴라 박띠비노다 타꾸라(Śrīla Bhaktivinoda Ṭhākura)는 모든 형태의 물질적 지식은 단지 환영적 에너지의 외적 특징이며 그런 지식을 발전시켜도 당나귀보다 나을 게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원칙이 여기 스리 이쇼빠니샤드에서도 발견된다. 물질적 지식의 향상으로 현대인들은 그저 당나귀로 탈바꿈하고 있을 뿐이다. 영적 가면을 쓴 일부 물질주의적 정치인들은 현대문명이 사악하다고 비난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바가바드 기따에 설명된 진정한 지식의 배양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사악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어린 소년조차 독립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잘못된 형태의 교육 때문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연장자들에게 두통을 안겨주고 있다. 따라서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무지의 배양은 지식의 배양과 완전히 다르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대학은 말하자면 무지의 센터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자들은 다른 나라를 없애기 위한 치명적 무기 개발에만 바쁘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브라흐마짜리(금욕하는 학생의 삶)의 규정 원칙을 배우지 않고 어떤 경전적 가르침에도 믿음이 없다. 실제적 실천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름과 명예만을 위해 종교 원칙이교육되고 있다. 따라서 사회 정치적 분야 뿐만 아니라 종교 분야에서도 적개심이 존재한다
일반 대중이 배양한 무지 때문에 민족주의가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그 누구도 이 조그마한 지구가 측정 불가하고 무한한 우주 안에 다른 여러 덩어리와 함께 떠 있는 한 덩어리의 물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의 광대함에 비교하면 이 물질 덩어리(지구, 행성)들은 공기 중의 먼지 입자 같다. 절대신께서 친절하게도 이러한 물질 덩어리들을 완전하게 만들어주셨고 우주 안에 떠 있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게 해 주셨다. 우주선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성과에 자부심을 느낄지도 모르나, 그들은 행성이라 불리는 더 위대하고 더 거대한 우주선들의 최고 조종사를 고려하지 않는다.
무한히 많은 태양과 태양계 또한 존재한다. 절대신의 극히 작은 일부로서, 우리 작은 생명체들은 이 무한한 행성을 지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생과 사를 반복하고 대체로 늙음과 질병으로 고통받는다. 인간의 수명은 약 100년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 역시 점차 20~30년으로 줄어들고 있다. 무지의 배양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얼마 안 되는 세월 동안에도 더욱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자 이 행성 내에 자기 나라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한 인간들은 완벽한 국가 경계 확정 혹은 분리라는 여러 계획을 꾸미지만 그런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목적을 이루려고 각 국가는 다른 국가에 근심을 안겨주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국가 에너지의 50% 이상이 국방으로 낭비되고 있다. 그 누구도 진정한 지식의 발전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사람들은 물질적, 영적 지식을 모두 발전시키고 있다고 그릇되게 자만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우리에게 이런 잘못된 형태의 교육을 경고하고, 바가바드 기따는 진정한 지식의 발전에 관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이 만뜨라는 비댜(지식)는 디라(dhīra)를 통해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디라’란 물질적 환영에 방해받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 무엇을 갈망하지도, 한탄하지도 않는 경지에 도달한 자, 즉 영적으로 완벽히 깨닫지 않은 한, 그 누구도 평온할 수 없다. 디라는 물질과의 접촉을 통해 우연히 얻게 된 물질계의 몸과 마음이 자신과는 무관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그는 이 육신을 전화위복을 위한 도구로 생각할 뿐이다.
물질적 육신과 마음은 영적 생명체에게 불리한 거래다. 생명체는 살아있는 영적 세계 안에서 실제의 기능을 하지만 이 물질계는 죽은 곳이다. 살아있는 영적 불꽃이 죽은 물질 덩어리를 조정하는 한 죽은 세계가 마치 산 세계처럼 보인다. 실제로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지고한 존재의 부분인 살아있는 영혼이다. 디라는 더 높은 권위자들로부터 이런 사실을 들어 알게 되었고 규정 원칙들을 따름으로써 이 지식을 깨달았다.
규정 원칙을 따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영적 스승을 은신처로 삼아야 한다. 초월적 메시지와 규정 원칙은 영적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해 내려 온다. 그런 지식은 무지한 교육 방식처럼 위험하게 내려오지 않는다. 오직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서 순종적으로 들음으로써 디라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르주나는 최고인격신 주 끄리쉬나 당신께 순종적으로 들음으로써 디라가 되었다. 따라서 완벽한 제자는 아르주나 같아야 하고 영적 스승은 주만큼 훌륭해야 한다. 이것이 디라(평온한 자)에게서 비댜(지식)를 배우는 과정이다.
아디라(adhīra: 디라가 되는 훈련을 받지 않은 자)는 남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현대 정치인들은 자신이 디라인체하지만 사실 아디라이며 그들에게 완벽한 지식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월급을 확인하는 데 정신없이 바쁠 뿐이다. 그러한 자들이 어떻게 대중을 자아 인식의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실제 교육을 받으려면 디라에게서 순종적으로 들어야만 한다.
비댬 짜비댬 짜 야스 vidyāṁ cāvidyāṁ ca yas
딷 베도바얌 사하 tad vedobhayaṁ saha
아비댜야 므리뜜 띠르뜨바 avidyayā mṛtyuṁ tīrtvā
비댜이암리땀 아스누떼 vidyayāmṛtam aśnute

Synonyms

Translation

초월적 지식 과정과 무지의 과정을 나란히 습득할 수 있는 자만이 반복된 생(生)과 사(死)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원히 불사하는 완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Purport

물질계가 창조된 이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자연의 법칙은 너무나 엄격해 그 누구도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도 죽거나 늙고, 병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그 누구에게도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에서의 면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물질적 지식의 발전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았다. 물질과학은 죽음의 과정을 가속하는 핵폭탄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을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의 가혹한 손아귀에서 보호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뿌라나에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매우 진보했던 왕, 히란야까시뿌(Hiraṇyakaśipu)의 활약을 알게 된다. 그는 물질적 부와 무지의 힘으로 가혹한 죽음을 정복하려고 매우 혹독한 형태의 명상을 했고, 모든 행성계의 거주자들이 그가 지닌 마력 때문에 방해받게 되었다. 히란야까시뿌는 우주의 창조자, 데바(demigod) 브라흐마를 강제로 자기 앞에 내려오게 했다. 그런 다음 브라흐마에게 아마라(amara), 즉 불멸하게 되는 축복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브라흐마는 물질적 창조자이자 모든 행성의 지배자인 자신조차 아마라가 아니라서 그런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바가바드 기따(8.17)가 확증했듯이, 브라흐마가 오래 살지만 그렇다고 불멸한다는 뜻은 아니다.
히란야(Hiraṇya)는 ‘금’을 의미하고, 까시뿌(kaśipu)는 ‘부드러운 침대’를 의미한다. 이 교활한 신사 히란야까시뿌는 이 두 가지, 돈과 여자에 관심 있어 불멸해 그것을 영원토록 즐기고자 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간접적으로 브라흐마에게 여러 가지 소원을 빌었다. 브라흐마가 불사(不死)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히란야까시뿌는 어떠한 인간, 동물, 데바, 그리고 8,400,000종의 다른 생명체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땅에서, 공중에서, 물속에서 또는 어떠한 무기로도 죽음을 맞지 않도록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히란야까시뿌는 어리석게도 이런 보장이 자신을 죽음에서 모면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브라흐마가 이 모든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반인(半人) 반사자 형상의 최고인격신, 느리심하(Nṛsiṁha)께 죽임을 당하는데, 당신은 어떠한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당신의 손톱으로 히란야까시뿌를 죽이셨다. 또한 땅에서도, 공중에서도, 물속에서도 아닌,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주 느리심하의 무릎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
여기에서 전체 요지는 가장 강력한 물질주의자, 히란야까시뿌조차 그가 세운 다양한 계획으로 죽음을 모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매 순간 세워놓은 여러 계획이 좌절되고 마는 오늘날의 축소판 히란야까시뿌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우리에게 존재를 위한 고군분투에서의 승리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누구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자연계의 법칙은 너무나 혹독하고 신속해 누구도 그 법칙을 능가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대신께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절대신께 돌아가는 과정은 이런 세속적 지식과는 다른 분야의 지식으로, 우빠니샤드, 베단따 수뜨라, 바가바드 기따, 스리마드 바가바땀 같은 밝혀진 베다 경전을 통해 배워야 한다. 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물질적 육신을 버리고 영원히 축복으로 가득한 삶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이런 신성한 문헌들을 공부하여 초월적 지식을 얻어야 한다. 속박된 생명체는 절대신과 자신의 영원한 관계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태어난 일시적 장소를 전부라 잘못 생각하게 되었다. 주는 망각에 빠진 인류에게 우리의 고향은 이 물질계가 아님을 상기시키기 위해 친절히 위에 언급된 경전들을 인도에 보이셨고, 다른 경전들을 다른 나라들에 보이셨다. 생명체는 영적 존재이고 본래의 영적 고향에 돌아갈 때에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최고인격신은 당신의 왕국에서 진정한 종들을 보내어 절대신께 돌아가게 하는 이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고, 때로는 당신이 친히 이 일을 하러 내려오신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소중한 자식이고 당신의 부분이기에 절대신은 이 물질적 상태 속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욱 가엾게 여기신다. 이 물질계 속에서 겪는 불행은 생명이 없는 물질과는 양립할 수 없는 우리 존재를 간접적으로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총명한 생명체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고 비댜, 즉 초월적 지식의 배양에 전념한다. 인간의 삶은 영적 지식을 배양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고 인간이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나라다마(narādhama), 즉 가장 하등한 인간이라 불린다.
아비댜, 즉 감각 만족을 위한 물질적 지식의 향상은 반복된 삶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영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에게 출생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영혼의 껍데기, 즉 육신에 적용된다. 죽음은 이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것이고, 출생은 새 껍데기를 덮어쓰는 것에 비유된다. 아비댜, 즉 무지의 배양에 철저히 열중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가혹한 과정에 개의치 않는다. 이들은 환영적 에너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같은 불행을 반복해서 겪지만 자연의 법칙에서 어떤 교훈도 배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댜, 즉 초월적 지식의 배양은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일종의 질병과 같은 물질적 상황 속에서 얻는 감각적 즐거움은 가능한 절제되어야 한다. 이 육체를 통해 느끼는 절제되지 않은 감각의 즐거움은 무지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생명체는 영적 감각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본래 모든 생명체는 모든 영적 감각을 지닌 영적 모습이지만, 현재 물질적 몸과 마음으로 덮여 물질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질적 감각으로 하는 활동은 본래의 영적 감각이 하는 활동의 왜곡된 투영이다. 병에 걸린 상태에서 영혼은 물질적 덮개를 쓰고 여러 물질적 행위에 종사한다. 진정한 감각적 즐거움은 물질주의라는 질병을 제거할 때만 느낄 수 있다. 순수한 영적 모습일 때의 우리는 모든 물질적 오염에서 벗어나 진정한 감각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다시 진정한 감각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환자는 먼저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 삶의 목적은 왜곡된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계적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있다. 물질계적 질병의 악화는 지식의 상징이 아니라 아비댜, 즉 무지의 상징이다. 건강해지려면 열이 40.5~41.6도까지 올라가서는 안 되고 37도로 체온을 낮추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현대 물질문명은 체온이 41.6도까지 오르는 고열의 물질적 상태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세상이 어느 순간에라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울부짖는다. 그것이 물질적 지식 향상의 결과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영적 지식의 배양을 게을리한 결과이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죽음으로 이끄는 이 위험한 길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영적 지식을 배양하는 노력을 하면 죽음의 가혹한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건강을 회복하려고 할 때 열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행위를 멈출 이유는 없다. “불리한 거래였지만 가장 좋게 활용하기”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영적지식의 배양은 몸과 마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몸과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평소의 체온이 37도가 되어야 하듯이, 인도의 위대한 성자와 성인들이 영적 지식과 물질적 지식의 균형 잡힌 계획으로 이렇게 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병든 감각 만족을 위해 인간의 지성을 오용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감각 만족 추구의 경향으로 하는 인간의 병든 행위는 베다가 구원의 원칙으로 규제해 왔다. 이 베다 제도는 종교, 경제 발전, 감각 만족, 구원을 다루지만 오늘날의 인간들은 종교나 구원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목적, 감각 만족이 있을 뿐이고 이를 달성하고자 경제 발전 계획을 세운다. 오도된 인간들은 종교가 감각을 만족시키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므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후에도 계속 감각 만족을 얻으려고 천국에 가게 하는 어떤 종교적 율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의 목적이 아니다. 종교의 길은 사실 자아 인식을 위해서이고 경제 발전은 그저 몸을 건전하고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필요할 뿐이다. 인간 삶의 목적인 비댜, 즉 진정한 지식을 깨달으려면 건전한 마음과 건강한 삶을 유지해야 한다. 감각 만족을 위해 노새처럼 일하거나 아비댜의 배양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비댜의 길은 인간이 절대 진리에 대해 질문하는 데 인생을 활용하도록 지도하는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가장 완벽히 제시되어 있다. 절대 진리는 브라흐만(Brahman), 빠람아뜨마(Paramātmā),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가반(Bhagavān), 즉 최고인격신에 대한 깨달음으로 단계별로 이뤄진다. 절대 진리는 만뜨라 10의 요지에 설명된 것처럼 바가바드 기따의 18가지 원칙을 따름으로써 지식을 얻고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이 넓은 자가 깨달을 수 있다. 18가지 원칙의 핵심 요지는 최고인격신께 초월적 봉헌을 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류의 사람이 주께 봉헌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비댜를 목적으로 하는 보장된 길이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Śrīla Rūpa Gosvāmī)가 쓴 박띠-라삼리따-신두(Bhakti-rasāmṛta-sindhu)에 설명되어 있고 우리는 ‘헌애의 감로(The Nectar of Devotion)’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비댜를 배양하는 법이 스리마드 바가바땀(1.2.14)에 다음과 같은 구절로 요약되어 있다.
따스맏 에께나 마나사 tasmād ekena manasā
바가반 사뜨바땀 빠띠히 bhagavān sātvatāṁ patiḥ
스로따뱌 끼르띠따뱌스 짜 śrotavyaḥ kīrtitavyaś ca
드예야 뿌쟈스 짜 니땨다 dhyeyaḥ pūjyaś ca nityadā
“그러므로 오직 한결같이 집중하여 헌애자들의 보호자인 최고인격신에 관해 끊임없이 듣고, 찬양하고, 기억하고, 숭배하라.”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다음 만뜨라가 가리키는 것처럼 종교와 경제 발전, 그리고 감각 만족이 주를 향한 봉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은 그저 여러 다른 형태의 무지에 불과하다.
안담 따마하 쁘라비샨띠 andhaṁ tamaḥ praviśanti
예 ‘삼부띰 우빠사떼 ye 'sambhūtim upāsate
따또 부야 이바 떼 따모 tato bhūya iva te tamo
야 우 삼부땸 라따하 ya u sambhūtyām ratāḥ

Synonyms

Translation

데바 숭배에 종사하는 자들은 무지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빠져들고, 비인성적 절대자를 숭배하는 자들은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Purport

산스끄리뜨어 아삼부띠(asambhūti)는 독립적이지 않은 존재를 의미한다. 삼부띠(Sambhūti)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최고인격신이다. 바가바드 기따(10.2)에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 메 비두후 수라-가나 na me viduḥ sura-gaṇā
쁘라바밤 나 마하르샤야하 prabhavaṁ na maharṣayaḥ
아함 아디르 히 데바남 aham ādir hi devānāṁ
마하르쉬남 짜 사르바샤하 maharṣīṇāṁ ca sarvaśaḥ
“모든 면에서 내가 데바와 현인들의 근원이므로 많은 데바나 위대한 현인조차 나의 기원이나 풍요로움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끄리쉬나가 데바, 위대한 현인,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근원이다. 비록 그들이 큰 힘을 부여받더라도 이러한 힘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끄리쉬나께서 당신의 내적 능력으로 어떻게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셨는지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많은 철학자와 위대한 리쉬들(ṛṣis, 현인)이나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작은 두뇌를 활용해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자를 구별하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절대자에 관한 긍정적 자취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부정적 개념에만 이를 뿐이다. 부정(不定)으로 절대자를 정의하려 하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런 부정적 정의는 자기만의 개념을 만들어 내게 하고 따라서 절대자가 형상이 없고 자질이 없는 존재라 상상하게 된다. 절대자를 이런 식으로 인식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브라흐만이라고 알려진 절대신의 비인성적 광채에 이를 뿐이고 최고인격신 바가반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런 관념적 사색가들은 최고인격신이 끄리쉬나이고, 비인성적 브라흐만은 당신의 초월적 몸에서 빛나는 광채이며 빠람아뜨마, 즉 초영혼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당신의 완전한 표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또한 끄리쉬나가 초월적 자질인 영원한 축복과 지식으로 가득 찬 영원한 형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끄리쉬나께 의존하는 데바들과 위대한 현인들조차 불완전하게도 당신을 강력한 데바로 간주하고, 브라흐만의 광채가 절대 진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끄리쉬나의 헌애자들은 당신을 향한 항복(surrender)과 순수한 헌애(devotion) 덕분에 끄리쉬나가 절대 인격이며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 헌애자들은 모든 것의 원천인 끄리쉬나께 끊임없이 사랑의 봉사를 바친다.
바가바드 기따(7.20, 23)에서 말하길, 총명하지 못하고 당혹한 사람들이 감각 만족을 이루려는 강한 욕망에 이끌려 일시적 안도나 일시적 문제 해결을 위해 데바들을 숭배한다. 생명체는 현재 물질에 얽혀있으므로 영원한 행복과 삶, 지식이 있는 영계에 도달함으로써 영원한 안도를 얻어 물질적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오직 일시적 혜택만을 줄 뿐인 종속적인 데바들을 숭배함으로써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시적 구원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다. 데바들을 숭배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매력적이고 우리를 본래의 고향, 절대신께 돌아가게 함으로써 물질적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 주는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를 숭배해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7.23)는 데바들의 숭배자들은 데바들의 행성에 갈 수 있다고 명시한다. 달 숭배자들은 달에 갈 수 있고, 태양 숭배자들은 태양에 갈 수 있다. 현대 과학자들은 로켓의 도움으로 달에 가려고 모험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진보한 의식을 가진 인간은 자연히 우주선이나 신비한 힘, 혹은 데바 숭배를 통해 지구 밖 다른 우주나 행성에 가고 싶어 한다. 베다 경전은 이 세 가지 방식으로 다른 행성에 갈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특정 행성에 주재하는 데바 숭배를 통해 가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달, 태양, 심지어 이 우주의 최고 행성인 브라흐마로까(Brahmaloka)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물질적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행성은 일시적 거처이다. 영원한 행성은 오직 바이꾼타로까(Vaikuṇṭhaloka)일 뿐이다. 이 행성들은 최고인격신 당신이 직접 지배하는 영적 창공(영계)에 있다. 바가바드 기따(8.16)에서 주 끄리쉬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흐마-부바날 로까하 ābrahma-bhuvanāl lokāḥ
뿌나르 아바르띠노 ‘르주나 punar āvartino 'rjuna
맘 우뻬땨 뚜 까운떼야 mām upetya tu kaunteya
뿌나르 잔마 나 비댜떼 punar janma na vidyate
“물질계의 가장 높은 행성에서 가장 낮은 행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반복된 생과 사가 이어지는 고통의 장소이다. 오 꾼띠의 아들이여, 그러나 내 거처를 얻는 자는 절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데바들을 숭배하여 그들이 주재하는 물질적 행성을 얻더라도 여전히 우주의 가장 어두운 지역에 머문다고 지적한다. 전 우주는 거대한 물질적 요소들로 덮여 있고, 이는 마치 물이 반쯤 차있고 단단한 껍질에 싸인 코코넛과 같다. 우주는 표면이 밀폐되어 있고 내부의 어둠이 무척 짙기 때문에 빛을 밝히려면 태양과 달이 필요하다. 우주 밖은 광대하고 무한한 브라흐마-죠띠(brahma-jyotir)의 팽창이며 바이꾼타로까들로 가득 차 있다. 브라흐마-죠띠 안에 있는 가장 크고 가장 높은 행성은 끄리쉬나로까(Kṛṣṇaloka), 또는 골로까 브린다반(Goloka Vṛndāvana)으로,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 당신이 거주하는 곳이다. 주 스리 끄리쉬나는 끄리쉬나로까를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 그곳에서 당신의 영원한 동반자들과 계시지만 동시에 전 우주와 영계를 통틀어 두루 존재하신다. 이 사실은 이미 만뜨라 4에서 설명되었다. 당신은 태양처럼 모든 곳에 존재하시지만 태양이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고유한 궤도에 머무는 것처럼 한 곳에 머무신다.
삶의 여러 문제를 달이나 그보다 높고 낮은 다른 행성에 가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우리에게 이 어두운 물질적 우주 안에 있는 어떤 목적지에도 관심 두지 말고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 찬란한 절대신의 왕국에 이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직 이름과 명성을 얻으려고 종교인이 된 많은 가짜 신앙인들이 있다. 그런 가짜 종교인들은 이 우주를 벗어나 영계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주를 숭배한다는 명목으로 이 물질계에서 현상 유지만을 원할 뿐이다. 무신론자는 최고인격신의 존재를 직접 부정하고 비인성주의자들은 절대신의 비인성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스리 이쇼빠니샤드 만뜨라 중에서 어떤 부분도 최고인격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행성들을 뒤쫓는 자는 분명 사람일 것이고 주께서 그들 모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어떻게 당신이 비인성일 수 있는가? 절대신의 비인성적 개념은 절대 진리에 관한 불완전한 개념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무지이다.
무지한 가짜 종교인들과 베다 지시 사항을 직접 어기는 소위 화신 제조자들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오도하므로 우주의 가장 어두운 지역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비인성주의자들은 대개 베다 지혜에 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자기가 신의 화신이라고 가장한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갖고 있으면 완전히 무지한 사람보다 더 위험하다. 그런 비인성주의자들은 심지어 경전이 권장하는 사항에 따라 데바들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경전은 특정 상황에 맞게 데바들을 숭배하라고 권하지만 동시에 대체로 데바 숭배가 필요 없다고도 명시한다. 바가바드 기따(7.23)는 데바 숭배로 얻은 결과는 영원하지 않다고 명백히 말한다. 전 물질 우주 자체가 영원하지 않으므로 물질적 존재의 어둠 속에서 이룩한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문제는 진정하고 영원한 삶을 얻는 데 있다.
주께서 말씀하시길, 최고인격신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봉헌으로 당신께 이르자마자 삶과 죽음의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셨다. 다른 말로 하면, 물질적 덫에서 구원받는 길은 주를 섬김으로써 얻은 지식과 초연함의 원칙에 전적으로 달렸다. 가짜 종교인들은 지식은 물론이고 물질적 상황에서 초연하지도 않고 그들 대부분은 종교 원칙으로 가장한 박애주의 활동의 그늘에서 물질적 속박이라는 황금 족쇄를 차고 살기를 원한다. 온갖 비윤리적인 행위에 탐닉하면서 거짓된 종교 감정을 표현하며 헌신적 봉사라는 쇼를 보인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神)을 섬기는 자이고 영적 스승이라 말한다. 그런 종교 원칙의 위반자들은 엄격한 사제 계보 안에 있는 성인다운 스승, 즉 권위 있는 아짜리아를 향해 어떤 존경심도 표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다의 지시 사항인 ‘아짜료빠사나(ācāryopāsana)’, 즉 “아짜리아를 반드시 숭배해야 한다.”는 명령과 바가바드 기따(4.2)에서 끄리쉬나께서 하신 말씀, “에밤 빠람빠라-쁘랍땀(evaṁ paramparā-prāptam)”, 즉 “절대신에 관한 이 최고의 과학은 사제 계보를 통해 전해진다.”를 무시한다.  그 대신 자기가 소위 아짜리아가 되어 대중을 오도하지만 아짜리아들이 지켜야 할 원칙조차 따르지 않는다.
이런 사기꾼들이 인류에 가장 위험한 요소다.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법의 처벌을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자의 법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바가바드 기따가 명백히 선언한 것처럼 “종교적 선동을 일삼는 시기심에 가득 찬 악마들은 지옥의 가장 어두운 지역으로 떨어질 것이다(16.19~20).”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이런 가짜 종교인은 오로지 감각 만족을 위해 한 영적 스승이라는 비즈니스를 끝낸 후 우주에서 가장 추악한 곳을 향해 갈 것이라고 확언한다.
아냗 에바후후 삼바바드 anyad evāhuḥ sambhavād
아냗 아후르 아삼바밧 anyad āhur asambhavāt
이띠 슈스루마 디라남 iti śuśruma dhīrāṇāṁ
예 나스 딷 비짜짝쉬레 ye nas tad vicacakṣire

Synonyms

Translation

모든 원인의 최고 원인인 최고 존재를 숭배함으로써 얻는 결과는 최고가 아닌 것을 숭배함으로써 얻는 결과와는 다르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이에 관해 명백히 설명한, 마음이 평온한 권위자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Purport

마음이 평온한 권위자들을 통해 듣는 제도가 이 만뜨라에서 승인되었다. 물질계의 변화에 동요되지 않는 진정한 아짜리아에게서 듣지 않는 한, 초월적 지식을 향한 진정한 실마리를 얻을 수 없다. 진정한 영적 스승 또한 스루띠 만뜨라나 베다 지식을 마음이 평온한 아짜리아에게서 들었고, 그들은 베다 문헌에서 언급되지 않은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바가바드 기따(9.25)는 삐뜨리(pitṛ), 즉 조상을 숭배하는 자는 조상들이 있는 행성에 가게 되고, 이 세상에 남으려는 계획을 세우는 철저히 물질주의적인 자들은 이곳에 남고, 다른 신이 아닌 모든 원인의 근본 원인인 주 끄리쉬나를 숭배하는 헌애자들은 당신이 계신 영계에 가 당신께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에서도 여러 다른 숭배에 따라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고 입증한다. 절대신을 숭배하면 분명 당신이 계신 영적 보금자리에서 당신과 만날 수 있고, 태양신이나 달의 신 같은 데바들을 숭배하면 의심의 여지 없이 각각 그 행성에 갈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계획 단체와 임시방편의 정치 조정이 있는 이 비참한 행성에 남고자 한다면 분명 그렇게도 될 수 있다.
진짜 경전 어디에서도 아무 행위나 하고 아무나 숭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같은 목표에 이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어리석은 이론은 자칭 ‘영적 스승’들이 지어낸 것으로 그들은 진정한 사제 계보인 빠람빠라(paramparā)와 아무 관련이 없는 자들이다. 진정한 영적 스승이라면 모든 길이 같은 목표에 이르게 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방식으로 데바나 절대신이나 무엇이나 숭배함으로써 누구나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보통의 상식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목적지에 가게 하는 표를 사야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콜카타행 표를 산 사람은 콜카타에 가지, 뭄바이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영적 스승이라는 자들은 어떤 길이라도 모두 최고 목표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제안은 여러 어리석은 자를 사로잡고 이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영적 깨달음의 방법에 의기양양해한다. 그러나 베다 가르침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공인된 사제 계보를 따르는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서 지식을 받지 않는 한, 있는 그대로의 참지식을 얻을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4.2)에서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에밤 빠람빠라-쁘랍땀 evaṁ paramparā-prāptam
이맘 라자르샤요 비두후 imaṁ rājarṣayo viduḥ
사 깔레네하 마하따 sa kāleneha mahatā
요고 나쉬따 빠란따빠 yogo naṣṭaḥ parantapa
“이 최상의 과학은 사제 전수의 사슬을 통해 전해졌고 성스러운 왕들도 그런 식으로 그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계보가 끊어졌기에 있는 그대로의 과학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주 스리 끄리쉬나께서 이 지구 상에 나타나셨을 때 바가바드 기따에 정의된 박띠 요가 원칙들이 왜곡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신은 가장 은밀한 친구이자 당신의 헌애자인 아르주나를 시작으로 하는 사제 계보를 다시 확립하셔야 했다. 당신은 아르주나가 당신의 헌애자이고 친구이므로 바가바드 기따의 원칙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명백히 말씀하신다(바가바드 기따 4.3). 다른 말로 하면, 주의 헌애자와 친구만이 기따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아르주나의 길을 따르는 자만이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주 끄리쉬나나 아르주나에는 전혀 관심 없이 이 숭고한 대화를 마음대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주해가들은 바가바드 기따 구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기따의 이름으로 온갖 쓰레기 가정을 늘어놓는다. 그런 주해가들은 스리 끄리쉬나는 물론이고 당신의 영원한 보금자리 또한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바가바드 기따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끄리쉬나께서는 온전한 정신이 아닌 자만이 사소한 보상을 바라고 데바들을 숭배한다고 명백히 말씀하신다(바가바드 기따 7.20, 7.23). 궁극적으로 당신은 모든 방식과 종류의 숭배를 버리고 당신께만 완전히 항복하라고 조언하신다(바가바드 기따 18.66). 모든 죄악의 결과를 깨끗이 씻은 자만이 절대신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다른 이들은 부분적인 숭배를 함으로써 계속해서 물질계를 맴돌 것이고, 그 결과 모든 길이 같은 목표에 이르게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에 쓰인 ‘삼-바밧’, 즉 “최고 원인을 숭배함으로써”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주 끄리쉬나는 최초의 최고인격신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나왔다. 바가바드 기따(10.8)에서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함 사르바샤 쁘라바보 ahaṁ sarvasya prabhavo
맛따 사르밤 쁘라바르따떼 mattaḥ sarvaṁ pravartate
이띠 마뜨바 바잔떼 맘 iti matvā bhajante māṁ
부다 바바-사만비따하 budhā bhāva-samanvitāḥ
“내가 모든 영계와 물질계의 원천이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온다. 이것을 완벽히 아는 현자들은 나를 향한 봉헌에 종사하고 진심을 다해 나를 숭배하느니라.”
여기 절대신 스스로 제공해 주신 당신에 관한 정확한 설명이 있다. ‘사르바샤 쁘라-바바하’는 끄리쉬나께서 브라흐마(Brahmā), 비쉬누(Viṣṇu), 시바(Śiva)를 포함한 모든 이의 창조주라는 뜻이다. 그리고 물질계를 지배하는 이 주요 세 신이 주에게서 창조되었으므로 주는 물질계와 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다. 아타르바베다(Atharva Veda)가 비슷한 설명을 한다. “브라흐마가 있기 전에도 존재한 분, 그리고 브라흐마에게 베다 지식을 밝혀준 분은 주 스리 끄리쉬나이다(고빨라-따빠니 우빠니샤드 1.24). 마찬가지로 나라야나 우빠니샤드(Nārāyaṇa Upaniṣad 1)도 이렇게 명시한다. “그런 후 최고의 인간, 나라야나께서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시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라야나에서 브라흐마가 태어났다. 나라야나는 모든 쁘라자빠띠(Prajāpatis)를 창조하셨다. 나라야나께서 인드라(Indra)를 창조하셨다. 나라야나께서 여덟 명의 바수(Vasus)를 창조하셨다. 나라야나께서 11명의 루드라(Rudras)를 창조하셨다. 나라야나께서 12명의 아디땨(Ādityas)를 창조하셨다.” 나라야나는 주 끄리쉬나의 전체적 현현으로, 나라야나와 끄리쉬나는 하나며 같다. 나라야나 우빠니샤드(4)는 또한 이렇게 명시한다. “데바끼(Devakī)의 아들(끄리쉬나)은 절대신이다.” 나라야나가 최상의 원인이라는 정체성은 인성주의자 바이쉬나바 계보에 속하지 않는 스리빠다 샹까라짜리아(Śrīpāda Śaṅkarācārya)마저 인정하고 확증했다. 아타르바 베다(마하 우빠니샤드 1) 또한 이렇게 명시한다. “오직 나라야나만이 브라흐마나 시바 혹은 불, 물, 별, 태양, 달이 존재하지 않던 태초에 존재했다. 주는 홀로 남지 않으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창조하신다.” 끄리쉬나 당신께서 목샤-다르마(Mokṣa-dharma)에서 “내가 쁘라자빠띠와 루드라를 창조했다. 내 환영 에너지가 그들을 감싸고 있으므로 그들은 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신다. 바라하 뿌라나(Varāha Purāṇa) 또한 “나라야나는 최고인격신이고 당신에게서 네 머리를 한 브라흐마가 나타났으며 나중에 전지(全知)하게 된 루드라가 나타났다.”라고 명시한다.
따라서 모든 베다 문헌은 나라야나, 혹은 끄리쉬나가 모든 원인의 원인이라고 확언한다. 브라흐마 삼히따(5.1) 또한 절대신 스리 끄리쉬나, 고빈다는 모든 생명체에게 기쁨을 주는 자이고 모든 원인의 원초적 원인이라고 명시한다. 진정 학식 있는 자는 위대한 현자들과 베다가 제공하는 증거들을 통해 이것을 이해하고, 따라서 그들은 유일하고 전부인 주 끄리쉬나만을 숭배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자들은 오직 끄리쉬나만을 숭배함으로써 부다, 즉 진정 학식 있는 자라고 불린다.
끄리쉬나가 전부라는 확신은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이 평온한 아짜리아들에게서 초월적 메시지를 들을 때 생겨난다. 주 끄리쉬나께 전혀 믿음이 없거나 사랑이 없는 자는 이 단순한 진리에 확신감을 가질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9.11)는 믿음이 없는 자들을 무다(mūḍha), 즉 바보, 혹은 당나귀라고 묘사한다. 무다들은 마음이 평온한 아짜리아에게서 완전한 지식을 얻지 못했기에 최고인격신을 비웃는다. 물질적 에너지의 소용돌이에 방해받는 자는 아짜리아가 될 자격이 없다.
바가바드 기따를 듣기 전에 아르주나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를 향한 애정으로 물질적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래서 아르주나는 비폭력적인 박애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절대 인격에게 바가바드 기따라는 베다 지식을 들음으로써 그는 부다(budha)가 되었고 결심을 달리했으며 꾸룩쉐뜨라 전장을 친히 준비하신 주 스리 끄리쉬나의 숭배자가 되었다. 아르주나는 소위 친척이라는 자들과 싸움으로써 주를 숭배했고 이렇게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가 되었다. 그런 임무의 완수는 바가바드 기따와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설명된 끄리쉬나 과학의 복잡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꾸며낸 “제조된 끄리쉬나”가 아니라 진짜 끄리쉬나를 숭배할 때만 가능하다.
베단따 수뜨라에 따르면 삼부따(sambhūta)는 출생과 유지의 원천이며 소멸 후에도 남는 저장소이다(잔마디 아샤 야따하, 스리마드 바가바땀 1.1.1). 베단따 수뜨라의 자연스러운 주해서인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동 저자에 의해 집필되었고 이 책은 파생된 모든 것의 원천은 죽은 돌 같은 것이 아니라 아비갸(abhijña), 즉 완전한 의식이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원초적 주 스리 끄리쉬나께서도 바가바드 기따(7.26)에서 당신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완전히 아시고 시바와 브라흐마나 같은 데바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당신에 관해 완전히 알지 못한다신다. 물질적 존재의 흥망에 좌우되는 “절반의 학식만 갖춘 영적 스승들”은 분명 당신을 완전히 알 수 없다. 대중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왜곡된 타협을 시도하지만, 대중은 불완전하여 그런 숭배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소위 영적 스승들이 만들어낸 이런 시도는 나무의 뿌리가 아닌 잎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나무의 뿌리에 물을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그런 동요하는 지도자들은 뿌리보다 잎에 더 사로잡혀 있다. 계속해서 잎에 물을 주더라도 영양 부족으로 결국 전부 말라죽게 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모든 발아의 원천인 뿌리에 물을 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절대 완벽할 수 없는 육체적 안락을 제공함으로써 대중을 숭배하는 것은 영혼을 위한 봉사보다 덜 중요하다. 영혼은 까르마의 법칙에 따라 다양한 몸을 만들어내는 뿌리이다. 의학적 원조, 사회적 원조, 교육 시설로써 인류에 봉사하는 동시에 도살장에서 가엾은 동물들의 목을 따는 것은 생명체, 영혼에 하는 봉사가 절대 아니다.
생명체는 출생과 늙음, 질병, 죽음이라는 물질적 고통을 다양한 육신 안에서 끊임없이 경험하고 있다. 인간 형태를 한 삶은 생명체와 절대신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재확립하는 것만으로도 이 얽힘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한다. 주께서는 당신께 항복하는 이 철학, 삼부따를 가르치러 친히 오신다. 절대신께 항복하고 완전한 사랑과 에너지를 다해 당신을 숭배하라고 가르칠 때 인류에 진정한 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가 가르치는 바이다.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절대신을 숭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당신의 위대한 활약에 관해 듣고 구송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념적 사색가들은 당신의 활약들이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것에 관해 듣기를 삼가고 아무런 실체도 없는 말장난을 발명해 내 순진한 대중의 관심을 끈다. 주 끄리쉬나의 활약에 관해 듣는 대신 그런 가짜 영적 스승은 추종자들에게 자신에 관한 노래를 부르게 하며 자기광고를 한다. 현시대에 그런 사기꾼들의 수는 상당히 급증해서 주의 순수한 헌애자들이 이 사기꾼들과 가짜 화신들의 부정한 선전에서 대중을 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빠니샤드는 간접적으로 우리 관심을 원초적 주 스리 끄리쉬나께 돌리게 하지만, 모든 우빠니샤드의 요약서인 바가바드 기따는 직접적으로 스리 끄리쉬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따나 스리마드 바가바땀을 통해 끄리쉬나에 관해 있는 그대로 들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우리 마음은 모든 더러움을 점점 씻어낸다. 스리마드 바가바땀(1.2.17)은 “주의 활약들에 관해 들음으로써 헌애자는 당신께 주목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체의 가슴에 자리하시는 주는 헌애자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며 도와주신다.” 바가바드 기따(10.10)가 이것을 확증한다. 다다미 붓디-요감 땀 예나 맘 우빠얀띠 떼(dadāmi buddhi-yogaṁ taṁ yena mām upayānti te).
가슴 속에서 당신이 주시는 지도 덕분에 동성(動性)과 암성(暗性)의 물질적 본성으로 생겨난 헌애자의 가슴 속에 있던 모든 더러움이 씻긴다. 비헌애자는 열성과 암성에 동요한다. 열성에 있는 자는 물질적 열망에서 초연할 수 없고 암성에 있는 자는 자기가 무엇인지, 주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열성이나 암성에 있을 때 자아 인식을 할 가능성은 없는데도 종교인의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헌애자는 주의 자비로 열성과 암성이 제거된 상태가 된다. 이렇게 헌애자는 완벽한 브라흐마나의 징표인 선성(善性)에 있게 된다. 누구라도 진정한 영적 스승의 지도를 받아 봉헌의 길을 따르면 브라흐마나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2.4.18) 또한 이렇게 말한다.
끼라따-후난드라-뿔린다-뿔까샤 kirāta-hūṇāndhra-pulinda-pulkaśā
아비라-슘바 야바나 카사다야하 ābhīra-śumbhā yavanāḥ khasādayaḥ
예 ‘녜 짜 빠빠 야드-아빠스라야스라야하 ye 'nye ca pāpā yad-apāśrayāśrayāḥ
슈댠띠 따스마이 쁘라바비쉬나베 나마하 śudhyanti tasmai prabhaviṣṇave namaḥ
주는 놀랍도록 강력하기에 아무리 천한 태생의 사람이라도 주의 순수한 헌애자의 지도를 받음으로써 정화될 수 있다.
브라흐민의 자격을 갖추면 행복해지고 주를 향한 봉헌에 열중하게 된다. 저절로 절대신의 과학이 이들 앞에 드러나게 된다. 절대신의 과학을 앎으로써 물질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당신의 자비로 의심하는 마음이 맑고 투명해진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된 해방된 영혼은 삶의 매 순간 주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에서 설명하는 삼바바의 완성이다.
삼부띰 짜 비나샴 짜 sambhūtiṁ ca vināśaṁ ca
야스 딷 베도바얌 사하 yas tad vedobhayaṁ saha
비나세나 므리뜜 띠르뜨바 vināśena mṛtyuṁ tīrtvā
삼부띠암리땀 아스누떼sambhūtyāmṛtam aśnute

Synonyms

Translation

인간은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와 당신의 초월적 이름, 형상, 자질과 유희를 완벽히 알아야 하며 일시적인 데바, 인간 그리고 동물로 이루어진 일시적 물질계의 창조 또한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알 때, 죽음과 덧없는 우주적 발현을 넘어 절대신의 영원한 보금자리에서 축복과 지식으로 가득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Purport

소위 지식의 진보로 인류 문명은 우주선과 원자력 에너지를 포함한 여러 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죽지 않아도 되고 다시 태어나지 않고, 늙거나 병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발명해내지는 못했다. 총명한 자가 소위 과학자라는 사람들에게 이런 불행에 대해 질문하면 과학자들은 물질과학은 발전하고 있고 결국 죽지 않고 늙지 않으며 질병 없는 인간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매우 영리하게 대답한다. 그런 답이야말로 물질적 본성에 대한 과학자들의 철저한 무지를 증명한다. 물질적 본성 안에서 모든 이는 엄격한 물질의 법칙에 영향받고 여섯 단계의 존재, 즉 출생, 성장, 유지, 부산물의 생산, 쇠퇴, 마침내 죽음을 거쳐야 한다. 물질적 본성과 접촉하는 것 중 어떤 것도 이 여섯 전환의 법칙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데바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물질계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다.
수명은 종에 따라 다양하다. 이 물질적 우주 안에서 최고의 생명체인 브라흐마는 수백만 년을 살지만 작은 균은 오직 몇 시간만을 살 뿐이다. 그러나 물질계에 있는 누구라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다. 특정 조건으로 태어나거나 창조되고, 얼마간을 머무르며 계속 산다면 성장하고 생식하고 점점 쇠퇴하여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이 법칙에 따라 수백만의 다른 우주에 거주하는 브라흐마들조차 오늘이나 내일 죽어야 할 운명에 있다. 그러므로 전 물질 우주는 마르땨로까(Martyaloka), 즉 죽음의 장소라 불린다.
물질 과학주의자들과 정치인들은 불멸의 영적 본성에 관한 정보가 없기에 이곳을 불멸의 장소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이는 성숙한 초월적 경험을 통해 확증된 완전한 지식을 담고 있는 베다 문헌에 관해 무지한 탓이다. 불행히도 현대 인간은 베다, 뿌라나, 그리고 다른 경전들로부터 지식을 받기 싫어한다.
비쉬누 뿌라나(6.7.61)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는다.
비쉬누-샥띠 빠라 쁘록따 viṣṇu-śaktiḥ parā proktā
끄쉐뜨라-갸키아 따타 빠라 kṣetra-jñākhyā tathā parā
아비댜-까르마-삼갸니아 avidyā-karma-saṁjñānyā
뜨리띠야 샥띠르 이샤떼 tṛtīyā śaktir iṣyate
최고인격신, 주 비쉬누는 빠라(parā: 상위)와 아빠라(aparā: 하위)라고 하는 다른 에너지를 소유하신다. 생명체는 상위 에너지에 속한다. 우리가 현재 얽혀있는 물질적 에너지는 하위 에너지이다. 물질적 창조는 이 에너지에 의해 생겨났고 생명체를 무지(아비댜)로 덮어 인과응보를 낳는 행위를 하도록 한다. 하지만 물질적 하위 에너지와 상위 에너지인 생명체와는 다른 주의 또 다른 상위 에너지 부분이 있다. 그 상위 에너지는 영원하고 불멸하는 주의 거처이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8.20)에서 확인된다.
빠라스 따스맛 뚜 바보 ‘뇨 paras tasmāt tu bhāvo 'nyo
’비약또 ‘비약땃 사나따나하 'vyakto 'vyaktāt sanātanaḥ
야하 사 사르베슈 부떼슈 yaḥ sa sarveṣu bhūteṣu
나샷수 나 비나샤띠 naśyatsu na vinaśyati
태양과 달, 금성을 포함해 높거나 낮거나 중간에 위치한 모든 물질적 행성은 우주 전역에 흩어져 있다. 이 행성들은 브라흐마의 생존 기간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낮은 행성은 브라흐마의 하루가 끝나면 파괴되고 브라흐마의 다음 날 동안 다시 창조된다. 더 높은 행성에서 시간은 다르게 측정된다. 우리의 일 년이 여러 상위 행성의 24시간, 즉 하루 밤낮과 일치한다. 지구의 네 시대(사땨, 뜨레따, 드바빠라, 깔리)는 상위 행성의 시간으로 오직 12,000년간만 지속된다. 여기에 1000을 곱하면 브라흐마의 하루가 되고 브라흐마의 밤은 이것과 같은 길이다. 그런 낮과 밤이 달과 해가 되고, 브라흐마는 그런 시간으로 100년을 산다. 브라흐마의 삶이 끝날 때 완전한 우주의 발현은 소멸한다.
태양과 달 같이 더 높은 행성들과 마르땨로까를 비롯해 이 지구, 더 낮은 행성에 사는 생명체는 모두 브라흐마의 밤 동안 황폐의 물속에 잠긴다. 이때 생명체는 비록 영적으로 계속 존재하지만 발현하지는 않는다. 이 비발현의 상태를 아뱍따(avyakta)라고 한다. 브라흐마의 삶이 다할 때 전 우주는 다시 소멸하고 이것이 또 다른 아뱍따 상태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비발현 상태를 넘어서 또 하나의 비발현 상태, 영적 대기권 혹은 영적 본성이 있다. 이 대기권 안에는 엄청난 수의 영적 행성이 있고, 브라흐마의 삶이 다 해 이 물질적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행성이 소멸할 때조차 이 행성들은 영원히 존재한다. 물질적 우주의 수는 많고, 각 우주는 각각의 브라흐마가 관할하며 이렇게 다양한 브라흐마의 관할 안에 있는 전 우주의 발현은 주(主, 에까빠드-비부띠; ekapād-vibhūti)가 가진 에너지의 1/4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이 상위 에너지, 빠라-쁘라끄리띠(parā-prakṛti)이다.
영적 본성 안에 거주하며 직접 지배하는 최고 인간은 주 스리 끄리쉬나이다. 바가바드 기따(8.22)에서 확증되었듯이 갸나(철학), 요가(신비주의), 혹은 까르마(인과응보적 일)의 과정이 아닌 순수한 봉헌으로만 당신께 다가갈 수 있다. 결실을 바라고 일하는 까르미들은 태양과 달을 포함하는 스바르가로까(Svargaloka) 행성으로 올라갈 수 있다. 갸니들과 요기들은 마하르로까(Maharloka), 따뽀로까(Tapoloka), 브라흐마로까(Brahmalok) 같이 더 높은 행성으로 올라갈 수 있고 봉헌을 통해 더 높은 자격을 갖추면 그 자격에 따라 무한한 영적 하늘의 빛나는 대기권(브라흐만)이나 바이꾼타 행성이 있는 영적 본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봉헌하는 훈련을 받지 않고 영적 바이꾼타에 들어 갈 수 없다.
물질적 행성에서는 브라흐마에서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려 하고 이것이 물질적 질병이다. 이 물질적 질병이 계속되는 한 생명체는 육신의 변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인간의 모습을 받든, 데바든 동물이든 결국 두 종류의 황폐기, 즉 브라흐마의 밤과 브라흐마의 삶이 끝나는 때 비발현의 상태를 겪어야 한다. 우리가 이 반복되는 생과 사, 그리고 이와 수반되어 일어나는 노화와 질병의 과정을 끝내고 싶다면 주 끄리쉬나 혹은 당신의 전체적 확장인 나라야나 형상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적 행성에 들어가려고 반드시 노력해야 한다. 주 끄리쉬나 혹은 당신의 전체적 확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모든 행성을 각각 지배하시고 이 사실은 스루띠 만뜨라들에서 확증되었다. 에꼬 바시 사르바-가 끄리쉬나 이댜하 / 에꼬 ‘삐 산 바후다 요 ‘바바띠(eko vaśī sarva-gaḥ kṛṣṇa īḍyaḥ/ eko 'pi san bahudhā yo 'vabhāti, 고빨라-따빠니 우빠니샤드 1.21). 
아무도 끄리쉬나를 지배할 수 없다.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속박된 영혼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해도 오히려 물질적 본성의 법칙과 반복된 생과 사의 고통에 종속될 뿐이다. 주께서 종교 원칙을 재확립하시고자 이곳에 오시고, 그 기본 원칙은 당신께 항복하는 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18.66)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사르바-다르만 빠리땨쟈 맘 에깜 샤라남 브라자(sarva-dharmān parityajya mām ekaṁ śaraṇaṁ vraja). “모든 다른 과정을 버리고 그저 나에게만 항복하라.” 불행하게도 어리석은 자들은 이 중요한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고 대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오도한다. 사람들은 병원을 열라는 재촉을 받지만 봉헌의 태도를 길러 스스로 영적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게 교육하라는 재촉은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생명체에게 진정한 행복을 결코 줄 수 없는 일시적 구제 사업에만 관심을 가지라고 배울 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공공사업과 정부 관련 기관을 열어 자연의 파괴력에 맞서려고 하지만 이겨낼 수 없는 자연을 달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바가바드 기따의 위대한 학자라 광고하지만 물질적 본성을 평정할 수 있는 기따의 메시지를 못 보고 지나친다. 바가바드 기따(7.14)가 명백히 지적하듯이, 오직 신(神) 의식을 일깨움으로써만 강력한 자연을 평정할 수 있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는 삼부띠(sambhūti: 최고인격신)와 비나샤(vināśa:일시적 물질의 발현) 둘 다 완벽히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연의 흐름 속에는 매 순간 황폐가 발생하므로 물질적 발현을 아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아하니 아하니 부따니 갓찬띠하 야마-라얌: ahany ahani bhūtāni gacchantīha yamā-layam). 병원을 연다고 해서 이 황폐에서 구제되지도 않는다. 행복과 깨달음으로 가득한 영원한 삶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얻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 모든 베다의 취지는 이 영원한 삶을 얻게 하는 방법을 교육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종종 감각 만족에 기반을 둔 일시적으로 매력적인 것들에 이끌리지만 감각 대상에 하는 봉사는 오도적이며 타락적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 자신과 친구를 올바른 방식으로 구제해야 한다. 진실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진실이다. 반복된 생과 사에서 구제받고 싶다면 주를 향한 봉헌을 반드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필수이므로 타협은 없다. 
히란마예나 빠뜨레나 hiraṇmayena pātreṇa
사땨샤삐히땀 무캄 satyasyāpihitaṁ mukham
땃 뜨밤 뿌샨 아빠브리누 tat tvaṁ pūṣann apāvṛṇu
사땨-다르마야 드리쉬따예 satya-dharmāya dṛṣṭaye

Synonyms

Translation

오, 주여! 살아있는 모든 것의 유지자, 당신의 진정한 얼굴은 찬란한 빛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부디 그 가리개를 걷어내시어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에게 당신을 드러내 주소서.

Purport

바가바드 기따(14.27)에서 주께서는 당신의 형상에서 발하는 찬란한 빛(브라흐마죠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브라흐마노 히 쁘라띠쉬타함 brahmaṇo hi pratiṣṭhāham
암리따시아뱌야샤 짜 amṛtasyāvyayasya ca
샤스바따샤 짜 다르마샤 śāśvatasya ca dharmasya
수카샤이깐띠까샤 짜 sukhasyaikāntikasya ca
“내가 불후, 불사하는 영원하고 본원적인 최고 행복의 근원, 비인성적 브라흐만의 토대이다.” 브라흐만, 빠람아뜨마, 그리고 바가반은 똑같은 절대 진리의 세 가지 다른 측면이다. 브라흐만은 초심자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고 빠람아뜨마, 즉 초영혼은 영적으로 좀 더 앞선 자들이 깨달으며 바가반 깨달음은 절대 진리의 최종적 깨달음이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7.7)에서 주 끄리쉬나께서 당신이 절대 진리의 궁극적 개념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확인된다. 맛따하 빠라따람 난얏(mattaḥ parataraṁ nānyat). 그러므로 끄리쉬나가 모든 곳에 존재하는 빠람아뜨마일 뿐만 아니라 브라흐마-죠띠의 근원이다. 나중에 바가바드 기따(10.42)에서 이에 관해 더욱 설명하신다.
아타 바 바후나이떼나 atha vā bahunaitena
낌 갸떼나 따바르주나 kiṁ jñātena tavārjuna
비쉬따비아함 이담 끄릿스남 viṣṭabhyāham idaṁ kṛtsnam
에깜세나 스티또 자갓 ekāṁśena sthito jagat
“아르주나여, 그러나 이 모든 구체적인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내 작은 단편이 모든 곳에 스며들어 이 전 우주를 지탱한다.” 따라서 당신의 전체적 확장인 모든 곳에 존재하는 빠람아뜨마 측면이 완전한 물질 우주의 창조를 유지한다. 당신은 또한 영계에 발현된 모든 것을 유지하신다. 그러므로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스루띠 만뜨라에서 당신을 뿌샤나(pūṣan), 즉 궁극적 유지자로 지칭하고 있다.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는 항상 초월적 행복으로 가득하다(아난다-마요 ‘비아삿: ānanda-mayo 'bhyāsāt). 오천 년 전 인도의 브린다반에 계셨을 때도 당신은 어린 시절 유희를 시작으로 항상 초월적 행복으로 가득 차 계셨다. 아가, 바까, 뿌따나 그리고 쁘랄람바 같은 다양한 악마를 죽인 것은 즐거운 소풍 같았다. 당신의 마을 브린다반에서 어머니와 형, 그리고 친구들과 즐겁게 지냈으며 당신이 짓궂은 버터 도둑처럼 굴었을 때도 모든 동무들은 천상의 행복을 즐겼다. 주는 버터를 훔침으로써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셨기에 당신을 버터 도둑이라고 나무랄 수 없다. 주께서 브린다반에서 하신 모든 행위는 그곳의 당신 동반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주는 절대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메마른 철학자들과 소위 하타-요가(haṭha-yoga) 곡예사들을 사로잡기 위해 이와 같은 유희를 벌이셨다.
슈까데바 고스와미(Śukadeva Gosvāmī)가 스리마드 바가바땀(10.12.11)에서 주와 당신의 목동 친구들 사이에 벌어진 어린 시절 유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잇탐 사땀 브라흐마-수카누부땨 itthaṁ satāṁ brahma-sukhānubhūtyā
다샴 가따남 빠라-다이바떼나 dāsyaṁ gatānāṁ para-daivatena
마야스릿따남 나라-다라께나 māyāśritānāṁ nara-dārakeṇa
사깜 비자흐루 끄리따-뿐야-뿐자하 sākaṁ vijahruḥ kṛta-puṇya-puñjāḥ
“최고인격신은 갸니들에게는 비인성적이며 행복에 가득 찬 브라흐만으로 인식되고, 종의 감정을 가지는 헌애자들에게는 절대신으로 숭배되며, 세속적 인간들에게는 여러 생에 걸쳐 경건한 행위의 덕을 쌓은 후에야 비로소 그 위치를 얻게 된 목동들과 그저 함께 노는 평범한 인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당신의 영적 동반자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시어 항상 초월적이며 애정 어린 행위를 하시며 이러한 관계는 샨따(śānta, 중립적 관계), 다샤(dāsya, 종의 관계), 사캬(sakhya, 우정), 밧살랴(vātsalya, 부모애), 그리고 마두랴(mādhurya, 부부애)이다.
주 끄리쉬나는 브린다반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창조에 관여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가바드 기따(13.14~18)에 나와 있다. 주는 빠람아뜨마, 즉 당신의 전체적 부분인 초영혼으로서 전 물질적 창조 안에 존재하신다. 비록 당신이 물질적 창조와 유지, 파괴에 직접 아무 관여를 하지 않으시지만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전체적 확장인 빠람아뜨마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신다. 모든 생명체는 아뜨마(ātmā), 즉 영혼이고 이들 모두를 통제하는 주된 아뜨마가 빠람아뜨마, 즉 초영혼이다.
신(神)에 관한 이러한 깨달음의 체계는 위대한 과학이다. 물질주의적 상캬-요기(sāṅkhya-yogī)들은 뿌루샤(puruṣa), 즉 주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물질적 창조의 24요소에 관해 분석, 명상할 뿐이다. 그리고 비인성적 초월주의자들은 단지 브라흐마-죠띠의 광채(光彩)에 사로잡혀 혼란에 빠진다. 절대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24개의 물질적 요소와 브라흐마-죠띠의 광채를 넘어서야 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주의 히란마야-빠뜨라(hiraṇmaya-pātra), 즉 눈부신 가리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할 것을 지적한다. 이 가리개가 제거되지 않는 한 최고인격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고 절대 진리의 실제적 깨달음 또한 결코 이룰 수 없다.
최고인격신의 빠람아뜨마 측면은 비쉬누-땃뜨바(viṣṇu-tattvas), 즉 세 가지 완전한 확장자 중 하나로, 일괄하여 뿌루샤-아바따라(puruṣa-avatāras)라고 한다. 이 비쉬누-땃뜨바 중에서 우주 안에 계시는 존재를 끄쉬로다까샤이 비쉬누(Kṣīrodakaśāyī Viṣṇu)라고 한다. 그가 바로 세 주요 신 브라흐마(Brahmā), 비쉬누(Viṣṇu), 그리고 시바(Śiva) 중 하나인 비쉬누이며 모든 개별 생명체 안에 두루 존재하는 빠람아뜨마이다. 우주 안에 있는 두 번째 비쉬누-땃뜨바는 가르보다까샤이 비쉬누(Kāraṇodakaśāyī Viṣṇu)로, 모든 생명체의 총체적 초영혼이다. 이 두 비쉬누를 넘어서 원인의 바다에 누워 계시는 분이 까라노다까샤이 비쉬누(Kāraṇodakaśāyī Viṣṇu)이다. 요가 체계는 진지한 학생들에게 우주 창조의 스물넷 물질 요소를 넘어선 다음 비쉬누-땃뜨바를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경험적 철학 풍토는 주 스리 끄리쉬나의 초월적 몸에서 빛나는 광채, 비인성적 브라흐마-죠띠를 깨닫는 데 도움을 준다. 그 브라흐마-죠띠가 끄리쉬나의 광채라는 사실은 바가바드 기따(14.27) 뿐만 아니라 브라흐마 삼히따(5.40)에서도 확인된다.
야샤 쁘라바-쁘라바바또 자갇-안다-꼬띠-
yasya prabhā-prabhavato jagad-aṇḍa-koṭi-
꼬띠쉬 바쉐샤-바수다디 비부띠-빈남
koṭiṣv aśeṣa-vasudhādi vibhūti-bhinnam
딷 브라흐마 니쉬깔람 아난땀 아쉐샤-부땀
tad brahma niṣkalam anantam aśeṣa-bhūtaṁ
고빈담 아디-뿌루샴 땀 아함 바자미
govindam ādi-puruṣaṁ tam ahaṁ bhajāmi
“수백 수천만 개의 우주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성이 존재하고, 각각의 행성은 우주의 구조에 따라 서로 다르다. 이 모든 행성은 브라흐마-죠띠의 한구석에 위치한다. 브라흐마-죠띠는 내가 숭배하는 최고인격신 고빈다(Govinda)의 몸에서 발하는 빛이다.” 브라흐마 삼히따의 이 만뜨라는 절대 진리의 실제적 깨달음의 단계에서 말한 것이며 우리가 논하고 있는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스루띠 만뜨라는 이 만뜨라를 깨달음의 한 과정으로 입증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는 주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브라흐마-죠띠를 제거해 달라고 기원하는 단순한 기도이다. 이 브라흐마-죠띠 광채는 문다까 우빠니샤드(2.2.10~12)의 몇몇 만뜨라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히란마예 빠레 꼬세 hiraṇmaye pare kośe
비라잠 브라흐마 니쉬깔람 virajaṁ brahma niṣkalam
땃 추브람 죠띠쉬샴 죠띠스 tac chubhraṁ jyotiṣāṁ jyotis
딷 얃 아뜨마-비됴 비두후 tad yad ātma-vido viduḥ
나 따뜨라 수료 바띠 나 짠드라-따라깜 na tatra sūryo bhāti na candra-tārakaṁ
네마 비듀또 반띠 꾸또 ‘얌 아그니히 nemā vidyuto bhānti kuto 'yam agniḥ
땀 에바 반땀 아누 바띠 사르밤 tam eva bhāntam anu bhāti sarvaṁ
따샤 바사 사르밤 이담 비바띠 tasya bhāsā sarvam idaṁ vibhāti
브라흐마이베담 암리땀 뿌라스딷 브라흐마 brahmaivedam amṛtaṁ purastād brahma
빠스짣 브라흐마 닥쉬나따스 쫏따레나 paścād brahma dakṣiṇataś cottareṇa
아다스 쪼르드밤 짜 쁘라스리땀 브라흐마이- adhaś cordhvaṁ ca prasṛtaṁ brahmai-
베담 비스밤 이담 바리쉬탐 vedaṁ viśvam idaṁ variṣṭham
“물질적 가리개를 넘어서는 영계는 물질적 오염에서 벗어난 무한한 브라흐만 광채이다. 초월주의자들은 그 찬란한 흰빛이 모든 빛 중의 빛이라고 이해한다. 그 영역에서는 빛을 밝히기 위해 햇빛, 달빛, 불 또는 전기가 필요 없다. 실제로, 물질계에 나타나는 어떤 눈부심도 그 최고 조명의 반영일 뿐이다. 그 브라흐만이 앞과 뒤, 위와 아래, 그리고 동서남북에 존재한다. 다른 말로, 그 최고의 브라흐만 광채는 물질계와 영계를 통틀어 두루 존재한다.”     
완전한 지식이란 끄리쉬나를 이 브라흐만 광채의 근원으로 이해함을 의미한다. 이 지식은 끄리쉬나의 과학을 완벽히 설명하는 스리마드 바가바땀과 같은 문헌에서 얻을 수 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서 저자, 스릴라 비아사데바는 깨달은 정도에 따라 최고의 진리를 브라흐만, 빠람아뜨마 또는 바가반으로 묘사할 것이라고 확증했다. 스릴라 비아사데바는 최고 진리가 지바(jīva), 즉 평범한 생명체라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평범한 생명체를 전지전능한 최고의 진리로 절대 간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생명체가 절대자라면 주께 당신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찬란한 가리개를 제거해 주십사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론은 최고 진리의 능력에 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자는 비인성적 브라흐만을 깨달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의 물질적 능력만을 깨닫고 당신의 영적 능력에는 무지한 자는 빠람아뜨마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 진리의 브라흐만과 빠람아뜨마 깨달음은 부분적 깨달음이다. 그러나 주의 눈부신 가리개 히란마야-빠뜨라를 제거한 다음,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의 완전한 능력을 깨닫게 되면 ‘바아수데바 사르밤 이띠(vāsudevaḥ sarvam iti, 바가바드 기따 7.19), 즉 ‘끄리쉬나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아수데바로 알려진 스리 끄리쉬나가 브라흐만, 빠람아뜨마 그리고 바가반, 이 모든 것이다. 그가 바로 바가반, 근원이며 브라흐만과 빠람아뜨마는 그의 부분이다.
바가바드 기따(6.46~47)에 세 유형의 초월주의자에 관한 비교 분석이 있다. 비인성적 브라흐만의 숭배자(갸니, jñānīs), 빠람아뜨마 측면의 숭배자(요기, yogīs) 그리고 주 스리 끄리쉬나의 헌애자(박따, bhakta)가 그것이다. 베다 지식을 배양하는 갸니가 결실을 낳는 일을 하는 보통 사람보다 낫고, 그러한 갸니보다는 요기가 더 위대하며 모든 요기 중에서 온 힘을 다해 주를 쉼 없이 섬기는 자가 가장 위대하다고 바가바드 기따는 명시한다. 결론적으로, 노동자보다는 철학자가 낫고, 신비주의자가 철학자보다 뛰어나며 모든 신비주의적 요기 중에서 쉼 없이 주를 위한 봉사에 종사하는 박띠 요가의 길을 따르는 자가 가장 높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이 완성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뿌산 네까르쉐 야마 수랴 쁘라자빠땨 pūṣann ekarṣe yama sūrya prājāpatya
비우하 라스민 사무하 vyūha raśmīn samūha
떼조 얏 떼 루빰 깔야나-따맘 tejo yat te rūpaṁ kalyāṇa-tamaṁ
땃 떼 빠샤미 요 ‘사 바사우 뿌루샤 소 ‘함 아스미
tat te paśyāmi yo 'sāv asau puruṣaḥ so 'ham asmi

Synonyms

Translation

오 주님, 오 원초적 철학자이시며 우주의 유지자이시여, 오 규제하는 원칙이시며 순수한 헌애자의 목적지, 그리고 인류의 조상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이시여, 부디 당신의 초월적 광채를 거두시어 행복으로 가득 찬 당신의 형상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당신은 저에게 태양과 같은 영원한 최고인격신이십니다.

Purport

태양과 그 빛은 하나이며 질적으로 같다. 마찬가지로 주와 생명체는 하나이고 질적으로 같다. 태양은 하나이지만 태양광선의 분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태양광선은 태양의 부분이며 태양과 태양광선이 결합하여 완전한 태양을 구성한다. 태양 안에 태양신이 사는 것처럼 브라흐마-죠띠 광채가 퍼져나오는 최상의 영적 행성, 골로까 브린다반 안에서 주는 당신의 영원한 유희를 즐기시고, 이것은 브라흐마 삼히따(5.29)에서 입증된다.
찐따마니-쁘라까라-사드마수 깔빠-브릭샤-
cintāmaṇi-prakara-sadmasu kalpa-vṛkṣa-
락샤브리떼슈 수라비르 아비빨라얀땀
lakṣāvṛteṣu surabhīr abhipālayantam
락쉬미-사하스라-샤따-삼브라마-세뱌마남
lakṣmī-sahasra-śata-sambhrama-sevyamānaṁ
고빈담 아디-뿌루샴 땀 아함 바자미
govindam ādi-puruṣaṁ tam ahaṁ bhajāmi
“수백만 그루의 소원성취수가 우거지고 영적 보석들로 가득한 곳에서 모든 소망을 들어주시며 소들을 돌보시는 태고의 주님이시며 인류 최초의 선조이신 고빈다를 저는 숭배합니다. 당신은 수백 수천 명의 행운의 여신 락쉬미(Lakṣmī)로부터 항상 커다란 존경과 사랑이 가득한 섬김을 받습니다.”
브라흐마-죠띠는 최고의 영적 행성 골로까 브린다반에서 퍼져나오는 빛으로 태양에서 햇빛이 발산하는 것과 같다고 브라흐마 삼히따는 설명한다. 브라흐마-죠띠의 광채를 넘어서지 않는 한, 주의 영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눈부신 브라흐마-죠띠에 의해 눈이 먼 비인성적 철학자들은 주의 실제적 거주지는 물론이고 당신의 초월적 형상도 깨달을 수 없다. 협소한 지식을 가진 비인성적 사색가들은 행복으로 가득한 주 끄리쉬나의 초월적 형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도에서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주께 브라흐마-죠띠의 광채를 거두시어 순수한 헌애자가 행복으로 가득한 당신의 초월적 형상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비인성적 브라흐마-죠띠를 깨달음로써 절대 진리의 상서로운 측면을 경험하고, 두루 퍼져있는 절대자의 빠람아뜨마를 깨달음으로써 더욱 상서로운 깨달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최고인격신을 직접 만남으로써 헌애자는 절대자의 가장 상서로운 측면을 경험한다. 주가 원초적 철학자, 유지자 그리고 전 우주의 후원자로 지칭되었으므로 절대 진리가 결코 비인성일 수 없다. 이것이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결론이다. 주가 모든 존재를 유지하지만 특별히 당신의 헌애자들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뿌샨(pūṣan, 유지자)이라는 말은 특히 큰 의미를 지닌다. 비인성적 브라흐마-죠띠를 초월하고 주의 인성적 측면과 당신의 가장 상서롭고 영원한 형상을 본 후 헌애자는 절대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된다.
바가밧-산다르바(Bhagavat-sandarbha)에서 스릴라 지바 고스와미(Śrīla Jīva Gosvāmī)는 이렇게 말한다. “최고인격신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초월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절대 진리에 관한 완전한 개념은 최고인격신을 깨달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절대 진리의 완전한 능력은 브라흐마-죠띠 단계에서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브라흐만 깨달음은 최고인격신의 부분적 깨달음에 불과하다. 오 학식 있는 현인들이여, 바가반(bhagavān)이라는 말의 첫째 음절 바(bha)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완전히 유지하는 자’ 그리고 둘째는 ‘안내자’이다. 두 번째 음절 가(ga)는 ‘안내자’, ‘지도자’ 또는 ‘창조자’를 의미한다. 세 번째 음절 반(vān)은 모든 생명체가 주 안에 살고 주 역시 모든 생명체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초월적 소리 바가반은 무한한 지식, 능력, 에너지, 풍요로움, 힘 그리고 영향력을 대표하며 이 모든 것은 티끌만큼의 물질적 성향도 없다.”
주는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를 완전히 유지하시며 그들이 점진적으로 완벽한 봉헌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 헌애자들의 지도자로서 주는 궁극적으로 당신 자신을 헌애자들에게 주심으로써 봉헌을 하며 바랐던 결과를 이루게 하신다. 주의 헌애자들은 당신의 원인 없는 자비 덕분에 직접 주를 보게 되고, 그렇게 주는 그들을 최고의 영적 행성, 골로까 브린다반에 이르도록 도우신다. 조물주(造物主)이신 당신은 당신의 헌애자에게 모든 필요한 자격을 부여하심으로써 그들이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이르게 하신다. 주는 모든 원인의 원인이시다. 다른 말로, 당신을 초래하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당신이 바로 원초적 원인이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의 내적 능력을 발현하시어 당신 자신을 즐기신다. 외적 능력은 당신이 직접 드러내지 않으시며 당신을 뿌루샤(puruṣa)들로 확장하여 바로 이러한 형상으로 물질 발현의 특징과 기능을 유지하신다. 그러한 확장자들을 통해 주께서는 모든 우주의 발현을 창조, 유지 그리고 소멸케 하신다.
생명체 역시 주 당신에게서 분화된 확장이며 그들 중 일부는 절대신을 흉내 내 주인이 되려고 하여 당신이 그들로 하여금 우주적 창조에 들어가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성향을 스스로 선택하고 완전히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당신의 부분인 생명체의 존재 때문에 전 현상계는 행위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뒤섞인다. 따라서 생명체는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기 위한 완벽한 편의을 제공받지만 궁극적 지배자는 당신의 뿌루샤 중 하나인 빠람아뜨마, 즉 초영혼의 형상으로 완전하게 존재하시는 주이다.
그러므로 생명체(아뜨마)와 그를 통제하는 주(主, 빠람아뜨마), 즉 영혼(soul)과 초영혼(Supersoul)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빠람아뜨마는 통제자이고 아뜨마는 통제받는 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다른 범주에 있다. 빠람아뜨마는 아뜨마에게 완전히 협력하시므로 당신은 생명체의 영원한 동반자로 알려졌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주의 특징은 잠자거나 깨는 것과 같은 모든 상황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해방된 영혼과 속박된 영혼으로 발현되는 지바-샥띠(the jīva-śakti: 생명력) 안에도 존재하며 이것이 브라흐만이다. 주가 브라흐만과 빠람아뜨마의 기원이므로 당신이 바로 모든 생명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즉시 주의 봉헌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한 순수하고 완전히 깨달은 주의 헌애자는 진심을 다해 주에게 애착을 갖고, 그러한 헌애자가 자기와 비슷한 헌애자를 만나게 되면 언제든 오직 주의 초월적 활약들에 대한 찬양 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는다. 순수한 헌애자만큼 완벽하지 못한 자들, 이름하여 주의 브라흐만이나 빠람아뜨마 측면만을 깨달은 자들은 순수한 헌애자들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주는 순수한 헌애자의 가슴에 필요한 지식을 전함으로써 항상 그들을 돕고, 따라서 당신의 특별한 호의로 모든 무지의 어둠을 사라지게 한다. 사색적 철학자들이나 요기들은 그들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므로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까타 우빠니샤드(Kaṭha Upaniṣad 1.2.23)에 언급된 바와 같이, 주는 당신의 호의를 받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지, 그 외 누구도 당신을 알 수 없다. 그런 주의 특별한 호의는 오직 주의 순수한 헌애자에게만 내려진다. 그러므로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브라흐마-죠띠의 범위를 초월한 주의 호의를 강조한다.
 바유르 아닐람 암리땀 vāyur anilam amṛtam
아테담 바스만땀 샤리람 athedaṁ bhasmāntaṁ śarīram
옴 끄라또 스마라 끄리땀 스마라 oṁ krato smara kṛtaṁ smara
끄라또 스마라 끄리땀 스마라 krato smara kṛtaṁ smara

Synonyms

Translation

이 일시적인 몸이 타 재가 되게 하시고 생기(生氣)가 우주적 기(氣)와 합쳐지게 하소서. 오 주여, 당신이 궁극적 수혜자이시니 부디 제가 올린 제식과 당신을 위해 한 모든 것을 기억해주소서.

Purport

일시적인 몸은 분명 이질적인 옷이다. 바가바드 기따(2.20)는 이 몸이 소멸한 후에 생명체가 같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정체성을 잃는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생명체의 정체는 결코 비인성적이거나 형상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불멸하는 인간의 형태에 따라 다른 모양을 띠는 옷이야말로 형태가 없다. 원래 생명체에겐 반드시 형상이 있지만 지식이 없는 자들이 어리석게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만뜨라는 물질로 된 이 몸이 소멸하고 나서도 생명체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물질계에서 물질적 본성(자연)은 다양한 생명체가 가진 다양한 감각 만족의 성향에 따라 그에 맞는 몸을 창조해 내는 기량을 보여준다. 똥을 좋아하는 생명체는 똥을 먹는 데 적합한 몸, 즉 돼지의 몸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의 살과 피를 좋아하는 자는 그러기에 적합한 이빨과 발톱을 가진 호랑이의 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고기를 먹게끔 되어 있지 않고 또한 아무리 원시적 상태에 있더라도 똥을 먹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비록 두 개의 송곳니가 있어 원시적인 인간들이 원한다면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인간의 치아는 과일과 채소를 잘라 먹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모든 동물과 인간의 물질적 몸은 생명체에 이질적인 것이다. 육신은 특정한 감각 만족을 하고 싶어하는 생명체의 욕망에 따라 바뀐다. 진화의 순환을 통해 생명체는 끊임없이 몸을 바꾼다. 세상이 물로 가득 찼을 때 생명체는 수생에 적합한 몸을 받았다. 그런 다음 식물 형태의 생명, 그 후 식물에서 벌레,  벌레에서 새, 그다음 새에서 동물, 그리고서 동물에서 인간의 형태로 진화한다. 완전한 영적 지식의 감각을 가질 때 인간은 가장 발전한 형태의 몸을 가지게 된다. 가장 발전한 인간의 영적 감각이 이 만뜨라에 묘사된다. 인간은 재로 변할 이 물질적 몸을 버리고 생명의 기(氣)를 그것이 발원한 영원한 기(氣) 저장소에 합쳐지게 해야 한다. 생명체의 행위는 요약하면 쁘라나-바유(prāṇa-vāyu)라고 하는 여러 종류의 기의 움직임을 통해 신체 내에서 이루어진다. 요기들은 일반적으로 신체의 기를 통제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영혼은 가장 높은 순환인 브라흐마-란드라(brahma-randhra) 단계에 이를 때까지 한 단계의 기 움직임에서 다른 단계로 점차 상승하게 되어있다. 그러한 최고 단계에 도달한 요기는 자기가 희망하는 어떤 행성에도 갈 수 있다. 그 과정은 이 물질적 몸을 버리고 다른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최상의 변화는 이 만뜨라가 제시하듯이 생명체가 물질적 몸을 완전히 버릴 때만 이루어지며 이런 육신과는 확연히 다른 몸, 즉 두 번 다시 죽음이나 또 다른 변화를 맞지 않을 영적 몸을 얻어 영적 대기 안에 들어갈 때만 가능하다.
이곳 물질계에서는 물질적 본성이 생명체로 하여금 감각 만족을 향한 다양한 욕망에 맞게 몸을 바꾸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욕망은 세균에서부터 가장 완벽한 물질적 몸을 가진 브라흐마와 데바들의 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으로 나타난다. 모든 생명체는 각기 다른 형태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다. 지혜로운 자는 육신의 다양성에서가 아니라 영적 정체성에서 동일성을 본다. 절대신의 일부인 영적 불꽃은 돼지의 몸에 있든 데바의 몸에 있든 똑같다. 생명체는 선행과 악행에 따라 각기 다른 몸을 받는다. 인간의 몸은 아주 진화된 몸이며 완전한 의식이 있다. 바가바드 기따(7.19)에 따르면, 여러 생을 거쳐 지식을 배양한 후 가장 완벽한 인간이 주께 항복한다고 한다. 지식의 배양은 절대신, 바수데바(Vāsudeva)에 항복하는 단계에 올 때 완성에 이른다. 영적 정체성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에도 생명체가 전체의 영원한 부분이며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또다시 물질계로 떨어지게 된다. 실제로 브라흐마-죠띠와 하나가 된 다음에도 반드시 떨어지게 된다.
이전 만뜨라에서 배웠듯이 주의 초월적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라흐마-죠띠는 존재의 완전한 감각을 지닌 개별 생명체로 이루어진 영적 불꽃으로 가득하다. 때때로 이러한 생명체가 자신의 감각을 즐기려고 해서 감각의 명령에 따라 거짓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도록 물질계 안에 놓인다. 감각 만족이라는 마법에 홀려 생명체는 이 물질계에 발현된 여러 가지 몸을 통해 끊임없이 윤회하므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생명체가 지닌 물질적 질병이다. 브라흐마-죠띠와 하나가 됨은 성숙한 지식을 대변하지 않는다. 오직 주께 완전히 항복하고 영적 봉사의 감각을 발전시킬 때만 가장 높고 완성된 단계에 도달한다.
이 만뜨라에서 생명체는 물질적 몸과 물질적 기를 버린 다음 절대신의 영적 왕국으로 들어가려고 기도한다. 헌애자는 자신의 몸이 재로 변하기 전에 자기가 한 행위와 제식을 주께서 기억해주시기를 기도한다. 헌애자는 죽을 때 자신의 과거 행위와 삶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이 기도를 한다. 물질계의 지배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 자는 사는 동안 한 여러 악행을 기억하고 그 결과 사후에 또 다른 물질적 몸을 받는다. 바가바드 기따(8.6)가 이 진리를 확증한다.
얌 얌 바삐 스마란 바밤 yaṁ yaṁ vāpi smaran bhāvaṁ
땨자띠 안떼 깔레바람 tyajaty ante kalevaram
땀 땀 에바이띠 까운떼야 taṁ tam evaiti kaunteya
사다 딷-바바-바비따하 sadā tad-bhāva-bhāvitaḥ
“오 꾼띠의 아들이여! 몸을 떠날 때 무엇을 기억하든, 바로 그것을 틀림없이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생명체의 성향을 다음 생(生)으로 가져가게 한다
발전한 마음이 없는 단순한 동물들과는 달리 죽을 때 인간은 밤에 꾸는 꿈처럼 자기 인생에 한 여러 행위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물질적 욕망으로 가득해서 영적 몸을 얻어 영계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헌애자들은 주를 향한 헌신적 봉사로 절대신을 사랑하는 감각을 발전시킨다. 죽음의 순간 헌애자가 주께 한 봉사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주는 그를 잊지 않는다. 이 기도는 헌애자의 희생을 주께서 기억하도록 상기시키지만 그런 기도가 없더라도 주는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가 한 봉사를 잊지 않으신다.
바가바드 기따(9.30~34)는 주와 당신의 헌애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명백히 설명한다. “가장 혐오할만한 잘못을 저지른 인간이라도 그가 봉헌에 종사하면 올바른 결심을 세운 것이므로 성인 같다고 여겨져야 한다. 그런 자는 금방 정의로워지고 영속적인 평화를 얻게 된다.  오 꾼띠의 아들이여! 내 헌애자는 절대 파멸하지 않는다고 과감히 선언하라. 오 쁘리따의 아들이여! 나에게 은신하는 자는 여자, 바이샤(상인들), 수드라(노동자들) 같은 낮은 태생이라도 최고의 목적지를 얻을 수 있다. 이들이 이러한데 정의로운 브라흐마나, 헌애자 그리고 성스러운 왕들은 어떨 것 같은가? 그러므로 일시적이고 괴로운 이 세상에 온 이상, 나를 향한 사랑의 봉사에 종사하라. 네 마음을 항상 나를 생각하는 데 둘 것이며, 내 헌애자가 되어 내게 경배하고 나를 숭배하라. 나에게 완전히 몰입하면 반드시 나에게 올 것이다.”
스릴라 박띠비노다 타꾸라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 끄리쉬나의 헌애자를 성인들이 가는 옳은 길에 있는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비록 그런 헌애자가 ‘엉성한 사람(수-드라짜라: su-durācāra)’처럼 보일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엉성한 사람’이라는 말의 진정한 취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속박된 영혼은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 이름하여 육신의 유지와 다시 한 번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 정신 개발, 청결, 고행, 영양 공급, 그리고 생존을 위한 분투는 모두 신체 유지를 위한 것이다. 자아 인식을 위한 행위는 주의 헌애자로서의 임무이고 이와 관련된 일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속박된 영혼은 신체 유지를 포기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역할을 나란히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신체의 유지를 위한 행위의 비율은 봉헌이 증가함에 따라 낮아지게 된다. 봉헌이 올바른 비율을 차지하지 않으면 간혹 세속적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그런 세속성은 오래가지 않는데, 그런 결점은 주의 은총으로 금방 끝을 맺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봉헌의 길만이 오직 바른길이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면 간혹 세속적 행위를 할지라도 자아 인식을 위한 진보에 방해받지 않는다.”
비인성주의자들은 주의 브라흐마-죠띠 측면에 집착하기 때문에 봉헌을 거부한다. 이전 만뜨라가 제시했듯이 그들은 최고인격신을 믿지 않으므로 브라흐마-죠띠를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은 대개 말장난이나 관념적 사색만을 할 뿐이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따(12.5)가 확증하는 바와 같이 비인성주의자들은 헛된 노력을 추구한다.
이 만뜨라에 제시된 모든 내용은 절대 진리의 인성적 측면과 계속해서 접촉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를 향한 봉헌은 가장 중요한 9가지 초월적 행위로 구성된다. (1) 주에 관해 듣기 (2) 주를 찬양하기 (3) 주를 기억하기 (4) 주의 연꽃과 같은 발을 섬기기 (5) 주를 숭배하기 (6) 주께 기도하기 (7) 주께 봉사하기 (8) 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기쁨을 느끼기 (9) 주께 모든 것을 바치기. 이 9가지 주요 봉헌의 원칙은 하나씩 수행하든, 전부 다 수행하든 헌애자를 절대신과 계속해서 함께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하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를 기억하는 것이 헌애자에게는 쉬운 일이다. 이 9가지 원칙 중에서 오직 한 가지만으로도 다음에 나오는 유명한 주의 헌애자들이 최고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 (1) 주에 관해 들음으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땀의 영웅, 빠릭싯 왕(Mahārāja Parīkṣit)은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 오직 주를 찬양함으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땀의 화자, 슈까데바 고스와미(Śukadeva Gosvāmī)는 완성을 달성했다. (3) 주께 기도를 함으로써 아끄루라(Akrūra)는 바라는 결과를 얻었다. (4) 주를 기억함으로써 쁘라흘라다 마하라자(Prahlāda Mahārāja)는 바라는 결과를 얻었다. (5) 주를 숭배함으로써 쁘리투 마하라자(Pṛthu Mahārāja)는 완성을 얻었다. (6) 주의 연꽃과 같은 발을 섬김으로써 행운의 여신, 락쉬미는 완성에 도달했다. (7) 주에게 친밀한 봉사를 함으로써 하누만(Hanumān)은 바라는 결과를 얻었다. (8) 주와의 우정을 통해서 아르주나는 바라는 결과를 얻었다. (9) 가진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발리 마하라자(Mahārāja Bali)는 바라는 결과를 얻었다.
실제로 이 만뜨라와 함께 모든 베다 찬가에 나온 진언의 설명은 베단따 수뜨라에 요약되어 있고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베다라는 지혜의 나무에 열린 숙성한 열매이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빠릭싯 왕과 슈까데바 고스와미가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의 첫대목에 바로 이 만뜨라가 설명된다. 절대신의 과학을 듣고 구송하는 것이 헌애하는 삶의 기본 원칙이다. 스리마드 바가바땀 전체를 슈까데바 고스와미가 말하고, 빠릭싯왕이 청취했다. 빠릭싯왕이 슈까데바 고스와미에게 질문을 한 이유는 그가 그 당시 어떤 위대한 요기나 초월주의자보다 뛰어난 영적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빠릭싯왕이 한 주된 질문은 “모든 인간, 특히 죽음이 임박한 인간의 의무는 무엇입니까?”였고 슈까데바 고스와미가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따스마드 바라따 사르바뜨마 tasmād bhārata sarvātmā
바가반 이스바로 하리히 bhagavān īśvaro hariḥ
스로따뱌 끼르띠따뱌스 짜 śrotavyaḥ kīrtitavyaś ca
스마르따뱌스 쩻차따바얌 smartavyaś cecchatābhayam
“모든 걱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항상 최고인격신에 관해 듣고, 찬양하고,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모든 것의 최고 지휘자이시고, 모든 고난의 제거자이시며 모든 생명체의 초영혼이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 2.1.5》
소위 인간 사회라고 하는 것이 대개 밤에는 잠과 성생활에 몰두하고, 낮에는 가능한 많은 돈을 벌려고 애쓰고 가정 유지를 위해 소비생활하기에 바쁘다. 사람들은 절대신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질문할 시간이 거의 없다. 주로 절대신이 감각이 없는 비인성적 존재라고 주장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절대신의 존재를 무시한다. 그러나 우빠니샤드, 베단따 수뜨라, 바가바드 기따 또는 스리마드 바가바땀 같은 베다 문헌에는 주는 지각이 있는 존재로 모든 생명체에 우선하는 최고의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다. 당신의 영광스러운 행위는 당신 자신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속적 정치인들이나 소위 사회의 거물급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쓰레기 같은 행위에 관해 듣고 이야기하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절대신을 숭상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삶을 형성해야 한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우리에게 절대신을 숭상하는 행위를 하게끔 지도한다.
봉헌에 익숙하지 않으면 육신이 떠나는 죽음의 순간에 과연 전능한 주께 자신이 한 희생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희생한다는 것은 감각이 원하는 이해관계를 부정함을 의미한다. 모든 감각을 평생 주를 향한 봉사에 종사하게 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죽음의 순간에 그런 실천의 결과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그네 나야 수빠타 라예 아스만 agne naya supathā rāye asmān
비스바니 데바 바유나니 비드반 viśvāni deva vayunāni vidvān
유요디 아스마 주후라남 에노 yuyodhy asmaj juhurāṇam eno
부이이쉬탐 떼 나마-욱띰 비데마 bhūyiṣṭhāṁ te nama-uktiṁ vidhema

Synonyms

Translation

오 불처럼 강력한 주여! 전지전능한 분이시여, 당신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경의를 바칩니다. 오 주여, 부디 저를 당신께 이르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당신은 제 과거의 모든 행적을 기억하시니 과거의 죄악으로 인한 과보에서 저를 벗어나게 하시어 영적 길을 나아가는 데 장애가 없도록 도와주소서.

Purport

주께 항복하고 당신의 원인 없는 자비를 구함으로써 헌애자는 완전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주는 항복한 영혼의 죄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태워 재가 되게 하실 수 있기에 여기에서 당신을 불로 지칭한다. 이전 만뜨라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절대자의 참된 궁극적 측면은 최고인격신으로서이고, 비인성적 브라흐마-죠띠 측면은 당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눈부신 빛이다. 결실을 낳는 행위, 즉 ‘까르마-깐다(karma-kāṇḍa)’ 방식의 자아 인식 과정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가장 낮은 단계의 노력이다. 그런 행위가 베다가 규정하는 원칙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금방 비까르마(vikarma), 즉 행위자의 이해에 반대되는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비까르마는 환영에 빠진 인간이 오직 감각 만족을 추구할 때 생기며 그러한 행위는 자아 인식의 길에 장애가 된다.
자아 인식은 인간 형태의 삶에서만 가능하다. 8,400,000종의 삶이 있고 인간 형태에서만 브라흐마나다운 문화로 초월적 지식을 얻는 기회를 잡게 된다. 브라흐마나 문화는 진실함, 감각 통제, 인내, 소박함, 완전한 지식과 절대신을 향한 완전한 믿음을 포함한다.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자랑스러워해서는 안 된다. 명문가에서 태어나면 유명해질 기회가 더 많은 것처럼 브라흐마나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브라흐마나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 하지만 브라흐마나가 되려면 브라흐마나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생득권리가 다는 아니다. 브라흐마나의 아들로 태어난 것에 자만하며 진정한 브라흐마나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데 소홀히 하면 즉시 타락하게 되어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임무를 저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바가바드 기따(6.41~42)에 따르면 요가-브라쉬따들(yoga-bhraṣṭas), 즉 자아 인식의 길에서 실패한 영혼들은 좋은 브라흐마나 가문이나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 태어나 자기를 바로잡을 기회를 얻게 된다고 주께서 보장하신다. 그런 출생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만약 이러한 기회를 환영에 사로잡혀 잘못 이용하면 전능한 주님이 주신 인간 삶이라는 좋은 기회를 잃게 된다.
따라서 규정적 원칙이란 그것을 따르는 자를 결실적 행위의 단계에서 초월적 지식의 단계로 끌어올려 준다. 수없이 많은 삶을 거쳐 초월적 지식을 배양한 다음, 주께 항복하게 될 때 완벽해진다. 이것이 일반적인 절차이다. 그러나 이 만뜨라가 권장하는 것처럼 바로 처음부터 항복하는 자는 그저 헌애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즉시 모든 준비 단계를 넘어서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18.66)에 설명된 바와 같이, 주는 즉시 그런 항복한 영혼을 보살피시며 그가 저지른 죄악에서 비롯된 모든 과보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까르마-깐다 행위를 통해 많은 인과응보를 얻게 되는 반면 철학적 발전을 꾀하는 길, 갸나-깐다(jñāna-kāṇḍa) 행위로 얻는 과보는 더 적다. 그러나 주를 향한 봉헌, 박띠의 길에서는 실제로 죄악의 과보가 있을 수 없다. 주의 헌애자는 주가 가진 모든 좋은 특징을 얻게 되니 브라흐마나가 가진 장점을 얻게 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헌애자가 브라흐마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제식을 올리는 권위를 인정받은 뛰어난 브라흐마나의 자격을 저절로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주의 전능함이다. 당신은 브라흐마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을 개 먹는 자만큼 타락하게 할 수 있고, 개 먹는 자와 같이 낮은 태생의 사람을 단지 봉헌의 힘으로 자격 있는 브라흐마나보다 더 뛰어난 자로 만들 수 있다.
전능한 주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존재하시므로 당신의 진실한 헌애자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도하실 수 있다. 그러한 지도는 비록 헌애자가 다른 것을 원하더라도 특별히 그들에게 전해진다. 다른 사람들에 관한 한 행위자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도록 주께서 허락하신다. 그러나 헌애자의 경우 절대 잘못되지 않도록 주께서 안내해 주신다. 스리마드 바가바땀(11.5.42)은 이렇게 말한다.
스바-빠다-물람 바자따 쁘리야샤 sva-pāda-mūlaṁ bhajataḥ priyasya
땩따냐-바바샤 하리 빠레샤하 tyaktānya-bhāvasya hariḥ pareśaḥ
비까르마 얏 쫏빠띠땀 까탄찓 vikarma yac cotpatitaṁ kathañcid
두노띠 사르밤 흐리디 산니비쉬따하 dhunoti sarvaṁ hṛdi sanniviṣṭaḥ
“주께서는 당신의 연꽃 같은 발에 완전히 항복한 헌애자에게 너무도 친절하시어 비록 헌애자가 때때로 베다의 방향에 어긋난 비까르마 행위에 휘말리더라도 그의 가슴속에서 그런 실수를 즉시 바로잡으신다. 이는 헌애자들은 주께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이 만뜨라에서 헌애자는 주께 가슴속에서 자신을 바로잡아 달라고 기도한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이다. 속박된 영혼은 자주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고 뜻하지 않게 지은 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주의 연꽃과 같은 발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는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실 수 있다. 주는 항복한 영혼들을 온전히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단지 주께 자신을 바치고 당신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진실한 헌애자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그런 지도가 제공된다. 그 첫째는 성인들과 경전, 그리고 영적 스승에 의해서이고, 둘째는 모든 이의 가슴 속에 계시는 주께서 직접 지도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다의 지식에 완전히 정통한 헌애자는 모든 면에서 보호받는다.
베다 지식은 초월적이므로 세속적 교육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주와 영적 스승의 은총으로 베다 만뜨라들을 이해할 수 있다(야샤 데베 빠라 박띠르 야타 데베 따타 구라우, yasya deve parā bhaktir yathā deve tathā gurau: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6.23).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 은신하면 주의 은총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는 헌애자에게 영적 스승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영적 스승, 베다의 가르침, 그리고 가슴 속에 계시는 주, 이 모두가  완전한 힘으로 헌애자를 인도한다. 이처럼 헌애자가 물질적 환영의 수렁에 다시 빠질 기회는 없다. 모든 면에서 보호를 받는 헌애자는 분명 완성의 궁극적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 완전한 과정이 이 만뜨라에 밝혀져 있고 스리마드 바가바땀(1.2.17~20)에 더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주의 영광에 관해 듣고 구송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행위이다. 주는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바라는 분이시므로 누구나 당신의 영광을 듣고 구송하기를 원하신다. 주의 영광을 듣고 구송함으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것을 깨끗이 씻게 되며 우리의 헌애심이 주께 고정된다. 이 단계에서 헌애자는 브라흐마나의 자격을 얻게 되며 낮은 단계의 본성(동성과 암성)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다. 헌애자는 봉헌의 덕으로 완전히 깨우치게 되고, 그 결과 주를 향한 길과 주를 얻는 방법을 알게 된다. 모든 의혹이 사라질 때 그는 순수한 헌애자가 된다.”
이로써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하는 지식, 스리 이쇼빠니샤드에 대한 박띠베단따 주석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