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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물질계에서의 해방

갸니(명상가)와 요가행자는 일반적으로 비인성주의자로서 영적 하늘, 즉 비인성적 광휘에 합쳐지는 일시적 형태의 해방을 얻는다 하더라도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따르면 그들의 지식은 순수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참회와 고행, 명상으로 지고한 주의 행성에 올라갈 수는 있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끄리쉬나의 인격적 특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물질계로 떨어진다.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을 숭배하지 않는 한 물질계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마음가짐은 “저는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같은 것이어야 한다. 끄리쉬나는 아지따하(ajitaḥ), 그 누구도 절대신을 정복할 수 없기에 ‘정복되지 않는 자’이다. 하지만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따르면 이런 마음가짐과 자세로는 당신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또한 지고한 주를 가늠하려는 쓸데없는 과정 또한 버려야 한다고 권한다. 우주의 한계조차 측정 불가능한데 지고한 주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인간의 아주 작은 지식으로 끄리쉬나의 길이와 넓이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를 이해한 자를 베다 문헌은 총명한 자라고 한다. 순종적인 자세로 우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아주 하찮은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제한된 지식이나 사색으로 지고한 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겸허하고 순종적으로 권위 있는 출처인 바가바드 기따나 다른 깨달은 영혼들의 입을 통해 지고한 주에 대해 들어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아르주나는 스리 끄리쉬나 당신의 입을 통해 직접 절대신에 대해 듣는다. 이렇게 아르주나는 순종적인 듣기를 지고한 주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의 위치는 아르주나의 입을 통해 바가바드 기따를 듣거나 그의 진정한 대표자인 영적 스승을 통해 듣는 것이다. 듣고 난 후에는 습득한 지식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필요가 있다. “오 주님, 당신은 정복되지 않는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이 과정으로, 당신에 대해 들음으로써 정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헌애자(獻愛者, devotee)들은 기도한다. 절대신은 정복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추측을 완전히 삼가고 권위 있는 출처들을 통해 듣는 헌애자에게 당신은 친히 정복되어 주신다.

브라흐마 삼히따에 따르면 지식을 얻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올라가는 과정과 내려가는 과정이다. 올라가는 과정은 스스로 획득한 지식으로 향상되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난 책이나 권위자들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명상이나 철학 같은 방법으로 나 스스로 지식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절대신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인 내려가는 과정은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자들로부터 지식을 얻는다. 브라흐마 삼히따는 올라가는 과정을 채택한 자들이 마음과 바람의 속도로 수백만 년을 나아가도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끝난다고 말한다. 그런 자들에게 탐색 주제는 파악하기 어렵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주제에 관해 바가바드 기따는 설명한다. 아난냐-쩨따하. 순종적인 자세로 봉헌의 과정에서 벗어남 없이 당신을 명상하라고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다. 이런 식으로 그를 숭배하는 자는 따샤함 술라바하, “나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참된 과정이다. 끄리쉬나를 위해 하루 24시간 일하는 자를 끄리쉬나께서 잊으실 수 없다. 순종함으로써 절대신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영적 스승 박띠싯단따 사라스바띠(Guru Mahārāja Bhaktisiddhānta Sarasvatī)께서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을 보려 애쓰지 마라. 우리가 신을 보고 싶다고 해서 당신이 종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 주셔야 하는가? 그건 순종적인 자세가 아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당신이 기꺼이 와 주시게끔 해야 한다.”

끄리쉬나께 다가가는 올바른 과정은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Lord Caitanya Mahāprabhu)께서 인류에 소개하셨고, 그의 첫 제자인 루빠 고스와미(Rūpa Gosvāmī)가 그 진가를 인정했다. 루빠 고스와미는 마호메트 정부의 장관이었지만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제자가 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낭독하며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를 처음 뵈었다.

나모 마하-바단야야 namo mahā-vadānyāya
끄리쉬나-쁘레마-쁘라다야 떼 kṛṣṇa-prema-pradāya te
끄리쉬나야 끄리쉬나-짜이따냐 kṛṣṇāya kṛṣṇa-caitanya-
남네 고라 뜨비셰 나마하 nāmne gaura-tviṣe namaḥ

“지고한 주 스리 끄리쉬나 짜이따냐께 경배 올립니다. 당신은 그 누구도 준 적 없는 끄리쉬나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기꺼이 나누어 주시기에 끄리쉬나 자신보다도 더 관대한 아바따라(avatāra)이십니다.” 

절대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가장 귀중한 것을 모두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루빠 고스와미는 짜이따냐 마하쁘라부를 ‘가장 후하고 자비로운 인격’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끄리쉬나를 원하고 갈망한다. 끄리쉬나는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풍부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지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갈망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강력하며 지적이고 부유한 것을 갈구한다. 끄리쉬나는 이 모든 것의 저장소이므로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리쉬나께 돌리기만 하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가슴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죽는 자는 이전에 언급했듯이 끄리쉬나께서 거처하시는 최상의 보금자리 끄리쉬나로까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받는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끄리쉬나로까에 들어가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다. 거기에 관한 답을 끄리쉬나께서 직접 주신다.

맘 우뻬땨 뿌나르 잔마 mām upetya punar janma
두칼라얌 아샤스바땀 duḥkhālayam aśāśvatam
납누반띠 마하뜨마나하 nāpnuvanti mahātmānaḥ
삼싯딤 빠라맘 가따하 saṁsiddhiṁ paramāṁ gatāḥ

“위대한 영혼들이 헌애로 나에게 이른 후 고통으로 가득한 이 일시적 세상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높은 완성을 달성했기 때문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8.14》

이 물질계는 스리 끄리쉬나께서 증명해 주시는 것처럼 두칼라얌(duḥkhālayam),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평안해질 수 있는가? 소위 진보한 과학으로 이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 과학 발전의 결과로 오히려 이 고통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어 그저 방치할 뿐이다. 과학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이런 고통을 해결할 힘이 없다. 그 대신 우리의 관심을 우주선이나 원자폭탄에 향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바가바드 기따에 나와 있다. 끄리쉬나의 행성에 도달한 자들은 삶과 죽음이 있는 이 지구에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고통으로 가득 찬 곳임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의 발전된 의식이 필요하다. 개나 고양이, 돼지는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 부르지만 이성을 이런 고통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찾는 데 쓰기보다 오히려 더욱 동물적인 성향을 만족시키는 데 쓰고 있다. 여기에 끄리쉬나께서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당신에게 오는 자는 다시 고통을 겪기 위해 태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하신다. 당신께 온 위대한 영혼들은 속박된 존재에서 오는 고통을 덜어주는 삶의 가장 높은 완성을 달성했다.

끄리쉬나와 평범한 존재의 차이점 중의 하나는 평범한 생명체는 한 번에 한 장소에만 머물 수 있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우주의 모든 곳에 계실 수 있는 동시에 당신의 고유한 보금자리에도 계실 수 있다는 점이다. 초월적 왕국에 있는 끄리쉬나의 거처는 골로까 브린다반이라고 한다. 인도에 있는 브린다반은 그곳과 같은 장소로 지구 위에 내려온 형태이다. 끄리쉬나께서 당신의 고유한 내적 능력으로 내려오실 때 당신의 다마(dhāma), 즉 거처도 함께 내려온다. 다른 말로 하면 끄리쉬나께서 이 지구상에 내려오실 때 특정한 땅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럼에도 끄리쉬나의 거처는 영원히 바이꾼타들(Vaikuṇṭhas)의 초월적 영역에 남아 있다. 이 절에서 끄리쉬나께서는 바이꾼타에 있는 당신의 보금자리에 도달한 자는 물질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고 단언하신다. 그런 자들을 마하뜨마(mahātmā)라고 한다. 마하뜨마라는 단어를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마하뜨마 간디와 연관 지어 들었겠지만 마하뜨마는 정치가의 직함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마하뜨마는 끄리쉬나의 보금자리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1등급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을 일컫는다. 인간의 형태로 태어난 삶과 특성을 활용하여 삶과 죽음의 반복에서 해방됨으로써 마하뜨마 완성을 이룬다.

총명한 자는 고통받고 싶지 않지만 고통이 강제로 자신을 덮친다는 것을 안다. 이전에 설명했듯이 우리는 마음과 몸, 자연재해 또는 다른 생명체 때문에 항상 괴로운 상태에 놓인다. 어떤 종류의 고통이라도 항상 우리에게 온다. 이 물질계는 고통받기 위해 존재하고 만일 고통이 없다면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고통은 사실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에 오르게 도와주는 동력이다. 총명한 자는 이런 고통이 왜 강제로 초래되는지 묻는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사고방식은 이렇다. “그래, 괴로워 주지. 어떤 거로 취하면 돼. 그러면 다 사라져.” 그러나 그 도취의 효력이 끝나자마자 고통은 되돌아온다. 인위적인 도취로 삶의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끄리쉬나 의식만이다.

누군가는 끄리쉬나의 헌애자들은 끄리쉬나 행성에 들어가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은 달에 가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달에 가는 것도 완성이 아닌가 하며 물을 것이다. 다른 행성에 가려는 경향은 생명체와 항상 함께했다. 생명체를 사르바-가따(sarva-gata)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모든 곳에 가고 싶어하는 자’라는 뜻이다. 여행은 생명체가 지닌 본성의 한 부분이다. 달에 가려는 욕망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요가행자들 또한 더 높은 행성에 들어가는 데 관심이 있지만 바가바드 기따(8.16)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이런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신다.

아브라흐마-부바날 로까하 ābrahma-bhuvanāl lokāḥ
뿌나르 아바르띠노 '르주나 punar āvartino 'rjuna
맘 우뻬땨 뚜 까운떼야 mām upetya tu kaunteya
뿌나르 잔마 나 비댜떼 punar janma na vidyate

 “물질계의 가장 높은 행성에서 가장 낮은 행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은 생사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나의 보금자리에 이르는 자는 오 꾼띠의 아들이여,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느니라.”

우주는 높은 행성, 중간 행성, 낮은 행성으로 구분되고 지구는 중간 행성 체계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 중에서 아무리 가장 높은 행성인 브라흐마로까(Brahmaloka)에 들어가더라도 생사의 반복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끄리쉬나께서 지적하신다. 우주의 다른 행성들도 생명체로 가득하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고 해서 다른 행성들은 모두 비어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경험상으로도 지구에 비어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땅의 깊은 곳을 파면 벌레가 나오고 물 깊숙이 들어가면 수생 동물들이 나오며 하늘에 오르면 수많은 새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행성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위대한 데바들이 거주하는 행성들에 들어가더라도 여전히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이 계신 행성에 도달함으로써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거듭 말씀하신다.

우리는 행복과 지식으로 가득한 영원한 삶을 얻는 데 매우 심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진정한 목적이고 관심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왜 잊게 되었는가? 아무리 높고 큰 고층빌딩을 지어도 거기에서 영원히 살 수 없는데도 고층빌딩과 큰 공장, 정치놀이 등과 같은 물질적 현란함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물질적 속성에 한층 더 휘말리게 할 거대한 산업이나 도시를 만드는 데 우리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끄리쉬나의 행성에 들어가게 하는 영적 몸을 얻기 위해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힘써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은 종교적 공식이나 영적 오락이 아니라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