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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절대자에 관한 지식

원문

스리-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마이야삭따-마나 빠르타 mayy āsakta-manāḥ pārtha
요감 윤잔 맏-아스라야하 yogaṁ yuñjan mad-āśrayaḥ
아삼샤얌 사마그람 맘 asaṁśayaṁ samagraṁ māṁ
야타 갸샤시 땃 츠리누 yathā jñāsyasi tac chṛṇu

동의어

스리-바가반 우바짜: 최고의 주께서 말씀하셨다, 마이: 나에게, 아삭따-마나하: 마음을 집중하고,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요감: 자아 인식, 윤잔: 수행하는, 맛-아스라야하: 나에 관한 의식으로(끄리쉬나 의식), 아삼샤얌: 의심 없이, 사마그람: 완전히, 맘: 나에게, 야타: 어떻게, 갸샤시: 너는 알 수 있다, 땃: 그것, 스리누: 듣도록 하라.

번역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나에 관한 완전한 의식으로 내게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어떻게 네가 의심 없이 나를 완전히 알 수 있게 되는지를.

주석

바가바드 기따의 이 제7장에서 끄리쉬나 의식의 본질이 완전하게 설명된다. 끄리쉬나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풍요로움을 가지고 계시고 당신이 그 풍요로움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여기에서 설명된다. 또한 네 부류의 운 좋은 사람들이 끄리쉬나께 애착을 갖게 되고, 네 부류의 불행한 사람들이 끄리쉬나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장에서 설명된다.

바가바드 기따의 이전 여섯 장에서 생명체가 물질이 아닌 영혼으로서 여러 형태의 요가로 자아 인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설명되었다. 제6장의 마지막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마음을 끄리쉬나께 집중하는 것, 즉 끄리쉬나 의식은 모든 요가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했다. 마음을 끄리쉬나께 집중함으로써 절대 진리를 완전히 알 수 있지만,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비인성적 브라흐마죠띠나 국부적 빠람아뜨마 깨달음은 절대 진리에 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부분적 지식이다. 완벽한 과학적 지식은 끄리쉬나이며, 모든 것은 끄리쉬나 의식인 사람에게 드러난다. 어떠한 의심도 넘어선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이 되면 끄리쉬나가 궁극적 지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러 형태의 요가는 끄리쉬나 의식의 길을 향한 디딤돌에 불과하다. 끄리쉬나 의식에 곧바로 착수하는 자는 저절로 브라흐마죠띠와 빠람아뜨마를 완전하게 알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 요가를 수행함으로써 절대 진리와 생명체, 물질적 본성과 그와 함께 나타나는 도구들, 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6장의 마지막 절에서 지시한 요가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절대자 끄리쉬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아홉 가지로 규정된 봉헌의 형태 중에서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스라바남(śravaṇam 듣기)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주께서 아르주나에게 말씀하신다, “나에게서 들어라”(땃 츠리누). 끄리쉬나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자란 있을 수 없기에 주께 들음으로써, 완벽한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잡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끄리쉬나께 직접 듣거나 그렇지 않으면 끄리쉬나의 순수한 헌애자에게서 배워야 하며 학벌을 자랑하는 거만한 비헌애자에게서 배워서는 안 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 제1권 제2장에서 최고인격신이자 절대 진리인 끄리쉬나를 이해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스린바땀 스바-까타 끄리쉬나하 śṛṇvatāṁ sva-kathāḥ kṛṣṇaḥ
뿐야-스라바나-끼르따나하 puṇya-śravaṇa-kīrtanaḥ
흐리디 안따-스토 햐바드라니 hṛdy antaḥ-stho hy abhadrāṇi
비두노띠 수흐릿 사땀 vidhunoti suhṛt satām
나쉬따-쁘라예스바드레슈 naṣṭa-prāyeṣv abhadreṣu
니땸 바가바따-세바야 nityaṁ bhāgavata-sevayā
바가바띠 웃따마-슬로께 bhagavaty uttama-śloke
박띠르 바바띠 나이쉬티끼 bhaktir bhavati naiṣṭhikī
따다 라자스-따모-바바하 tadā rajas-tamo-bhāvāḥ
까마-로바다야스 짜 예 kāma-lobhādayaś ca ye
쩨따 에따이라나빋담 ceta etair anāviddhaṁ
스티땀 삿뜨베 쁘라시다띠 sthitaṁ sattve prasīdati
에밤 쁘라산나-마나소 evaṁ prasanna-manaso
바가받-박띠 요가따하 bhagavad-bhakti-yogataḥ
바가받-땃뜨바-비갸남 bhagavat-tattva-vijñānaṁ
묵따-상가샤 자야떼 mukta-saṅgasya jāyate
비댜떼 흐리다야-그란티스 bhidyate hṛdaya-granthiś
치댠떼 사르바-삼샤야하 chidyante sarva-saṁśayāḥ
끄쉬얀떼 짜샤 까르마니 kṣīyante cāsya karmāṇi
드리쉬따 에바뜨마니스바레 dṛṣṭa evātmanīśvare

“베다 경전을 통해 끄리쉬나에 관해 듣거나,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직접 듣는 것 자체가 고결한 행위이다. 주 끄리쉬나는 모든 이의 가슴속에 계시며 당신에 관해 계속 듣는 헌애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시며 그들을 정화해 주신다. 이렇게 헌애자는 잠자는 초월적 지식을 자연스레 발전시킨다. 바가바땀과 헌애자에게서 끄리쉬나에 관해 더 많이 들을수록 주를 향한 봉헌에 확고하게 된다. 봉헌의 발전으로 동성과 암성의 양태에서 벗어나 물질적 욕망과 탐욕이 줄어든다. 이러한 불순함이 말끔히 제거될 때, 지망생은 순수한 선성의 위치를 유지하게 되고, 봉헌으로 활기 띠며, 절대신의 과학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박띠 요가는 물질적 애정이라는 단단한 매듭을 잘라버리고, 즉시 아삼샤얌 사마그람 경지에 올라 지고의 절대 진리, 최고인격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바가바땀 1.2.17~21).” 그러므로 오직 끄리쉬나나 끄리쉬나 의식의 헌애자에게 들음으로써 우리는 끄리쉬나의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

원문

갸남 떼’함 사-비갸남 jñānaṁ te ’haṁ sa-vijñānam
이담 박샴야셰샤따하 idaṁ vakṣyāmy aśeṣataḥ
얏 갸뜨바 네하 부욘’얏 yaj jñātvā neha bhūyo ’nyaj
갸따뱜 아바시샤떼 jñātavyam avaśiṣyate

동의어

갸남: 현상적 지식, 떼: 너에게, 아함: 나는, 사: 가지고, 비갸남: 영적인 지식, 이담: 이것, 박샤미: 설명할 것이다, 아셰샤따하: 완전히, 얏: 어느, 갸뜨바: 아는, 나: 아니다, 이하: 이 세상에, 부야하: 훨씬 더, 안얏: 어느 것도 더는, 갸따뱜: 알아야 하는, 아바시샤떼: 남는다.

번역

이제 너에게 영적 지식과 현상계의 지식을 모두 설명할 것이니라. 이것을 알고 나면, 네가 알아야 할 것은 더는 없을 것이다.

주석

완전한 지식은 현상계의 지식과 그 배후에 있는 영적인 지식, 그리고 그 둘 다의 원천을 포함한다. 이것이 초월적 지식이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의 은밀한 헌애자며이자 친구이므로 주께서 위에 언급된 지식을 설명하고자 하신다. 이것은 제4장 처음에 설명되었지만 여기에서 다시 확증된다. 주로부터 직접 시작되는 사제 전수의 계통에 있는 주의 헌애자만이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지식의 원천과 모든 원인의 원인이 누구이며, 모든 요가 수행의 유일한 명상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해야 한다. 모든 원인의 원인을 알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더는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베다(무꾼다 우빠니샤드 1.1.3)에서 “까스민누 바가보 비갸떼 사르밤 이담 비갸땀 바바띠띠(kasminn u bhagavo vijñāte sarvam idaṁ vijñātaṁ bhavatīti)”라고 말한다.

원문

마누샤남 사하스레슈 manuṣyāṇāṁ sahasreṣu
까스찓 야따띠 싣다예 kaścid yatati siddhaye
야따땀 아삐 싣다남 yatatām api siddhānāṁ
까스찐 맘 벳띠 땃뜨바따하kaścin māṁ vetti tattvataḥ

동의어

마누샤남: 사람들의, 사하스레슈: 수천의, 까스찟: 누군가, 야따띠: 노력하다, 싣다예: 완성을 위해, 야따땀: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 중에서, 아삐: 진정으로, 싣다남: 완성을 달성한 사람들 중에서, 까스찟: 누군가, 맘: 나를, 벳띠: 알다, 땃뜨바따하: 진실로.

번역

수천의 사람 중 단 한 명만이 완성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이렇게 완성을 이룩한 자 중 진실로 나를 아는 자는 드물다.

주석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아란 무엇이고 육신이란 무엇이며 절대 진리란 또한 무엇인지 알고자 초월적 깨달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한 사람이 있을까 말까 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물적 성향, 이름하여 먹고, 자고, 방어하고, 교미하는 일에 바빠서 누구도 초월적 지식에 관심이 없다. 기따의 이전 여섯 장은 자아, 초자아, 갸나 요가와 댜나 요가를 통한 깨달음의 과정, 그리고 물질과 자아를 구별하는 초월적 지식에 관심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끄리쉬나는 끄리쉬나 의식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 다른 초월주의자들이 비인성적 브라흐만 깨달음을 이루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끄리쉬나를 이해하기보.다 쉽기 때문이다. 끄리쉬나는 지고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그는 브라흐만과 빠람아뜨마의 지식을 넘어선다. 요기들과 갸니들은 끄리쉬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혼란에 빠진다. 가장 위대한 비인성주의자, 스리빠다 샹까라짜리아는 자신의 기따 논평에서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끄리쉬나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비인성적 브라흐만의 초월적 깨달음을 이루더라도 끄리쉬나를 이해하는 것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끄리쉬나는 최고인격신이고 모든 원인의 원인이며 원초적 주 고빈다(Govinda)이다.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 삿-찓-아난다-비그라하 / 아나디라디르 고빈다 사르바-까라나-까라남(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sac-cid-ānanda-vigrahaḥ/ anādir ādir govindaḥ sarva-kāraṇa-kāraṇam).” 비(非)헌애자들이 끄리쉬나를 이해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비록 비헌애자들이 박띠, 즉 봉헌의 길이 아주 쉬운 것이라 말해도 그들은 이를 실천할 수 없다. 비헌애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박띠의 길이 그렇게 쉽다면, 그들은 왜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는가? 사실 박띠의 길은 쉽지 않다. 공인되지 않고, 박띠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소위 박띠의 길은 쉬워 보일지는 모르나, 규칙과 규정에 따라 제대로 수행하라고 하면, 추론주의 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그 길에서 떠나버린다.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가 박띠 라삼리따 신두(1.2.101)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신다.

스루띠-스므리띠-뿌라나디 śruti-smṛti-purāṇādi-
빤짜라뜨라-비딤 비나 pañcarātra-vidhiṁ vinā
아이깐띠끼 하레르 박띠르 aikāntikī harer bhaktir
웃빠따야이바 깔빠떼 utpātāyaiva kalpate

“우빠니샤드와 뿌라나, 그리고 나라다 빤짜라뜨라 같이 공인된 베다 문헌을 무시하고 주께 봉헌하는 것은 사회에 불필요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브라흐만 깨달음을 얻은 비인성주의자나 빠람아뜨마를 깨달은 요기가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가 야쇼다의 아들이나 아르주나의 마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위대한 데바들조차 때로 끄리쉬나에 관해 착각한다(무햔띠 얏 수라야하 muhyanti yat sūrayaḥ). “맘 뚜 베다 나 까스짜나(Māṁ tu veda na kaścana), 즉 그 누구도 나를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누군가가 주를 알게 되면, “사 마하뜨마 수-둘라바하(a mahātmā su-durlabhaḥ), 즉 그러한 영혼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향한 봉헌을 실천하지 않는 한, 주를 있는 그대로(땃뜨바따하 tattvataḥ) 알 수 없으며, 위대한 학자나 철학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오직 순수한 헌애자들만이 주의 불가사의한 초월적 특징, 즉 모든 원인의 원인, 당신의 전지전능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당신의 부, 명성, 힘, 아름다움, 지식, 그리고 버림 중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끄리쉬나께서는 헌애자들에게 자비롭게 끌리시기 때문이다. 그는 브라흐만 깨달음의 결론이고, 헌애자들만이 그를 있는 그대로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따 스리-끄리쉬나-나마디 ataḥ śrī-kṛṣṇa-nāmādi
나 바벧 그라햠 인드리야이히 na bhaved grāhyam indriyaiḥ
세본무케 히 지바다우 sevonmukhe hi jihvādau
스바얌 에바 스푸라땨다하 svayam eva sphuraty adaḥ  

“그 누구도 무딘 물질적 감각으로 끄리쉬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끄리쉬나께서는 사랑의 초월적 봉사를 하는 헌애자들에게 만족하시어, 그들에게 당신을 직접 드러내 보이신다(박띠 라삼리따 신두 1.2.234)”

원문

부미라뽀’날로 바유후 bhūmir āpo ’nalo vāyuḥ
캄 마노 붇디레바 짜 khaṁ mano buddhir eva ca
아항까라 이띠얌 메 ahaṅkāra itīyaṁ me
빈나 쁘라끄리띠라쉬따다 bhinnā prakṛtir aṣṭadhā

동의어

부미히: 흙, 아빠하: 물, 아날라하: 불, 바유후: 공기, 캄: 하늘, 마나하: 마음, 붇디히: 지성, 에바: 분명히, 짜: 그리고, 아항까라하: 거짓 자아, 이띠: 따라서, 이얌: 이 모든 것들, 메: 나의, 빈나: 분리된, 쁘라끄리띠히: 에너지, 아쉬따다: 여덟 가지.

번역

흙, 물, 불, 공기, 하늘, 마음, 지성, 그리고 거짓 자아, 이 여덟 가지가 나에게서 나와서 물질 에너지를 형성하느니라.

주석

절대신의 과학은 절대신의 근원적 위치와 그의 다양한 에너지를 분석한다. 사뜨바따 딴뜨라(Sātvata-tantra)의 하나인 나라다 빤짜라뜨라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물질적 본성은 쁘라끄리띠(prakṛti), 즉 주의 여러 뿌루샤 화신(확장)의 하나인 주의 에너지이다.

비쉬노스 뚜 뜨리니 루빠니 viṣṇos tu trīṇi rūpāṇi
뿌루샤캬니 아토 비두후 puruṣākhyāny atho viduḥ
에깜 뚜 마하따 스라쉬뜨르 ekaṁ tu mahataḥ sraṣṭṛ
드비띠얌 뚜반다-삼스티땀 dvitīyaṁ tv aṇḍa-saṁsthitam
뜨리띠얌 사르바-부따-스탐 tṛtīyaṁ sarva-bhūta-sthaṁ
따니 갸뜨바 빔우쨔떼 tāni jñātvā vimucyate

“물질계 창조를 위해 주 끄리쉬나는 당신의 완전한 확장인 세 비쉬누(Viṣṇu)가 되신다. 첫째, 마하 비쉬누(Mahā-viṣṇu)께서 마핫-땃뜨바(mahat-tattva)라고 하는 전체 물질적 에너지를 창조하신다. 둘째, 가르보다까샤이 비쉬누(Garbhodaka-śāyī Viṣṇu)께서 모든 우주로 들어가셔서 각 우주의 다양성을 창조하신다. 셋째, 끄쉬로다까샤이 비쉬누(Kṣīrodaka-śāyī Viṣṇu)께서 모든 우주에 편재한 초영혼으로서 퍼지시어 빠람아뜨마로 불리며 당신은 심지어 원자 안에도 계신다. 이 세 비쉬누를 이해하는 자는 물질적 얽힘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 물질계는 주의 여러 에너지 중 하나로, 일시적으로 나타난다. 물질계의 모든 움직임은 주 끄리쉬나의 이 세 비쉬누 확장이 감독하신다. 이러한 뿌루샤들을 화신(incarnation)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절대신(끄리쉬나)의 과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물질계란 생명체들이 즐기기 위한 곳이고, 자기들이 뿌루샤, 즉 물질적 에너지의 원인, 통제자, 그리고 향유자라고 생각한다.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이러한 무신론적 결론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 논의하고 있는 절에서 끄리쉬나께서 물질적 현현의 근원이라고 명시되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 또한 이것을 확증한다. 물질적 발현의 성분들은 주의 분리된 에너지이다. 비인성주의자들의 궁극적 목적인 브라흐마죠띠조차 영적 하늘에서 발현되는 영적 에너지이다. 브라흐마죠띠는 바이꾼타 로까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영적 다양성이 없지만, 비인성주의자들은 브라흐마죠띠를 궁극적이고 영원한 목적으로 받아들인다. 빠람아뜨마의 현현 역시 일시적으로 두루 존재하는 끄쉬로다까샤이 비쉬누의 현상일 뿐이다. 빠람아뜨마의 현현은 영적 세계에서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실제 절대 진리는 최고인격신 끄리쉬나이다. 그는 완전한 에너지를 갖춘 사람이며, 여러 내적 에너지와 분리된 에너지를 소유하신다.

물질 에너지의 주된 발현은 위에 언급된 여덟 가지이다. 이것 중 먼저 다섯 가지의 발현, 즉 흙, 물, 불, 공기 그리고 하늘은 다섯 가지의 거시적 창조 혹은 총체적 창조물이라고 하며, 그 안에 다섯 가지 감각 대상이 포함된다. 물리적 소리, 촉각, 형상, 맛 그리고 냄새가 나타난다. 물질적 과학은 이 열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며, 그 이상은 없다. 그러나 물질주의자들은 다른 세 가지 항목, 즉 마음, 지성 그리고 거짓 자아(false ego)는 소홀히 한다. 정신 활동을 다루는 철학자들 역시 모든 것의 궁극적 원천, 끄리쉬나를 몰라 완벽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다. 거짓 자아, 즉 “나는”, “내 것은”이라고 하는 이것이 물질적 행위를 위한 열 가지 감각을 포함하고 물질적 존재의 기본 원리를 구성한다. 지성이란 마핫 땃뜨바(mahat-tattva)라고 하는, 전체 물질적 창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의 여덟 가지 분리된 에너지에서 물질계의 스물네 가지 요소가 나타나고, 이것이 상캬 무신론 철학의 주제이다. 스물네 가지 요소는 원래 끄리쉬나의 에너지에서 나와 끄리쉬나와 분리된 상태이지만 무신론적 상캬 철학자들은 지식의 부족함 탓에 끄리쉬나께서 이 모든 원인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바가바드 기따에 설명된 것처럼, 상캬 철학에서 논의하는 주제란 끄리쉬나의 외적 에너지의 발현일 뿐이다.

원문

아빠레얌 이따스 뜨반얌  apareyam itas tv anyāṁ
쁘라끄리띰 빋디 메 빠람 prakṛtiṁ viddhi me parām
지바-부땀 마하-바호 jīva-bhūtāṁ mahā-bāho
야예담 다랴떼 자갓 yayedaṁ dhāryate jagat

동의어

아빠라: 하위의, 이얌: 이것, 이따하: 이것 외에, 뚜: 그러나, 안얌: 또 다른, 쁘라끄리띰: 에너지, 빋디: 이해하려고 하다, 메: 나의, 빠람: 상위의, 지바: 부땀, 생명체를 구성하는, 마하-바호: 오 강력히 무장한 자여, 야야: 그에 의해, 이담: 이것, 다랴떼: 이용 또는 활용되다, 자갓: 물질계.

번역

오! 강력히 무장한 아르주나여, 이것 외에 또 다른 나의 상위 에너지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체를 포함하며 생명체는 이 물질적 하위 본성의 자원들을 활용하고 있느니라.

주석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상위 본성(혹은 에너지)에 속한다고 여기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하위 에너지란 여러 성분의 구성 요소가 되는 물질, 즉 흙, 물, 불, 공기, 하늘, 마음, 지성 그리고 거짓 자아이다. 물질 구성의 두 가지 형태, 즉 거시적인 것(흙 등)과 미시적인 것(마음 등)은 하위 에너지의 산물이다. 이러한 하위 에너지를 여러 목적으로 활용하는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상위 에너지이며, 바로 이 에너지에 의해 전 물질계가 작동한다. 우주의 현현은 상위 에너지, 즉 생명체에 의해 작동되지 않는 한, 기능할 수 없다. 에너지는 항상 에너지원에 의해 통제되며, 생명체는 항상 주에 의해 통제된다. 이들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무지한 자들의 생각처럼 이들은 주와 절대 똑같은 능력을 갖출 수 없다. 생명체와 주의 차이는 스리마드 바가바땀(10.87.30)에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아빠리미따 드루바스 따누-브리또 야디 사르바-가따스 aparimitā dhruvās tanu-bhṛto yadi sarva-gatās
따리 나 샤샤떼띠 니야모 드루바 네따라타 tarhi na śāsyateti niyamo dhruva netarathā
아자니 짜 얀-마얌 딷 아빔우쨔 니얀뜨리 바벳 ajani ca yan-mayaṁ tad avimucya niyantṛ bhavet
사맘 아누자나땀 얃 아마땀 마따-두쉬따따야 samam anujānatāṁ yad amataṁ mata-duṣṭatayā

“오 영원한 최고의 존재여! 육체화된 생명체가 당신처럼 영원하고 편재(遍在)한다면 그들은 당신의 다스림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체가 주의 작은 에너지라면 그들은 즉시 당신의 지고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해방은 생명체가 당신의 다스림에 항복하는 것이고, 이 항복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오직 이 본원적 위치에서 그들은 통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신과 생명체가 모든 면에서 동등하다는 일원론을 주장하는 제한적 지식을 가진 자들은 사실 결점 있고 오염된 의견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고의 주, 끄리쉬나께서 유일한 통제자이고 모든 생명체는 주의 통제를 받는다. 이러한 생명체는 그 존재의 질적 측면에서 절대자와 하나이며 같기 때문에 주의 상위 에너지라고 하지만, 능력의 양적 측면에서 주와 절대 같아질 수 없다. 상위 에너지(생명체)는 거시적, 미시적 하위 에너지(물질)를 이용하는 동안 그의 진정한 영적 마음과 지성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망각은 생명체를 덮어씌우는 물질의 영향 때문이다. 생명체가 이 환영의 물질적 에너지의 영향을 벗어날 때 묵띠(mukti), 즉 해방에 도달하게 된다. 물질적 환영의 영향으로 “나는 물질이고, 물질적 소유물은 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거짓 자아이다. 자아의 실제적 위치는 모든 면에서 절대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포함한 모든 물질적 개념에서 벗어날 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기따는 생명체란 끄리쉬나의 여러 에너지 중 그저 하나일 뿐임을 확증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에너지가 물질적 더러움에서 벗어날 때,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 즉 해방을 얻게 된다.

원문

에딷-요니니 부따니 etad-yonīni bhūtāni
사르바니뜌빠다라야 sarvāṇīty upadhāraya
아함 끄릿스나샤 자가따하 ahaṁ kṛtsnasya jagataḥ
쁘라바바 쁘랄라야스 따타 prabhavaḥ pralayas tathā

동의어

에땃: 이 두 가지 본성, 요니니: 그 발생의 원천, 부따니: 창조된 모든 것, 사르바니: 모든, 이띠: 그래서, 우빠다라야: 알다, 아함: 나는, 끄릿스나샤: 모든 것을 포함한, 자가따하: 세상의, 쁘라바바하: 발현의 원천, 쁘랄라야하: 소멸, 따타: 마찬가지로.

번역

창조된 모든 존재는 이 두 가지 본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세상에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의 기원이며 동시에 파괴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라.

주석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과 영(靈)의 산물이다. 영은 창조의 근본 장(場)으로, 물질은 이 영에 의해 창조된다. 영은 물질이 발전하는 어떠한 단계에 창조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물질계가 이 영적 에너지에 기초하여 발현한다. 영이 물질에 내재하기 때문에 물질적 육신이 발전한다. 영적 에너지, 즉 영이 물질 안에 있어서 아이는 점차 자라 소년에서 어른이 된다. 이처럼 거대한 우주의 전체적 발현은 초영혼, 비쉬누가 존재하기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영과 물질, 이것이 합쳐져 이 거대한 우주의 형상을 만드는데, 그 근원은 주님의 두 가지 에너지이며, 결국 주가 모든 것의 근원적 원인이다. 생명체라는 주의 입자적 부분들은 고층 건물, 큰 공장, 심지어 큰 도시의 원인자가 될 수는 있지만, 거대한 우주의 원인자가 될 수는 없다. 거대한 우주의 원인자는 큰 영혼, 즉 초영혼이다. 그리고 절대자, 끄리쉬나께서는 크고 작은 영혼 모두의 원인자이시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는 모든 원인의 근원적 원인이시다. 이것은 까타 우빠니샤드(2.2.13)에서 확증된다. 니뚀 니땨남 쩨따나스 쩨따나남(Nityo nityānāṁ cetanaś cetanānām).

원문

맛따 빠라따람 난얏 mattaḥ parataraṁ nānyat
낀찓 아스띠 다난자야 kiñcid asti dhanañ-jaya
마이 사르밤 이담 쁘로땀 mayi sarvam idaṁ protaṁ
수뜨레 마니-가나 이바 sūtre maṇi-gaṇā iva

동의어

맛따하: 나를 초월한, 빠라-따람: 고등한, 나: 아니다, 안얏 낀찟: 그 밖의 어떤 것, 아스띠: 있다, 다난자야: 오! 부의 정복자여, 마이: 나에게, 사르밤: 존재하는 모든 것, 이담: 우리가 보는 것, 쁘로땀: 꿰어 있는, 수뜨레: 실에, 마니-가나하: 진주, 이바: 것처럼.

번역

오! 부의 정복자여, 나를 초월하는 진리란 없느니라. 실에 꿰인 진주처럼, 모든 것은 나에게 의존하느니라.

주석

최고의 절대 진리가 인성을 가졌는지 비인성인지에 관한 논쟁은 일반적이다. 바가바드 기따의 측면에서 보면 절대 진리는 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이고 이는 모든 점에서 확증되었다. 특히 이 절에서 절대 진리는 사람이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인격신이 절대 진리라는 것은 브라흐마 삼히따에서도 확증된다.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 삿-찓-아난다-비그라하.” 즉 최고의 절대 진리, 인격신은 주 끄리쉬나로, 그는 태고의 주이고, 모든 즐거움의 보고(寶庫)이자 고빈다이며, 완전한 축복과 지식의 영원한 형상이다. 브라흐마와 같은 이러한 권위자들은 절대 진리가 최고의 인격신이며, 모든 원인의 원인이라는 것에 어떠한 의심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비인성주의자는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3.10)에 있는 베다의 구절에 힘입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따도 얃 웃따라-따람 딷 아루빰 안아마얌 / 야 에딷 비두람리따스 떼 바반띠 아테따레 두후캄 에바삐얀띠(tato yad uttara-taraṁ tad arūpam anāmayam/ ya etad vidur amṛtās te bhavanti athetare duḥkham evāpiyanti), 즉 물질계에서는 이 우주의 가장 오래된 생명체인 브라흐마가 데바와 인간, 그리고 낮은 동물 중에서 가장 높은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브라흐마를 넘어선 초월성이 있는데, 그는 물질적 형상이 없으며, 모든 물질적 오염에서 벗어나 있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초월하게 되지만, 그를 모르는 자는 물질계의 괴로움으로 고통받는다.”

비인성주의자는 아루빰(arūpam)이라는 말을 무척 강조한다. 그러나 이 아루빰은 비인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인용된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묘사된 영원성, 축복, 지식으로 가득한 초월적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3.8~9)의 다른 구절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확증한다.

베다함 에땀 뿌루샴 마한땀 vedāham etaṁ puruṣaṁ mahāntam
아디땨-바르남 따마사 빠라스땃 āditya-varṇaṁ tamasaḥ parastāt
땀 에바 비디뜨바띠 므리뜜 에띠 tam eva viditvāti mṛtyum eti
난야 빤타 비댜떼’얀아야 nānyaḥ panthā vidyate ’yanāya
야스맛 빠람 나빠람 아스띠 낀찓 yasmāt paraṁ nāparam asti kiñcid
야스만 나니요 노 쟈요’스띠 낀찟 yasmān nāṇīyo no jyāyo ’sti kiñcit
브릭샤 이바 스땁도 디비 띠쉬타뗴까스 vṛkṣa iva stabdho divi tiṣṭhaty ekas
떼네담 뿌르남 뿌루쉐나 사르밤 tenedaṁ pūrṇaṁ puruṣeṇa sarvam

“나는 모든 물질적 개념의 암흑을 초월한 최고인격신을 안다. 그를 아는 자만이 삶과 죽음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최고인격신에 관한 지식 이외에 다른 해방의 길은 없다.”

“지고한 절대자는 가장 높으셔서 그보다 더 높은 진리란 없다. 그는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으며, 가장 큰 것보다도 더 크다. 그는 조용한 나무처럼 서 계시고 초월적 하늘을 비추시며, 나무가 뿌리를 뻗쳐 나가듯이 당신의 방대한 에너지를 펼치신다.”

이 절에서 말한 것처럼 지고의 절대 진리는 최고인격신이며, 그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두 당신의 다양한 에너지로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원문

라소’함 압수 까운떼야 raso ’ham apsu kaunteya
쁘라바스미 샤시-수랴요호 prabhāsmi śaśi-sūryayoḥ
쁘라나바 사르바-베데슈 praṇavaḥ sarva-vedeṣu
샤브다 케 빠우루샴 느리수 śabdaḥ khe pauruṣaṁ nṛṣu

동의어

라사하: 맛, 아함: 나는, 압수: 물,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쁘라바: 빛, 아스미: 나는, 샤시-수랴요호: 달과 태양의, 쁘라나바하: 세 음절 아-우-음, 사르바: 모두에, 베데슈: 베다에, 샤브다하: 소리 울림, 케: 공(空)에, 빠우루샴: 능력, 느리수: 사람에게 있는.

번역

오! 꾼띠의 아들이여, 나는 물의 맛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며, 베다 진언에서 음절 옴이며, 나는 공(空)에 있는 소리이며 사람들이 가진 능력이니라.

주석

이 절은 주께서 어떻게 다양한 물질적, 그리고 영적 에너지로 모든 곳에 존재하시는지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지고한 주의 여러 에너지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주를 비인성적으로 깨닫게 된다. 태양신도 하나의 인격체인데, 그의 편재하는 에너지가 햇빛으로 인식되듯이, 주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왕국에 머물고 계시더라도, 널리 흩어져 퍼지는 에너지를 통해 그 존재가 인지된다. 물의 맛은 물의 유효 성분이다. 그 누구도 바닷물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물의 순수한 맛이 소금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의 매력은 그 맛의 순수함에 달렸고, 순수한 맛은 주의 에너지 가운데 하나이다. 비인성주의자는 물의 맛으로 물속에서 주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성주의자 역시 자신의 목마름을 달래주는 맛있는 물을 선사하신 주를 찬양한다. 이것이 절대자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인성주의와 비인성주의 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다. 신(神)을 아는 자는 비인성적 개념과 인성적 개념이 모든 것에 동시에 존재하며 어떠한 모순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주 짜이따냐께서 ‘아찐땨 베다와 아베다 땃뜨바’(acintya bheda-and-abheda-tattva), 즉 동시에 하나이며 다름’이라는 숭고한 이론을 정립하셨다.

태양과 달의 빛 역시 주의 비인성적 광채인 브라흐마죠띠에서 원래 나온다. 그리고 쁘라나바(praṇava), 즉 초월적 소리, 옴까라(oṁ-kāra)는 모든 베다 찬송의 첫소리로 지고한 주를 일컫는 말이다. 비인성주의자들은 지고한 주 끄리쉬나의 수많은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몹시 두려워해서 초월적 소리 옴까라로 발음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들은 옴까라가 끄리쉬나를 소리로 나타내는 것임을 깨닫지 않는다. 끄리쉬나 의식의 범위는 모든 곳에 미치고, 이 끄리쉬나 의식을 아는 자는 축복받은 것이다. 끄리쉬나 의식을 모르는 자들은 환영 속에 있기에 끄리쉬나에 관한 지식은 해방이며, 그에 대한 무지는 속박이다.

원문

뿐요 간다하 쁘리티비암 짜 puṇyo gandhaḥ pṛthivyāṁ ca
떼자스 짜스미 비바바사우 tejaś cāsmi vibhāvasau
지바남 사르바-부떼슈 jīvanaṁ sarva-bhūteṣu
따빠스 짜스미 따빠스비슈 tapaś cāsmi tapasviṣu

동의어

뿐야하: 원래의, 간다하: 향기, 쁘리티비암: 땅에서, 짜: 또한, 떼자하: 열, 짜: 또한, 아스미: 나는, 비바바사우: 불 속에, 지바남: 생명, 사르바: 모두, 부떼슈: 생명체, 따빠하: 고행, 짜: 또한, 아스미: 나는, 따빠스비슈: 고행을 실천하는 자의.

번역

나는 흙의 본래 향기이며, 또한 불 속에 있는 열이다.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며, 모든 고행자의 고행이니라.

주석

뿐야(Puṇya)란 분해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뿐야는 원초적이다. 이 물질계의 모든 것은 일정한 풍미(風味)와 향기를 지니고 있는데, 꽃을 비롯해 흙, 물, 불, 공기 등에도 맛과 향기가 있다. 오염되지 않은 맛, 모든 것에 스며있는 원래의 맛이 끄리쉬나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고유의 맛을 가지고 있고, 이 맛이 화학물질과 섞이면 맛이 변한다. 무엇이든 원래의 것은 그 고유한 냄새와 향기 그리고 맛을 가지고 있다. 비바바수(Vibhāvasu)란 불을 의미한다. 불 없이 공장을 운영할 수 없고, 요리도 할 수 없다. 바로 그 불이 끄리쉬나이며, 그 불 속에 있는 열 또한 끄리쉬나다. 베다 의학에 따르면 소화불량은 복부 내의 낮은 온도 탓이다. 그래서 소화를 위해서라도 불은 필요하다. 끄리쉬나 의식을 통해 흙, 물, 불, 공기 그리고 모든 유효 성분, 모든 화합물과 모든 물질적 요소가 끄리쉬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수명 역시 끄리쉬나에 달렸다. 그러므로 끄리쉬나의 은총으로 인간은 더 살 수도, 덜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끄리쉬나 의식은 모든 면에서 작용한다.

원문

비잠 맘 사르바-부따남 bījaṁ māṁ sarva-bhūtānāṁ
빋디 빠르타 사나따남 viddhi pārtha sanātanam
붇디르 붇디마땀 아스미 buddhir buddhimatām asmi
떼자스 떼자스비남 아함 tejas tejasvinām aham

동의어

비잠: 씨앗, 맘: 나는, 사르바-부따남: 모든 생명체의, 빋디: 이해하려 하다,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사나따남: 원래의, 영원한, 붇디히: 지성, 붇디-마땀: 지성 있는 자, 아스미: 나는, 떼자하: 용기, 떼자스비남: 강력한 자의, 아함: 나는.

번역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나는 모든 존재의 원초적 씨앗이고, 지적인 자의 지성이며, 모든 강력한 자의 용기라는 것을 알아라.

주석

비잠(Bījam)이란 씨앗을 의미한다. 끄리쉬나가 모든 것의 씨앗이다. 움직이는 생명과 움직이지 않는 다양한 생명체가 있다. 새, 짐승, 사람과 같이 살아서 활동하는 것들은 움직이는 생명체이지만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은 움직이지 않고 오직 서 있는 정체된 생명체이다. 이렇게 다양한 생명체는 모두 8,400,000종이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움직이고, 다른 일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그 생명의 씨앗은 끄리쉬나이다. 베다의 문헌에 진술된 바대로, 브라흐만, 즉 최고의 절대 진리란 모든 것이 나오는 근원이다. 끄리쉬나는 빠라브라흐만(Parabrahman), 즉 최고의 영혼이다. 브라흐만은 비인성이고, 빠라브라흐만은 인성이 있다. 비인성적 브라흐만은 인성적 측면 안에 존재한다. 그것이 바가바드 기따가 명시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 모든 것의 원천이다. 그는 뿌리다. 나무의 뿌리가 나무 전체를 유지하듯이, 모든 것의 원래 뿌리인 끄리쉬나께서 이 물질 현현의 모든 것을 유지하신다. 이것 역시 베다의 문헌에서 확증된다(까타 우빠니샤드 2.2.13).

니뚀 니땨남 쩨따나스 쩨따나남 nityo nityānāṁ cetanaś cetanānām
에꼬 바후남 요 비다다띠 까만 eko bahūnāṁ yo vidadhāti kāmān

그는 영원한 모든 것 중에 가장 영원하다. 그는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최고의 생명체이며, 오직 그만이 모든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는 지성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끄리쉬나께서도 당신이 그 모든 지성의 뿌리라고 말씀하신다. 지성이 없으면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다.

원문

발람 발라바땀 짜함  balaṁ balavatāṁ cāhaṁ
까마-라가-비바르지땀 kāma-rāga-vivarjitam
다르마비룯도 부떼슈 dharmāviruddho bhūteṣu
까모’스미 바라따르샤바 kāmo ’smi bharatarṣabha

동의어

발람: 힘, 발라-바땀: 강한 자의, 짜: 그리고, 아함: 나는, 까마: 열정, 라가: 집착, 비바르지땀: 없는, 다르마-아비룯다하: 종교적 원칙에 거스르지 않는, 부떼슈: 모든 생명체에, 까마하: 성생활, 아스미: 나는, 바라따-리샤바: 오 바라따의 주인이여.

번역

나는 열정과 욕망이 없는 강자의 힘이며 종교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성생활이니라, 오! 바라따의 주인(아르주나)이여.

주석

강한 자의 힘은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개인적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생활은 종교적 원칙(다르마)에 따라 자손을 낳기 위해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모의 책임은 자식을 끄리쉬나 의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

원문

예 짜이바 삿뜨비까 바바 ye caiva sāttvikā bhāvā
라자사스 따마사스 짜 예 rājasās tāmasāś ca ye
맛따 에베띠 딴 빋디 matta eveti tān viddhi
나 뜨바함 떼슈 떼 마이 na tv ahaṁ teṣu te mayi

동의어

예: 모든 것, 짜: 그리고, 에바: 분명히, 삿뜨비까하: 선성에 있는, 바바하: 존재의 상태, 라자사하: 동성에 있는, 따마사하: 암성에 있는, 짜: 또한, 예: 모든 것, 맛따하: 나로부터, 에바: 분명히, 이띠: 그래서, 딴: 그것들, 빋디: 알고자 하는, 나: 아니다, 뚜: 그러나, 아함: 나는, 떼슈: 그들 안에, 떼: 그들, 마이: 내 안에.

번역

모든 존재의 양태, 즉 선성과 동성, 그리고 암성은 나의 에너지로 현현한다는 것을 알아라. 어떤 의미에서 나는 모든 것이지만, 나는 이 모든 것에서 독립적이고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영향받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이 내 안에 있느니라.

주석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행위는 세 가지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영향받으며 행해지고 있다. 이 물질적 양태가 지고한 주, 끄리쉬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주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나라의 법에 따라 우리는 처벌받을 수 있지만, 법을 만든 왕은 그 법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처럼 물질적 본성의 모든 양태, 즉 선성(善性), 동성(動性), 그리고 암성(暗性)은 지고한 주, 끄리쉬나의 현현이지만 끄리쉬나께서는 그 물질적 본성에 좌우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주는 니르구나(nirguṇa)로, 구나(guṇa), 즉 양태가 당신에게서 나왔지만 그것이 당신께 영향을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바가반, 즉 최고인격신의 특성이다.

원문

뜨리비르 구나-마야이르 바바이르 tribhir guṇa-mayair bhāvair
에비 사르밤 이담 자갓 ebhiḥ sarvam idaṁ jagat
모히땀 나비자나띠 mohitaṁ nābhijānāti
맘 에뱌 빠람 아뱌얌 mām ebhyaḥ param avyayam

동의어

뜨리비히: 세 가지, 구나-마야이히: 구나를 구성하고 있는, 바바이히: 존재의 양태에 의해, 에비히: 이 모든 것, 사르밤: 전체, 이담: 이것, 자갓: 우주, 모히땀: 현혹된, 나 아비자나띠: 모른다, 맘: 나를, 에뱌하: 이것을 초월한, 빠람: 절대자, 아비아얌: 소멸하지 않는.

번역

세 가지 양태, 선성과 동성, 그리고 암성에 현혹된 온 세상이 이 양태를 초월한 불멸의 나를 모르느니라.

주석

온 세상이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에 현혹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양태 때문에 혼동하는 자들은 이 물질적 본성을 넘어선 지고한 주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다.

물질적 본성의 영향을 받는 모든 생명체는 일정한 형태의 몸을 가지고 그에 따른 심리적, 생리적 활동을 한다. 세 가지 물질적 양태 속에서 활동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순수하게 선성의 양태에 있는 사람들을 브라흐마나라고 하며, 순수하게 동성의 양태에 있는 사람들을 끄샤뜨리야라고 한다. 동성과 암성 둘다에 있는 사람을 바이샤라고 하며, 완전한 무지 속에 있는 사람을 슈드라라고 한다. 그보다 낮은 것은 동물이거나 동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영원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 나는 브라흐마나나 끄샤뜨리야, 혹은 바이샤든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어떠한 경우든 인생은 일시적이다. 삶이 일시적이고 다음 생에 무엇이 될지 모르는데도, 우리는 환영 에너지의 마력 때문에 삶의 육체적 개념에 갇혀 자신을 스스로 미국인, 인도인, 러시아인, 또는 브라흐마나, 힌두교도, 이슬람교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얽히면 이 모든 양태의 배후에 계시는 최고인격신을 잊게 된다. 그래서 주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러한 세 가지 양태에 현혹된 생명체들은 물질적 현상의 배후에 최고인격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고 하셨다.

여러 종류의 생명체가 있고, 인간, 데바, 동물 등 이들 각각은 물질적 본성의 영향을 받으며 그들 모두 초월적 인격신을 망각하고 있다. 동성과 암성의 양태에 있는 자들, 심지어 선성의 양태에 있는 자들도 절대 진리의 비인성적 브라흐만 개념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아름다움, 부, 지식, 힘, 명성, 그리고 버림을 지닌 인성적 특성을 갖추신 지고한 주 앞에서 혼란에 빠진다. 선성에 있는 자들조차 이를 이해할 수 없는데, 동성과 암성에 있는 자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끄리쉬나 의식은 이 모든 세 가지 물질적 본성의 양태를 초월하며, 진정으로 끄리쉬나 의식을 갖춘 자들은 실제로 해방된 것이다.

원문

다이비 혜샤 구나-마이 daivī hy eṣā guṇa-mayī
마마 마야 두라땨야 mama māyā duratyayā
맘 에바 예 쁘라빠댠떼 mām eva ye prapadyante
마얌 에땀 따란띠 떼 māyām etāṁ taranti te

동의어

다이비: 초월적인, 히: 확실히, 에샤: 이것, 구나-마이: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를 구성하는, 마마: 나의, 마야: 에너지, 두라땨야: 극복하기 아주 어려운, 맘: 나에게, 에바: 분명히, 예: 하는 자, 쁘라빠댠떼: 항복하다, 마얌 에땀: 이 환영 에너지, 따란띠: 극복하다, 떼: 그들.

번역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를 구성하고 있는, 나의 이 신성한 에너지는 극복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항복한 자들은 그것을 쉽게 넘어설 수 있느니라.

주석

최고인격신은 무수한 에너지를 가지시며 이 모든 에너지는 신성하다. 생명체는 당신이 가지신 에너지의 일부여서 신성하더라도 물질적 에너지와의 접촉 때문에 그들 원래의 더 높은 힘이 가려져 있다. 따라서 물질적 에너지에 가려진 우리가 그 영향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하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물질적 본성과 영적 본성은 모두 최고인격신에게서 발현된 것이므로 영원하다. 생명체들은 주의 영원한 상위적 본성에 속하지만 하위적 본성, 즉 물질에 오염되어 그들의 환영 또한 영원하다. 그러므로 속박된 영혼은 니따-받다(nitya-baddha), 즉 영원히 속박된 자라고 한다. 그 누구도 물질계의 역사상 어떤 날에 우리가 속박되었는지 그 역사를 추적할 수 없다. 따라서 물질적 에너지가 주의 하위 에너지라 하더라도, 물질적 본성의 손아귀에서 해방되는 것은 몹시 어려운데,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생명체가 극복할 수 없는 지고한 의지로 물질적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위 물질적 본성은 신성한 의지와 신성한 관련을 맺고 작용하고 있어 신성한 본성으로 정의된다. 비록 하위이지만, 신성한 의지로 움직이는 물질적 본성은 우주적 발현의 생성과 소멸을 너무나 훌륭히 관할하고 있다. 베다는 다음과 같이 이것을 확증한다. “마얌 뚜 쁘라끄리띰 비댠 마이남 뚜 마헤스바람(māyāṁ tu prakṛtiṁ vidyān māyinaṁ tu maheśvaram), 비록 마야(환영)는 거짓이고 일시적이지만, 마야의 배후는 지고의 마술사이며 지고의 통제자, 마헤스바라(Maheśvara)라는 인격신이다(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4.10).”

구나의 또 다른 의미는 밧줄이다, 속박된 영혼은 환영의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손발이 묶인 자는 꼼짝할 수가 없다. 그는 묶이지 않은 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묶인 자는 묶인 자를 도울 수 없기에 구조자는 풀린 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주 끄리쉬나와 그의 진정한 대표자인 영적 스승만이 속박된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한 상위의 도움 없이, 우리는 물질적 본성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봉헌, 즉 끄리쉬나 의식은 우리가 그러한 해방을 얻도록 돕는다. 환영 에너지의 주인인 끄리쉬나는 이 무한한 에너지에게 속박된 영혼을 풀어주라고 명령하실 수 있다. 당신은 항복한 영혼에게 원인 없는 자비로, 그리고 원래 주의 사랑하는 자식인 생명체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애정 때문에 그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주의 연꽃 같은 발아래 항복하는 것은 엄격한 물질적 본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다.

맘 에바(mām eva)라는 말 또한 중요하다. 맘이란 브라흐마와 시바가 아닌, 오직 끄리쉬나(비쉬누)에게만을 의미한다. 브라흐마와 시바가 아주 높고 비쉬누와 거의 같은 수준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라조-구나(rajo-guṇa 동성)와 따모-구나(tamo-guṇa 암성)의 화신이어서 속박된 영혼들을 마야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킬 수 없다. 다른 말로, 브라흐마와 시바 역시 마야의 영향을 받는다. 베다(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3.8)에서 이것을 “땀 에바 비디뜨바(tam eva viditvā)”라고 확증한다. 즉, “자유는 오직 끄리쉬나를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주 시바조차도 해방은 오직 비쉬누의 자비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주 시바가 말하기를, “묵띠-쁘라다따 사르베샴 비쉬누레바 나 삼샤야하(mukti-pradātā sarveṣāṁ viṣṇur eva na saṁśayaḥ)”, 즉 “비쉬누가 모든 이에게 해방을 주는 구원자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문

나 맘 두쉬끄리띠노 무다하 na māṁ duṣkṛtino mūḍhāḥ
쁘라빠댠떼 나라다마하 prapadyante narādhamāḥ
마야야빠흐리따-갸나 māyayāpahṛta-jñānā
아수람 바밤 아스리따하 āsuraṁ bhāvam āśritāḥ

동의어

나: 아니다, 맘: 나에게, 두쉬끄리띠나하: 악한들, 무다하: 어리석은, 쁘라빠댠떼: 항복하다, 나라-아다마하: 인류에서 가장 비천한, 마야야: 환영 에너지에 의해, 아빠흐리따: 빼앗긴, 갸나하: 그 지식, 아수람: 악마의, 바밤: 본성, 아스리따하: 받아들이는.

번역

크게 어리석고, 인간 중에서 가장 낮으며, 지식이 환영에 빼앗겨 버렸고, 악마들의 무신론적 천성을 가지고 있는 악한들은 나에게 항복하지 않느니라.

주석

단지 최고인격신의 연꽃 같은 발에 항복함으로써 우리는 물질적 본성의 엄격한 법칙을 극복할 수 있다고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했다. 이 점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학식 있는 철학자, 과학자, 경영인, 행정가,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지도자들은 왜 전능하신 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에 항복하지 않는가? 묵띠, 즉 물질적 본성의 법칙에서 해방됨은 인류의 지도자들이 아주 많은 생과 세월을 거치며 장대한 계획과 인내로써 여러 방식으로 추구해 온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그저 최고인격신의 연꽃 같은 발에 항복함으로써 가능하다면 이러한 지성 있고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들이 왜 이렇게 단순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 것인가?

기따는 이 질문에 아주 솔직하게 답한다. 브라흐마, 시바, 까삘라, 꾸마라, 마누, 비아사, 데발라, 아시따, 자나까, 쁘라흘라다, 발리, 그리고 나중에 마드바짜리아, 라마누자짜리아, 스리 짜이따냐,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과 신뢰할 수 있는 철학자들, 정치가들, 과학자들같이 학식을 갖춘 사회의 진정한 지도자들은 전능한 권위, 지고한 인간의 연꽃 같은 발에 항복한다. 진정한 철학자, 과학자, 교육자, 행정가 등이 아니면서 물질적 이득을 보려고 자신들을 그러한 위치라고 내세우는 자들은 지고한 주의 계획과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의 세속적 계획을 만들어 내고, 결과적으로 물질적 존재의 문제들을 풀고자 하는 헛된 노력으로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물질 에너지(본성)는 너무나 강해서 무신론자들의 공인되지 않은 계획들을 거부하고 “기획 위원회”의 계획을 좌절시킨다.

무신론적 계획쟁이들은 여기에서 두쉬끄리띠나하(duṣkṛtinaḥ), 즉 “악한들”이란 말로 묘사되었다. 끄리띠(Kṛtī)란 이로운 일을 행한 사람이란 뜻이다. 좋든 나쁘든 거대한 계획은 반드시 지성이 필요하기에 무신론적이고 계획 세우기에만 전념하는 자들은 때때로 매우 학식 있고 나름의 장점도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의 두뇌는 지고한 주의 계획에 반대하는 데 잘못 활용되기 때문에 무신론적 계획쟁이를 두쉬끄리띠(duṣkṛtī)라고 하며, 이것은 그의 지성과 노력이 잘못된 곳에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기따에서 물질 에너지는 지고한 주의 지시에 따라 완전하게 움직인다고 분명히 언급되었다. 물질 에너지는 자체의 독립된 권위가 없다. 그것은 그림자가 물체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듯이 작용한다. 그렇지만 물질 에너지는 매우 강력하고, 무신론자는 그의 무신론적 성향 탓에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지고한 주의 계획도 알 수 없다. 환영과 동성, 암성의 영향으로 그의 모든 계획은 좌절되는데, 그 예로 히란야까시뿌와 라바나의 경우, 그들은 모두 물질적으로 과학자, 철학자, 행정가, 그리고 교육자처럼 학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들의 계획이 산산이 조각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두쉬끄리띠나, 즉 악한들은 아래와 같이 네 가지 유형이 있다.

(1) 무다(mūḍha)는 짐을 지고 열심히 일하는 짐승들처럼, 크게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노동의 결실을 자기들만 즐기려고 하고, 절대자와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짐을 지는 짐승의 전형적인 예는 노새이다. 이 초라한 짐승은 일을 아주 열심히 하게끔 주인에게 명령받는다. 노새는 누구를 위해 밤낮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를 전혀 모른다. 노새는 그저 짚 한 다발로 배를 채우는 데 만족하고, 주인에게 매 맞는 두려움 속에서 잠깐 잠을 자고, 상대방에게 계속 차이면서도 성욕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노새는 때로 시를 짓고 철학을 말하지만, 이렇게 우는 소리는 오직 다른 사람들을 방해할 뿐이다. 이것이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 모르는 어리석은 일꾼의 처지이다. 그는 까르마(행위)는 야갸(희생)를 위한 것임을 모른다.

스스로 만든 의무의 짐을 덜고자 밤낮으로 아주 열심히 일하는 자들은 생명의 영원함에 관해 들을 시간이 없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한 무다에게는 없어질 물질적 이득이 삶의 전부이다. 무다들은 노동의 결실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을 즐긴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때때로 결실을 얻으려고 여러 밤낮을 잠자지 않고 보내며, 위궤양이나 소화불량이 있어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일하는 데 만족한다. 그들은 환영의 주인들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데만 몰두한다. 자기들의 진정한 주인을 모르는 이러한 어리석은 일꾼들은 귀중한 시간을 부를 섬기는 데 낭비한다. 불행히도, 그들은 모든 주인의 최고 주인에게 절대 항복하지 않고, 올바른 출처에서 절대자에 관해 듣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더러운 흙을 먹는 돼지는 설탕과 버터로 만든 과자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꾼들은 깜빡하고 마는 세속의 쾌락적 보도와 정보에 관해서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들을 것이다.

(2) 또 다른 부류의 두쉬끄리띠, 즉 악한을 나라다마(narādhama), 즉 가장 낮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한다. 나라(nara)는 인간을 의미하고, 아다마(adhama)는 가장 낮은 것을 의미한다. 8백 40만 종의 서로 다른 생명들 중에서 40만 종의 인간이 있다. 이 중에서 대개 문명화되지 않은 낮은 형태의 인간이 많이 있다. 문명화된 인간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생활을 규정하는 법칙을 갖추고 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는 발전했지만, 종교적 원칙이 없는 자들은 나라다마로 여겨져야 한다. 종교적 원칙을 따르는 목적은 지고의 진리와 그와 인간의 관계를 아는 것이므로 절대신에 관한 깨달음이 없으면 종교가 아니다. 기따에서 인격신께서 당신을 초월한 권위는 존재하지 않고 당신이 지고의 진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문명화된 형태의 인간 삶은 지고의 진리이자 전능하신 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와 자기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잃어버린 의식을 부활하기 위함이다. 이 기회를 놓치는 누구나 나라다마로 분류된다. 아기가 어머니 자궁 속(극도로 불편한 상황)에 있을 때, 아기는 절대신께 그곳에서 나가게 해달라며 기도하고, 그곳에서 나가자마자 오직 당신만을 섬길 것을 약속한다는 정보를 우리는 밝혀진 경전을 통해 얻는다. 어려움에 부닥칠 때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본능인데, 그 이유는 우리는 각자 절대신과 영원히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는 태어나는 즉시 출생의 어려움을 잊고, 자기를 구제한 자도 잊으며 마야, 환영 에너지에 영향을 입고 만다.

잠재하고 있는 신성한 의식을 부활하는 것은 아이를 돌보는 자의 의무이다. 종교 원칙 안내서인 마누 스므리띠에 규정된 열 가지의 교화 의식(의례)는 바르나스라마 체계 속에서 신 의식을 부활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현 세상 어디에서도 이것을 엄격히 따르지 않기 때문에 99.9%의 인구는 나라다마이다.

전 인구가 나라다마가 될 때, 소위 그들의 교육은 당연히 물리적 자연의 강력한 에너지에 의해 수포가 되게 마련이다. 기따의 표준에 따르면, 학식 있는 자란 배운 브라흐마나, 개, 소, 코끼리, 그리고 개를 먹는 자를 모두 똑같이 보는 자이다. 이것이 진정한 헌애자의 시각이다. 신성한 스승이신 절대신의 화신, 스리 니땨난다 쁘라부께서는 전형적인 나라다마 자가이와 마다이 형제를 구원하시고, 진정한 헌애자의 자비가 어떻게 가장 낮은 인간에게도 전해지는지를 보이셨다. 그래서 인격신께 비난받는 나라다마도 오직 헌애자의 자비로 영적 의식을 부활할 수 있다.

바가바따 다르마(bhāgavata-dharma), 즉 헌애자들의 행위를 전파하신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사람들에게 인격신의 메시지를 순종적으로 들을 것을 권고하셨다. 이 메시지의 핵심이 바가바드 기따이다. 인간 중 가장 낮은 인간들은 오직 순종적으로 듣는 과정을 통해 구원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이러한 메시지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데 하물며 지고한 주의 뜻에 항복함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라다마, 즉 가장 낮은 인간은 인간의 주된 의무를 전적으로 무시한다.

(3) 두쉬끄리띠의 다음 부류는 마야야빠흐리따 갸나하(māyayāpahṛta-jñānāḥ), 즉 환영의 물질 에너지 영향으로 박식한 지식이 쓸모없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매우 학식 있는 사람들인 위대한 철학자, 시인, 지식인, 과학자 등이지만 환영 에너지가 그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지도하기에 지고한 주께 항복하지 않는다.

현재에 많은 수의 마야야빠흐리따 갸나하들이 있고 심지어 바가바드 기따의 학자들 사이에도 있다. 기따에서, 평이하고 간단한 언어로 스리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이라고 명시한다. 끄리쉬나와 동등하거나 더 큰 것은 없다. 그는 모든 인간의 원래 아버지인 브라흐마의 아버지로 언급되었다. 사실, 스리 끄리쉬나는 브라흐마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종, 모든 생명의 아버지이다. 그는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빠람아뜨마의 근원이다. 모든 생명체 안에 계신 초영혼은 그의 전체적 확장 중 부분이다. 그는 모든 것의 원천이며 모든 이는 그의 연꽃 같은 발에 항복할 것을 권고받는다. 이렇게 분명한 제시가 있지만, 마야야빠흐리따-갸나하는 지고한 주의 인성을 조롱하고 그를 단지 또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축복받은 형태인 인간의 삶이 영원하고 초월적 특징을 지닌 지고한 주를 추구할 목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빠람빠라 체계에서 벗어난 마야야빠흐리따 갸나하 부류가 쓴 공인되지 않은 기따 해석은 영적 이해의 길에 여러 장애물이다. 혼란에 빠진 해석자들은 스리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에 항복하지도, 다른 사람들이 이 원칙을 따르도록 가르치지도 않는다.

(4) 두쉬끄리띠의 마지막 부류를 아수람 바밤 아스리따하(āsuraṁ bhāvam āśritāḥ), 즉 악마의 원칙으로 사는 자들이라 부른다. 이 부류는 노골적인 무신론자이다. 그들 중 일부는 어떤 확실한 증거없이, 지고한 주가 물질계에 강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따에 분명히 나와 있음에도, 끄리쉬나를 비인성적 특성에 종속시키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고인격신을 시기하는 무신론자는 자기 머리에서 제조해낸 여러 무허가 화신들을 내세운다. 그러한 사람들의 삶의 원칙은 인격신을 비난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스리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아래 항복할 수 없다.

남인도의 스리 야무나짜리아 알라반다루(Śrī Yāmunācārya Ālabandaru)가 말씀하시기를, “오 나의 주여! 당신의 비범한 특성과 형상, 그리고 행위에도 불구하고, 선성에 있는 밝혀진 모든 경전에서 당신의 인성을 찾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초월적 과학의 깊은 지식과 성스러운 성품으로 알려진 유명한 권위자들이 당신의 존재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무신론적 이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인식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된 (1) 크게 어리석은 사람들, (2) 아주 낮은 인간들, (3) 현혹된 사상가들, 그리고 (4) 공언하는 무신론자들은 모든 경전적, 권위적 조언을 무시하고 인격신의 연꽃 같은 발에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원문

짜뚜르-비다 바잔떼 맘 catur-vidhā bhajante māṁ
자나 수끄리띠노’르주나 janāḥ su-kṛtino ’rjuna
아르또 지갸수 아르타르티 ārto jijñāsur arthārthī
갸니 짜 바라따르샤바 jñānī ca bharatarṣabha

동의어

짜뚜르-비다: 네 가지 종류의, 바잔떼: 봉헌하다, 맘: 나에게, 자나하: 사람들, 수-끄리띠나하: 경건한 자들,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아르따하: 불행한 자들, 지갸수후: 호기심 있는 자들, 아르타-아르티: 물질적 이득을 바라는 자들, 갸니: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아는 자들, 짜: 또한, 바라따-리샤바: 바라따 후손 가운데 위대한 자여.

번역

오 바라따 가문의 최고여, 네 종류의 경건한 사람들이 나에게 봉헌을 시작하느니라. 괴로운 자, 부를 바라는 자, 호기심 많은 자, 그리고 절대자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바로 그들이다.

주석

악한들과 달리, 경전에 규정된 원칙을 고수하는 자들을 수끄리띠나하(su-kṛtinaḥ)라고 하며, 그들은 경전의 규칙과 규정, 윤리와 사회적 법규를 준수하고 어느 정도 지고한 주께 헌신한다. 이들 가운데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가끔 괴로운 자들, 돈이 필요한 자들, 호기심 있는 자들, 절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상태에서 봉헌하려고 지고한 주께 다가온다. 이들은 봉헌을 대가로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어서 순수한 헌애자가 아니다. 순수한 봉헌은 갈망과 물질적 이득을 위한 욕심이 없다. 박띠 라삼리따 신두(1.1.11)는 순수한 헌애(devotion)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야빌라쉬따-슌얌 anyābhilāṣitā-śūnyaṁ
갸나-까르마댜나브리땀 jñāna-karmādy-anāvṛtam
아누꿀례나 끄리쉬나누 ānukūlyena kṛṣṇānu-
실라남 박띠르 웃따마 śīlanaṁ bhaktir uttamā

“우리는 지고한 주 끄리쉬나를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를 호의적으로 해야 하며, 결실을 바라는 행위나 철학적 추측을 통해 물질적 혜택이나 이득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지고한 주께 다가가 봉헌하고 순수한 헌애자와의 교제로 완전히 정화될 때, 그들 역시 순수한 헌애자가 된다. 악한들에 관해 보자면, 그들의 삶은 이기적이고 불규칙적이며 영적 목표가 없어 그들이 봉헌하기란 몹시 어렵다. 그러나 우연히라도 순수한 헌애자와 접촉하게 되면 그중 일부마저 순수한 헌애자가 된다.

결실적 행위로 항상 바쁜 자들은 물질적 불행 속에서 주를 찾게 되고, 그때 순수한 헌애자와 접촉하게 되며 괴로움 안에서 주의 헌애자가 된다. 좌절에 빠진 자들도 때때로 순수한 헌애자와 접촉하게 되고 절대신에 관해 알고자 호기심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메마른 철학자들이 지식의 각 분야에서 좌절하게 될 때, 때때로 절대신에 관해 배우고자 하며, 지고한 주께 다가가 봉헌하고, 그 결과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국부화된 빠람아뜨마의 지식을 넘어서, 지고한 주와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의 은총으로 절대신에 관해 인성적 개념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불행에 처한 자들, 호기심 있는 자들,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 그리고 돈이 필요한 자들이 모든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 물질적 이득이 영적 발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완전하게 이해할 때, 순수한 헌애자가 된다. 이렇게 정화된 경지에 도달하지 않는 한, 헌애자가 주의 초월적 봉헌에 종사하더라도 결실적 행위와 세속적 지식 추구 등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순수한 경지의 봉헌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넘어서야 한다.

원문

떼샴 갸니 니땨-육따 teṣāṁ jñānī nitya-yukta
에까-박띠르 비시샤떼 eka-bhaktir viśiṣyate
쁘리요 히 갸니노’땨르탐 priyo hi jñānino ’tyartham
아함 사 짜 마마 쁘리야하 ahaṁ sa ca mama priyaḥ

동의어

떼샴: 그들 중에서, 갸니: 완전한 지식을 갖춘 자, 니땨-육따하: 항상 종사하는, 에까: 오직, 박띠히: 봉헌에, 비시샤떼: 특별한, 쁘리야하: 아주 친애하는, 히: 확실히, 갸니나하: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아땨르탐: 높이, 아함: 나는, 사하: 그는, 짜: 또한, 마마: 나에게, 쁘리야하: 소중한.

번역

이 중에서 완전한 지식을 갖추고 항상 순수한 봉헌에 종사하는 자가 최고이다. 그 이유는 나는 그에게 아주 소중하고, 그는 나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주석

모든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면 괴로운 자들, 호기심 있는 자들, 가난한 자들, 그리고 지고의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 모두 순수한 헌애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절대 진리의 지식을 갖추고 모든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자는 진정 주의 순수한 헌애자가 된다. 네 부류 중에서 완전한 지식으로 봉헌에 종사하는 헌애자가 최고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자아가 물질적 육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빠람아뜨마의 지식에 이르게 된다. 완전하게 정화가 되면 자신의 본원적 위치가 절대신의 영원한 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순수한 헌애자와의 교제로 호기심 있는 자들,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자들과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 순수해진다. 그러나 준비 단계에서 지고한 주에 관해 완전한 지식을 갖추고 동시에 봉헌하는 자는 주께 아주 소중하다. 최고인격신의 초월성에 관한 순수한 지식을 갖춘 자는 봉헌 속에서 보호받고 물질적 오염이 그를 건드릴 수 없다.

원문

우다라 사르바 에바이떼 udārāḥ sarva evaite
갸니 뜨바뜨마이바 메 마땀 jñānī tv ātmaiva me matam
아스티따 사 히 육따뜨마 āsthitaḥ sa hi yuktātmā
맘 에바눗따맘 가띰 mām evānuttamāṁ gatim

동의어

우다라하: 관대한, 사르바: 모든, 에바: 분명히, 에떼: 이러한, 갸니: 지식을 가진 자, 뚜: 그러나, 아뜨마 에바: 꼭 나와 같이, 메: 나의, 마땀: 의견, 아스티따하: 위치한, 사하: 그는, 히: 확실히, 육따-아뜨마: 봉헌에 종사하는, 맘: 나에게, 에바: 분명히, 아눗따맘: 가장 높은, 가띰: 목적지.

번역

이 헌애자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관대한 영혼이지만, 나에 관한 지식을 갖춘 자를 나는 바로 나로 여기느니라. 나의 초월적 봉사에 종사하면 반드시 가장 높고 가장 완벽한 목표인 나를 얻을 것이다.

주석

지식을 덜 갖춘 헌애자가 주께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목적을 갖든 주께 오는 자는 마하뜨마(mahatma), 즉 위대한 영혼이므로 그 모든 자는 관대하다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봉헌을 통해 어떠한 혜택을 바라는 헌애자도 주께서 받아들이시는데, 거기에도 애정의 교환이 있기 때문이다. 애정을 가지고 그들은 어떤 물질적 혜택을 주께 부탁하고, 그것을 얻게 되면 그들은 아주 만족하고 또한 봉헌의 길에서 전진한다. 그러나 완전한 지식을 갖춘 헌애자가 주께 아주 소중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과 헌신으로 지고한 주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헌애자는 단 일초라도 지고한 주를 위한 봉사나 교류 없이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고한 주는 당신의 헌애자를 매우 어여삐 여기시고 그들과 떨어질 수 없다.

스리마드 바가바땀(9.4.68)에서 주께서 말씀하신다.

사다보 흐리다얌 마햠 sādhavo hṛdayaṁ mahyaṁ
사두남 흐리다얌 뜨바함 sādhūnāṁ hṛdayaṁ tv aham
맏-안얏 떼 나 자난띠 mad-anyat te na jānanti
나함 떼뵤 마나가삐 nāhaṁ tebhyo manāg api

“헌애자는 항상 내 가슴속에 있으며, 나는 항상 헌애자의 가슴속에 있다. 헌애자는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 역시 헌애자를 잊을 수 없다. 나와 순수한 헌애자 사이에는 매우 친밀한 관계가 있다. 완전한 지식을 갖춘 순수한 헌애자는 절대 영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나에게 아주 소중하다.”

원문

바후남 잔마남 안떼 bahūnāṁ janmanām ante
갸나반 맘 쁘라빠댜떼 jñānavān māṁ prapadyate
바아수데바 사르밤 이띠 vāsudevaḥ sarvam iti
사 마하뜨마 수-둘라바하 sa mahātmā su-durlabhaḥ

동의어

바후남: 많은, 잔마남: 반복된 생과 사, 안떼: 후에, 갸나-반: 완전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자, 맘: 나에게, 쁘라빠댜떼: 항복한다, 바아수데바하: 인격신 끄리쉬나, 사르밤: 모든 것, 이띠: 그러므로, 사하: 그것, 마하-아뜨마: 위대한 영혼, 수-둘라바하: 아주 드물게 보인다.

번역

많은 삶과 죽음을 거친 후, 실제로 지식을 갖춘 자는 내가 모든 원인의 원인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기에 나에게 항복한다. 이런 위대한 영혼은 아주 드물다.

주석

생명체는 많고 많은 생을 거친 다음 초월적 제례 의식이나 봉헌을 수행하면서, 최고인격신이 영적 깨달음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초월적이고 순수한 지식에 이르게 된다. 영적 깨달음의 첫 단계 때, 물질주의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비인성주의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기도 하지만, 더 진보하게 될 때 그는 영적 삶의 행위가 있고 이러한 행위들이 봉헌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을 깨달은 다음, 최고인격신에 애착을 갖게 되고 당신께 항복한다. 바로 그때, 주 스리 끄리쉬나의 자비가 모든 것이고, 모든 원인의 원인이며 이 물질계의 현상이 당신에게서 독립된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물질계는 영적 다양성의 왜곡된 투영이며 모든 것이 지고한 주 끄리쉬나와 관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것을 바아수데바(Vāsudeva), 즉 스리 끄리쉬나와의 관계에서 생각한다. 바아수데바에 관한 이러한 보편적 시각은 최상의 목표로서 지고한 주 스리 끄리쉬나께 우리가 완전히 항복하게 촉진한다. 그렇게 항복한 위대한 영혼은 무척 드물다.

이 절은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의 세 번째 장(14, 15절)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사하스라-시르샤 뿌루샤하 sahasra-śīrṣā puruṣaḥ
사하스락샤 사하스라-빳 sahasrākṣaḥ sahasra-pāt
사 부밈 비스바또 브리뜨바 sa bhūmiṁ viśvato vṛtvā- 
땨띠쉬탇 다샹굴람 tyātiṣṭhad daśāṅgulam
뿌루샤 에베담 사르밤 puruṣa evedaṁ sarvaṁ
얃 부땀 얏 짜 바뱜 yad bhūtaṁ yac ca bhavyam
우땀리땃바셰샤노 utāmṛtatvasyeśāno
얃 안네나띠로하띠 yad annenātirohati

“주 비쉬누께서는 수천 개의 머리와 수천 개의 눈과 수천 개의 발을 가지고 계신다. 당신은 전 우주를 완전히 포함하시고 여전히 그것보다 열 손가락 너비만큼 더 크시다. 당신은 실제로 전 우주이다. 당신은 모든 것이었고 앞으로의 모든 것이다. 당신은 불멸의 주이고 음식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모든 존재이다.” 찬도갸 우빠니샤드(5.1.15)에 이르기를, “나 바이 바쪼 나 짝슘쉬 나 스로뜨라니 나 마남시땨짝샤떼 쁘라나 이띠 에바짝샤떼 쁘라노 혜바이따니 사르바니 바반띠(na vai vāco na cakṣūṁṣi na śrotrāṇi na manāṁsīty ācakṣate prāṇa iti evācakṣate prāṇo hy evaitāni sarvāṇi bhavanti), 즉 생명체의 몸 안에서 말하는 힘, 보는 힘, 듣는 힘, 생각하는 힘 중 어떤 것도 핵심 요소가 아니다. 모든 행위의 중심은 바로 생명이다.” 마찬가지로 주 바아수데바, 즉 인격신 주 스리 끄리쉬나가 모든 것의 핵심체이다. 이 육신에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힘 등이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지고한 주와 연관되지 않으면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바아수데바는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시고, 모든 것은 바아수데바이므로 헌애자는 완전한 지식으로 항복한다(참조 바가바드 기따 7.17과 11.40).

원문

까마이스 따이스 따이르 흐리따-갸나하 kāmais tais tair hṛta-jñānāḥ
쁘라빠댠뗀’야-데바따하 prapadyante ’nya-devatāḥ
땀 땀 니야맘 아스타야 taṁ taṁ niyamam āsthāya
쁘라끄리땨 니야따 스바야 prakṛtyā niyatāḥ svayā

동의어

까마이히: 욕망에 의해, 따이히 따이히: 다양한, 흐리따: 빼앗긴, 갸나하: 지식, 쁘라빠댠떼: 항복하다, 안야: 다른 것에, 데바따하: 데바들, 땀 땀: 상응하는, 니야맘: 규칙들, 아스타야: 따르는, 쁘라끄리땨: 본성에 의해, 니야따하: 통제된, 스바야: 자신이 가진 것에 의한.

번역

물질적 욕망에 지성을 빼앗긴 자들은 데바들에게 항복하고, 그들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특정한 규칙과 규정으로 제사를 지내느니라.

주석

모든 물질적 오염에서 벗어난 자들은 지고한 주께 항복하고 당신을 향한 봉헌에 종사한다. 물질적 오염을 완전히 씻어내지 않으면 그들은 천성적으로 헌애자가 아니다. 하지만 비록 물질적 욕망을가지고 있더라도 지고한 주께 의존하는 자들은 외적인 것들에 그다지 사로잡히지 않는다. 올바른 목표에 접근하고 있기에 그들은 곧 모든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서 모든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순수한 헌애자이든, 물질적 욕망으로 가득 찬 자이든, 물질적 더러움에서 해방을 구하는 자이든, 어떠한 경우에도 바아수데바께 항복하고 그를 숭배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바가바땀에 이렇게 명시한다(2.3.10).

아까마 사르바-까모 바 akāmaḥ sarva-kāmo vā
목샤-까마 우다라-디히 mokṣa-kāma udāra-dhīḥ
띠브레나 박띠-요게나 tīvreṇa bhakti-yogena
야제따 뿌루샴 빠람 yajeta puruṣaṁ param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자들은 물질적 욕망을 재빨리 충족시키고자 데바들에게 은신한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최고인격신에게 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낮은 물질적 본성(암성과 동성) 안에 있어서이고, 따라서 여러 데바를 숭배한다. 숭배의 규칙과 규정을 따르며 그들은 흡족해한다. 데바 숭배자들의 동기는 작은 욕망에 있고 그들은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지고한 주의 헌애자는 오도되지 않는다. 베다 문헌에서 서로 다른 목적(예를 들어 병든 자는 태양을 숭배하도록 권고받는다)을 위해 서로 다른 데바를 숭배하라는 권고가 있어서 주의 헌애자가 아닌 자들은 특정 목적을 위해서는 데바들이 지고한 주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수한 헌애자는 지고한 주 끄리쉬나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짜이따냐 짜리땀리따(아디 5.142)에서 말하기를, “에깔레 이스바라 끄리쉬나, 아라 사바 브흐리땨(ekale īśvara kṛṣṇa, āra saba bhṛtya).” 오직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가 주인이고 다른 모든 이는 종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헌애자는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데바들에게 절대 가지 않는다. 헌애자는 지고한 주께 의지한다. 그리고 순수한 헌애자는 주가 주시는 어떠한 것에든 만족한다.

원문

요 요 얌 얌 따눔 박따하 yo yo yāṁ yāṁ tanuṁ bhaktaḥ
스랃다야르찌뚬 잇차띠 śraddhayārcitum icchati
따샤 따샤짤람 스랃담 tasya tasyācalāṁ śraddhāṁ
땀 에바 비다다먀함 tām eva vidadhāmy aham

동의어

야하 야하: 누구든지, 얌 얌: 어디에서든지, 따눔: 데바의 형상, 박따하: 헌애자, 스랃다야: 믿음을 갖고, 아르찌뚬: 숭배하다, 잇차띠: 바라다, 따샤 따샤: 그에게, 아짤람: 꾸준한, 스랃담: 믿음, 땀: 그것, 에바: 반드시, 비다다미: 주다, 아함: 나는.

번역

나는 모든 이의 가슴속에 초영혼으로 있다. 어떤 자가 데바를 숭배하고자 하면 나는 그의 믿음을 꾸준하게 해서 그 특정 데바에게 헌신할 수 있게 해 주느니라.

주석

절대신은 모두에게 독립성을 주셨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물질적 쾌락을 즐기고자 세속적 데바에게 그러한 편의를 성심을 다해 얻으려고 한다면 모든 이의 가슴속에 초영혼으로 계시는 지고한 주께서는 그것을 이해하시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부여하신다. 모든 생명체의 지고한 아버지로서 주는 그들의 독립성에 참견하지 않으시지만, 그들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여러 편의를 제공하신다. 전능하신 절대신이 왜 생명체가 이 물질계를 즐기도록 편의를 제공하시어 그들이 환영 에너지의 덫에 빠져들게 하시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답은 만약 초영혼으로서의 지고한 주께서 그러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으시면 독립성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두에게 무엇을 원하든지 완전한 독립성을 부여하시지만, 바가바드 기따에서 우리는 당신의 궁극적 가르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다른 모든 일을 버리고 그에게 전적으로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생명체와 데바들 모두 최고인격신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자기 욕망에 따라 데바를 숭배할 수 없고, 데바들 역시 지고의 뜻 없이는 어떠한 축복도 내려줄 수 없다. 풀잎 하나도 최고인격신의 의지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일반적으로, 물질계에서 괴로운 사람들은 베다의 문헌에서 권고하는 바대로 데바들에게 간다. 특정한 것을 원하는 자는 특정한 데바를 숭배한다. 예를 들어, 병든 사람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교육을 원하는 자는 배움의 신, 사라스바띠(Sarasvatī)를 숭배하며, 예쁜 아내를 얻고자 하는 자는 시바의 아내, 여신 우마(Umā)를 숭배한다.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물질적 본성에 있는 자에 따라 서로 다른 데바 숭배를 샤스뜨라(베다 경전)는 권장한다. 그리고 각 생명체는 특정한 물질적 편의를 즐기고자 하므로 주께서는 생명체가 특정 데바에게 특정 축복을 얻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느끼도록 고무하셔서 생명체는 그 축복을 성공적으로 받게 된다. 생명체가 특정 데바에게 보이는 특정한 봉헌의 태도 역시 지고한 주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다. 데바들은 생명체가 그러한 애착을 갖도록 주입시키지 못하지만, 지고한 주, 초영혼은 모든 생명체의 가슴속에 존재하셔서 끄리쉬나는 인간에게 특정 데바를 섬기도록 자극하신다. 데바들은 사실 지고한 주께서 보이시는 우주적 몸의 서로 다른 구성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독립성이 없다. 베다의 문헌이 이렇게 명시한다. “초영혼으로서의 최고인격신은 데바의 가슴속에도 존재하신다. 따라서 당신이 데바들을 통해 생명체의 욕망을 채우게끔 배려하신다. 그러나 데바와 생명체는 모두 절대자의 의지에 의존한다. 그들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원문

사 따야 스랃다야 육따스 sa tayā śraddhayā yuktas
따샤라다남 이하떼 tasyārādhanam īhate
라바떼 짜 따따 까만 labhate ca tataḥ kāmān
마야이바 비히딴 히 딴 mayaiva vihitān hi tān

동의어

사하: 그는, 따야: 그것으로, 스랃다야: 영감, 육따하: 부여받은, 따샤: 그 데바의, 아라다남: 숭배를 위한, 이하떼: 그는 갈망한다, 라바떼: 얻다, 짜: 그리고, 따따하: 그것으로부터, 까만: 그의 욕망, 마야: 나에 의해, 에바: 오직, 비히딴: 주어진, 히: 확실히, 딴: 그것들.

번역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열심히 특정 데바를 숭배하여 그의 소망을 이룬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혜택은 오직 내가 주는 것이니라.

주석

데바들은 지고한 주의 허락 없이 그들의 헌애자들에게 축복을 내릴 수 없다. 생명체는 모든 것이 지고한 주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잊을지 모르지만, 데바들은 이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데바들의 숭배와 그에 따른 결과의 성취는 데바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고인격신이 마련해주시기에 가능하다. 어리석은 생명체는 이것을 몰라 어리석게 어떤 이득을 위해 데바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순수한 헌애자는 무언가 필요할 때, 지고한 주께만 기도한다. 그러나 물질적 혜택을 요구하는 것은 순수한 헌애자의 징후가 아니다. 생명체가 데바에게 가는 것은 대개 욕망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옳지 않은 것을 바라고, 주께서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시지 않을 때, 사람들은 데바를 찾는다. 짜이따냐 짜리땀리따에서 지고한 주를 숭배하는 동시에 물질적 쾌락을 바라는 자는 모순된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지고한 주를 향한 봉헌과 데바 숭배는 같은 위치에 설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데바 숭배는 물질적이고 지고한 주를 향한 봉헌은 완전히 영적이기 때문이다.

절대신께 돌아가고자 하는 생명체에게 물질적 욕망은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들은 지고한 주의 봉헌에 종사하기보다는 물질계의 데바들 숭배를 더 선호하지만, 주의 순수한 헌애자는 이러한 어리석은 자들이 바라는 물질적 혜택을 선사 받지 않는다.

원문

안따밧 뚜 팔람 떼샴 antavat tu phalaṁ teṣāṁ
딷 바바땰빠-메다삼 tad bhavaty alpa-medhasām
데반 데바-야조 얀띠 devān deva-yajo yānti
맏-박따 얀띠 맘 아삐 mad-bhaktā yānti mām api

동의어

안따-밧: 소멸하고 마는, 뚜: 그러나, 팔람: 결실, 떼샴: 그들의, 땃: 그것, 바바띠: 되다, 알빠-메다삼: 작은 지성을 가진 자들의, 데반: 데바들에게, 데바-야자하: 데바들의 숭배자들, 얀띠: 가다, 맛: 나의, 박따하: 헌애자들, 얀띠: 가다, 맘: 나에게, 아삐: 또한.

번역

지성이 얕은 자들은 데바들을 숭배하며, 그들의 결실은 한정적이고 일시적이다. 데바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데바들의 행성에 가지만, 나의 헌애자들은 궁극적으로 가장 높은 내 행성에 이른다.

주석

바가바드 기따의 일부 논평가들은 데바를 숭배하는 자도 지고한 주께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서 태양 숭배자는 태양에 가고, 달의 숭배자는 달에 가는 것처럼 데바들의 숭배자는 다양한 데바가 사는 서로 다른 행성 체계로 간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이처럼 인드라와 같은 데바를 숭배하고자 하는 자는 그 특정 데바의 행성에 이를 수 있다. 어떤 데바를 숭배하는지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최고인격신에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부정되고 있는 이유는 데바들의 숭배자는 이 물질계에서 다양한 행성에 가지만 지고한 주의 헌애자는 최고인격신의 지고한 행성에 바로 간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데바들이 지고한 주의 몸 부분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숭배함으로써 똑같은 목적이 달성되어야 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데바들의 숭배자들은 지성이 부족하기에 신체의 어느 부위에 음식을 집어넣어야 할지 모른다. 일부는 너무나 어리석게도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신체 부위와 방법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리 바람직한 주장이 아니다. 누가 음식을 귀 또는 눈에 집어넣을 수가 있는가? 그들은 여러 데바가 지고한 주의 우주적 몸의 서로 다른 부위라는 것을 모르고 그러한 무지 탓에 각 데바가 독립된 신이며 지고한 주의 경쟁자라고 믿는다.

데바들만 지고한 주의 부분인 것이 아니라, 보통의 생명체들 또한 마찬가지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따르면, 브라흐마나는 지고한 주의 머리이고, 끄샤뜨리야는 당신의 팔이며, 바이샤는 당신의 허리이고, 슈드라는 당신의 다리이며, 이 모두 각각의 임무를 맡는다고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데바들과 자기가 지고한 주의 일부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의 지식은 완벽한 것이다. 그러나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데바들이 거주하는 다른 행성들에 가게 된다. 이것은 헌애자들이 도달하는 목적지와 같은 곳이 아니다.

데바들의 축복으로 얻은 결과는 소멸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이 물질계의 여러 행성, 데바들, 그리고 그들의 숭배자들 모두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 데바 숭배로 얻은 모든 결과는 소멸하고 말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명체들이 그러한 숭배를 행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지고한 주의 봉헌에 종사하는 순수한 헌애자는 지식으로 가득 찬 영원하고 축복된 존재를 얻기 때문에 헌애자가 성취하는 것과 일반 데바 숭배자의 성취는 다르다. 지고한 주는 무한하고, 그의 은혜도 무한하며 그의 자비도 무한하다. 그러므로 지고한 주의 순수한 헌애자를 향한 당신의 자비도 무한하다.

원문

아뱍땀 비약띰 아빤남 avyaktaṁ vyaktim āpannaṁ
만얀떼 맘 아붇다야하 manyante mām abuddhayaḥ
빠람 바밤 아자난또 paraṁ bhāvam ajānanto
마마뱌얌 아눗따맘 mamāvyayam anuttamam

동의어

아비악땀: 발현되지 않은, 비악띰: 인격, 아빤남: 달성하다, 만얀떼: 생각하다, 맘: 나에게, 아붇다야하: 아둔한 자들, 빠람: 최고의, 바밤: 존재, 아자난따하: 알지 않고, 마마: 나의, 아비아얌: 사라지지 않는, 아눗따맘: 가장 정교한 것.

번역

나를 제대로 모르는 아둔한 자들은 나,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가 전에는 비인성적이었으나, 지금 이러한 인성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느니라. 얕은 지식 때문에 그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지고한 나의 드높은 본성을 모른다.

주석

이 절에서 데바 숭배자들은 아둔한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비인성주의자들도 유사하게 묘사되었다. 여기에서 인성을 갖춘 형상이 있는 주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 앞에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비인성주의자들은 여전히 무지한 탓에 지고한 주는 궁극적으로 형태가 없다고 주장한다. 라마누자짜리아의 사제 전수 계보에 속하는 주의 위대한 헌애자, 야무나짜리아는 이와 관련해서 아주 타당한 두 구절을 남기셨다. 그가 말하기를,

뜨밤 실라-루빠-짜리따이 빠라마-쁘라끄리쉬따이히 tvāṁ śīla-rūpa-caritaiḥ parama-prakṛṣṭaiḥ
삿뜨베나 삿뜨비까따야 쁘라발라이스 짜 샤스뜨라이히 sattvena sāttvikatayā prabalaiś ca śāstraiḥ
쁘라캬따-다이바-빠람아르타-비담 마따이스 짜 prakhyāta-daiva-paramārtha-vidāṁ mataiś ca
나이바수라-쁘라끄리따야 쁘라바반띠 볻둠 naivāsura-prakṛtayaḥ prabhavanti boddhum

“제 소중한 주님, 비아사데바와 나라다 같은 헌애자들은 당신이 인격신이라는 것을 압니다. 여러 베다 문헌을 이해함으로써 당신의 특징, 당신의 형상, 그리고 당신의 행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이 최고인격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과 암성의 양태에 있는 자들, 악마들, 비헌애자들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헌애자들이 아무리 뛰어나게 베단따, 우빠니샤드, 그리고 다른 베다 문헌을 논할지라도 그들이 인격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스또뜨라-라뜨나 Stotra-ratna 12).”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단지 베단따 문헌의 학습만으로 인격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지고한 주의 자비로만 절대자의 인성이 파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절에서 아둔한 자는 데바 숭배자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끄리쉬나 의식 없이 베단따와 베다 문헌 추론에 전념하는 비헌애자들 역시 아둔하다고 분명히 언급되었고, 그들이 절대신의 인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 진리가 비인성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아붇다야하(abuddhayaḥ)”라고 하고, 이는 “절대 진리의 궁극적 특징을 모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서 최고의 깨달음은 비인성적 브라흐만에서 시작하여 국부적 초영혼의 단계로 오른다. 그렇지만 절대 진리의 최종 결론은 인격신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비인성주의자들 또한 지성이 모자라는데, 그 이유는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이라고 명백히 말한, 그들의 위대한 선배 샹까라짜리아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진리를 모르는 비인성주의자들은 끄리쉬나가 그저 데바끼와 바수데바의 아들이거나, 왕자이거나, 또는 강력한 생명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9.11)에서도 비난받았다. “아바자난띠 맘 무다 마누쉼 따눔 아스리땀(Avajānanti māṁ mūḍhā mānuṣīṁ tanum āśritam), 오직 어리석은 자들이 나를 보통 사람으로 여긴다.”

사실은 봉헌 없이, 끄리쉬나 의식의 발전 없이 그 누구도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다. 바가바땀(10.14.29)에서 이것을 확증한다.

아타삐 떼 데바 빠담부자-드바야 athāpi te deva padāmbuja-dvaya-
쁘라사다-레샤누그리히따 에바 히 prasāda-leśānugṛhīta eva hi
자나띠 땃뜨밤 바가반-마힘노 jānāti tattvaṁ bhagavan-mahimno
나 짠야 에꼬’ 삐 찌람 비찐반 na cānya eko ’pi ciraṁ vicinvan

“주님, 어떤 자가 당신의 연꽃 같은 발의 아주 작은 자비라도 입게 되면, 그는 당신의 인성이 얼마나 위대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인격신을 이해하려고 사색하는 자는 수년 동안 꾸준히 베다를 연구할지라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정신적 사색이나 베다 문헌을 토론함으로써 최고인격신 끄리쉬나, 그의 형상, 또는 그의 특징과 이름을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봉헌으로 그를 이해해야 한다. 마하 만뜨라,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구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끄리쉬나 의식에 전적으로 종사할 때야 비로소 최고인격신을 이해할 수 있다. 비헌애자 비인성주의자들은 끄리쉬나가 이 물질적 본성으로 만들어진 몸을 가지며 당신의 모든 행위, 형상, 모든 것이 마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비인성주의자들을 마야바디(Māyāvādī)라고 하며 그들은 궁극적 진리를 모른다.

제20절에서 분명히 “까마이스 따이스 따이르 흐리따-갸나 쁘라빠댠뗀’야-데바따하(kāmais tais tair hṛta-jñānāḥ prapadyante ’nya-devatāḥ), 즉 탐욕스러운 욕망에 눈먼 자들은 다른 데바들에게 항복한다.”라고 명시한다. 최고인격신 외에도 다른 행성을 가지고 있는 데바들이 있고, 주 또한 행성을 가지고 계신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제23절에서 “데반 데바-야조 얀띠 맏-박따 얀띠 맘 아삐(devān deva-yajo yānti mad-bhaktā yānti mām api), 즉 데바들의 숭배자들은 데바들의 행성에 가고, 주 끄리쉬나의 헌애자들은 끄리쉬나로까 행성에 간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분명히 언급해도 어리석은 비인성주의자들은 여전히 주는 형상이 없고 당신의 형상들은 사기라고 주장한다. 기따를 공부하고 나면 데바들과 그들의 거처가 비인성적으로 보이는가? 분명히 데바들도,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도 비인성적이지 않다. 그들은 모두 사람이다. 주 끄리쉬나는 최고인격신이고 당신의 고유한 행성이 있으며 데바들도 그들의 행성이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 진리는 무형이고, 그 형상은 조작된 것이라는 일원론적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그것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데바들의 형상과 지고한 주의 형상은 동시에 존재하며, 주 끄리쉬나는 삿-찓-아난다, 영원하고 축복된 지식이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베다는 또한 지고의 절대 진리는 지식과 행복이 넘치는 즐거움, “비갸남 아난담 브라흐마(vijñānam ānandam brahma)” 《브리핟 아란야까 우빠니샤드 3.9.28》이고 주는 무한한 상서로운 자질의 보고, “아난따 깔야나 구나뜨마꼬 ‘사우(nanta-kalyāna-guṇātmako ’sau)” 《비쉬누 뿌라나 6.5.84》라고 확증한다. 그리고 기따에서 주께서는 당신이 비록 태어나지 않으셔도(아자 aja) 여전히 현현한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알아야 한다. 우리 헌애자들은 최고인격신이 어떻게 비인성적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기따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일원론적 비인성주의자들의 조작 이론은 거짓이다. 이 절에서 지고의 절대 진리, 주 끄리쉬나께서 형상과 인성을 모두 갖추고 계심이 명백히 드러났다.

원문

나함 쁘라까샤 사르바샤 nāhaṁ prakāśaḥ sarvasya
요가-마야-사마브리따하 yoga-māyā-samāvṛtaḥ
무도’얌 나비자나띠 mūḍho ’yaṁ nābhijānāti
로꼬 맘 아잠 아비아얌 loko mām ajam avyayam

동의어

나: 역시 아니다, 아함: 나는, 쁘라까샤하: 현현하는, 사르바샤: 모든 이에게, 요가-마야: 내적 능력으로, 사마브리따하: 가려진, 무다하: 어리석은, 아얌: 이러한, 나: 아닌, 아비자나띠: 이해할 수 있다, 로까하: 사람들, 맘: 나에게, 아잠: 태어나지 않는, 아비아얌: 소멸하지 않는.

번역

나는 어리석고 지성이 없는 자에게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나의 내적 능력으로 가려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태어나지 않으며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주석

끄리쉬나께서 이 지상에 현존하셨고 누구나 볼 수 있었는데, 왜 그는 모두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신은 모두에게 나타나지 않으신다. 끄리쉬나께서 이 지구상에 계셨을 때, 당신이 최고인격신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꾸루 가문의 모임에서, 시슈빨라(Śiśupāla)가 끄리쉬나가 그 모임의 장으로 선출된 것에 반대했을 때, 비쉬마는 끄리쉬나를 지지하며 끄리쉬나가 지고한 주라고 공언했다. 마찬가지로 빤다바와 다른 소수의 사람만이 끄리쉬나가 절대자라는 것을 알았지, 누구나 다 안 것은 아니다. 당신은 비헌애자들과 보통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의 순수한 헌애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자기들과 같게 생각한다고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다. 당신은 오직 당신의 헌애자들에게만 모든 즐거움의 보고로서 나타나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어리석은 비헌애자들에게는 당신의 내적 능력으로 가리셨다.

스리마드 바가바땀(1.8.19)에 나오는 꾼띠의 기도에서 주께서는 요가 마야(yoga-māyā)의 커튼에 가려져 계셔 보통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요가 마야 커튼은 이쇼빠니샤드(만뜨라 15)에서도 확증되며, 거기에서 헌애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히란마예나 빠뜨레나 hiraṇmayena pātreṇa
사땨샤삐히땀 무캄 satyasyāpihitaṁ mukham
땃 뜨밤 뿌산 나빠브리누 tat tvaṁ pūṣann apāvṛṇu
사땨-다르마야 드리쉬따예 satya-dharmāya dṛṣṭaye

“오 주님, 당신은 전 우주의 유지자이시며 당신을 향한 봉헌은 최상의 종교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저 또한 유지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의 초월적 형상은 요가 마야로 가려져 있습니다. 브라흐마죠띠는 내적 능력의 덮개입니다. 부디 당신의 삿-찓-아난다-비그라하, 축복과 지식이 가득한 당신의 영원한 형상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이 번쩍이는 광채를 친히 없애 주세요.” 축복과 지식의 초월적 형상을 하고 계신 최고인격신은 브라흐마죠띠의 내적 능력으로 가려져 있어 어리석은 비인성주의자들은 절대자를 볼 수 없다.

스리마드 바가바땀(10.14.7)에서도 브라흐마의 이런 기도를 찾을 수 있다. “오 최고인격신이시여, 오 초영혼이시여, 오 모든 신비로움의 주인이시여, 이 세상의 누가 당신의 능력과 유희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항상 당신의 내적 능력을 확장하고 계시므로 그 누구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학식 있는 과학자들이나 학자들은 이 물질계와 행성들의 원자적 구조까지 검사할 수는 있어도, 당신의 에너지와 능력은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바로 그들 앞에 계시는데도 그러합니다.” 최고인격신, 주 끄리쉬나는 태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뱌야(avyaya), 소멸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영원한 형상은 축복과 지식이며 당신의 에너지는 모두 무한하다.

원문

베다함 사마띠따니 vedāhaṁ samatītāni
바르따마나니 짜르주나 vartamānāni cārjuna
바비샤니 짜 부따니 bhaviṣyāṇi ca bhūtāni
맘 뚜 베다 나 까스짜나 māṁ tu veda na kaścana

동의어

베다: 알다, 아함: 나는, 사마띠따니: 완전히 지난, 바르따마나니: 현재의, 짜: 그리고,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바비샤니: 미래의, 짜: 또한, 부따니: 모든 생명체, 맘: 나에게, 뚜: 그러나, 베다: 알다, 나: 아니다, 까스짜나: 누구나.

번역

오 아르주나, 최고인격신으로서 나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것,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든 것을 안다. 나는 또한 모든 생명체를 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모른다.

주석

여기에서 인성과 비인성의 문제가 명백히 진술되었다. 만약 끄리쉬나, 최고인격신의 형상이 비인성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마야, 즉 물질적이라면 그는 생명체처럼 몸이 바뀌고 전생에 관한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 물질적 육신을 가진 누구도 전생을 기억할 수 없고, 미래의 삶을 예견할 수도, 현재 삶의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건들을 알 수 없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주 끄리쉬나께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제4장에서 우리는 주 끄리쉬나께서 수백만 년 전 태양신, 비바스반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보았다. 끄리쉬나는 초영혼으로서 모든 생명체의 가슴속에 계시므로 모든 생명체를 아신다. 당신은 초영혼으로서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하시고, 최고인격신으로서도 존재하시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비인성적 브라흐만을 깨달을 수는 있어도, 지고의 인간으로서 스리 끄리쉬나를 깨달을 수는 없다. 스리 끄리쉬나의 초월적 몸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로 태양과 같고 마야는 구름과 같다. 물질계에서 태양이 있고 구름과 다른 별과 행성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름이 이 모든 것을 하늘에서 일시적으로 가릴 수는 있지만 이러한 가림은 우리의 제한된 시야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실제로 가려진 것은 아니다. 이처럼 마야는 지고한 주를 가릴 수 없다. 당신의 내적 능력으로 어리석은 부류의 인간들에게 당신은 나타나지 않으신다. 이 장의 세 번째 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수백만의 사람 중 몇 명만이 인간 형태의 삶에서 완전해지고자 노력하며 그렇게 완성을 이룬 수천의 사람 중 단 한 명도 주 끄리쉬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설령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국부적 빠람아뜨마의 깨달음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끄리쉬나 의식이 되지 않고서는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다.

원문

잇차-드베샤-사뭇테나 icchā-dveṣa-samutthena  
드반드바-모헤나 바라따 dvandva-mohena bhārata
사르바-부따니 삼모함 sarva-bhūtāni sammohaṁ
사르게 얀띠 빠란따빠 sarge yānti paran-tapa

동의어

잇차: 욕망, 드베샤: 그리고 증오, 사뭇테나: ~에서 생기는, 드반드바: 이원성, 모헤나: 환영에 의해, 바라따: 오 바라따의 자손이여, 사르바: 모든, 부따니: 생명체, 삼모함: 착각 속에, 사르게: 태어나는 동안에, 얀띠: 가다, 빠란따빠: 오 적을 정복하는 자여.

번역

오 바라따의 자손이여, 오 적을 정복하는 자여, 모든 생명체는 망상에서 태어나고, 욕망과 증오에서 생긴 이원성으로 어찌할 줄 모르느니라.

주석

생명체의 진정한 본원적 위치는 순수한 지식인 지고한 주와 종속 관계에 있다. 우리가 이 순수한 지식에서 벗어나 착각할 때, 환영 에너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최고인격신을 이해할 수 없다. 환영 에너지는 욕망과 증오의 이원성에서 나타난다. 욕망과 증오 때문에 무지한 자는 지고한 주와 하나가 되고자 하고, 최고인격신으로서의 끄리쉬나를 시기한다. 욕망과 증오로 착각하지도, 오염되지도 않은 순수한 헌애자는 주 스리 끄리쉬나께서 당신의 내적 능력으로 현현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원성과 무지에 현혹된 자들은 최고인격신이 물질적 에너지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이 처한 불행이다. 그렇게 현혹된 자들의 징후는 불명예와 명예, 불행과 행복, 여자와 남자, 선과 악, 기쁨과 고통의 이원성에서 살며, “이 사람은 내 아내, 이것은 내 집, 나는 이 집의 주인,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원성에 너무나 현혹된 자들은 전적으로 어리석어서 최고인격신을 이해할 수 없다.

원문

예샴 뜨반따-가땀 빠빰 yeṣāṁ tv anta-gataṁ pāpaṁ
자나남 뿐야-까르마남 janānāṁ puṇya-karmaṇām
떼 드반드바-모하-니르묵따 te dvandva-moha-nirmuktā
바잔떼 맘 드리다-브라따하 bhajante māṁ dṛḍha-vratāḥ

동의어

예샴: 하는 자의, 뚜: 그러나, 안따-가땀: 완전히 제거된, 빠빰: 죄, 자나남: 사람들의, 뿐야: 경건한, 까르마남: 그들의 경건한 행위들, 떼: 그들, 드반드바: 이중성의, 모하: 망상, 니르묵따하: 벗어난, 바잔떼: 봉헌에 종사하다, 맘: 나에게, 드리다-브라따하: 굳은 결심으로.

번역

전생과 현생에서 경건한 행동을 했고 죄 많은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자들은 망상의 이원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굳은 결심으로 나의 봉헌에 종사하느니라.

주석

초월적 위치에 오를 자격이 있는 자들이 이 절에서 언급되었다. 죄를 저지르고, 무신론적이며, 어리석고, 속이기를 잘하는 자들이 욕망과 증오의 이원성을 초월하기란 몹시 어렵다. 종교가 규정하는 원칙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고, 경건하게 행동했으며, 죄업을 모두 극복한 자들만이 봉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점진적으로 최고인격신의 순수한 지식에 오른다. 이것이 영적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러한 격상은 끄리쉬나 의식 속에서 순수한 헌애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가능한데, 그 이유는 위대한 헌애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리마드 바가바땀(5.5.2)에서, 우리가 진실로 해방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헌애자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한다(마핫-세밤 드바람 아후르 비묵떼헤 mahat-sevāṁ dvāram āhur vimukteḥ), 그러나 물질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는 존재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가는 길에 오르는 것이다(따모-드바람 요쉬땀 상기-상감 tamo-dvāraṁ yoṣitāṁ saṅgi-saṅgam). 주의 모든 헌애자는 오직 속박된 영혼들을 망상에서 회복시키려고 이 지구를 횡단할 뿐이다. 비인성주의자들은 지고한 주께 종속된 자기들의 본원적 위치를 망각하는 것이 절대신의 법을 가장 크게 어기는 것임을 모른다. 자신의 본원적 위치로 돌아가지 않는 한, 최고인격신을 이해하는 것도, 굳은 결심으로 주의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완전히 종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원문

자라-마라나-목샤야 jarā-maraṇa-mokṣāya
맘 아스리땨 야딴띠 예 mām āśritya yatanti ye
떼 브라흐마 딷 비두후 끄릿스남 te brahma tad viduḥ kṛtsnam
아댜뜨맘 까르마 짜킬람 adhyātmaṁ karma cākhilam

동의어

자라: 노년, 마라나: 그리고 죽음, 목샤야: 해방의 목적을 위해, 맘: 나에게, 아스리땨: 은신하는, 야딴띠: 노력하다, 예: 그러한 모든 자, 떼: 그런 사람들, 브라흐마: 브라흐만, 땃: 사실상, 비두후: 그들은 안다, 끄릿스남: 모든 것, 아댜뜨맘: 초월적, 까르마: 행위들, 짜: 또한, 아킬람: 전적으로.

번역

늙음과 죽음에서 해방되고자 노력하는 총명한 자들은 봉헌으로 나에게 은신하느니라. 그들은 초월적 행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기에 그들이 진실로 브라흐만이다.

주석

생로병사는 이 물질적 육신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영적 몸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영적 몸에는 생로병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적 몸을 얻어서 최고인격신의 동반자 중 하나가 되어 영원한 봉헌에 종사하는 자가 진정 해방된 자이다. “아함 브라흐마스미(Ahaṁ brahmāsmi), 즉 나는 영혼이다.” 우리는 브라흐만, 영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삶에 관한 이 브라흐만 개념 역시 봉헌에 속한다. 순수한 헌애자들은 초월적인 브라흐만의 경지에 있으며, 그들은 초월적 행위에 관한 모든 것을 안다.

주의 초월적 봉사에 종사하는 네 부류의 순수하지 않은 헌애자들은 각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지고한 주의 은총으로 그들이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이 될 때, 그들은 실제로 지고한 주와 영적 교류를 즐긴다. 그러나 데바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최상의 행성에 계시는 지고한 주께 절대 도달할 수 없다. 브라흐만 깨달음만을 얻은 자들은 지성이 모자라 골로까 브린다반으로 알려진 끄리쉬나의 가장 높은 행성에 이를 수 없다. 오직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맘 아스리땨 mām āśritya)만이 실제로 브라흐만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끄리쉬나의 행성에 이르고자 실제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끄리쉬나에 관해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사실 브라흐만이다.

주의 아르짜(arcā), 즉 형상을 숭배하는 데 종사하거나, 단지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주에 관해 명상하는 데 전념하는 자들 또한 주의 은총으로 브라흐만, 아디부따(adhibhūta) 등의 취지를 알게 되는데, 다음 장에서 주께서 이것을 설명하신다.

원문

사디부따디다이밤 맘 sādhibhūtādhidaivaṁ māṁ
사디야걈 짜 예 비두후 sādhiyajñaṁ ca ye viduḥ
쁘라야나-깔레’삐 짜 맘 prayāṇa-kāle ’pi ca māṁ
떼 비두르 육따-쩨따사하 te vidur yukta-cetasaḥ

동의어

사-아디부따: 그리고 물질적 발현을 주관하는 원칙, 아디다이밤: 모든 데바들을 주관하는, 맘: 나에게, 사-아디야걈: 그리고 모든 제사를 주관하는, 짜: 또한, 예: 하는 자들, 비두후: 알다, 쁘라야나: 죽음의, 깔레: 그때, 아삐: 심지어, 짜: 그리고, 맘: 나에게, 떼: 그들, 비두후: 알다, 육따-쩨따사하: 나에게 전념하는 그들의 마음.

번역

나에 관한 완전한 의식 속에서 나, 지고한 주가 물질적 발현, 데바들, 그리고 모든 형식의 희생을 주관하는 원칙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나, 최고인격신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느니라.

주석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최고인격신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끄리쉬나 의식과의 초월적 교류 속에서 지고한 주가 어떻게 물질적 발현은 물론이고 데바들까지 주관하는 원칙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초월적 교류로, 우리는 최고인격신에 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죽음의 순간에 그러한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절대 끄리쉬나를 잊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지고한 주의 행성, 골로까 브린다반으로 올라가게 된다.

여기 제7장에서는 특히 우리가 어떻게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끄리쉬나 의식의 시작은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런 교류는 영적이고 우리를 지고한 주와 직접 연결하며, 주의 은총으로 우리는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생명체의 본원적 위치와 생명체가 어떻게 끄리쉬나를 잊고 물질적 행위에 얽매이게 되는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좋은 교류 속에서 점진적으로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생명체는 끄리쉬나를 잊었기 때문에 자기가 물질적 본성의 법칙에 얽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인간 형태의 삶이 끄리쉬나 의식을 회복하기 위한 기회이며 인간 삶을 지고한 주의 원인 없는 자비를 얻는 데 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많은 주제, 즉 괴로움에 빠진 자, 호기심 있는 자, 물질적 필요를 원하는 자, 브라흐만에 관한 지식, 빠람아뜨마에 관한 지식, 생로병사에서의 해방, 그리고 지고한 주의 숭배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에 실제로 오른 자는 다른 여러 과정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오직 끄리쉬나 의식의 행위에 직접 종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 끄리쉬나의 영원한 종으로서의 자기 본원적 위치를 실제로 얻는다. 그러한 순수한 봉헌의 상황 속에서 그는 지고한 주를 듣고 찬양하는 데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모든 목표가 달성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굳은 믿음을 드리다-브라따(dṛḍha-vrata)라고 하며, 이것은 박띠 요가, 즉 초월적 사랑의 봉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것이 모든 경전의 결론이다. 이 바가바드 기따의 제7장은 그러한 확신의 본질이다.

이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드 기따의 제7장, 절대자에 관한 지식에 대한 박띠베단따 주석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