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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기따 내용의 요약

원문

산자야 우바짜 sañjaya uvāca
땀 따타 끄리빠야비쉬땀 taṁ tathā kṛpayāviṣṭam
아스루-뿌르나꿀렉샤남 aśru-pūrṇākulekṣaṇam
비쉬단땀 이담 바꺔 viṣīdantam idaṁ vākyam
우바짜 마두수다나하 uvāca madhusūdanaḥ

동의어

산자야 우바짜: 산자야가 말했다, 땀: 아르주나에게, 따타: 따라서, 끄리빠야: 동정심에서, 아비쉬땀: 압도된, 아스루-뿌르나-아꿀라: 눈물로 가득한, 익샤남: 눈, 비쉬단땀: 비탄하는, 이담: 이것들을, 바꺔: 말, 우바짜: 말했다, 마두-수다나하: 마두를 죽이신 자여.

번역

산자야가 말했다: 동정심에 마음이 비탄에 잠기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아르주나를 보고서, 마두수다나 끄리쉬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석

물질적인 동정심, 비탄, 눈물은 모두 진정한 자아에 대한 무지의 징후이다. 영원한 영혼을 위한 동정심은 자아 인식(self-realization)이다. "마두수다나"라는 말은 이 절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주 끄리쉬나께서 악마 마두를 죽이셨으므로 이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께서 자신의 의무 수행을 방해하는 오해라는 악마를 없애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도 동정심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모른다. 물에 빠진 사람의 옷을 동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지의 바다에 빠진 사람은 단지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옷, 즉 총체적 육신을 구한다고 해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모르고 겉옷을 두고 비탄하는 자를 슈드라, 즉 불필요하게 한탄하는 자라고 한다. 아르주나는 끄샤뜨리야였고 이런 행위는 그가 해야 할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 끄리쉬나께서는 무지한 자들의 한탄을 없애실 수 있고, 그렇게 하려고 바가바드 기따를 설하셨다. 이 장에서는 최고의 권위자, 주 스리 끄리쉬나께서 이 물질적 육신과 영혼의 분석적 연구를 통해 우리에게 자아 인식을 가르치신다. 이 깨달음이란 우리가 일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일하고, 진정한 자아에 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질 때 가능하다.

원문

스리-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꾸따스뜨바 까스말람 이담 kutas tvā kaśmalam idaṁ
비샤메 사무빠스티땀 viṣame samupasthitam
아나르야-주쉬땀 아스바르걈 anārya-juṣṭam asvargyam
아끼르띠-까람 아르주나 akīrti-karam arjuna

동의어

스리-바가반-우바짜: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꾸따하: 어디에서, 뜨바: 네게, 까스말람: 더러움, 이담: 이런 비탄, 비샤메: 위기의 순간에, 사무빠스티땀: 도달한, 아나르야: 삶의 가치에 관해 모르는 사람들, 주쉬땀: 실천하는, 아스바르걈: 상계(上界)로 이르지 못하는, 아끼르띠: 불명예, 까람: 원인의,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번역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소중한 아르주나여, 어떻게 이런 불순함이 너에게 깃들었는가? 삶의 가치를 아는 자에게 불순함은 전혀 어울리지 않느니라. 그런 것들이 너를 더 높은 행성이 아닌 불명예로 이끌 것이다.

주석

끄리쉬나와 최고인격신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주 끄리쉬나가 기따 전체를 통해 바가반(Bhagavān)으로 불린다. 바가반은 절대 진리의 궁극이다. 절대 진리는 세 가지 단계, 즉 모든 곳에 퍼져 있는 비인성적 성령 브라흐만(Brahman)과 모든 생명체의 가슴에 계신 국부적 측면의 절대자 빠람아뜨마(Paramātmā), 그리고 최고인격신(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 바가반, 주 끄리쉬나로 이해될 수 있다. 절대 진리의 이러한 개념이 스리마드 바가바땀(1.2.11)에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바단띠 땃 땃뜨바-비다스 vadanti tat tattva-vidas
땃뜨밤 야즈 갸남 아드바얌 tattvaṁ yaj jñānam advayam
브라흐메띠 빠라마뜨메띠 brahmeti paramātmeti
바가반 이띠 샵댜떼 bhagavān iti śabdyate

 “절대 진리는 절대 진리를 아는 자에 의해 세 가지 단계로 깨달아지며 이 셋은 모두 동일하다. 절대 진리의 세 가지 단계는 브라흐만, 빠람아뜨마, 바가반으로 나타난다.”

이 신성한 세 측면은 서로 다른 세 측면을 지니는 태양의 예로 설명될 수 있고, 이것은 이름하여 태양의 빛, 태양의 표면, 태양 행성 그 자체이다. 태양의 빛만을 연구하는 자는 예비단계의 학생이고 태양의 표면을 이해하는 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이며 태양 행성 그 자체를 이해하는 자는 가장 높은 단계에 있다. 단지 햇빛, 즉 햇빛의 우주적 편재성(遍在性)과 환한 빛의 비인성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일반 학생들은 절대 진리의 브라흐만 특징만을 깨달은 자들에 비유될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아간 학생들은 태양 표면을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은 절대 진리의 빠람아뜨마 특징을 아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태양 행성의 심장부까지 들어갈 수 있는 학생은 최고 절대 진리의 인성적 특징을 깨달은 자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대 진리의 연구에 몰두하는 모든 학생은 똑같은 주제를 연구하지만 박따(bhakta), 즉 절대 진리의 바가반 특징을 깨달은 초월주의자들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초월주의자들이다. 태양의 빛, 태양의 표면, 그리고 태양 행성의 내부적인 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세 가지 다른 측면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똑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바가반이라는 산스끄리뜨 단어는 비아사데바의 아버지이며 위대한 영적 권위자인 빠라샤라 무니(Parāśara Muni)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최고인격신은 모든 부(富), 모든 힘, 모든 명성, 모든 아름다움, 모든 지식, 모든 버림을 다 지닌 바가반으로 불린다. 아주 부유하고, 아주 강력하고, 아주 아름답고, 아주 유명하고, 아주 학식 있고, 아주 초연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 누구도 모든 부, 모든 힘 등을 완전히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다. 오직 끄리쉬나만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바로 최고인격신이기 때문이다. 브라흐마, 시바, 나라야나를 포함한 어떠한 생명체도 끄리쉬나가 가진 완전한 풍요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브라흐마는 주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이라고 결론짓는다. 그 누구도 끄리쉬나와 같거나 그를 능가할 수 없다. 그가 고빈다로 불리는 최초의 주 바가반이고  모든 원인의 최고 원인이다.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 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삿-찓-아난다-비그라하 sac-cid-ānanda-vigrahaḥ
아나디르 아디르 고빈다하 anādir ādir govindaḥ
사르바-까라나-까라남 sarva-kāraṇa-kāraṇam

“바가반의 자질을 소유한 인격들이 많이 있지만, 그 누구도 끄리쉬나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에 끄리쉬나가 최고이다. 끄리쉬나는 최고의 인간이며 당신의 몸은 영원하고 지식과 축복으로 가득하다. 끄리쉬나가 최초의 주 고빈다이며 모든 원인의 원인이시다.” (브라흐마 삼히따 5.1)

바가바땀에도 최고인격신의 많은 화신이 열거되어 있지만, 끄리쉬나가 최초의 인격신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에게서 많은 화신과 다른 인격신들이 확장되어 나왔다.

에떼 짬샤-깔라 뿜사하 ete cāṁśa-kalāḥ puṁsaḥ
끄리쉬나스 뚜 바가반 스바얌 kṛṣṇas tu bhagavān svayam
인드라리-뱌꿀람 로깜 indrāri-vyākulaṁ lokaṁ
므리다얀띠 유게 유게 mṛḍayanti yuge yuge

“여기에 열거된 모든 화신은 최고인격신의 전체적 확장이거나 전체적 확장의 일부이다. 그러나 끄리쉬나는 최고인격신 그 자체이다.” (스리 바가바땀 1.3.28)

그러므로 끄리쉬나는 최초의 최고인격신, 절대 진리, 초영혼과 비인성적 브라흐만 둘 다의 근원이다.

최고인격신이 계시는 곳에서 아르주나가 친인척들 때문에 비탄하는 것은 맞지 않는 행동이기에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의 놀라움을 꾸따, “어디에서”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그러한 불순함은 아리안(Āryans)으로 알려진 문명화된 계층의 사람에게서 결코 기대되는 바가 아니다. 아리안은 삶의 가치를 알고 영적 깨달음에 기초한 문명을 지닌 사람들을 말한다. 물질적 개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가 절대 진리 비쉬누, 즉 바가반에 관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물질계의 외적 특징에 사로잡혀 해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물질적 속박에서 해방되는 데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비(非)아리안이라고 한다. 아르주나는 끄샤뜨리야임에 불구하고, 싸움을 거부함으로써 규정된 자기 의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비겁한 행동은 비아리안에게나 맞는 행동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의무의 일탈은 영적 삶의 진전에 도움 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유명해질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주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의 친인척들을 향한 소위 동정심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원문

끌라이뱜 마 스마 가마 빠르타 klaibyaṁ mā sma gamaḥ pārtha
나이땃뜨바이 유빠빠댜떼 naitat tvayy upapadyate
끄슈드람 흐리다야-다우르발럄 kṣudraṁ hṛdaya-daurbalyaṁ
땩뜨봇띠쉬타 빠란따빠 tyaktvottiṣṭha paran-tapa

동의어

끌라이뱜: 무능함, 마 스마: 하지 않다, 가마하: 접어들다,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나: 결코, 에땃: 이것, 뜨바이: 네게, 우빠댜떼: 어울리는, 끄슈드람: 하찮은, 흐리다야: 마음의, 다우르발럄: 약함, 딱뜨바: 포기하는, 웃띠쉬타: 일어나다, 빠람-따빠: 오 적을 벌하는 자여.

번역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이 저급한 무능함에 굴하지 말아라. 이것은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하찮은 심약함을 버리고 일어서라, 오 적을 벌하는 자여.

주석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의 아버지 바수데바의 여동생인 쁘리타의 아들로 불렸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와 혈연관계다. 만약 끄샤뜨리야의 아들이 싸움을 거부하면 그는 이름뿐인 끄샤뜨리야이고, 브라흐마나의 아들이 불경하게 행동하면 이름뿐인 브라흐마나가 된다. 그러한 끄샤뜨리야와 브라흐마나는 자기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아들이다. 따라서 끄리쉬나는 아르주나가 끄샤뜨리야의 부끄러운 아들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끄리쉬나가 마차 위에서 직접 그를 지도하고 있는 유리한 상황임에도 만약 싸움을 포기한다면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의 그런 태도가 그의 인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아르주나는 가장 존경받아 마땅한 비쉬마와 자기 친척들에게 아량을 베풀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이런 종류의 관대함은 그저 심약함일 뿐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릇된 관대함은 어떤 권위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관대함, 소위 비폭력은 끄리쉬나께 직접 지시를 받는 아르주나와 같은 사람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원문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까탐 비쉬맘 아함 상켸 kathaṁ bhīṣmam ahaṁ saṅkhye
드로남 짜 마두수다나 droṇaṁ ca madhusūdana
이슈비 쁘라띠욧샤미 iṣubhiḥ pratiyotsyāmi
뿌자르하바리-수다나 pūjārhāv ari-sūdana

동의어

아르주나 우바짜: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까탐: 어떻게, 비쉬맘: 비쉬마, 아함: 나는, 상켸: 싸움에서, 드로남: 드로나, 짜: 또한, 마두-수다나: 오 마두를 죽이신 분이여, 이슈비히: 화살로, 쁘라띠욧샤미: 맞받아치다, 뿌자-아르하우: 숭배되어야 할 사람들, 아리-수다나: 오 적을 죽이는 분이시여.

번역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오 적을 죽이는 분이시여, 오 마두를 죽인 분이시여, 제가 숭배해야 마땅할 비쉬마와 드로나 같은 분들을 어떻게 전쟁에서 활로 맞쏠수 있겠습니까?

주석

할아버지 비쉬마와 스승 드로나짜리아 같은 존경스러운 윗사람은 항상 숭배받아야 마땅하다. 비록 그들이 공격할지라도 맞공격해서는 안 된다. 윗사람과 말싸움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보편적 예절이다. 비록 윗사람들이 때때로 심하게 대하더라도 그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떻게 아르주나가 그들에게 맞서 공격할 수 있겠는가?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의 외할아버지인 우그라세나(Ugrasena)와 스승인 산디빠니 무니(Sāndīpani Muni)를 공격할 수 있으시겠는가? 이것이 바로 아르주나가 끄리쉬나께 내세운 주장의 일부이다.

원문

구룬 아하뜨바 히 마하누바반 gurūn ahatvā hi mahānubhāvān
스레요 복뚬 바익샴 아삐하 로께 śreyo bhoktuṁ bhaikṣyam apīha loke
하뜨바르타-까맘스뚜 구룬 이하이바 hatvārtha-kāmāṁs tu gurūn ihaiva
분지야 보간 루디라-쁘라딕단 bhuñjīya bhogān rudhira-pradigdhān

동의어

구룬: 손윗분들, 아하뜨바: 죽이지 않는, 히: 확실히, 마하-누바반: 위대한 영혼들, 스레야하: 더 낫다, 복뚬: 삶을 즐기다, 바익샴: 구걸함으로써, 아삐: 심지어, 이하: 이생에서, 로께: 이 세상에서, 하뜨바: 죽이는, 아르타: 얻다, 까만: 바라는, 뚜: 그러나, 구룬: 손윗분들, 이하: 이 세상에서, 에바: 확실히, 분지야: 즐겨야 한다, 보간: 즐거움의 대상, 루디라: 피, 쁘라딕단: 물든.

번역

위대한 영혼인 제 스승들의 목숨을 대가로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구걸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세속적 이득을 보려 하더라도 그들은 제 윗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살해되면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이 피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주석

경전에 따르면 혐오스러운 행동을 하고 분별심을 잃은 스승은 버려도 된다고 한다. 비쉬마와 드로나는 재정적 지원 때문에 듀로다나 편에 서야만 했는데, 사실 경제적인 이유로 그러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그들은 스승으로서의 체통을 잃었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그들을 여전히 윗사람으로 받들고 있고, 따라서 그들을 죽인 후 물질적 혜택을 즐기는 것은 피로 물든 전리품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문

나 짜이딷 비드마 까따란노 가리요 na caitad vidmaḥ kataran no garīyo
야드 바 자예마 야디 바 노 자예유후 yad vā jayema yadi vā no jayeyuḥ
야네바 하뜨바 나 지지비샤마스 yān eva hatvā na jijīviṣāmas
떼바스티따하 쁘라무케 다르따라쉬뜨라하 te ’vasthitāḥ pramukhe dhārtarāṣṭrāḥ

동의어

나: 아닌, 짜: 또한, 에땃: 이것, 비드마하: 우리는 안다, 까따랏: 어느 것, 나하: 우리를 위해, 가리야하: 더 낫다, 야뜨 바: 어느, 자예마: 우리는 정복할 것이다, 야디: 만약, 바: 또는, 나하: 우리를, 자예유: 그들이 정복하다, 얀: 그러한 자들, 에바: 확실히, 하뜨바: 죽임으로써, 나: 결코, 지지비샤마하: 우리가 살고자 하는, 떼: 그들 모두, 아바스티따하: 위치한, 쁘라무케: 전면에, 다르따라쉬뜨라하, 드리따라쉬뜨라의 아들들.

번역

그들을 정복하는 것과 그들에게 정복당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드리따라쉬뜨라의 아들을 모두 죽인다면 우리 또한 살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전쟁터에서 바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주석

비록 싸우는 것이 끄샤뜨리야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아르주나는 그 전쟁으로 생기는 불필요한 폭력을 무릅써야 하는지, 아니면 싸움을 포기하고 구걸로 살아가는 게 더 나은지 알지 못했다. 그가 만약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구걸만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될 것이다. 양쪽 모두 승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승리 또한 보장할 수 없다. 비록 승리할지라도 (그리고 전쟁의 명분 또한 정당화되더라도), 드리따라쉬뜨라의 아들들이 전쟁에서 죽으면 아르주나로서는 그들의 부재를 견디며 살아가기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또 다른 패배일 수도 있다. 아르주나가 고려한 이 모든 점은 그가 주의 위대한 헌애자일 뿐만 아니라, 마음과 감각을 완전히 통제하여 높은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한다. 그가 왕가에 태어났으나 구걸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또 다른 초연함의 표시이다. 스리 끄리쉬나(아르주나의 영적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이러한 자질들이 어우러져 아르주나가 진실로 덕망 있는 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해방을 이루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감각을 통제하지 않는 한, 지식을 배양할 수 없고, 지식과 헌신 없이 해방은 있을 수 없다. 아르주나는 엄청난 물질적 자질을 넘어 이 모든 영적 자질 또한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원문

까르빤야-도쇼빠하따-스바-바바하 kārpaṇya-doṣopahata-svabhāvaḥ
쁘릿차미 뜨밤 다르마삼무다쩨따하 pṛcchāmi tvāṁ dharma-sammūḍha-cetāḥ
얏츠레야 시안 니스찌땀 브루히 딴 메 yac chreyaḥ syān niścitaṁ brūhi tan me
시샤스 떼’함 샤디 맘 뜨밤 쁘라빤남 śiṣyas te ’haṁ śādhi māṁ tvāṁ prapannam

동의어

까르빤야: 구두쇠 같은, 도샤: 나약함 때문에, 우빠하따: 괴로워하는, 스바-바바하: 특성들, 쁘릿차미: 나는 묻고 있다, 뜨밤: 당신에게, 다르마: 종교, 삼무다: 당황한, 쩨따하: 가슴에, 얏: 무엇, 스레야: 좋은 것들, 샷: 아마도, 니스찌땀: 자신 있게, 브루히: 말하다, 땃: 그것, 메: 나에게, 시샤하: 제자, 떼: 당신의, 아함: 나는, 샤디: 그저 가르치다, 맘: 나를, 뜨밤: 당신에게, 쁘라빤남: 완전히 항복하다.

번역

구두쇠 같은 나약함 때문에 이제 저는 제 의무에 관해 혼란스럽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을지 말씀해 주시기를 당신께 간청합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제자이며 당신께 완전히 항복한 영혼입니다. 제발 저를 가르쳐 주소서.

주석

자연의 법칙에 의해 모든 물질적 활동은 모든 이에게 곤혹을 초래하는 근원이다. 매 순간 곤혹을 경험하므로 삶의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바른 지도를 할 수 있는 진정한 영적 스승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모든 베다 문헌은 뜻하지 않게 생긴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려면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곤혹은 누가 불을 지르지 않았는데도 훨훨 타는 산불과도 같다. 마찬가지로 세상사는 우리가 혼란을 원치 않아도 저절로 닥치는 삶의 곤혹과도 같다. 아무도 산불을 원하지 않지만 저절로 일어나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러므로 베다 지혜는 삶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지식을 찾기 위해 반드시 사제전수의 전통을 잇고 있는 영적 스승을 찾아가야 한다고 권고한다. 진정한 영적 스승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물질적 곤혹에 빠져 허덕이지 말고 영적 스승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 이 절의 취지이다.

물질적 곤혹에 빠진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들은 삶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브리핟-아란야까 우빠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niṣad 3.8.10)에 당황하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요 바 에따닥샤람 가르갸비디뜨바스말 로깟 쁘라이띠 사 끄리빠나하(yo vā etad akṣaraṁ gārgy aviditvāsmāḻ lokāt praiti sa kṛpaṇaḥ).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며 자아 인식의 과학에 관한 이해 없이 개나 고양이처럼 이 세상을 마감하는 자는 수전노 같은 사람이다.” 인간 형태의 삶은 생명체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자는 구두쇠이다. 반면 브라흐마나들은 충분한 지성을 갖추고 있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 육신을 활용한다. 야 에따닥샤람 가르기 디뜨바스말 로깟 쁘라이띠 사 브라흐마나하(Ya etad akṣaraṁ gārgi viditvāsmāl lokāt praiti sa brāhmaṇaḥ).

끄리빠나, 즉 구두쇠 같은 자들은 물질적 개념의 삶 속에서 가족, 사회, 국가 등을 향한 지나친 애정으로 그들의 시간을 낭비한다. “피부병(혈연/살갗으로 맺어진 육신을 나와 내 가족으로 인식하는 병)”에 근거하여 가족생활, 이름하여 아내, 자식 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우리는 자주 집착한다. 끄리빠나들은 자기가 가족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가족이나 사회가 자기를 죽음 직전에 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가족에 대한 집착은 새끼를 돌보는 하등 동물한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성 있는 아르주나는 가족들에게 느끼는 애정과 그들을 죽음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소망이 자신이 처한 곤혹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의무가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구두쇠 같은 심약함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최고의 영적 스승, 주 끄리쉬나께 명확한 해결책을 찾아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끄리쉬나의 제자로 바친다. 그는 친구 사이의 대화를 그만두기를 원했다. 스승과 제자의 대화는 심각하고, 아르주나는 이제 공인된 스승 앞에서 매우 진지한 대화를 하고자 한다. 따라서 끄리쉬나는 바가바드 기따라는 과학의 최초 영적 스승이고 아르주나는 기따를 이해하는 최초의 제자이다. 아르주나가 어떻게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는지는 기따 자체가 설명한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세속적 학자들은 인격(최고의 인간)으로서의 끄리쉬나에 항복할 필요가 없고, “끄리쉬나 안의 태어나지 않은 측면/존재”에 항복해야 한다고 한다. 끄리쉬나의 안과 밖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자는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 중 가장 어리석은 부류에 속한다.

원문

나 히 쁘라빠샤미 마마빠누댣 na hi prapaśyāmi mamāpanudyād
얏 초까뭄 웃초샤남 인드리야남 yac chokam ucchoṣaṇam indriyāṇām
아바뺘 부마 바사빠뜨남릳담 avāpya bhūmāv asapatnam ṛddhaṁ
라쟘 수라남 아삐 짜디빠땸 rājyaṁ surāṇām api cādhipatyam

동의어

나: 하지 않다, 히: 확실히, 쁘라빠샤미: 나는 본다, 마마: 나의, 아빠누댯: 몰아낼 수 있다, 얏: 그것, 쇼깜: 비탄, 웃초샤남: 바짝 마르는, 인드리야남: 감각들의, 아바뺘: 달성하는, 부마우: 지상에, 아사빳남: 겨룰 자가 없는, 릿담: 번영하는, 라쟘: 왕국, 수라남: 데바들의, 아삐: 조차, 짜: 또는, 아디빠땸: 최상.

번역

제 감각을 타들어 가게 하는 이 비탄을 몰아낼 방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신들이 가진 권력과 비교할 바 없이 번영하는 왕국을 지상에서 얻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 비탄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주석

비록 아르주나가 종교 원칙과 도덕 규범에 관한 지식에 근거하여 여러 주장을 했지만 영적 스승, 주 스리 끄리쉬나의 도움 없이는 그가 처한 진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듯하다. 그는 그가 가진 소위 지식이라는 것이 자기 존재를 완전히 타들어 가게 하는 이 난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과 주 끄리쉬나 같은 영적 스승의 도움 없이 그런 곤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론적 지식, 학문, 높은 지위 등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끄리쉬나 같은 영적 스승만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결론은 100%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영적 스승이 바로 진정한 영적 스승으로, 그가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주 짜이따냐께서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끄리쉬나 의식의 과학에 정통한 사람이 진정한 영적 스승이라고 말씀하셨다.

끼바 비쁘라, 끼바 냐시, 슈드라 께네 나야 kibā vipra, kibā nyāsī, śūdra kene naya
예이 끄리쉬나-따뜨바-벳따, 세이 구루 하야 yei kṛṣṇa-tattva-vettā, sei ‘guru’ haya

“비쁘라(베다 지식에 밝은 학자)인지, 낮은 가문에서 태어났는지, 버리는 삶의 단계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끄리쉬나의 과학에 정통했다면 그가 완벽하고 진정한 영적 스승이다.” (짜이따냐 짜리땀리따, 마댜 8.128)

삿-까르마-니뿌노 비쁘로 ṣaṭ-karma-nipuṇo vipro
만뜨라-딴뜨라-비샤라다하 mantra-tantra-viśāradaḥ
아바이쉬나보 구루르 나 샫 avaiṣṇavo gurur na syād
바이쉬나바 스바-빠쪼 구루후 vaiṣṇavaḥ śva-paco guruḥ

“베다 지식의 모든 주제에 정통한 학구적인 브라흐마나라고 할지라도, 끄리쉬나 의식의 과학에 정통한 바이쉬나바가 되지 않으면 영적 스승이 되기에 부적합하다. 그러나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그가 바이쉬나바, 즉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사람이면 영적 스승이 될 수 있다.” (빠드마 뿌라나)

물질적 존재가 안고 있는 생로병사의 문제를 부의 축적과 경제 발전으로 막을 수는 없다. 세계의 여러 곳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춘 부가 충만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많이 있지만, 물질적 존재가 겪는 문제는 그곳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여러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끄리쉬나 의식을 갖춘 끄리쉬나의 진정한 대리인을 통해 끄리쉬나의 과학을 다루고 있는 바가바드 기따와 스리마드 바가바땀을 통해 끄리쉬나의 조언을 구함으로써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경제 발전과 물질적 안락이 가족, 사회, 국가 및 전 세계가 경험하는 비탄을 몰아낼 수 있다면 아르주나는 이 지구상에서 비교할 데 없이 좋은 왕국이나 천상의 신들이 가진 주권조차 자기가 느끼는 비탄을 몰아낼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 의식에 은신했으며, 이것이야말로 평화와 화합을 위한 바른 길이다. 경제 발전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물질적 자연의 지각 변동으로 한순간에 끝날 수 있다. 현재 인간이 달에 가려는 것처럼 더 높은 행성으로 올라가더라도 이 모든 것은 한순간에 끝날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는 이것을 확증한다. 끄쉬네 뿐예 마르땨-로깜 비샨띠(kṣīṇe puṇye martya-lokaṁ viśanti). “경건한 행위의 결과가 다하면 행복의 절정에서 삶의 가장 낮은 단계로 다시 떨어진다.” 세상의 많은 정치인이 이런 식으로 무너졌다. 이러한 몰락은 더 극심한 비탄의 원인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탄을 영원히 없애려면 아르주나처럼 끄리쉬나께 은신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아르주나는 자기가 처한 문제를 어떻게 하면 확실히 풀 수 있는지 끄리쉬나께 질문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끄리쉬나 의식의 길이다.

원문

산자야 우바짜 sañjaya uvāca
에밤 욱뜨바 흐리쉬께샴 evam uktvā hṛṣīkeśaṁ
구다께샤 빠란따빠하 guḍākeśaḥ paran-tapaḥ
나 욧샤 이띠 고빈담 na yotsya iti govindam
욱뜨바 뚜쉬님 바부바 하 uktvā tūṣṇīṁ babhūva ha

동의어

산자야 우바짜: 산자야가 말했다, 에밤: 따라서, 욱뜨바: 말하는, 흐리쉬께샴: 감각의 주인 끄리쉬나께, 구다께샤하: 무지(無知)를 제어할 수 있는 자(아르주나), 빠람따빠하: 적을 벌하는 자, 나 욧세: 나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이띠: 따라서, 고빈담: 감각에 즐거움을 주시는 분(끄리쉬나께), 욱뜨바: 말하는, 뚜쉬님: 조용한, 바부바: 되다, 하: 확실히.

번역

산자야가 말했다: 이렇게 말한 후, 적을 벌하는 자, 아르주나가 끄리쉬나께 “고빈다여! 저는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침묵했습니다.

주석

드리따라쉬뜨라는 아르주나가 싸움을 포기하고 전쟁터를 떠나 구걸에 나설 것으로 생각하고 무척 기뻤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산자야는 아르주나를 적을 무찌를 능력이 있는 자(빠란따빠)로 묘사함으로써 다시 드리따라쉬뜨라를 실망시켰다. 비록 아르주나가 가족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잠시 그릇된 비탄에 잠겼지만 최고의 영적 스승, 끄리쉬나께 제자로서 항복했다. 이것은 그가 곧 가족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옳지 않은 비탄에서 벗어나 완벽한 자아 인식의 지식, 즉 끄리쉬나 의식으로 교화되어 틀림없이 싸우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의 가르침을 받아 끝까지 싸울 것이므로 드리따라쉬뜨라의 기쁨은 좌절될 것이다.

원문

땀 우바짜 흐리쉬께샤하 tam uvāca hṛṣīkeśaḥ
쁘라하산니바 바라따 prahasann iva bhārata
세나요루바요르 마뎨 senayor ubhayor madhye
비쉬단땀 이담 바짜하 viṣīdantam idaṁ vacaḥ

동의어

땀: 그에게, 우바짜: 말했다, 흐리쉬께샤하: 감각의 주인 끄리쉬나, 쁘라하산: 웃으며, 이바: 그와 같이, 바라따: 오 드리따라쉬뜨라, 바라따의 후손이여, 세나요호: 군대의, 우바요호: 양쪽의, 마뎨: 사이, 비쉬단땀: 비탄하고 있는 자에게, 이담: 다음의, 바짜하: 말씀.

번역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바로 그때 끄리쉬나께서 양쪽 군대의 한 가운데에서 비탄에 빠진 아르주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석

대화는 밀접한 친구 사이, 즉 흐리쉬께샤(끄리쉬나)와 구다께샤(아르주나)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둘은 동등한 친구였지만 둘 중 하나가 자발적으로 상대방의 제자가 되었다. 끄리쉬나는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결정했기 때문에 웃고 계신다. 끄리쉬나는 모든 이의 주로서 항상 모든 이의 스승에 해당하는 우월한 위치에 계시지만 헌애자가 원한다면 친구, 아들, 또는 연인이 되어 주신다. 그러나 당신을 스승으로 받아들이면 즉시 스승의 역할을 맡으시어 스승에게 요구되는 무게를 지니고 제자와 대화하신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 대화는 양쪽 군대가 모두 자리한 곳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모든 사람이 혜택을 입을 수 있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따의 대화는 특정한 개인, 사회 또는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친구든 적이든 똑같이 들을 수 있다.

원문

스리 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아쇼쨘 안바쇼짜스 뜨밤 aśocyān anvaśocas tvaṁ
쁘라갸바담스 짜 바샤세 prajñā-vādāṁś ca bhāṣase
가따순 아가따숨스 짜 gatāsūn agatāsūṁś ca
나누쇼짠띠 빤디따하 nānuśocanti paṇḍitāḥ

동의어

스리 바가반 우바짜: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쇼쨘: 비탄할 가치가 없는, 안바쇼짜하: 비탄하고 있다, 뜨밤: 너, 쁘라갸-바단: 배운 사람의 대화, 짜: 또한, 바샤세: 말하는, 가따: 잃어버린, 아순: 생명, 아가따: 지나지 않은, 아순: 생명, 짜: 또한, 나: 결코, 아누쇼짠띠: 비탄하다, 빤디따하: 학자.

번역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유식한 말을 하고 있지만 너는 비탄할 가치가 없는 것을 두고 애통해하고 있구나. 현명한 자는 산 자를 위해서도,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는다.

주석

주께서 즉시 스승의 위치에서 간접적으로 제자를 바보라 부르며 훈계하셨다. 주께서 “너는 유식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만 육신이 무엇인지 영혼이 무엇인지 아는 자, 즉 진정으로 학식 있는 자는 살아있는 상태든 죽은 상태든 육신이 처한 어떠한 단계를 두고도 비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신다. 후반부의 여러 장에서 설명되지만 지식이란 물질과 영혼, 그리고 이 둘을 통제하는 자에 관한 이해를 의미한다는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아르주나는 종교 원칙이 정치학이나 사회학보다 더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물질과 영혼, 그리고 절대자에 관한 지식이 종교 규범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러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매우 학식 있는 사람처럼 내세우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 그는 진정으로 학식 있는 자가 아니었기에 결과적으로 비탄할 가치가 없는 것을 두고 슬퍼했다. 몸은 태어나서 오늘이든 내일이든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따라서 육신은 영혼만큼 중요하지 않다. 이것을 아는 자가 진정 학식 있는 자이며 그런 자는 물질로 된 몸의 상태가 어떻든 결코 한탄할 이유가 없다.

원문

나 뜨베바함 자뚜 나삼 na tv evāhaṁ jātu nāsaṁ
나 뜨밤 네메 자나디빠하 na tvaṁ neme janādhipāḥ
나 짜이바 나 바비샤마하 na caiva na bhaviṣyāmaḥ
사르베 바얌 아따 빠람sarve vayam ataḥ param

동의어

나: 결코, 뚜: 그러나, 에바: 확실히, 아함: 나, 자뚜: 언제라도, 나: 않았다, 아삼: 존재하다, 나: 아니다, 뜨밤: 너, 나: 아니다, 이메: 이 모든 것, 자나-아디빠하: 왕들, 나: 결코, 짜: 또한, 에바: 확실히, 나: 아니다, 바비샤마하: 존재할 것이다, 사르베 바얌: 우리 모두, 아따 빠람: 내세에.

번역

나와 너, 그리고 여기 모인 모든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고 미래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존재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석

베다의 까타 우빠니샤드(Kaṭha Upaniṣad)와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Śvetāśvatara Upaniṣad)에서 최고인격신은 개별적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에 따라 각기 다른 상황에 부닥친 수없이 많은 생명체의 유지자라고 한다. 바로 그 최고인격신의 완전한 부분이 빠람아뜨마로 모든 생명체의 가슴속에 사신다. 지고한 주를 안팎으로 볼 수 있는 성자들만이 실제로 완전하며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니뚀 니땨남 쩨따나스 쩨따나남 nityo nityānāṁ cetanaś cetanānām
에꼬 바후남 요 비다다띠 까만 eko bahūnāṁ yo vidadhāti kāmān
땀 아뜨마스탐 예’누빠샨띠 디라스 tam ātma-sthaṁ ye ’nupaśyanti dhīrās
떼샴 샨띠 샤스바띠 네따레샴 teṣāṁ śāntiḥ śāśvatī netareṣā

(까타 우빠니샤드 2.2.13)

아르주나에게 전해진 똑같은 베다 진리가, 자신을 매우 유식한 것처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지식이 부족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주께서 당신을 비롯해 아르주나와 전쟁터에 모인 모든 왕은 영원히 개별 존재이며 속박되어 있거나 해방된 개별 생명체 둘 다를 당신이 영원히 유지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최고인격신은 가장 높은 개별 인격체이며 주의 영원한 벗인 아르주나와 그곳에 모인 여러 왕도 영원한 개별 인격체들이다. 그들이 과거에 개별 인격체로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으며 또한 앞으로 영원한 개별체로 남지 않을 것도 아니다. 그들의 개별성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미래에도 중단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를 위해서도 한탄할 이유는 없다.

해방을 이룬 다음 개별 영혼은 마야, 즉 환영의 덮개에서 벗어나 비인성적 브라흐만에 합쳐져 그 개별 존재를 상실한다는 마야바디 이론을 주 끄리쉬나, 최고의 권위자께서 여기에서 지지하고 계시지 않다. 속박된 상태에서만 개별성이 존재한다는 이론 역시 여기에서 지지받지 않는다. 우빠니샤드가 확증한 것처럼 끄리쉬나께서는 여기에서 주와 다른 이들의 개별성이 미래에도 영원히 지속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끄리쉬나는 환영에 빠지지 않으므로 끄리쉬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권위 있다. 만약 개별성이 사실이 아니라면 끄리쉬나께서 미래에도 그러하다고 그토록 강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마야바디는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 개별성이 영적이 아니라 물질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만약 개별성이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된다는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끄리쉬나의 개별성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끄리쉬나는 과거에 존재한 당신의 개별성과 미래의 개별성을 모두 말씀하고 계시다. 당신은 여러 방식으로 당신의 개별성을 확언하셨으며 비인성적 브라흐만이 당신에게 종속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끄리쉬나는 영적 개별성을 계속해서 유지하셨다. 만약 끄리쉬나가 한 개인의 의식 안에 있는 보통의 속박된 영혼이라고 간주하면 그의 바가바드 기따는 권위 있는 경전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결점인 네 가지 결함을 지닌 보통 사람이 경청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가르칠 수는 없다. 기따는 그러한 문헌의 차원을 넘어선다. 어떠한 세속의 책도 바가바드 기따와 비교될 수 없다. 끄리쉬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따의 모든 중요성은 사라진다. 마야바디들은 이 절에서 언급된 복수성은 상투적 개념으로서 육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 절에서 그런 육체적 개념은 이미 거부되었다. 생명체에 대한 육체적 개념을 비난한 다음, 끄리쉬나께서 어떻게 육체에 대해 상투적 명제를 다시 부여하시겠는가? 그러므로 개별성은 영적 차원에서 유지되며 이것은 스리 라마누자와 다른 위대한 아짜리아들에 의해 확증되었다. 기따의 여러 곳에 주의 헌애자들은 영적 개별성을 이해한다고 확실히 언급되어 있다. 최고인격신으로서의 끄리쉬나를 시기하는 자는 위대한 문헌을 올바로 이해할 방법이 없다. 비(非)헌애자들이 기따의 가르침에 접근하는 방식은 벌이 꿀단지의 겉을 핥는 것과 같다. 뚜껑을 열지 않고서 꿀을 맛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바가바드 기따의 신비는 제4장에서 설명되는 바와 같이 헌애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고, 그 외의 누구도 그 맛을 알 수 없다. 기따는 주의 존재를 시기하는 자들이 사실 건드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기따에 대한 마야바디의 설명은 전체 진리를 가장 잘못된 방향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주 짜이따냐는 마야바디의 주석을 읽는 것을 금했고, 마야바디 철학이 제시하는 이해방식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따의 진정한 신비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상실한다고 경고하셨다. 만약 개별성이 경험적 우주를 가리킨다면 주께서 가르치실 필요가 없다. 개별 영혼과 주의 복수성(이 둘이 하나가 아님)은 영원한 사실이며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베다에서 확증되었다.

원문

데히노’스민야타 데헤 dehino ’smin yathā dehe
까우마람 야우바남 자라 kaumāraṁ yauvanaṁ jarā
따타 데한따라-쁘랍띠르 tathā dehāntara-prāptir
디라스 따뜨라 나 무햐띠 dhīras tatra na muhyati

동의어

데히나하: 육체화된, 아스민: 여기에, 야타: 처럼, 데헤: 몸에, 까우마람: 소년시절, 야우바남: 청년, 자라: 노년, 따타: 마찬가지로, 데하-안따라: 육체의 변화, 쁘랍띠히: 성취, 디라하: 분별있는, 따뜨라: 그 결과, 나: 결코, 무햐띠: 현혹되는.

번역

육체에 갇힌 영혼이 어린 시절에서 청년기, 노년기로 계속 지나는 것처럼 죽음의 순간, 영혼은 다른 육체로 옮겨간다. 분별 있는 자는 이러한 변화에 당황해하지 않는다.

주석

모든 생명체는 개별 영혼이므로 때로는 어린이로, 때로는 젊은이로, 때로는 노인으로 나타나며 매 순간 몸이 변한다. 그러나 똑같은 영혼이 그 몸 안에 항상 있고, 그 영혼은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는다. 이 개별 영혼은 죽음의 순간에 다른 몸으로 옮겨가 육체를 바꾼다. 그리고 다음 생에 물질적 혹은 영적인 다른 몸을 받을 것이 확실하므로 아르주나는 자신이 그토록 걱정하는 비쉬마든 드로나든 그들의 죽음 때문에 한탄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들이 늙은 몸에서 젊은 몸으로 바뀌어 활력을 얻는 점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 삶을 사는 동안 하는 행위에 따라 이러한 육신의 변화는 여러 가지 기쁨과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고귀한 영혼인 비쉬마와 드로나는 다음 생에 틀림없이 영적 몸을 얻거나 적어도 물질적 존재로서 고차원적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천상(天上)의 몸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든 슬퍼할 이유는 없다.

개별 영혼, 초영혼,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본질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가진 자를 디라(dhīra), 즉 가장 분별 있는 자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육체의 변화에 절대 속지 않는다.

영혼은 입자처럼 작은 부분으로 쪼개질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영혼의 일원론을 주장하는 마야바디의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 서로 다른 개별 영혼으로 쪼개질 수 있다는 이론은 절대자도 쪼개질 수 있거나 변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 역시 최고 영혼의 불변성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기따에서 확증된 바와 같이 절대자의 단편적 부분들도 영원히 존재하며(사나따나), 이들을 “끄샤라(kṣara)”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물질계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단편적 부분들은 영원하며 해방을 얻은 후에도 개별 영혼은 여전히 개별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해방을 얻게 되면 최고인격신과 함께 축복과 완벽한 지식의 삶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 반영(反影)론을 초영혼에 적용할 수 있는데, 빠람아뜨마로 알려진 초영혼은 모든 개별 생명체의 몸 안에 존재한다. 초영혼은 개별 생명체와는 다른 존재이다. 물에 비친 하늘을 보면 그 비친 모습에서 해, 달, 별들도 볼 수 있다. 별들은 생명체에 비유될 수 있고 태양이나 달은 지고한 주에 비유할 수 있다. 개개의 단편적 영혼은 아르주나가 대표하고, 초영혼은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가 대표하고 있다. 그들은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 제4장의 서두에서 명확히 설명될 것이다. 만약 아르주나가 끄리쉬나와 같은 위치에 있고, 끄리쉬나가 아르주나보다 더 높지 않다면 스승과 제자라는 그들의 관계는 무의미하게 된다. 만일 둘 다 환영 에너지(마야, māyā)에 의해 현혹된다면 한 사람은 스승으로, 다른 사람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마야의 손아귀 안에서 그 누구도 권위 있는 스승이 될 수 없기에 그러한 가르침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마야에 현혹된 망각의 영혼인 아르주나는 개별 생명체이고 그런 생명체를 초월하는 끄리쉬나가 바로 지고한 주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원문

마뜨라-스빠르샤스 뚜 까운떼야 mātrā-sparśās tu kaunteya
시또쉬나-수카-두카-다하 śītoṣṇa-sukha-duḥkha-dāḥ
아가마빠이노’니땨스 āgamāpāyino ’nityās
땀스 띠띡샤스바 바라따 tāṁs titikṣasva bhārata

동의어

마뜨라-스빠르샤하: 감지, 뚜: 오직, 까운떼야: 꾼띠의 아들이여, 시따: 겨울, 우쉬나: 여름, 수카: 행복, 두카: 고통, 다하: 주다, 아가마: 나타나는, 아빠이나하: 사라지는, 아니땨하: 영원하지 않은, 땀: 그것들 모두, 띠띡샤스바: 그저 인내하려고 애쓰다, 바라따: 바라따 왕조의 후손이여.

번역

오 꾼띠의 아들이여, 영원하지 않은 행복과 불행의 교차는 여름과 겨울의 계절이 오고 가는 것과 같다.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행복과 불행은 감각의 인식에서 생기므로 그에 좌우되지 말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석

의무를 올바로 수행하려면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행복과 불행의 오고 감을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베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가(1월~2월) 기간에조차 이른 아침에 목욕해야 한다. 이 시기는 매우 추운 시기이지만 종교 원칙을 준수하는 자는 망설이지 않고 목욕한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가장 더운 여름 때인 5, 6월에도 주저하지 않고 부엌에서 요리한다. 계절의 불편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이처럼 싸움은 끄샤뜨리야들의 종교 원칙이며 설령 친구나 친척들과 싸워야 할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지식의 단계로 오르려면 종교 원칙의 규정들을 따라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오직 지식과 헌애로만 마야(환영)의 손아귀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주나에게 붙여진 다른 두 이름 역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를 “까운떼야”라고 부른 것은 모계(母系)의 위대한 혈통을 의미하고, “바라따”라고 부른 것은 부계(父系)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그는 양쪽으로 훌륭한 혈통을 물려받았음이 분명하다. 훌륭한 혈통은 올바른 의무 수행을 위한 책임감을 부여한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원문

얌 히 나 뱌타얀뗴떼 yaṁ hi na vyathayanty ete
뿌루샴 뿌루샤르샤바 puruṣaṁ puruṣarṣabha
사마-두카-수캄 디람 sama-duḥkha-sukhaṁ dhīraṁ
소’므리따뜨바야 깔빠떼 so ’mṛtatvāya kalpate

동의어

얌: 그에게, 히: 확실히, 나: 결코, 뱌타얀띠: 불행한, 에떼: 이 모든 것들, 뿌루샴: 사람에게, 뿌루샤-리샤바: 오 최고의 인간이여, 사마: 불변의, 두카: 불행의, 수캄: 행복과, 디람: 인내하는, 사하: 사람, 암리따뜨바야: 해방을 위해, 깔빠떼: 자격이 있는.

번역

오 최고의 인간이여(아르주나), 행복과 불행에 흔들림 없이 한결같은 자는 분명 해방을 얻을 자격이 있다.

주석

영적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이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행복과 불행의 맹공을 한결같이 견딜 수 있는 자는 분명 해방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바르나스라마 제도에서 네 번째 삶의 단계, 즉 버리는 삶의 질서(산냐사 sannyasa)는 고생스러운 위치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하는 데 진지한 사람은 모든 어려움도 감수하고 분명 산냐사라는 삶의 질서를 받아들인다. 어려움은 주로 아내와 자식들을 포기하는, 가족 관계를 끊는 데서 온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참을 수 있다면 영적 깨달음을 향한 길은 반드시 완성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아르주나는 끄샤뜨리야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족이나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어렵다고 하더라고 그것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받는다. 주 짜이따냐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산냐사의 길을 택했고 당신의 젊은 아내와 늙은 모친을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산냐사를 택했고 고차원적 의무를 꾸준히 수행하셨다. 이것이 바로 물질적 속박에서 해방을 얻는 길이다.

원문

나사또 비댜떼 바보 nāsato vidyate bhāvo
나바보 비댜떼 사따하 nābhāvo vidyate sataḥ
우바요라삐 드리쉬똔따스 ubhayor api dṛṣṭo ’ntas
뜨바나요스 땃뜨바-다르시비히 tv anayos tattva-darśibhiḥ

동의어

나: 결코 하지 않다, 아사따하: 영원하지 않은 것들, 비댜떼: 있다, 바바하: 인내, 나: 결코, 아바바하: 질적 변화, 비댜떼: 있다, 사따하: 영원한 것들, 우바요호: 두 개의, 아삐: 진실로, 드리쉬따하: 준수하다, 안따하: 결론, 뚜: 정말로, 아나요호: 그들 중, 땃뜨바: 진리의, 다르시비히: 보는 자들에 의해.

번역

진리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물질적 육신)은 내구성이 없고, 영원한 것(영혼)은 변화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이 둘의 본성을 연구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주석

변하는 육체는 내구성이 없다. 육체가 여러 세포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매 순간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 의학도 인정한 바이며 성장과 노화의 과정은 우리 몸에서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영혼은 몸과 마음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똑같고, 계속해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물질과 영혼의 차이다. 본질적으로 몸은 항상 변하지만 영혼은 영원하다. 이 결론은 인성주의자든 비인성주의자든 진리를 통찰하는 모든 단계의 사람들이 확립했다. 비쉬누 뿌라나(2.12.38)에서 “비쉬누와 그의 모든 거처에는 스스로 빛나는 영적 존재가 있다(죠띰쉬 비쉬누르 부바나니 비쉬누 jyotīṁṣi viṣṇur bhuvanāni viṣṇuḥ)”라고 했다. 존재와 비존재라는 말은 오직 영혼과 물질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통찰한 모든 사람의 결론이다.

이것이 주께서 무지로 당황하는 생명체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의 시작이다. 무지의 제거는 숭배하는 자와 숭배 대상과의 영원한 관계가 재정립되는 것을 포함하고 결과적으로 부분인 생명체와 전체인 최고인격신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과 지고한 존재와의 차이에 대한 이해, 즉 우리 자신을 철저히 연구함으로써 절대자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물론 베단따 수뜨라에서도 절대자가 모든 발생의 기원이라고 인정되었다. 그러한 발생은 고등하거나 열등한 자연의 귀결로 경험된다. 생명체는 고등한 자연에 속하는데, 이것은 제7장에서 설명될 것이다. 비록 에너지와 에너지원(源)의 차이가 없을지라도 에너지원(源)은 절대자로 인정되고, 에너지 혹은 자연은 종속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주인과 종,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생명체는 항상 지고한 주께 종속되어 있다. 이 명백한 지식을 무지에 빠진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 없기에 주께서 이 무지를 없애고, 모든 시대의 모든 생명체를 교화하시려고 바가바드 기따를 설파하신다.

원문

아비나시 뚜 딷 빋디 avināśi tu tad viddhi
예나 사르밤 이담 따땀 yena sarvam idaṁ tatam
비나샴 아뱌야샤샤 vināśam avyayasyāsya
나 까스찟 까르뚬 아르하띠 na kaścit kartum arhati

동의어

아비나시 :소멸하지 않는, 뚜: 그러나, 땃: 그것, 빗디: 그것을 알다, 예나: 그것에 의해, 사르밤: 몸 전체에, 이담: 이것, 따땀: 두루 존재하는, 비나샴: 파괴, 아뱌야샤: 소멸하지 않는 것들의, 아샤: 그것의, 나 까스찟: 어느 누구도, 까르뚬: 하다, 아르하띠: 가능한.

번역

몸 전체에 퍼져 있는 이것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멸하지 않는 영혼을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다.

주석

이 절은 영혼의 진정한 본성이 몸 전체에 퍼져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누구라도 몸 전체에 펴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의식이다. 모든 사람이 부분이든 전체든 육체의 고통과 즐거움을 의식한다. 이 의식의 분산은 자기 육체에 한정되어 있다. 한 사람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즐거움을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개개의 육체는 개별 영혼을 담고 있고 영혼이 존재하는 징후는 개개인의 의식으로 알 수 있다. 이 영혼은 머리카락 끝의 만분의 일 크기라고 한다.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5.9)에서 이것을 확증한다.

발라그라-샤따-바가샤 bālāgra-śata-bhāgasya
샤따다 깔삐따샤 짜 śatadhā kalpitasya ca
바고 지바 비계야하 bhāgo jīvaḥ sa vijñeyaḥ
사 짜난땨야 깔빠떼 sa cānantyāya kalpate

“머리카락의 끝을 백 개로 나누고 그 하나를 또다시 백 개로 나누면 그 각 부분이 영혼의 크기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또 있다.

께샤그라-샤따-바가샤 keśāgra-śata-bhāgasya
샤땀샤 사드리샤뜨마까하 śatāṁśaḥ sādṛśātmakaḥ
지바 숙쉬마-스바루뽀’얌 jīvaḥ sūkṣma-svarūpo ’yaṁ
상캬띠또 히 찟-까나하 saṅkhyātīto hi cit-kaṇaḥ

“머리카락 끝의 만분의 일 크기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적 입자가 있다.”

그러므로 영혼의 각 입자는 물질의 원자보다 더 작은 영적 원자이며 이러한 원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작은 영적 불꽃이 물질적 육신의 기본 원칙이며 영적 불꽃의 영향이 약효(藥效)가 온몸에 퍼지듯 몸 전체에 퍼져있다. 이 영혼의 전류는 몸 전체에서 의식으로 느껴지고 이것이 바로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의식 없는 육신은 죽은 몸이라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떠한 물질적 수단을 동원해도 죽은 몸에서 의식이 되살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은 어떤 중량의 물질 조합에서가 아니라 영혼에서 생겨난다. 문다까 우빠니샤드(3.1.9)에 원자적 영혼의 크기가 더 설명되어 있다.

에쇼’누르 아뜨마 쩨따사 베디따뵤 eṣo ’ṇur ātmā cetasā veditavyo
야스민 쁘라나 빤짜다 삼비베샤 yasmin prāṇaḥ pañcadhā saṁviveśa
쁘라나이스 찟땀 사르밤 오땀 쁘라자남 prāṇaiś cittaṁ sarvam otaṁ prajānāṁ
야스민 비슏데 비바바띠 에샤 아뜨마 yasmin viśuddhe vibhavaty eṣa ātmā

“영혼은 크기가 원자 만하며 완벽한 지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이 원자 만한 영혼은 다섯 가지의 기(氣: 쁘라나, 아빠나, 비야나, 사마나, 우다나)속에 떠다니고, 심장에 위치하며, 생명체의 몸 전체에 그 영향력이 미친다. 영혼이 다섯 종류의 물질적 기의 더러움에서 정화될 때 그 영적 능력을 발휘한다.”

하타 요가 체계는 어떤 물질적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물질적 대기에 속박된 작은 영혼의 해방을 목적으로 여러 앉는 자세를 통해 순수한 영혼을 에워싸고 있는 다섯 가지의 기를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베다 문헌에 영혼의 원자적 구조가 설명되어 있고 온전한 정신을 갖춘 누구라도 실질적 경험을 통해 실제로 느낄 수 있다. 오직 제정신이 아닌 자들만이 이 원자적 영혼을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는 비쉬누-땃뜨바(viṣṇu-tattva)라고 생각한다.

원자적 영혼의 영향력은 개별 육신의 몸 전체에 미칠 수 있다. 문다까 우빠니샤드에 따르면 이 원자적 영혼은 모든 생명체의 심장에 있으며, 그 크기가 세속적 과학자의 인식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부는 바보처럼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개별 원자적 영혼은 초영혼과 함께 심장에 분명히 존재하며 육체의 모든 운동 에너지는 신체의 이 부분에서 나온다. 폐로부터 산소를 나르는 혈구는 영혼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영혼이 그 자리를 떠나면 혈액의 융합 작용도 멈춘다. 현대 의학은 적혈구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에너지의 원천인 영혼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의학도 신체가 가진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 심장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전체 영혼(주)의 이러한 원자적 입자들은 햇빛의 입자에 비유된다. 햇빛에는 빛을 발하는 입자들이 수없이 많다. 마찬가지로 지고한 주의 단편적 부분들은 쁘라바(prabhā), 즉 상위 에너지라 불리는 지고한 주의 빛에서 뿜어져 나온 원자의 불꽃들이다. 따라서 베다의 지식을 따르든 현대 과학을 따르든 육체에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으며 이 영혼의 과학을 최고인격신께서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명백하게 설명하셨다.

원문

안따반따 이메 데하 antavanta ime dehā
니땨쇽따 샤리리나하 nityasyoktāḥ śarīriṇaḥ
아나시노’쁘라메야샤 anāśino ’prameyasya
따스맏 유댜스바 바라따 tasmād yudhyasva bhārata

동의어

안따-반따하: 소멸하는, 이메: 이 모든, 데하: 물질적 육신, 니땨샤: 영원한 존재, 욱따하: 라고 한다, 샤리리나하: 육체에 갇힌 영혼, 아나시나하: 절대 파괴되지 않는, 아쁘라메야샤: 측정할 수 없는, 따스맛: 그러므로, 유댜스바: 싸워라, 바라따: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번역

파괴될 수 없고 측정 불가하며 영원한 생명체의 물질적 육신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일어나 싸워라,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주석

물질적 육신은 본질적으로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는 즉시 소멸할 수도 있고, 백 년 후에 소멸할 수도 있다. 오직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육신을 무한히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혼은 너무나 작아 적이 볼 수조차 없어 그 영혼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앞 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혼은 너무나 작아 누구도 어떻게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생명체의 영혼을 죽일 수 없고, 물질적 육신을 영원히 살리거나 보호할 수 없기에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도 비탄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전체 영혼의 작은 입자는 자기가 한 행위에 따라 물질적 육신을 얻게 되므로 종교원칙을 반드시 지킬 필요가 있다. 베단따 수뜨라에서 말하기를, 생명체는 지고한 빛의 일부이므로 빛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한다. 햇빛이 전 우주를 유지하듯이, 영혼의 빛도 이 물질적 육신을 유지한다. 영혼이 이 물질적 육신을 떠나는 즉시, 육신은 분해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육신을 유지하는 것은 영혼이다. 육신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아르주나는 싸워야 하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고려 때문에 종교적 명분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충고받았다.

원문

야 에남 벳띠 한따람 ya enaṁ vetti hantāraṁ
야스짜이남 만야떼 하땀 yaś cainaṁ manyate hatam
우바우 따우 나 비자니또 ubhau tau na vijānīto
나얌 한띠 나 한야떼 nāyaṁ hanti na hanyate

동의어

야: 하는 자, 에남: 이것, 벳띠: 알다, 한따람: 살해자, 야하: 하는 자, 짜: 또한, 에남: 이것, 만야떼: 생각하다, 하땀: 죽이다, 우바우: 둘 다, 따우: 그들, 나: 결코, 비자니따하: 지식이 있는, 나: 결코, 아얌: 이것, 한띠: 죽이다, 나: 아닌, 한야떼: 살해되다.

번역

생명은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기에 생명체를 죽인다고 생각하거나 생명체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자 모두 지식이 없는 자이다.

주석

육체화된 생명체가 치명적 무기로 공격받을 때 육신 안에 깃든 생명체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다음 절에서 명백히 밝혀질 것이지만, 영혼은 너무나 작아서 어떠한 무기로도 죽일 수 없다. 생명은 본질이 영적이므로 죽임을 당할 수 없다. 따라서 죽는 것은 오직 육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육신을 함부로 죽여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베다에서 가르치기를, 마 힘샷 사르바 부따니(mā hiṁsyāt sarvā bhūtāni), 즉 “그 누구에게도 폭력을 쓰지 말라.”라고 한다. 또한 생명이 죽지 않는다고 해서 동물 도살을 부추기는 것 또한 아니다. 합당한 권한 없이 어떤 생명체의 육체라도 죽이는 것은 끔찍한 짓이며, 주(主)의 법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의 법으로도 처벌받게 된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자기 마음대로가 아닌 종교원칙을 위해 전쟁에 임한다.

원문

나 자야떼 므리야떼 바 까다찐 na jāyate mriyate vā kadācin
나얌 부뜨바 바비따 바 나 부야하 nāyaṁ bhūtvā bhavitā vā na bhūyaḥ
아조 니땨 샤스바또’얌 뿌라노 ajo nityaḥ śāśvato ’yaṁ purāṇo
나 한야떼 한야마네 샤리레 na hanyate hanyamāne śarīre

동의어

나: 결코, 자야떼: 태어나다, 므리야떼: 죽다, 바: 어느 것도, 까다찟: 어떠한 때라도(과거, 현재, 미래), 나: 결코, 아얌: 이것, 부뜨바: 이미 태어난, 바비따: 미래에 태어날, 바: 또는, 나: 아니다, 부야하: 다시 존재하는, 아자하: 태어나지 않은, 니땨하: 영원한, 샤스바따하: 지속적인, 아얌: 이것, 뿌라나하: 가장 오래된 것, 나: 결코, 한야떼: 죽다, 한야마네: 살해되다, 샤리레: 육체.

번역

어느 때에도 영혼에게 생과 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과거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현재에 태어나는 것 또한 아니며, 미래에 태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항상 존재하며 원초적이다. 육신이 살해될 때 영혼은 절대 살해되지 않는다.

주석

최고 영혼의 자그마한 원자적 파편은 절대자와 질적으로 하나이다. 영혼은 육신과 같은 변화를 거치지 않는다. 때때로 영혼은 꾸따-스타(kūṭa-stha), 즉 한결같은 것으로 불린다. 육신은 여섯 종류의 변화를 거치게 된다. 먼저 모체의 자궁에서 태어나 잠시 머물며 자라서 자식을 낳고, 점점 쇠퇴하여 사라지고 마침내 잊힌다. 그러나 영혼은 이러한 변화를 거치지 않는다. 영혼은 태어나지 않지만 물질로 된 몸을 갖기에 몸이 출생을 맞는다. 영혼은 절대 태어나지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태어나는 어떤 것도 죽음을 맞게 되지만 영혼에게는 출생이 없기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영혼은 영원하고 항상 존재했으며 원초적이다. 즉 영혼의 존재는 역사적 추적이 불가능하다. 육신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우리는 영혼의 출생 혹은 유래를 찾으려고 한다. 영혼은 육신처럼 어느 순간에도 늙지 않는다. 노인이 되어도 혼은 어린 시절에나 젊었을 때나 같다는 것을 노인 본인도 느낄 수 있다. 즉 육체의 변화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영혼은 나무나 다른 물질적인 것처럼 악화되지 않는다. 영혼은 부산물을 낳지도 않는다. 육신의 부산물, 이름하여 자식들 역시 서로 다른 개별 영혼이고 육신 때문에 특정한 사람의 자식으로 보이는 것뿐이다. 육체는 영혼의 존재 때문에 성장하지만 영혼은 자식을 낳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신의 여섯 단계의 변화와 무관하다.

까타 우빠니샤드(1.2.18)에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글을 찾을 수 있다.

나 자야떼 므리야떼 바 비빠스찐 na jāyate mriyate vā vipaścin
나얌 꾸따스찐 나 바부바 까스찟 nāyaṁ kutaścin na babhūva kaścit
아조 니땨 샤스바또’얌 뿌라노 ajo nityaḥ śāśvato ’yaṁ purāṇo
나 한야떼 한야마네 샤리레 na hanyate hanyamāne śarīre

이 절의 의미와 취지는 바가바드 기따와 같지만 이 절에 학식 또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빠스찟(vipaścit)이라는 특별한 단어가 나온다.

영혼은 지식으로 가득하며 항상 의식으로 차 있다. 그러므로 의식은 영혼의 징후이다. 심장에서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의식의 존재로 영혼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때때로 구름이나 다른 이유로 하늘의 해를 볼 수 없지만 햇빛이 항상 존재하므로 우리는 낮이라고 확신한다. 동틀 무렵이 되어 약간의 빛이 비치기라도 하면 즉시 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든 육신에 어느 정도의 의식이 있기에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이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절대자의 의식과는 다르다. 개별 영혼의 의식은 잊어버리기 쉬운 경향이 있다. 영혼이 자기의 진정한 본성을 잊어버리면 끄리쉬나의 드높은 가르침을 받아 지식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끄리쉬나는 우리처럼 망각하는 영혼이 아니다. 만약 끄리쉬나가 그렇다면 그가 가르치는 바가바드 기따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영혼이 있고 이들은 이름하여 작은 입자적 영혼(아누-아뜨마 aṇu-ātmā)과 초영혼(비부-아뜨마 vibhu-ātmā)이다. 이것은 까타 우빠니샤드(1.2.20)에서도 확증된다.

아노라니얀 마하또 마히얀 aṇor aṇīyān mahato mahīyān
아뜨마샤 잔또르 니히또 구하얌 ātmāsya jantor nihito guhāyām
땀 아끄라뚜후 빠샤띠 비따-쇼꼬 tam akratuḥ paśyati vīta-śoko
다뚜후 쁘라사단 마히마남 아뜨마나하 dhātuḥ prasādān mahimānam ātmanaḥ

“초영혼(빠람아뜨마 Paramātmā)과 원자적 영혼(지바뜨마 jīvātmā)은 둘 다 생명체의 몸이라는 나무 위의 가슴 안에 앉아 있는데, 모든 물질적 욕망과 비탄에서 벗어난 자만이 절대자의 은총으로 영혼의 영광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설명될 것이지만 끄리쉬나가 초영혼의 근원이고, 아르주나는 원자적 영혼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끄리쉬나 또는 끄리쉬나의 진정한 대리인(영적 스승)을 통해 교화되어야 한다.

원문

베다비나시남 니땸 vedāvināśinaṁ nityaṁ
야 에남 아잠 아뱌얌 ya enam ajam avyayam
까탐 사 뿌루샤 빠르타 kathaṁ sa puruṣaḥ pārtha
깜 가따야띠 한띠 깜 kaṁ ghātayati hanti kam

동의어

베다: 알다, 아비나시남: 파괴할 수 없는, 니땸: 항상 존재하는, 야하: 하는 자, 에남: 이것(영혼), 아잠: 태어나지 않은, 아뱌얌: 변하지 않는, 까탐: 어떻게, 사하: 그것, 뿌루샤하: 사람, 빠르타: 오 빠르타(아르주나), 깜: 그에게, 가따야띠: 해를 끼치는, 한띠: 죽이다, 깜: 그에게.

번역

오 빠르타여, 영혼은 파괴될 수 없고 영원하며 태어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가 어떻게 누구를 죽일 수 있으며, 또 누구를 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주석

모든 것은 각기 적절한 용도를 지니고, 완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과 장소를 정확히 안다. 이처럼 폭력도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으며 폭력을 어떻게 바르게 쓰느냐는 그 사람의 지식에 달려있다. 정의로운 재판관이 살인을 저지른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더라도 우리가 그 재판관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형법의 규정에 따라 폭력을 명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법률서, 마누-삼히따(Manu-saṁhitā)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저지른 큰 죄로 인해 다음 생에서 고통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이 살인자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실제로 이롭다. 마찬가지로 끄리쉬나께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실 때, 그 폭력은 최상의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 결론 내려야 한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를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행한 폭력은 실제로 폭력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끄리쉬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 즉 영혼은 죽임을 당할 수 없기에 정의의 유지를 위해 소위 폭력이라는 것은 허락된다. 외과 수술은 환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끄리쉬나의 가르침에 따라 아르주나가 싸우는 것은 지식으로 가득 찬 행위이며 어떠한 죄의 반작용(과보)도 생기지 않는다.

원문

바삼시 지르나니 야타 비하야 vāsāṁsi jīrṇāni yathā vihāya
나바니 그리흐나띠 나로’빠라니 navāni gṛhṇāti naro ’parāṇi
따타 샤리라니 비하야 지르나니tathā śarīrāṇi vihāya jīrṇāny
안야니 삼야띠 나바니 데히 anyāni saṁyāti navāni dehī

동의어

바삼시: 옷, 지르나니: 오래되고 낡은, 야타: 그처럼, 비하야: 포기하다, 나바니: 새 옷, 그리나띠: 얻다, 나라하: 사람, 아빠라니: 다른 것들, 따타: 똑같은 방식으로, 샤리라니: 육체, 비하야: 포기하다, 지르나니: 오래되고 쓸모없는, 안야니: 다른, 삼야띠: 진실로 받아들이다, 나바니: 새것, 데히: 육체화된 것.

번역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영혼은 늙고 쓸모없는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육신을 얻는다.

주석

원자적 개별 영혼이 육체를 바꾸는 것은 인정된 사실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 심장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근원도 설명하지 못하는 현대 과학자들조차 유아기에서 소년기, 소년기에서 청년기, 청년기에서 노년기로 이어지는 지속적 육체의 변화를 인정한다. 노년기에 그 변화는 다른 신체로 옮겨진다. 이것은 이미 앞 절(2.13)에서 설명되었다.

원자적 개별 영혼이 다른 육체로 옮겨가는 것은 초영혼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다. 초영혼은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소망을 들어주듯이 원자적 영혼의 소망을 성취해 준다.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와 문다까 우빠니샤드와 같은 베다는 영혼과 초영혼을 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새로 비유한다. 한 마리는(원자적 개별 영혼) 나무의 열매를 쪼아 먹고 있고, 다른 한 마리(끄리쉬나)는 그 친구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비록 이 둘은 질적으로 같지만 두 마리의 새 중 한 마리는 나무의 열매에 몰두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 마리는 친구의 행위를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끄리쉬나는 지켜보는 새이고, 아르주나는 열매를 먹고 있는 새이다. 비록 이들은 친구지만 하나는 주인이고 다른 하나는 종이다. 원자적 개별 영혼이 이 관계를 잊어버림으로써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다. 지바(jīva) 영혼은 물질적 육신이라는 나무에서 무척 고생하고 있지만, 아르주나가 끄리쉬나의 가르침에 자발적으로 항복하기로 한 것처럼 옆에 앉아 있는 새를 최고의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항복한 새는 모든 비탄에서 즉시 벗어나게 된다. 문다까 우빠니샤드(3.1.2)와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4.7)가 이것을 확증한다.

사마네 브릭쉐 뿌루쇼 니마그노 samāne vṛkṣe puruṣo nimagno
니샤야 쇼짜띠 무햐마나하 ’nīśayā śocati muhyamānaḥ
주쉬땀 야다 빠샤띠 안얌 이샴 juṣṭaṁ yadā paśyaty anyam īśam
아샤 마히마남 이띠 비따-쇼까하 asya mahimānam iti vīta-śokaḥ

“비록 두 마리 새가 같은 나무에 앉아 있지만, 열매를 먹고 있는 새는 그 열매를 즐기는 자이지만 근심과 비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어쩌다가 그 새가 자기 친구이며 주(主)인 옆에 앉은 새에게 얼굴을 돌려 주의 영광을 알게 되면 고통을 겪고 있던 새는 모든 근심에서 즉시 벗어나게 된다.” 아르주나는 이제 자신의 얼굴을 영원한 친구, 끄리쉬나께 돌려 그에게서 바가바드 기따를 배우고 있다. 끄리쉬나로부터 바가바드 기따를 들음으로써 아르주나는 주의 가장 높은 영광을 이해할 수 있으며 비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서 아르주나는 그의 나이 든 할아버지와 스승이 몸을 바꾸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말라고 주께 충고받고 있다. 정당한 전투에서 그들의 육신을 죽임으로써 그들이 다양한 육신의 반작용(과보) 전부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제단(祭壇), 즉 정당한 전투에 자기 생명을 내놓는 자는 곧 육신이 쌓은 반작용을 씻고 높은 위치의 삶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원문

나이남 친단띠 샤스뜨라니 nainaṁ chindanti śastrāṇi
나이남 다하띠 빠바까하 nainaṁ dahati pāvakaḥ
나 짜이남 끌레다얀땨뽀 na cainaṁ kledayanty āpo
나 쇼샤야띠 마루따하 na śoṣayati mārutaḥ

동의어

나: 결코, 에남: 이 영혼, 친단띠: 조각낼 수 있다, 샤스뜨라니: 무기, 나: 결코, 에남: 이 영혼, 다하띠: 태우다, 빠바까하: 불, 나: 결코, 짜: 또한, 에남: 이 영혼, 끌레다얀띠: 젖다, 아빠하: 물, 나: 결코, 쇼샤야띠: 마르다, 마루따하: 바람.

번역

영혼은 어떠한 무기로도 조각낼 수 없고 불에 타지도 않을뿐더러 물에 젖지도, 바람에 시들지도 않는다.

주석

칼, 화염 무기, 비(물) 무기, 회오리바람 무기 등 어떠한 무기로도 영혼을 죽일 수 없다. 불로 된 현대의 무기를 비롯해 흙, 물, 공기, 하늘 등으로 만들어진 많은 종류의 무기가 존재한다. 현대의 원자력 무기 역시 불로 된 무기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여러 종류의 물질 구성 요소로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무기가 있었다. 불 무기는 물 무기로 대적하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현대 과학에 알려져 있지 않다. 현대 과학자들은 회오리바람 무기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런데도 영혼은 절대 조각나지 않으며 현대의 과학적 도구는 말할 것도 없이 어떠한 무기로도 파괴될 수 없다.

마야바디들은 무지해서 개별 영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결국 환영 에너지에 현혹되고 만다. 개별 영혼을 원래의 최고 영혼에서 단절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개별 영혼은 최고 영혼의 영원히 분리된 부분이다. 영혼은 영원히 개별적이며 원자적이기 때문에(사나따나), 환영 에너지에 덮이기 쉽고, 결국 주와의 교제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것은 불꽃이 불과 질적으로 하나이지만 불에서 분리될 때 즉시 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라하 뿌라나(Varāha Purāṇa)에서 모든 생명체는 절대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부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도 그것은 영원히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주께서 아르주나에게 가르치신 바대로 생명체가 환영에서 벗어나더라도 여전히 분리된 개체로 남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르주나가 끄리쉬나께 얻은 지식으로 해방을 얻더라도 끄리쉬나와 하나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원문

앗체됴’얌 아다효’얌 acchedyo ’yam adāhyo ’yam
아끌레됴’쇼샤 에바 짜 akledyo ’śoṣya eva ca
니땨 사르바-가따 스타누르 nityaḥ sarva-gataḥ sthāṇur
아짤로’얌 사나따나하 acalo ’yaṁ sanātanaḥ

동의어

앗체댜하: 부서지지 않는, 아얌: 이 영혼, 아다햐하: 태울 수 없는, 아얌: 이 영혼, 아끌레댜하: 녹지 않는, 아쇼샤하: 마르지 않는, 에바: 확실히, 짜: 그리고, 니땨하: 영원한, 사르바 가따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스타누후: 변하지 않는, 아짤라하: 움직이지 않는, 아얌: 이 영혼, 사나따나하: 영원히 똑같은.

번역

이 개별 영혼은 부서지지 않고 녹지 않으며 타지도, 마르지도 않는다. 영혼은 영원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며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영원히 똑같다.

주석

원자적 영혼이 가진 이 모든 자질은 개별 영혼이 전체 영혼의 영원한 원자적 입자이고, 변하지 않으며 영원히 똑같은 원자로 지속된다는 점을 분명히 입증한다. 일원론적 이론을 여기에 적용할 수 없는 이유는 개별 영혼은 절대 전체 영혼과 동질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원자적 영혼은 물질적 더러움에서 벗어난 후 최고인격신의 광채 속에서 영적 불꽃이 되려고 하지만, 지성을 갖춘 영혼은 최고인격신과 함께할 수 있는 영적 행성들로 들어간다.

사르바-가따(모든 곳에 존재하는)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생명체는 절대신이 창조한 모든 영역에 두루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땅 위에서, 물 안에서, 공중에서, 흙 속에서, 심지어 불 속에서도 살고 있다. 불 속에서 모든 것이 살균된다는 믿음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영혼은 불에 타지 않는다고 여기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양 속에서도 그곳에 살기에 적합한 몸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태양에 생명체가 거주하지 않는다면 사르바-가따, “모든 곳에 살고 있는”이라는 말은 무의미하게 된다.

원문

아뱍또’얌 아찐뚀’얌 avyakto ’yam acintyo ’yam
아비까료’얌 우쨔떼 avikāryo ’yam ucyate
따스맏 에밤 비디뜨바이남 tasmād evaṁ viditvainaṁ
나누쇼찌뚬 아르하시 nānuśocitum arhasi

동의어

아비악따하: 보이지 않는, 아얌: 이 영혼, 아찐땨하: 상상할 수도 없는, 아얌: 이 영혼, 아비까르야하: 변하지 않는, 아얌: 이 영혼, 우쨔떼: 라고 한다, 따스맛: 그러므로, 에밤: 이처럼, 비디뜨바: 잘 아는, 에남: 이 영혼, 나: 하지 않다, 아누쇼찌뚬: 슬퍼하다, 아르하시: 할 가치가 있다.

번역

영혼은 보이지 않고 상상 불가하며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너는 이것을 잘 이해하여 육신을 두고 비통해하지 말아라.

주석

앞서 언급했듯이, 영혼은 우리의 물질적 측정으로는 너무나 작아 가장 강력한 현미경으로조차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에 관한 한 스루띠(경전)의 증거, 즉 베다의 지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존재를 경험적으로 확립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진리를 수용해야만 하는 이유는 영혼이란 인지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이해에 관한 다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위 권위를 받아들여야만 이해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 누구도 친어머니의 권위에 따른 친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어머니의 말씀 없이 친부를 확인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베다를 공부하지 않고 영혼을 이해할 방법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은 인간의 경험적 지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영혼은 의식이며 의식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역시 베다의 설명이고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변하는 육신과는 달리 영혼에는 변화가 없다. 영원히 불변하는 영혼은 무한한 최고 영혼에 비교해 원자적이고 계속해서 그렇게 남는다. 최고 영혼은 무한대(無限大)이고, 원자적 영혼은 무한소(無限小)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이 무한소의 영혼은 무한대의 영혼, 즉 최고인격신과 절대 동등해질 수 없다. 영혼의 개념을 확실히 정립하기 위해 이 개념은 베다에 다양한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오류 없이 철저히 이해하려면 반복이 필수적이다.

원문

아타 짜이남 니땨-자땀 atha cainaṁ nitya-jātaṁ
니땸 바 만야세 므리땀 nityaṁ vā manyase mṛtam
따타삐 뜨밤 마하-바호 tathāpi tvaṁ mahā-bāho
나이남 쇼찌뚬 아르하시 nainaṁ śocitum arhasi

동의어

아타: 그러나 만약, 짜: 또한, 에남: 이 영혼, 니땨-자땀: 항상 태어나는, 니땸: 영원히, 바: 어느 것이든, 만야세: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 므리땀: 죽은, 따타 아삐: 여전히, 뜨밤: 너, 마하-바호: 오 강력히 무장한 자여, 나: 결코, 에남: 영혼에 관해서, 쇼찌뚬: 비탄하다, 아르하시: 마땅하다.

번역

설령 영혼(생명의 징후)이 항상 태어나고 죽는다고 생각하더라도 네가 슬퍼할 이유는 없다. 오 강력히 무장한 자여.

주석

육신을 넘어선 영혼의 독자적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도와 이와 유사한 부류의 철학자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주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를 말씀하셨을 때도 이런 철학자들이 있었던 듯하고 그들을 로까야띠까(Lokāyatika)와 바이바쉬까(Vaibhāṣika)라고 불렀다. 그런 철학자들은 생명이 물질 조합의 숙성된 상황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 역시 이와 유사하게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육체는 물리적 요소의 조합으로, 특정한 때에 물리적 요소와 화학적 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생명의 징후가 발달한다고 한다. 인류학 이론은 이러한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유행처럼 퍼져 가고 있는 여러 사이비 종교들 역시 이러한 철학을 고수하며, 허무주의적이고 신을 부정하는 불교 일파 또한 마찬가지다.

바이바쉬까 철학처럼 아르주나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비탄할 이유가 없다. 어떤 화학 약품 덩어리를 잃고 그것에서 초래된 슬픔으로 자기 본연의 의무를 그만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현대 과학과 전쟁은 승리를 위해 무수한 화학품(육신)을 소모하고 있다. 바이바쉬까 철학에 따르면 소위 영혼, 즉 아뜨마라는 것은 육신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아르주나가 원자 같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베다의 결론을 받아들이든,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든 어떤 경우에도 비탄해야 할 이유는 없다. 바이바쉬까 이론에 따르면 수많은 생명체가 매 순간 물질에서 발생하고 그중 많은 수가 매 순간 사라지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를 두고 슬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만약 영혼의 환생이 없다면 아르주나는 그의 할아버지와 스승을 죽인 데 대한 죄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끄리쉬나께서는 냉소적으로 아르주나를 마하-바후, 강력히 무장한 자로 표현하고 계신데, 이것은 끄리쉬나께서는 베다의 지혜를 도외시한 바이바쉬까의 이론을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끄샤뜨리야로서 아르주나는 베다 문화에 종속되며 그 원칙을 계속 지킬 의무가 있다.

원문

자따샤 히 드루보 므리뜌르 jātasya hi dhruvo mṛtyur
드루밤 잔마 므리따샤 짜 dhruvaṁ janma mṛtasya ca
따스맏 아빠리하르예’르테 tasmād aparihārye 'rthe
나 뜨밤 쇼찌뚬 아르하시 na tvaṁ śocitum arhasi

동의어

자따샤: 태어난 자는, 히: 분명히, 드루바하: 사실, 므리뜌: 죽음, 드루밤: 또한 사실이다, 잔마: 출생, 므리따샤: 죽은 자는, 짜: 또한, 따스맛: 그러므로, 아빠리하르예: 피할 수 없는 것, 아르테: 물질에, 나: 않다, 뜨밤: 너, 쇼찌뚬: 비탄하다, 아르하시: 마땅하다.

번역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기 마련이며 죽은 다음에는 분명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네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두고 슬퍼하지 말아라.

주석

인간은 사는 동안 자기가 한 행위에 따라 출생을 맞는다. 그리고 한 삶의 행위가 끝나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위해 죽어야 한다. 해방을 이루지 못하면 이렇게 삶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거치게 된다. 그러나 이 윤회가 불필요한 살인과 도살, 그리고 전쟁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폭력과 전쟁은 인간 사회에서 법과 질서의 유지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다.

절대자의 뜻인 꾸룩쉐뜨라 전쟁은 필요불가결한 사건으로, 정당한 명분을 위해 싸우는 것은 끄샤뜨리야의 의무이다. 정당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친척들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비탄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아르주나가 불필요하게 법을 어기면 그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죄업을 받아 마땅하다. 정당한 의무를 외면한다고 해서 친척들의 죽음을 막지 못하며 오히려 잘못된 행위의 길을 선택한 탓에 그는 타락하게 될 것이다.

원문

아뱍따디니 부따니 avyaktādīni bhūtāni
비악따-마댜니 바라따 vyakta-madhyāni bhārata
아뱍따-니다나녜바 avyakta-nidhanāny eva
따뜨라 까 빠리데바나 tatra kā paridevanā

동의어

아비악따-아디니: 태초에는 발현되지 않은, 부따니: 창조된 모든 것, 비악따: 발현된, 마댜니: 중간에, 바라따: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아비악따: 발현되지 않은, 니다나니: 소멸할 때에, 에바: 모두 그러하다, 따뜨라: 그러므로, 까: 무슨, 빠리데바나: 비탄.

번역

창조된 모든 것은 태초에는 발현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나 중간에 발현했다가 소멸의 시기에 다시 비발현의 상태가 된다. 따라서 비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주석

두 부류의 철학자 중 하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 경우 모두 비탄할 이유는 없다. 베다의 지혜를 따르는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을 무신론자라 부른다. 논의를 위해 우리가 이 무신론적 이론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비탄에 빠질 이유는 없다. 개별 영혼의 존재를 제외하고, 물질적 요소들은 창조 이전에는 발현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비발현의 이 오묘한 상태에서 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공기가 나오고, 공기에서 불이 나오고, 불에서 물이 나오고, 물에서 흙이 나오는 것과 같다. 흙에서는 많은 종류의 발현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고층 건물은 땅에서 발현한다. 그것이 해체될 때 발현의 상태가 다시 비발현의 상태가 되고 궁극적 상태인 원자로 남는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유지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물이 나타났다가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따라서 발현과 비발현의 상태를 두고 슬퍼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어떻든 비발현의 상태에서조차 사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작과 끝 둘 다 모든 요소는 비발현의 상태로 남고 오직 중간에만 발현하므로 이것이 어떠한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차이도 낳지 않는다.

그리고 바가바드 기따가 말하는 바대로 베다의 결론을 인정하면 이러한 물질적 육신은 때가 지나면 소멸하지만(안따반따 이메 데하하 antavanta ime dehāḥ),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에(니땨쇽따 샤리리나하 nityasyoktāḥ śarīriṇaḥ) 육신이란 의복과 같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하고, 그렇다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두고 왜 슬퍼해야 하는가? 물질적 육신은 영원한 영혼과 관련지으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꿈과 같다. 꿈에서 우리는 하늘을 날기도 하고 왕이 되어 멋진 마차에 앉기도 하기도 하지만 잠에서 깨는 순간 하늘을 날지도 마차에 앉아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다의 지혜는 물질적 육신의 비실존에 근거한 자아 인식을 장려한다. 그러므로 영혼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어떤 경우에도 몸을 잃는 것을 슬퍼할 이유는 없다.

원문

아스짜리아-밧 뺘샤띠 까스찓 에남 āścarya-vat paśyati kaścid enam
아스짜리아-받 바다띠 땃 하이바 짠야하 āścarya-vad vadati tat haiva cānyaḥ
아스짜리아-밧 짜이남 안야 스리노띠 āścarya-vac cainam anyaḥ śṛṇoti
스루뜨바삐 에남 베다 나 짜이바 까스찟 śrutvāpy enaṁ veda na caiva kaścit

동의어

아스짜리아-밧: 경이로운 것으로서, 뺘샤띠: 보다, 까스찟: 어떤 사람, 에남: 이 영혼, 아스짜리아-밧: 경이로운 것으로서, 바다띠: 이야기하다, 따타: 따라서, 에바: 확실히, 짜: 또한, 안야하: 또 다른, 아스짜리아-밧: 똑같이 경이로운, 짜: 또한, 에남: 이 영혼, 안야하: 또 다른, 스리노띠: 듣다, 스루뜨바: 들었다, 아삐: 심지어, 에남: 이 영혼, 베다: 알다, 나: 결코, 짜: 그리고, 에바: 확실히, 까스찟: 누군가.

번역

어떤 사람은 영혼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영혼을 경이롭게 묘사하며 어떤 사람은 영혼을 경이롭게 듣지만, 어떤 사람들은 영혼에 관해 듣고 난 후에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주석

기또빠니샤드는 전체적으로 우빠니샤드의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까타 우빠니샤드(1.2.7)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스라바나야삐 바후비르 요 나 라뱌하 śravaṇayāpi bahubhir yo na labhyaḥ
스린반또’삐 바하보 얌 나 비듀후 śṛṇvanto ’pi bahavo yaṁ na vidyuḥ
아스짜리요 박따 꾸샬로’샤 랍다  āścaryo vaktā kuśalo ’sya labdhā
아스짜리요’샤 갸따 꾸샬라누시쉬따하 āścaryo ’sya jñātā kuśalānuśiṣṭaḥ

원자적 영혼이 거대한 동물의 몸 안에도, 거대한 반얀나무의 몸 안에도, 그리고 아주 작은 공간을 차지하는 수억 만 개의 미생물 세균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임이 분명하다. 우주 최초의 생명체인 브라흐마에게 이 가르침을 전한 지식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가 영혼에 관해 설명한다고 해도, 지식이 모자라거나 금욕적이지 않은 자는 개별 영혼이라는 원자적 불꽃의 경이를 이해할 수 없다. 사물에 관해 전부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탓에 이 시대 사람 대부분은 그렇게 작은 입자가 어떻게 그렇게 위대하면서도 작을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의 구성은 물론 그에 대한 묘사를 경이롭게 본다. 자아에 관한 이해 없이 하는 모든 행위는 존재를 위한 발버둥이며 끝내 패배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에너지의 환영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감각 만족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자아를 이해하는 데 쓸 시간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영혼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어서 물질적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을 구하려고 애쓴다.

영혼에 관해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좋은 친구들과 강연에 참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지 탓에 초영혼과 원자적 영혼이 그 크기에서 아무런 차이 없는 하나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초영혼과 원자적 영혼의 특징, 그 각각의 기능 및 상호관계, 그리고 중요한 세부적 내용을 모두 완벽히 이해한 사람을 찾기는 몹시 어렵다. 그리고 영혼에 관한 지식을 통해 얻는 혜택을 완전히 활용하고 영혼의 위치에 관해 다양한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자아에 관한 주제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과정은 최상의 권위, 주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 바가바드 기따를 다른 이론에 의한 왜곡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끄리쉬나를 최고인격신으로 인정하기까지 현생에서든 전생에서든 상당한 고행과 희생이 요구된다. 하지만 순수한 헌애자의 원인 없는 자비로 우리는 끄리쉬나를 알 수 있지만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원문

데히 니땸 아바됴’얌 dehī nityam avadhyo ’yaṁ
데헤 사르바샤 바라따dehe sarvasya bhārata
따스맛 사르바니 부따니 tasmāt sarvāṇi bhūtāni
나 뜨밤 쇼찌뚬 아르하시 na tvaṁ śocitum arhasi

동의어

데히: 물질적 육신의 주인, 니땸: 영원히, 아바댜하: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아얌: 이 영혼, 데헤: 육신에, 사르바샤: 모두의, 바라따: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따스맛: 그러므로, 사르바니: 모든, 부따니: 태어난 생명체, 나: 결코, 뜨밤: 너, 쇼찌뚬: 비탄하다, 아르하시: 마땅하다.

번역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육신 안에 거주하고 있는 영혼은 결코 살해될 수 없기에 어떠한 생명체를 두고도 비탄할 필요가 없느니라.

주석

지금 주께서 불변하는 영혼에 대해 가르치는 이 장(章)의 결론을 내리신다. 주 끄리쉬나께서는 영혼의 불변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시면서 영혼은 불멸하고 육체는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확립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아르주나는 그의 할아버지와 스승인 비쉬마와 드로나가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끄샤뜨리아로서의 자기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스리 끄리쉬나의 권위에 힘입어 우리는 물질적 육신과 구분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영혼이라는 것은 없으며 화학물질의 상호작용으로 물질이 일정한 숙성 단계에 이르면 생명이 생겨난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영혼은 불멸하지만 폭력을 권장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전시(戰時)와 같이 필요시에는 폭력을 마다해서도 안 된다. 그 필요성은 자의가 아닌 주의 허락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원문

스바-다르맘 아삐 짜벡샤 sva-dharmam api cāvekṣya
나 비깜삐뚬 아르하시 na vikampitum arhasi
다르먇 디 유닷 츠레요’냣 dharmyād dhi yuddhāc chreyo ’nyat
끄샤뜨리야샤 나 비댜떼 kṣatriyasya na vidyate

동의어

스바-다르맘: 자기 자신의 종교적 원칙과 의무, 아삐: 또한, 짜: 실제로, 아벡샤: 고려하는, 나: 결코, 비깜삐뚬: 주저하다, 아르하시: 마땅하다, 다르먓: 종교적 원칙을 위해서, 히: 정말로, 윳닷: 싸우는 것보다, 스레야하: 보다 나은 일, 안얏: 어떤 다른, 끄샤뜨리야샤: 끄샤뜨리야의, 나: 않는다, 비댜떼: 존재하다.

번역

끄샤뜨리야로서 네게 주어진 의무를 생각한다면 종교 원칙에 따른 전투보다 네게 더 나은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망설일 필요가 없느니라.

주석

네 계층의 사회 질서 가운데 두 번째가 행정을 담당하는 끄샤뜨리야이다. “끄샷”이란 “다친다”를 의미한다. 상해(傷害)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자를 끄샤뜨리야(뜨라야떼: 보호하다)라고 한다. 끄샤뜨리야는 숲에서 사냥하는 훈련을 받으며 호랑이와 정면으로 맞서 칼로 싸운다. 호랑이가 죽게 되면 왕족에 준한 예로 호랑이를 화장(火葬)한다. 이 제도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와 인도 자이뿌르(Jaipur)주의 끄샤뜨리야 왕들이 이 관습을 계속 따르고 있다. 끄샤뜨리야는 전투와 사냥을 위한 특별한 훈련을 받는데 종교적 폭력은 때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끄샤뜨리야는 산냐사, 즉 버리는 삶을 바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 정치에서의 비폭력은 외교 정책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이 필요불가결한 요소이거나 원칙은 결코 아니다. 종교적 법률서가 이렇게 말한다.

아하베슈 미톤’요냠 āhaveṣu mitho ’nyonyaṁ
지감산또 마히끄쉬따하 jighāṁsanto mahī-kṣitaḥ
윧다마나 빠람 샥땨 yuddhamānāḥ paraṁ śaktyā
스바르감 얀띠 아빠란-무카하 svargaṁ yānty aparāṅ-mukhāḥ
야계슈 빠샤보 브라흐만 yajñeṣu paśavo brahman
한얀떼 사따땀 드비자이히 hanyante satataṁ dvijaiḥ
삼스끄리따 낄라 만뜨라이스 짜 saṁskṛtāḥ kila mantraiś ca
떼’삐 스바르감 아밥누반 te ’pi svargam avāpnuvan

“브라흐마나들이 제사의 불에 제물을 바침으로써 천국을 얻게 되는 것처럼 전쟁터에서 왕, 즉 끄샤뜨리야가 자기를 시기하는 다른 왕과 싸우다가 죽게 되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종교 원칙에 따라 살인을 하는 것과 제사의 불에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은 폭력의 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종교 원리로 모두 혜택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희생된 동물은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의 점진적 진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인간의 몸을 얻게 되고, 전쟁에서 죽은 끄샤뜨리야 또한 희생 행위로 천국을 얻는 브라흐마나처럼 천국에 이르게 된다.

두 종류의 스바-다르마(sva-dharma), 특정 의무가 있다. 해방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해방을 얻고자 종교 원리에 따라 자신의 특정한 육신에 부여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해방을 이루면 자신의 스바-다르마(특정 의무)는 영적인 것이 되며 물질적 육신의 개념에 더는 속하지 않게 된다. 육체적 개념의 삶에서 브라흐마나와 끄샤뜨리야에게는 각각 특정한 의무가 있고 그런 의무를 피해서는 안 된다. 스바-다르마는 주께서 규정하신 것으로 이것은 제4장에서 명백히 설명될 것이다. 육체적 위치의 스바-다르마를 바르나스라마 다르마, 즉 인간의 영적 이해를 위한 디딤돌이라고 한다. 인류 문명은 바르나스라마 다르마의 단계, 즉 획득한 육신이 갖는 특정한 물질적 본성에 따른 특정 의무에서 시작된다. 더 높은 권위의 명령에 따라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하든 자신의 특정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더 높은 삶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원문

야드릿차야 쪼빠빤남 yadṛcchayā copapannaṁ
스바르가-드바람 아빠브리땀 svarga-dvāram apāvṛtam
수키나 끄샤뜨리야하 빠르타 sukhinaḥ kṣatriyāḥ pārtha
라반떼 윧담 이드리샴 labhante yuddham īdṛśam

동의어

야드릿차야: 저절로, 짜: 또한, 우빠빤남: 이르다, 스바르가: 천국의, 드바람: 문(門), 아빠브리땀: 넓게 열린, 수키나하: 아주 행복한, 끄샤뜨리야하: 왕족의 구성원들,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라반떼: 확실히 얻다, 윧담:전쟁, 이드리샴: 이처럼.

번역

오 빠르타여, 청하지도 않은 싸움의 기회가 끄샤뜨리야에게 온 것은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린 것과 같은 행복이다.

주석

세상에서 가장 높은 스승 주 끄리쉬나는 “저는 이 싸움이 어떤 점에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싸움은 저를 영원히 지옥에 살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아르주나의 태도를 꾸짖고 계시다. 아르주나의 이런 말은 오직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데 비폭력적이기를 원했다. 끄샤뜨리야가 전쟁터에서 비폭력적이고자 하는 것은 바보의 철학이다. 빠라샤라-스므리띠(Parāśara-smṛti), 즉 비아사데바의 아버지이며 위대한 성인인 빠라샤라가 지은 종교적 규정이 이렇게 말한다.

끄샤뜨리요 히 쁘라자 락샨 kṣatriyo hi prajā rakṣan
샤스뜨라-빠니 쁘라단다얀 śastra-pāṇiḥ pradaṇḍayan
니르지땨 빠라-사인야디 nirjitya para-sainyādi
끄쉬띰 다르메나 빨라옛 kṣitiṁ dharmeṇa pālayet

“끄샤뜨리야의 의무는 시민들을 모든 종류의 어려움에서 보호하는 것이므로 법과 질서를 위해 때에 따라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적대적인 왕의 병사들을 무찔러야 하고 종교 원리로써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르주나는 싸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가 적을 무찌르면 왕위를 누릴 것이고 전쟁을 하다 죽으면 활짝 열린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싸움이 그에게 이롭다.

원문

아타 쩻뜨밤 이맘 다르먐 atha cet tvam imaṁ dharmyaṁ
산그라맘 나 까리샤시 saṅgrāmaṁ na kariṣyasi
따따 스바-다르맘 끼르띰 짜 tataḥ sva-dharmaṁ kīrtiṁ ca
히뜨바 빠빰 아밥샤시 hitvā pāpam avāpsyasi

동의어

아타: 그러므로, 쩻: 만약, 뜨밤: 네가, 이맘: 이것, 다르먐: 종교적 의무로서, 산그라맘: 싸우다, 나: 않다, 까리샤시: 수행하다, 따따: 그러면, 스바-다르맘: 너의 종교적 의무, 끼르띰: 평판, 짜: 또한, 히뜨바: 잃다, 빠빰: 죄업, 아밥샤시: 얻게 될 것이다.

번역

그러나 만약 종교적 의무인 싸움을 하지 않으면 너는 분명 의무를 소홀히 하는 죄를 짓는 것이며, 따라서 전사로서의 명성을 잃게 될 것이다.

주석

아르주나는 유명한 전사였는데, 이러한 명성은 주 시바를 포함한 여러 위대한 데바들과 대적함으로써 얻게 되었다. 사냥꾼의 옷을 입고 주 시바와 싸워 그를 물리친 다음, 아르주나는 주 시바에게 기쁨을 준 대가로 빠슈빠따-아스뜨라(pāśupata-astra)라는 무기를 선사받았다. 모든 이가 아르주나가 훌륭한 전사라는 것을 알았다. 스승 드로나짜리아 역시 축복을 내려 심지어 스승마저 해칠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선사했다. 그리고 양부(養父)인 천국의 왕, 인드라를 포함한 많은 권위자에게서 여러 병법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가 전투를 포기한다면 끄샤뜨리야로서의 특정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명예와 명성을 잃게 될 것이며 결국 지옥으로 직행하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싸움 때문이 아니라 싸움에서 후퇴함으로써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원문

아끼르띰 짜삐 부따니 akīrtiṁ cāpi bhūtāni
까타이샨띠 떼’뱌얌 kathayiṣyanti te ’vyayām
삼바비따샤 짜끼르띠르 sambhāvitasya cākīrtir
마라낟 아띠리쨔떼 maraṇād atiricyate

동의어

아끼르띰: 불명예, 짜: 또한, 아삐: 넘어서, 부따니: 모든 사람들, 까타이샨띠: 말할 것이다, 떼: 너의, 아비아얌: 영원히, 삼바비따샤: 세간에 인정받을 만한 사람에게서, 짜: 또한, 아끼르띠: 치욕, 마라낫: 죽음보다, 아띠리쨔떼: 더 하게 되다.

번역

사람들은 항상 너를 악평할 것이며 세간에 인정받을 만한 사람에게 불명예는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다.

주석

아르주나의 친구이자 철학자로서 주 끄리쉬나는 이제 아르주나가 싸움을 거부한 것에 대한 최종 평결을 내리고 계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르주나여, 만약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네가 전장을 떠난다면 사람들이 너를 겁쟁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네가 전장에서 달아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충고하건대, 싸움에서 죽는 것이 차라리 네게 더 낫다. 왜냐하면 너처럼 세간에 인정받을 만한 자에게 불명예는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목숨이 두려워 도망쳐서는 안 된다. 전쟁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나의 우정을 저버렸다는 악평에서 벗어나고 사회에서 네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결국 주의 최종 판결은 아르주나가 전쟁에서 물러나기보다는 싸우다 죽으라는 것이다.

원문

바야드라낟 우빠라땀 bhayād raṇād uparataṁ
맘샨떼 뜨밤 마하-라타하 maṁsyante tvāṁ mahā-rathāḥ
예샴 짜 뜨밤 바후-마또 yeṣāṁ ca tvaṁ bahu-mato
부뜨바 야샤시 라가밤 bhūtvā yāsyasi lāghavam

동의어

바얏: 두려움 때문에, 라낫: 전장에서, 우빠라땀: 멈추다, 맘샨떼: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뜨밤: 너, 마하-라타하: 위대한 장군들, 예샴: 그들을 위해서, 짜: 또한, 뜨밤: 너, 바후-마따하: 높은 존중, 부뜨바: 누려오다, 야샤시: 너는 갈 것이다, 라가밤: 가치가 떨어진.

번역

너의 이름과 명성을 높이 사던 장군들은 네가 오직 두려움으로 전장을 떠났다고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너를 하찮은 자로 여길 것이다.

주석

주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당신의 의견을 계속 말씀하셨다. “듀로다나와 까르나 및 다른 위대한 장수들이 네가 너의 형제들과 할아버지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전장을 떠났다고 생각해 주리라 여기지 마라. 그들은 네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달아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네 인격에 대한 그들의 높은 평가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원문

아바쨔-바담스 짜 바훈 avācya-vādāṁś ca bahūn
바디샨띠 따바히따하 vadiṣyanti tavāhitāḥ
닌단따스 따바 사마르턈 nindantas tava sāmarthyaṁ
따또 두카따람 누 낌 tato duḥkha-taraṁ nu kim

동의어

아바쨔: 불친절한, 바단: 날조된 말들, 짜: 또한, 바훈: 많은, 바디샨띠: 말할 것이다, 따바: 너의, 아히따하: 적들, 닌단따하: 비방하면서, 따바: 너의, 사마르턈: 능력, 따따하: 그것보다, 두카-따람: 더욱 고통스러운, 누: 물론, 낌: 무엇이 있겠는가.

번역

적들이 여러 좋지 않은 말로 너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고 네 능력을 업신여길 것이다. 네게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주석

처음에 주 끄리쉬나는 아르주나의 불필요한 동정심에 놀랐고 이러한 동정심은 아리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아르주나의 소위 동정심이라는 것에 반대하는 당신의 의견을 여러 방식으로 입증하셨다.

원문

하또 바 쁘랍샤시 스바르감 hato vā prāpsyasi svargaṁ
지뜨바 바 복샤세 마힘 jitvā vā bhokṣyase mahīm
따스맏 웃띠쉬타 까운떼야 tasmād uttiṣṭha kaunteya
윧다야 끄리따-니스짜야하 yuddhāya kṛta-niścayaḥ

동의어

하따하: 살해되다, 바: 어느 경우에든, 쁘랍샤시: 너는 얻는다, 스바르감: 천국, 지뜨바: 정복함으로써, 바: 또는, 복샤세: 너는 즐긴다, 마힘: 세상, 따스맛: 그러므로, 웃띠쉬타: 일어나라,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윧다야:  싸우다, 끄리따: 결심한, 니스짜야하: 확실히.

번역

오 꾼띠의 아들이여, 너는 이 전쟁에서 살해되어 천상의 행성으로 가거나, 그것이 아니면 적을 정복하고 지상의 왕국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심하고 일어나 싸워라.

주석

아르주나 편이 승리하리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 해도 그는 여전히 싸워야 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천상의 행성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

수카-두케 사메 끄릿바 sukha-duḥkhe same kṛtvā
라발라바우 자야자야우 lābhālābhau jayājayau
따또 윧다야 유쟈스바 tato yuddhāya yujyasva
나이밤 빠빰 아밥샤시 naivaṁ pāpam avāpsyasi

동의어

수카: 행복, 두케: 그리고 불행, 사메: 동등하게, 끄리뜨바: 그렇게 함, 라바-알라바우: 이익과 손실 모두, 자야-아자야우: 승리와 패배 모두, 따따하: 그런 다음, 윧다야: 싸움을 위해서, 유쟈스바: 종사하다(싸우다), 나: 결코, 에밤: 이런 식으로, 빠빰: 죄업, 아밥샤시: 너는 얻을 것이다.

번역

행복과 불행, 이익과 손실, 승리와 패배를 생각하지 말고 싸움 그 자체를 위해서 싸워라. 그러면 너는 어떠한 죄도 짓지 않을 것이다.

주석

이제 주 끄리쉬나께서 당신이 전쟁을 원하시기에 아르주나는 이 전쟁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직접 말씀하신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하는 행위에는 행복과 불행, 이익과 손실, 승리와 패배의 고려가 없다. 끄리쉬나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은 초월적 의식이어야 한다. 그래서 물질적 행위라도 그에 대한 반작용이 없다. 선성(善性, goodness)이든, 동성(動性, passion)이든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해 행동하자는 좋든, 나쁘든 그에 대한 반작용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의 행위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자는 일상적 행위와는 달리 그 누구에 대한 의무도, 빚도 없다. 

데바르쉬-부땁따-느리남 삐뜨리남 devari-bhūtāpta-nṛṇā pitṝṇāṁ
나 낀까로 나얌 리니 짜 라잔 na kikaro nāyam ṛṇī ca rājan
사르바뜨마나 야하 샤라남 샤란얌 sarvātmanā ya śaraa śarayaṁ
가또 무꾼담 빠리흐리땨 까르땀 gato mukunda parihṛtya kartam

“다른 모든 의무를 포기하고 끄리쉬나, 무꾼다에 완전히 헌신하는 자는 더는 빚진 자가 아니며 데바, 현자, 대중, 친척, 인류, 선조, 그 누구에게도 의무를 지지 않는다.”(스리마드 바가바땀 11.5.41) 이것이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이 절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바로서 이는 다음 절에서 더욱 명료하게 설명될 것이다.

원문

에샤 떼’비히따 상켸 eā te ’bhihitā sākhye
붇디르 요게 뜨비맘 스리누 buddhir yoge tv imā śṛṇu
붇댜 육또 야야 빠르타 buddhyā yukto yayā pārtha
까르마반담 쁘라하샤시 karma-bandha prahāsyasi

동의어

에샤: 이 모든 것, 떼: 너에게, 아비히따: 설명했다, 상켸: 분석적 연구로, 붇디히: 지성, 요게: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일, 뚜: 그러나, 이맘: 이것의, 스리누: 오직 들어라, 붇댜: 지성으로, 육따하: 긴밀히 연관된, 야야: 그것으로,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까르마-반담: 반작용으로 인한 속박, 쁘라하샤시: 너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번역

지금까지 분석적 연구를 통해 이 지식을 네게 설명했다. 이제부터는 결과를 바라지 않고 일하는 것에 관해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그런 지식으로 일하면 너는 일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주석

니룩띠(베다 사전 Nirukti)에 따르면 상캬아(sakhyā)란 어떤 것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앙캬(sāṅkhya)란 영혼의 진정한 본성을 설명하는 철학을 말한다. 그리고 요가는 감각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싸우지 않겠다는 아르주나의 제안은 감각 만족에 기초한 것이다. 드리따라쉬뜨라의 아들인 자신의 사촌들과 다른 형제들을 무찌르고 왕국을 누리는 것보다 친척들을 죽이지 않는 편이 더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기에 아르주나는 그의 주된 의무를 잊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했다. 두 가지 길 모두 그 기본 원칙은 감각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친척들을 정복함으로써 얻는 행복과 지혜와 의무를 희생한 대가로 친척들이 살아있는 것을 봄으로써 얻는 행복 둘 다 개인적 감각 만족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할아버지의 육신을 죽인다고 해서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시고자 했고, 주 당신을 포함한 모든 개개인은 영원한 개별적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셨다. 그들은 과거에도 개별적 존재였고 현재에도 개별적 존재이며 미래에도 계속해서 개별적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두 영원히 개별 영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육신이라는 겉옷만을 여러 방식으로 갈아입을 뿐, 실제로 물질적 겉옷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에도 개별성을 유지한다. 영혼과 육체의 분석적 연구는 주 끄리쉬나께서 매우 생생하게 설명하셨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서술적 지식은 니룩띠 사전에서 사앙캬(Sāṅkhya)로 묘사되고 있다. 이 사앙캬는 무신론자 까필라의 상캬철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기꾼 까필라의 상캬가 나오기 아주 오래전, 주 끄리쉬나의 화신이신, 진짜 주 까필라(Kapila)께서 이 상캬철학을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당신의 어머니, 데바후띠(Devahūti)를 통해 설명하셨다. 뿌루샤, 즉 지고한 주는 역동적이며 당신이 쁘라끄리띠를 바라보심으로써 창조가 일어난다고 주 까필라께서 분명히 설명하셨다. 베다와 기따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베다는 주께서 쁘라끄리띠, 즉 물질계(자연)를 바라보심으로써 원자적 개별 영혼을 수태시켰다고 설명한다. 이 모든 개별 자아들은 물질계에서 감각 만족을 위해 일하고 있고 물질 에너지에 매혹되어 자기가 즐기는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 상태는 해방이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어 생명체가 주와 똑같아지고자 한다. 이것이 마야, 즉 감각 만족이라는 환영의 마지막 덫이며 이런 감각 만족 행위로 가득한 무수한 생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위대한 영혼은 바아수데바(Vāsudeva), 주 끄리쉬나께 항복하여 궁극적 진리의 추구를 완성하게 된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께 항복함으로써 주를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시샤스떼함 샤디 맘 뜨밤 쁘라빤남(śiṣyas te ’haṁ śādhi māṁ tvāṁ prapannam). 따라서 끄리쉬나께서 이제 아르주나에게 붇디 요가(buddhi-yoga) 및 까르마 요가, 즉 오직 주의 감각 만족을 위해 봉헌하는 과정을 설명할 것이다. 이 붇디 요가는 모든 이의 가슴에 빠람아뜨마로 앉아 계시는 주와 직접 교감하는 것이라고 제10장 10절에서 명백히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 교감은 헌신적 봉사 없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를 향한 헌신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의 봉사에 종사하는 자, 다른 말로 하면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자는 주의 특별한 은총으로 붇디 요가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주께서는 초월적 사랑의 봉헌에 항상 종사하는 자들에게만 순수한 사랑의 봉헌에 관한 지식을 주신다. 그러한 식으로 헌애자는 늘 축복으로 가득한 주의 왕국에서 주께 쉽게 닿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절에서 언급된 붇디 요가는 주를 향한 봉헌이며, 여기 언급된 상캬라는 말은 사기꾼 까필라가 표현한 무신론적 상캬 요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상캬 요가가 무신론적 상캬 요가와 관련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상캬 철학이 당시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며 주 끄리쉬나께서 절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추론을 언급하시고자 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상캬 철학은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주 까필라께서 설명하셨는데, 그 상캬조차도 지금의 주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기에서 상캬란 영혼과 육체의 분석적 설명을 의미한다. 주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를 붇디 요가, 혹은 박띠 요가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시려고 영혼의 분석적 설명을 하신 것뿐이다. 따라서 주 끄리쉬나의 상캬와 바가바땀에 설명된 주 까필라의 상캬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그 둘 다 박띠 요가이다.

그러므로 주 끄리쉬나께서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이 상캬 요가와 박띠 요가를 구분 짓는다고 하셨다(상캬-요가우 쁘리탁 발라 쁘라바단띠 나 빤디따하 sāṅkhya-yogau pṛthag bālāḥ pravadanti na paṇḍitāḥ).

물론 무신론적 상캬 요가는 박띠 요가와 아무 관련이 없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바가바드 기따에 무신론적 상캬 요가가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붇디 요가란 축복과 지식으로 가득 찬 봉헌으로, 즉 끄리쉬나 의식으로 일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오직 주의 만족을 위해 일하는 자는 그 일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붇디 요가의 원칙으로 일하는 것이며 항상 초월적 축복을 느낀다. 그러한 초월적 일에 종사함으로써 주의 은총으로 모든 초월적 이해를 저절로 얻게 되고 따라서 지식을 얻고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해방을 저절로 완성하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하는 일과 결과를 바라는 일, 특히 가족과 물질적 행복의 결과를 얻으려고 감각 만족을 좇는 일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붇디 요가는 초월적 성격을 지닌 행위이다.

원문

네하비끄라마-나쇼’스띠 nehābhikrama-nāśo ’sti
쁘라땨바요 나 비댜떼 pratyavāyo na vidyate
스발빰 아뺘샤 다르마샤 sv-alpam apy asya dharmasya
뜨라야떼 마하또 바얏 trāyate mahato bhayāt

동의어

나: 없다, 이하: 이 요가에서, 아비끄라마: 노력함에 있어, 나샤하: 손실, 아스띠: 있다, 쁘라땨바야하: 감소, 나: 결코, 비댜떼: 있다, 수-알빰: 조금, 아삐: 비록, 아샤: 이것의, 다르마샤: 직업, 뜨라야떼: 구제하다, 마하따하: 아주 큰, 바얏: 위험.

번역

여기에 기울이는 노력으로 인해 어떠한 손실이나 감소도 없으며, 이 길에서 이룬 아주 작은 발전이 인간을 가장 위험한 종류의 두려움에서 보호할 수 있다.

주석

끄리쉬나 의식의 행위, 즉 감각 만족을 바라지 않고 오직 끄리쉬나를 위해 하는 행위는 가장 높은 차원의 초월적 일이다. 그러한 행위는 비록 미흡한 시작이라 하더라도 잘못될 것이 없고, 어떤 단계에서도 그 작은 출발이 사라지는 것 또한 아니다. 물질적 동기로 시작하는 일은 완성을 보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된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으로 시작한 일은 비록 끝을 보지 않았어도 그 영향은 영원하다. 따라서 끄리쉬나 의식의 일을 하는 사람은 일을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잃는 것이 전혀 없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한 1%의 행위라도 영원한 결과를 낳으며 다음 시작은 2% 지점에서 출발하는 반면, 물질적 행위는 100%의 성공을 거두지 않으면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한다. 아자밀라(Ajāmila)는 약간의 끄리쉬나 의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지만, 주의 은총으로 100%의 완성된 결과를 누렸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마드 바가바땀(1.5.17)에 좋은 구절이 있다.

땩뜨바 스바-다르맘 짜라남부잠 하레르 tyaktvā sva-dharmaṁ caraṇāmbujaṁ harer
바잔나빡보’타 빠뗏 따또 야디 bhajann apakvo ’tha patet tato yadi
야뜨락바 바바드람 아붇 아무샤 낌 yatra kva vābhadram abhūd amuṣya kiṁ
꼬 바르타 압또’바자땀 스바-다르마따하 ko vārtha āpto ’bhajatāṁ sva-dharmataḥ

“자신의 고유한 의무를 포기하고 끄리쉬나 의식으로 일하다가 그 일을 마치지 못하고 타락한다 해도 그가 보는 손해는 무엇인가? 반면, 자신의 물질적 행위를 완벽히 수행한다고 해도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식으로는 “한 인간이 온 세상을 얻고서도 영원한 자신의 영혼에 손실을 본다면 그가 얻는 바는 무엇인가?”

물질적 행위와 그 결과는 육신과 함께 끝난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으로 한 일은 육신이 없어진 다음에도 그 사람을 끄리쉬나 의식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적어도 다음 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기회를 반드시 얻게 되며, 아주 덕망 있는 브라흐마나 가문에 태어나든지, 부유한 귀족 집안에 태어나서 영적 진보를 위한 더 낳은 기회를 받게 된다. 이것이 끄리쉬나 의식으로 하는 행위의 독특한 특징이다.

원문

뱌바사야뜨미까 붇디르 vyavasāyātmikā buddhir
에께하 꾸루-난다나 ekeha kuru-nandana
바후샤카 햐난따스 짜 bahu-śākhā hy anantāś ca
붇다요’뱌바사이남 buddhayo ’vyavasāyinām

동의어

뱌바사야-아뜨미까: 끄리쉬나 의식으로 단호히 결심한, 붇디히: 지성, 에까: 오직 하나, 이하: 이 세상에, 꾸루-난다나: 오 소중한 꾸루 가문의 자손이여, 바후-샤카하: 여러 갈래의, 히: 정말로, 아난따하: 무한한, 짜: 또한, 붇다야하: 지성, 아뱌바사이남: 끄리쉬나 의식이 없는 자들.

번역

이 길에 들어선 자들은 목표를 향해 굳은 결심을 하고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오 소중한 꾸루 가문의 자손이여, 결단력 없는 자들의 지성은 여러 가지로 갈라지느니라.

주석

끄리쉬나 의식으로 삶의 가장 높은 완성을 이루게 하는 강한 신념을 비아바사야뜨미까(vyavasāyātmikā) 지성이라고 한다. 짜이따냐 짜리땀리따(마댜 22.62)에서 말하기를,

‘스랃다’-사브데 비스바사 까헤 수드리다 니스짜야
‘śraddhā’-śabde – viśvāsa kahe sudṛḍha niścaya
끄리쉬네 박띠 까일레 사르바-까르마 끄리따 하야
kṛṣṇe bhakti kaile sarva-karma kṛta haya

신앙이란 숭고한 것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의 사명에 종사하면 가족 전통, 인류 또는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물질계의 관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결실을 바라는 행위는 과거의 선행과 악행에서 비롯된 반작용, 즉 인과응보에서 비롯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깨어나면 더는 좋은 결과를 위해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 끄리쉬나 의식을 갖추면 선악이라는 이원성에 속박되지 않아 모든 행위가 절대적 경지에 놓이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의 가장 높은 완성은 삶의 물질적 개념을 버리는 것이다. 이 상태는 끄리쉬나 의식이 발전함에 따라 저절로 성취하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을 위해 굳은 결의를 한 사람은 지식에 기초한다. 바아수데바 사르밤 이띠 사 마하뜨마 수-둘라바하(Vāsudevaḥ sarvam iti sa mahātmā su-durlabhaḥ).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발현된 모든 원인의 근원이 바아수데바, 즉 끄리쉬나라는 것을 완벽히 깨달은 매우 드문, 훌륭한 영혼이다. 나무의 뿌리에 물을 줌으로써 잎과 가지에 물이 저절로 가도록 하듯이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해 가족, 사회, 국가, 인류 등 모든 사람에게 가장 높은 봉사를 할 수 있다. 끄리쉬나께서 우리의 행동에 만족하시면 모든 사람이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으로 하는 봉사는 끄리쉬나의 진정한 대표자이며, 제자의 천성을 잘 알아 그에 맞는 끄리쉬나 의식의 행위를 하도록 지도할 수 있는 영적 스승의 능숙한 지도를 받을 때 가장 잘 실천될 수 있다. 그러므로 끄리쉬나 의식에 아주 정통하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행동해야 하고 끄리쉬나의 대표자에게 순종해야 하며 진정한 영적 스승의 가르침을 필생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스릴라 비스바나타 짜끄라바르띠 타꾸라(Śrīla Viśvanātha Cakravartī Ṭhākura)는 그가 지은 영적 스승을 위한 유명한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친다.

야샤 쁘라사닫 바가밧-쁘라사도 yasya prasādād bhagavat-prasādo
야샤쁘라사단 나 가띠 꾸또’삐 yasyāprasādān na gatiḥ kuto ’pi
댜얀 스뚜밤스 따샤 야샤스 뜨리-산댬 dhyāyan stuvaṁs tasya yaśas tri-sandhyaṁ
반데 구로 스리-짜라나라빈담 vande guroḥ śrī-caraṇāravindam

“영적 스승이 흡족해하시면 최고인격신도 만족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스승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끄리쉬나 의식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루에 세 번 영적 스승의 자비를 얻고자 명상하고 기도하며 스승님께 경배 올립니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 실천의 전 과정은 육신의 개념을 초월한 영혼에 관한 완벽한 지식에 달렸고 이것은 이론적이 아니라 실질적이며, 이 경지에 이르면 결실을 낳는 행위 속에서 감각 만족의 성향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굳은 결심을 하지 않는 자는 여러 형태의 결과 지향적 행위에 주의를 팔리게 된다.

원문

얌 이맘 뿌쉬삐땀 바짬 yām imāṁ puṣpitāṁ vācaṁ
쁘라바단땨비빠스찌따하 pravadanty avipaścitaḥ
베다-바다-라따 빠르타 veda-vāda-ratāḥ pārtha
난야다스띠띠 바디나하 nānyad astīti vādinaḥ
까마뜨마나 스바르가-빠라 kāmātmānaḥ svarga-parā
잔마-까르마-팔라-쁘라담 janma-karma-phala-pradām
끄리야-비세샤-바훌람 kriyā-viśeṣa-bahulāṁ
보가이스바르야-가띰 쁘라띠 bhogaiśvarya-gatiṁ prati

동의어

얌 이맘 :이 모든 것들, 뿌쉬삐땀: 화려한, 바짬: 언어들, 쁘라바단띠: 말하다, 아비빠스찌따하: 지식이 부족한 자들, 베다-바다-라따하: 베다를 따르는 자로 알려진 자들,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나: 결코, 안얏: 그 밖의 다른 것, 아스띠: 존재하다, 이띠: 그러므로, 바디나하: 옹호자들, 까마-아뜨마나하: 감각 만족을 바라는, 스바르가-빠라: 천국을 얻는 데 목표를 둔, 잔마-까르마-팔라-쁘라담: 좋은 출생과 다른 과보들을 받게 되는, 끄리야-비세샤: 호화로운 제사, 바훌람: 다양한, 보가: 감각적 즐거움, 아이스바르야: 부(富)와, 가띰: 나아가다, 쁘라띠: 향해서.

번역

지식이 부족한 자들은 천상의 행성들로 올라가는 것, 내생(來生)의 좋은 출생, 권력 등을 위해 다양한 결과를 낳는 행위를 추천하는 베다의 미사여구에 매우 집착한다. 감각 만족과 부유한 삶을 갈망하는 그들은 이것 이상의 것은 없다고 말한다.

주석

사람들은 대개 지성이 없고 무지한 탓에 베다의 까르마-깐다(karma-kāṇḍa) 부분이 권장하는 결과 지향적 행위에 가장 집착한다. 그들은 좋은 술과 여자, 물질적 풍요가 매우 흔한 천국의 삶을 즐기고자 감각 만족을 위한 제안 외에는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는다. 베다에는 천상의 행성들로 올라가기 위해 특히 죠띠쉬또마(Jyotiṣṭoma) 제사와 같이 많은 제사가 권장된다. 사실, 천상의 행성으로 올라가려는 자는 누구든 반드시 이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적혀 있고, 지식이 부족한 자는 바로 이것이 베다 지혜의 전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미숙한 자들이 끄리쉬나 의식의 단호한 행위를 하기는 몹시 어렵다. 바보들이 결과를 알지 못하고 독성 있는 나무의 꽃에 집착하는 것처럼 바른 지식이 없는 자들은 천국의 풍요와 그곳의 감각 만족에 사로잡힌다.

베다의 까르마-깐다 부분에서 “아빠마 소맘 암리따 아부마(apāma somam amṛtā abhūma)”와 “악샤이얌 하 바이 짜뚜르마샤-야지나 수끄리땀 바바띠(akṣayyaṁ ha vai cāturmāsya-yājinaḥ sukṛtaṁ bhavati)”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면, 4개월간의 고행을 한 자들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는 천상의 감로수(소마라사 soma-rasa)를 마실 자격이 있다. 지상에서조차 어떤 사람들은 감각 만족을 위해 강하고 건강해지려고 감로수를 무척 갖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은 물질적 속박에서의 해방에 관한 어떠한 믿음도 없고 오직 베다의 호화로운 제식에 매우 집착한다. 그들은 대개 방탕하고 현재의 삶에서 천상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원치 않는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어울릴 수 있고 감로주(甘露酒)를 실컷 마실 수 있는 난다나-까나나(Nandana-kānana)라는 정원이 있다. 그러한 육체적 행복은 분명 육욕을 자극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물질계의 주인인 양, 그런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행복에 전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원문

보가이스바르야-쁘라삭따남 bhogaiśvarya-prasaktānāṁ
따야빠흐리따-쩨따삼 tayāpahṛta-cetasām
뱌바사야뜨미까 붇디히 vyavasāyātmikā buddhiḥ
사마다우 나 비디야떼 samādhau na vidhīyate

동의어

보가: 물질적 쾌락에, 아이스바르야: 그리고 풍요, 쁘라삭따남: 집착하는 자들, 따야: 그러한 것들, 아빠흐리따-쩨따삼: 마음이 혼란한, 뱌바사야-아뜨미까: 굳은 결심을 한, 붇디히: 주를 향한 봉헌, 사마다우: 절제된 마음으로, 나: 결코, 비디야떼: 생기다.

번역

감각 만족과 물질적 풍요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것으로 당혹한 자의 마음에는 지고한 주를 향한 봉헌의 굳은 결심이 서지 않느니라.

주석

사마디(Samādhi)란 “고정된 마음”을 의미한다. 베다 사전 니룩띠에 “삼약 아디야떼’스민 아뜨마-땃뜨바-야탸뜨먐(Samyag ādhīyate ’sminn ātma-tattva-yāthātmyam)”이라고 적혀 있다. “마음이 자아를 알기 위해 집중될 때를 사마디에 들었다고 한다.” 사마디는 물질적인 감각 만족에 관심이 있거나 일시적인 것에 정신이 팔린 자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물질적 에너지의 과정에 의해 대부분 패배한다.

원문

뜨라이-군야-비샤야 베다 trai-guṇya-viṣayā vedā
니스뜨라이-군요 바바르주나 nistrai-guṇyo bhavārjuna
니르드반드보 니땨-삿뜨바-스토 nirdvandvo nitya-sattva-stho
니르요각쉐마 아뜨마반 niryoga-kṣema ātmavān

동의어

뜨라이-군야: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에 속하는, 비샤야하: 주제에 관해서, 베다: 베다 문헌들, 니스뜨라이-군야하: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를 초월한, 바바: 존재하다,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니르드반드바하: 이원성 없이, 니땨-삿뜨바-스타하: 영적 존재의 순수한 상태에서, 니르요가-끄쉐마: 이득과 보호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나, 아뜨마-반: 자아 속에 정립된.

번역

베다는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에 관한 주제를 주로 다룬다. 오 아르주나, 이 세 가지 양태를 초월하여라. 모든 이원성과 이득, 안위에 관한 근심에서 벗어나 자아를 확립하라.

주석

모든 물질적 행위는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 속에 있는 작용과 반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 모든 행위는 결실을 위한 것이고 바로 이것이 물질계에서의 속박을 초래한다. 베다는 일반 대중을 감각 만족의 장에서 초월의 경지로 점차 끌어올리려는 행위를 주로 다룬다. 주 끄리쉬나의 제자이자 친구인 아르주나는 초월의 궁극에 관한 질문, 즉 브라흐마-지갸사(brahma-jijñāsā)로 시작하는 베단따 철학의 초월적 위치로 자기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충고받는다. 물질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주께서는 물질계를 창조하신 후 어떻게 살아야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나는지를 가르치시고자 베다의 지혜를 주셨다. 까르마-깐다 장에서 감각 만족을 위한 행위를 기술한 다음, 영적 깨달음을 위한 기회가 다른 베다의 부분인 우빠니샤드로 제공되었고 바가바드 기따는 제5베다, 이름하여 마하바라따의 한 부분이다. 우빠니샤드는 초월적 삶의 시작을 보여준다.

물질적 육신이 존재하는 한, 물질적 본성의 영향을 받는 행위와 행위의 결과가 있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 추위와 더위와 같은 이원성을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런 이원성을 참아냄으로써 득실(得失)에 대한 근심에서 벗어난다. 우리가 끄리쉬나의 호의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이라는 초월적 경지에 이르게 된다.

원문

야반 아르타 우다빠네 yāvān artha uda-pāne
사르바따 삼쁠루또다께 sarvataḥ samplutodake
따반 사르베슈 베데슈 tāvān sarveṣu vedeṣu
브라흐마나샤 비자나따하 brāhmaṇasya vijānataḥ

동의어

야반: 그 모든 것, 아르타하: 목적으로, 우다-빠네: 우물물 안에, 사르바따하: 모든 점에서, 삼쁠루따-우다께: 큰 저수지의 물 안에, 따반: 마찬가지로, 사르베슈: 모든 것에, 베데슈: 베다 문헌들, 브라흐마나샤: 지고한 브라흐만을 아는 사람, 비자나따하: 완전한 지식을 갖춘.

번역

작은 우물이 성취해야 하는 목적은 큰 저수지의 물로 단번에 해결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베다의 근본 취지를 아는 자는 베다의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니라.

주석

베다 문헌의 까르마-깐다 부분에 언급된 의식과 제사들은 자아 인식을 향한 점진적 발전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자아 인식의 목적은 바가바드 기따의 제15장 15절에 명백히 서술되어 있다. “베다를 공부하는 목적은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인 주 끄리쉬나를 알기 위함이다.” 따라서 자아 인식이란 끄리쉬나와 그와 우리의 영원한 관계에 관한 이해를 의미한다. 끄리쉬나와 생명체와의 관계 또한 바가바드 기따 제15장 7절에 언급되어 있다. 생명체는 끄리쉬나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개개의 생명체가 끄리쉬나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 베다 지식의 가장 높은 완성이다. 이것은 스리마드 바가바땀(3.33.7)이 다음과 같이 확증한다.

아호 바따 스바-빠쪼’또 가리얀 aho bata śva-paco ’to garīyān
얏-지흐바그레 바르따떼 나마 뚜뱜 yaj-jihvāgre vartate nāma tubhyam
떼뿌스 따빠스 떼 주후부 사스누라리아 tepus tapas te juhuvuḥ sasnur āryā
브라흐마누쭈르 나마 그리난띠 예 떼 brahmānūcur nāma gṛṇanti ye te

“오 주님, 당신의 신성한 이름을 구송하는 자는 비록 짠달라(caṇḍāla 개를 먹는 자)와 같은 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도 자아 인식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베다 의식 절차에 따라 모든 종류의 고행과 희생을 했고, 모든 순례지에서 목욕한 다음, 베다 문헌들을 아주 여러 번 공부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리안 가문의 최고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다의 제사 절차에만 집착하지 말고 베다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어야 하고, 더 낳은 감각 만족을 얻고자 천국으로 올라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 시대의 일반인들이 베다 의식의 모든 규정과 규칙을 따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베단따와 우빠니샤드를 전부 철저히 공부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베다의 여러 목적을 실행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 에너지, 지식, 자원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 시대에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베다 문화의 최고 목적은 모든 타락한 영혼의 구원자이신 주 짜이따냐께서 추천하신 것처럼 주의 신성한 이름을 구송함으로 성취될 수 있다. 위대한 베다 학자, 쁘라까샤난다 사라스바띠(Prakāśānanda Sarasvatī)가 주 짜이따냐께 “주 당신께서는 왜 베단따 철학을 공부하지 않고 감상적인 사람들처럼 주의 신성한 이름을 구송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주는 “나의 영적 스승께서 내가 아주 바보라는 것을 아셔서 주 끄리쉬나의 신성한 이름을 구송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당신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고, 미친 사람처럼 황홀경에 빠지셨다. 이 깔리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어리석고 베단따 철학을 이해하는 데 알맞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베단따 철학의 최고 목적은 주의 신성한 이름을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구송함으로써 달성된다. 베단따는 베다 지혜의 마지막 단어로, 그 베단따 철학의 저자이자 그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주 끄리쉬나이다. 그리고 베단따 철학의 최고 학자는 주의 신성한 이름을 구송하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위대한 영혼들이다. 그것이 베다의 신비 전체가 가르치는 궁극적 목적이다.

원문

까르마녜바디까라스 떼 karmaṇy evādhikāras te
마 팔레슈 까다짜나 mā phaleṣu kadācana
마 까르마-팔라-헤뚜르 부르 mā karma-phala-hetur bhūr
마 떼 상고’스뜨바까르마니 mā te saṅgo ’stv akarmaṇi

동의어

까르마니: 규정된 의무, 에바: 확실히, 아디까라하: 권리, 떼: 너의, 마: 결코 않다, 팔레슈: 결실, 까다짜나: 어느 때라도, 마: 결코 않다, 까르마-팔라: 일의 결과로, 헤뚜: 원인, 부: 되다, 마: 결코 않다, 떼: 너의, 상가하: 집착, 아스뚜: 마땅히 해야 한다, 아까르마니: 규정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번역

너는 네게 규정된 의무를 수행할 권리는 있지만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권리는 없다. 너 자신을 네 행위가 낳는 결과의 원인이라 절대 생각지 말아라. 그렇다고 네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서도 안 되느니라.

주석

여기에서 세 가지 사항, 즉 규정된 의무, 방종, 그리고 무위(행위를 하지 않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규정된 의무란 자신이 얻게 된 물질계의 본성에 맞게 요구되는 행위이다. 방종이란 권위자로부터의 허가 없이 하는 행위이며 무위란 자기에게 규정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주께서 아르주나에게 무위하지 말고 결과에 집착함 없이 규정된 의무를 수행하라고 조언하신다. 자기가 한 일의 결과에 집착하는 자 또한 행위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자는 일의 결과를 두고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규정된 의무는 세 가지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것은 이름하여 일상적인 일, 위급한 일, 그리고 바람직한 일이다.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의무로서 수행하는 일상의 일을 선성(善性)의 행위라고 한다. 결과를 바라는 행위 자체가 속박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상서롭지 않다. 모든 사람은 규정된 의무를 수행할 권리는 있지만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사심 없이 의무를 수행하면 틀림없이 해방의 길에 이른다.

그러므로 아르주나는 주로부터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의무로서 싸워야 한다고 충고받았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집착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런 집착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절대 이끌지 않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종류의 집착도 속박의 원인이 된다. 무위는 죄악이다. 그러므로 의무로서 싸우는 것이 아르주나에게는 유일하게 상서로운 구원의 길이다.

원문

요가-스타 꾸루 까르마니 yoga-sthaḥ kuru karmāṇi
상감 땩뜨바 다난자야 saṅgaṁ tyaktvā dhanañ-jaya
싣댜싣됴 사모 부뜨바 siddhy-asiddhyoḥ samo bhūtvā
사마뜨밤 요가 우쨔떼 samatvaṁ yoga ucyate

동의어

요가-스타하: 마음이 평정한, 꾸루: 수행하다, 까르마니: 네 의무, 상감: 집착, 땩뜨바: 포기하다, 다남-자야: 오 아르주나, 싣디-아싣됴호: 성공과 실패에서, 사마하: 균형을 이룬, 부뜨바: 되다, 사마뜨밤: 평정, 요가: 요가,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오 아르주나여,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평정한 마음으로 네 의무를 다하여라. 그러한 평정을 요가라 하느니라.

주석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요가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요가란 무엇인가? 요가란 우리를 항상 방해하는 감각들을 통제함으로써 절대자에게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누가 절대자인가? 절대자는 주(主)이다. 그리고 절대자인 주께서 직접 아르주나에게 싸우라고 말씀하시므로 아르주나는 싸움의 결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득이나 승리는 끄리쉬나의 관심 사항이다. 아르주나는 그저 끄리쉬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끄리쉬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요가이고 이것은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을 통해 실행될 수 있다. 오직 끄리쉬나 의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소유 의식을 버릴 수 있다. 우리는 끄리쉬나의 종이거나 끄리쉬나의 종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끄리쉬나 의식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올바른 방법이며 이것만이 요가로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르주나는 끄샤뜨리야이고, 이는 바르나스라마 다르마 제도 안에 속한다. 비쉬누 뿌라나에서 바르나스라마 다르마의 전체 목적은 비쉬누를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물질계의 보편적인 현상인 자기 자신의 만족 추구가 아닌 끄리쉬나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래서 끄리쉬나를 만족시키지 않는 한, 바르나스라마 다르마의 원칙을 바르게 지킬 수 없다. 간접적으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라고 충고받았다.

원문

두레나 햐바람 까르마 dūreṇa hy avaraṁ karma
붇디-요갇 다난자야 buddhi-yogād dhanañ-jaya
붇다우 샤라남 안빗차 buddhau śaranam anviccha
끄리빠나하 팔라-헤따바하 kṛpaṇāḥ phala-hetavaḥ

동의어

두레나: 아주 먼 곳에 버려라, 히: 확실히, 아바람: 혐오스러운, 까르마: 행위, 붇디-요갓: 끄리쉬나 의식의 힘으로, 다난자야: 오 부(富)의 정복자여, 붇다우: 그런 의식으로, 샤라남: 완전한 항복, 안빗차: 노력하다, 끄리빠나하: 구두쇠들, 팔라-헤따바하: 결실을 바라는 자들.

번역

오 다난자야, 봉헌을 통해 모든 끔찍한 행위를 멀리하고 그런 의식으로 주께 항복하라. 자기 일의 결과를 즐기고자 하는 자는 구두쇠이니라.

주석

자기 본원의 위치가 주의 영원한 종임을 실제로 이해한 자는 끄리쉬나 의식의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을 그만둔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붇디 요가(buddhi-yoga)란 주를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를 의미한다. 그러한 봉헌은 생명체가 해야 할 올바른 행위의 과정이다. 오직 구두쇠들만이 물질적 속박에 더욱 얽히려고 자기가 한 일의 결과를 즐기고자 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하는 일을 제외한 모든 행위는 행위자를 생사의 순환 과정에 계속 묶어두기 때문에 끔찍하다. 따라서 우리는 일의 원인이 되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모든 것은 끄리쉬나의 만족을 위해, 끄리쉬나 의식으로 해야 한다. 구두쇠들은 운이 좋아서 혹은 힘겨운 노동으로 획득한 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모든 에너지를 끄리쉬나 의식으로 일하는 데 쏟으면 우리 삶은 성공할 것이다. 구두쇠처럼 불행한 자들은 자기 에너지를 주의 봉사에 쓰지 않는다.

원문

붇디-육또 자하띠하 buddhi-yukto jahātīha
우베 수끄리따-두쉬끄리떼 ubhe sukṛta-duṣkṛte
따스맏 요가야 유쟈스바 tasmād yogāya yujyasva
요가 까르마수 까우샬람 yogaḥ karmasu kauśalam

동의어

붇디-육따하: 봉헌에 종사하는 자, 자하띠: 없앨 수 있다, 이하: 현생에서, 우베: 둘 다, 수끄리따-두쉬끄리떼: 좋고 나쁜 결과, 따스맛: 그러므로, 요가야: 봉헌을 위해서, 유쟈스바: 그렇게 종사하는, 요가하: 끄리쉬나 의식, 까르마수: 모든 행위에서, 까우샬람: 기술.

번역

봉헌에 종사하는 자는 현생에서조차 좋고 나쁜 반작용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의 기술인 요가를 위해 노력하라.

주석

태곳적부터 각 생명체는 자기가 한 좋고 나쁜 일에 따른 여러 반작용을 쌓고 있다. 그런데도 진정한 자기 본원의 위치에 관해서 계속 무지하다. 바가바드 기따의 가르침으로 이 무지를 없앨 수 있고, 바가바드 기따는 우리에게 주 스리 끄리쉬나께 전적으로 항복하여 생을 거듭해 작용과 반작용의 사슬에 얽매이는 희생양이 되는 것에서 해방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결과를 낳는 행위를 정화하는 과정인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도록 충고받았다.

원문

까르마-잠 붇디-육따 히 karma-jaṁ buddhi-yuktā hi
팔람 땩뜨바 마니쉬나하 phalaṁ tyaktvā manīṣiṇaḥ
잔마-반다-비니르묵따하 janma-bandha-vinirmuktāḥ
빠담 갓찬땨나마얌 padaṁ gacchanty anāmayam

동의어

까르마-잠: 결실적 행위 때문에, 붇디-육따하: 봉헌에 종사하는, 히: 확실히, 팔람: 결과들, 땩뜨바: 포기하다, 마니쉬나하: 위대한 현자들 또는 헌애자들: 잔마-반다: 삶과 죽음의 속박에서, 비니르묵따하: 해방되는, 빠담: 위치, 갓찬띠: 그들은 도달한다, 아나마얌: 불행이 없는.

번역

그러므로 주를 향한 봉헌에 종사함으로써 위대한 현자들과 헌애자들은 물질계에서 생겨난 일의 결과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그들은 생사의 순환에서 벗어나 주의 왕국으로 들어감으로써 모든 불행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느니라.

주석

해방된 생명체들은 어떠한 물질적 불행도 없는 곳에 속한다. 바가바땀(10.14.58)에서 말하기를,

사마쉬리따 예 빠다-빨라바-쁠라밤 samāṣritā ye pada-pallava-plavaṁ
마핫-빠담 뿐야-야쇼 무라레헤 mahat-padaṁ puṇya-yaśo murāreḥ
바밤부디르 밧사-빠담 빠람 빠담 bhavāmbudhir vatsa-padaṁ paraṁ padaṁ
빠담 빠담 얃 비빠담 나 떼샴 padaṁ padaṁ yad vipadāṁ na teṣām

“우주에 발현된 모든 것의 안식처, 해방을 주시는 것으로 이름난 주 무꾼다의 연꽃 같은 발을 구원의 배로 받아들인 자에게 물질계의 대양은 송아지 발자국에 고인 물과 다름없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아니라 물질적 고통이 없는 곳(빠람 빠담 Paraṁ padam), 즉 바이꾼타(Vaikuṇṭha)가 그들의 목적지이다.”

무지로 인해 이 물질계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불행한 곳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오직 무지 때문에 지성이 부족한 자들은 일의 결과가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생각하고 결과 지향적인 행위들로 상황을 조정하려고 한다. 그들은 어떠한 우주에서도 어떠한 종류의 육신도 고통 없이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삶의 고통, 이름하여 생로병사는 물질계 내의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의 진정한 본원적 위치가 주의 영원한 종임을 이해하고 최고인격신의 위치를 아는 자는 주를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종사한다. 결과적으로 그런 사람은 물질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이 없고 시간과 죽음의 영향도 없는 바이꾼타로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된다. 자기 본원의 위치를 아는 것은 주의 신성한 위치를 아는 것 또한 의미한다. 생명체와 주의 위치가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자는 암흑 속에 있는 자이며, 따라서 주의 봉헌에 종사할 수 없다. 그러한 자는 자기가 자칭 신이 되어서 생사 반복의 길을 스스로 연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가 봉사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주의 봉헌에 종사하는 자는 즉시 바이꾼타 로까로 옮겨질 자격을 얻게 된다. 주의 대의(大義)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까르마 요가 또는 붇디 요가라고 하고, 쉬운 말로 주를 향한 봉헌이라고 한다.

원문

야다 떼 모하-깔리람 yadā te moha-kalilaṁ
붇디르 뱌띠따리샤띠 buddhir vyatitariṣyati
따다 간따시 니르베담 tadā gantāsi nirvedaṁ
스로따뱌샤 스루따샤 짜 śrotavyasya śrutasya ca

동의어

야다: 할 때, 떼: 너의, 모하: 환영의, 깔리람: 밀집한 숲, 붇디히: 지성을 갖춘 초월적 봉사, 뱌띠따리샤띠: 넘어서다, 따다: 그때, 간따 아시: 너는 갈 것이다, 니르베담: 냉담함, 스로따뱌샤: 들리는 모든 것을 향하여, 스루따샤: 이미 들은 모든 것, 짜: 또한.

번역

너의 지성이 깊은 환영의 숲에서 빠져나오면 지금까지 들은 모든 것과 앞으로 들을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주석

오직 주를 향한 봉헌에 종사함으로써 베다의 여러 의식에는 무관심한 위대한 헌애자들의 삶에서 여러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끄리쉬나와 우리의 관계를 실제로 이해하게 되면 능숙한 브라흐마나마저 자연히 결실을 낳는 의식들에 완전히 무관심하게 된다. 위대한 헌애자이자 헌애자 계보의 스승이신 스리 마다벤드라 뿌리(Śrī Mādhavendra Purī)께서 말씀하시기를,

산댜-반다나 바드람 아스뚜 바바또 보 스나나 뚜뱜 나모
sandhyā-vandana bhadram astu bhavato bhoḥ snāna tubhyaṁ namo
보 데바 삐따라스 짜 따르빠나-비다우 나함 끄샤마 끄샤먀땀
bho devāḥ pitaraś ca tarpaṇa-vidhau nāhaṁ kṣamaḥ kṣamyatām
야뜨라 끄바삐 니샤댜 야다바-꿀롯땀사샤 깜사-드비샤하
yatra kvāpi niṣadya yādava-kulottaṁsasya kaṁsa-dviṣaḥ
스마람 스마람 아감 하라미 딷 알람 만예 낌 안예나 메
smāraṁ smāram aghaṁ harāmi tad alaṁ manye kim anyena me

“오 나의 기도여, 하루에 세 번 당신에게 영광을, 오 목욕재계여,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오 데바들이여! 오 선조들이시여! 제가 경의를 표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이제 저는 어디에 앉든 야두 왕조의 위대한 후손 (끄리쉬나), 깜사의 적을 기억함으로써 모든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다의 의식과 제례들은 초심자들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하루 세 번 여러 종류의 기도를 올리고 이른 아침에 목욕재계하며 선조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끄리쉬나 의식이 되어 초월적이며 사랑으로 가득한 봉헌에 종사하면 이미 완성의 단계에 이른 것이므로 이 모든 규정 원칙을 개의치 않게 된다. 만약 우리가 지고한 주 끄리쉬나를 섬김으로써 이해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밝혀진 경전에서 권장하는 여러 종류의 고행과 희생제의를 수행할 필요가 더는 없다. 그러나 베다의 목적이 끄리쉬나께 이르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제례 의식 등에만 전념하면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샤브다-브라흐마(śabda-brahma), 즉 모든 베다와 우빠니샤드의 범위를 초월한다.

원문

스루띠-비쁘라띠빤나 떼 śruti-vipratipannā te
야다 스타샤띠 니스짤라 yadā sthāsyati niścalā
사마다 아짤라 붇디스 samādhāv acalā buddhis
따다 요감 아밥샤시 tadā yogam avāpsyasi

동의어

스루띠: 베다의 계시, 비쁘라띠빤나: 결실에 영향받지 않고, 떼: 너의, 야다: 할 때, 스타샤띠: 남는다, 니스짤라: 확고한, 사마다우: 초월적 의식, 즉 끄리쉬나 의식으로, 아짤라: 흔들리지 않는, 붇디히: 지성, 따다: 그때, 요감: 자아 인식, 아밥샤시: 너는 얻을 것이다.

번역

너의 마음이 베다의 미사여구에 더는 방해받지 않고, 자아 인식의 삼매경으로 확고할 때, 신성한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주석

우리가 사마디에 들었다고 함은 끄리쉬나 의식을 완전히 깨달았음을 말한다. 즉, 완전한 사마디에 든 사람은 브라흐만, 빠람아뜨마, 바가반을 깨달은 것이다. 자아 인식의 가장 높은 완성은 우리가 끄리쉬나의 영원한 종이며 우리의 유일한 용무는 끄리쉬나 의식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끄리쉬나 의식인 사람, 즉 주의 충직한 헌애자는 베다의 미사여구에 동요해서는 안 되고, 천국에 오르게 하는 결실을 낳는 행위에 종사해서도 안 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우리는 끄리쉬나와 직접 교감하게 되므로 그런 초월적 경지에서 끄리쉬나께서 주시는 모든 지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행위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룰 수 있고, 아울러 최종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오직 끄리쉬나와 당신의 대표자, 영적 스승의 명령만을 수행해야 한다.

원문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스티따-쁘라갸샤 까 바샤 sthita-prajñasya kā bhāṣā
사마디-스타샤 께샤바 samādhi-sthasya keśava
스티따-디히 낌 쁘라바쉐따 sthita-dhīḥ kiṁ prabhāṣeta
낌 아시따 브라제따 낌 kim āsīta vrajeta kim

동의어

아르주나 우바짜: 아르주나가 말했다, 스티따-쁘라갸샤: 끄리쉬나 의식이 확고한 자, 까: 무엇, 바샤: 언어, 사마디-스타샤: 삼매경에 있는 사람, 께샤바: 오 끄리쉬나, 스티따-디히: 끄리쉬나 의식으로 확고한 자, 낌: 무엇, 쁘라바쉐따: 말하다, 낌: 어떻게, 아시따: 가만히 있다, 브라제따: 걷다, 낌: 어떻게.

번역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오 끄리쉬나, 의식이 초월성에 몰입한 사람은 어떠한 징후를 나타냅니까? 그는 어떻게 말하고 어떤 언어를 구사합니까? 그는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습니까?

주석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징후가 있듯이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 또한 말하고, 걷고, 생각하고, 느끼는 등의 행위에 특별한 징후를 나타낸다. 부자 역시 부자라는 것을 알게 하는 징후가 있고 병든 사람도 그 나름의 징후가 있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학식 있는 사람도 그 나름의 징후가 있듯이, 초월적인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징후를 보인다. 우리는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우리 각자의 징후를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말하는가이다. 왜냐하면 말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입을 벌리지 않는 한 바보는 드러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분명 옷을 잘 차려입은 바보는 말하지 않는 한,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이 탄로 나게 마련이다.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사람을 바로 알 수 있는 징후는 그가 오직 끄리쉬나와 끄리쉬나에 관한 것만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다른 징후들은 다음에 설명되는 바대로 저절로 따라온다.

원문

스리-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쁘라자하띠 야다 까만 prajahāti yadā kāmān
사르반 빠르타 마노-가딴 sarvān pārtha mano-gatān
아뜨마니 에바뜨마나 뚜쉬따하 ātmany evātmanā tuṣṭaḥ
스티따-쁘라갸스 따도쨔떼 sthita-prajñas tadocyate

동의어

스리-바가반 우바짜: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다, 쁘라자하띠: 포기하다, 야다: 할 때, 까만: 감각 만족에의 욕망, 사르반: 모든 다양성의,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마나하-가딴: 마음이 꾸며낸 것, 아뜨마니: 영혼의 순수한 상태에서, 에바: 확실히, 아뜨마나: 정화된 마음, 뚜쉬따하: 만족하다, 스티따-쁘라갸하: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따다: 바로 그 때, 우쨔떼: 라고 하다.

번역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 빠르타여, 마음에서 생겨나는 감각 만족을 위한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 정화된 마음으로 오직 자기 안에서 만족을 찾게 될 때, 순수한 초월적 의식에 이르렀다고 한다.

주석

완전히 끄리쉬나 의식을 갖춘 누구라도, 즉 주의 봉헌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성자의 좋은 자질을 가지지만, 초월적 경지에 오르지 않은 자는 자기가 꾸며낸 생각 속에서 안식을 구할 것이 분명하기에 어떤 좋은 자질도 없다고 바가바땀이 확언한다. 따라서 마음이 만들어내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고 여기서 바르게 말하고 있다. 그런 감각적 욕망을 인위적으로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이 되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감각의 욕구가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 없이 끄리쉬나 의식이 되려고 해야 한다. 봉헌이 우리가 초월적 의식의 단계에 즉시 이르게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높이 진보한 영혼은 자기가 지고한 주의 영원한 종임을 깨닫기에 항상 스스로 만족한 상태에 있다. 그렇게 초월적으로 위치한 자는 하찮은 물질주의에서 비롯된 감각적 욕구가 전혀 없다. 오히려 지고한 주를 영원히 섬기는 자기 본연의 위치에서 항상 행복해한다.

원문

두케스 바눋비그나-마나하 duḥkheṣv anudvigna-manāḥ
수케슈 비가따-스쁘리하하sukheṣu vigata-spṛhaḥ
비따-라가-바야-끄로다하 vīta-rāga-bhaya-krodhaḥ
스티따-디르 무니루쨔떼 sthita-dhīr munir ucyate

동의어

두케슈: 세 겹의 고통, 아눋비그나-마나하: 마음의 동요 없이, 수케슈: 행복에서, 비가따-스쁘리하: 관심을 가지지 않고, 비따: 벗어난, 라가: 집착, 바야: 두려움, 끄로다하: 그리고 분노, 스티따-디히: 마음이 한결같은 자들, 무니: 성인(聖人),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세 겹의 고통 속에서조차 마음의 동요가 없고 행복으로 들뜨지 않으며 집착과 두려움, 분노에서 벗어난 자를 한결같은 마음을 지닌 성인이라고 하느니라.

주석

무니(muni)란 말은 실제적 결론에 이르지 않고, 정신적 사색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자를 의미한다. 모든 무니는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니며 각각의 무니가 서로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무니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나사브 리시랴샤 마땀 나 빈남(Nāsāv ṛṣir yasya mataṁ na bhinnam,《마하바라따 바나-빠르바 Mahābhārata, Vana-parva 313.117》). 그러나 주께서 여기에 언급한 스티따-디르 무니는 보통의 무니와는 다르다. 스티따-디르 무니는 창조적인 사색을 더는 하지 않으므로 항상 끄리쉬나 의식에 있다. 그런 사람을 쁘라샨따-니흐세샤-마노-라탄따라(praśānta-niḥśeṣa-mano-rathāntara, 《스또뜨라 라뜨나 Stotra-ratna 43》), 즉 정신적 사색의 단계를 넘어서 주 스리 끄리쉬나, 즉 바아수데바가 전부라는 결론에 이른 자라고 한다 (바아수데바 사르밤 이띠 사 마하뜨마 수-둘라바하). 그러한 사람을 마음이 한결같은 무니라고 부른다. 그런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자는 자기가 지은 과거의 잘못 때문에 더 많이 고통받아야 마땅하고 자기가 겪는 고통이 주의 은총으로 최소화되었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고통을 주의 자비로 받아들여 세 겹의 고통이라는 맹공격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행복할 때는 주께 은공을 돌리고 자기는 그 행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직 주의 은총으로 자기가 그런 안락한 상태에 있어 주께 더 낳은 봉헌을 할 수 있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주를 향한 봉사를 위해서라면 항상 위험을 무릅쓰며 적극적이고, 집착이나 반감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집착이란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초연함이란 그런 감각의 집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에 확고한 자는 자기 삶을 주의 봉사에 바쳤기 때문에 집착도 초연함도 없다. 따라서 자기가 한 시도가 성공하지 않아도 전혀 화내지 않는다. 성공이든 실패든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항상 자기 결심에 꾸준하다.

원문

야 사르바뜨라나비스네하스 yaḥ sarvatrānabhisnehas
땃 땃 쁘라뺘 슈바슈밤 tat tat prāpya śubhāśubham
나비난다띠 나 드베쉬띠 nābhinandati na dveṣṭi
따샤 쁘라갸 쁘라띠쉬티따 tasya prajñā pratiṣṭhitā

동의어

야: 하는 자, 사르바뜨라: 모든 곳에, 아나비스네하: 애정 없이, 땃: 그것, 땃: 그것, 쁘라뺘: 달성하는, 슈바: 선(善), 아슈밤: 악, 나: 결코 않다, 아비난다띠: 칭찬하다, 나: 결코 않다, 드베쉬띠: 시기(猜忌), 따샤: 그의, 쁘라갸: 완벽한 지식, 쁘라띠쉬티따: 고정된.

번역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선과 악에도 좌우되지 않으며 선을 칭찬하지도 악을 경멸하지도 않는 자는 완벽한 지식으로 확고한 자이다.

주석

물질계에서는 선과 악의 격변이 항상 일어난다. 그러한 물질적 격변에 동요하지 않고, 선과 악에 영향받지 않는 자는 끄리쉬나 의식에 확고히 위치한 자이다. 이 세상은 이원성으로 가득 차있어 우리가 물질계에 있는 한, 선과 악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에 확고한 자는 절대선인 끄리쉬나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선과 악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한 끄리쉬나에 전념하는 의식은 인간을 사마디라 불리는 완전한 초월적 경지에 자리하게 한다.

원문

야다 삼하라떼 짜얌 yadā saṁharate cāyaṁ
꾸르몽가니바 사르바샤하 kūrmo ’ṅgānīva sarvaśaḥ
인드리야닌드리야르테뱌스 indriyāṇīndriyārthebhyas
따샤 쁘라갸 쁘라띠쉬티따 tasya prajñā pratiṣṭhitā

동의어

야다: 때, 삼하라떼: 감다, 짜: 또한, 아얌: 그, 꾸르마하: 거북이, 앙가니: 사지(四肢), 이바: 처럼, 사르바샤하: 모두, 인드리야니: 감각들, 인드리야-아르테뱌하: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따샤: 그의, 쁘라갸: 의식, 쁘라띠쉬티따: 고정된.

번역

거북이가 등딱지 안으로 사지를 오그려 넣듯이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자기 감각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는 완벽한 의식으로 확고한 자이다.

주석

요기(yogi 요가행자)나 헌애자, 즉 깨달은 영혼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자기 의지대로 감각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감각의 노예여서 감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바로 이것이 요기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다. 감각은 독사와 같아 아무 제한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 요기 또는 헌애자는 뱀을 부리는 사람처럼 뱀(감각)을 통제하기 위해 강해야 한다. 뱀 마술사는 뱀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도록 절대 놔두지 않는다. 밝혀진 경전에는 많은 지시 사항이 있고 어떤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고, 어떤 것은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의 즐김을 억제하여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규정을 따르지 않는 한, 끄리쉬나 의식으로 확고하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에 가장 좋은 예, 거북이가 나온다. 거북이는 언제라도 사지를 오그려들일 수 있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언제라도 다시 사지를 내놓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사람의 감각은 오직 주를 향한 봉사라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두어들인다. 아르주나는 여기에서 자기 감각을 자기만족이 아닌 주를 섬기는 데 써야 한다고 배우고 있다. 감각을 항상 주를 섬기는 데 두는 것이 자기 사지를 안에 두는 거북에 비유되어 설명되었다.

원문

비샤야 비니바르딴떼 viṣayā vinivartante
니라하라샤 데히나하 nirāhārasya dehinaḥ
라사-바르잠 라소’뺘샤 rasa-varjaṁ raso ’py asya 
빠람 드리쉬뜨바 니바르따떼 paraṁ dṛṣṭvā nivartate

동의어

비샤야: 감각 즐김의 대상, 비니바르딴떼: 삼가하도록 수행하는, 니라하라샤: 부정적 제한 때문에, 데히나하: 육신을 가진 자들, 라사-바르잠: 맛을 버리다, 라사하: 쾌감, 아삐: 비록 있지만, 아샤: 그의, 빠람: 훨씬 우월한 것들, 드리쉬뜨바: 경험함으로써, 니바르따떼: 그는 그만두게 된다.

번역

육체에 갇힌 영혼이 감각의 즐거움을 절제하더라도 감각 대상을 향한 맛은 남는다. 그러나 고차원적 맛을 경험함으로써 그러한 기호를 버린 자는 의식이 확고하게 된다.

주석

우리가 초월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감각의 즐거움을 그만두는 일은 불가능하다. 규정과 원칙에 따라 감각 만족을 절제하는 과정은 병든 사람에게 특별한 종류의 음식을 제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환자는 그러한 제한을 반기지 않으며 음식에 대한 맛 또한 잃지 않는다. 야마(yama), 니야마(niyama), 아사나(āsana), 쁘라나야마(prāṇāyāma), 쁘라땨하라(pratyāhāra), 다라나(dhāraṇā), 댜나(dhyāna) 등을 다루는 아쉬땅가 요가(aṣṭāṅga-yoga) 같은 어떤 영적 과정을 통해 감각을 절제하는 것은 더 나은 지식을 갖추지 않은 지성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고한 주, 끄리쉬나의 아름다움을 맛본 자는 생명 없는 물질적인 것들에 더는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절제는 삶의 영적 진보에 있어 지성이 부족한 초심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러한 절제는 실제로 끄리쉬나 의식을 위한 맛이 생길 때까지만 효력이 있다. 우리가 실제로 끄리쉬나 의식이 되면 피상적인 것들에 끌리는 맛을 저절로 잃게 된다.

원문

야따또 햐삐 까운떼야 yatato hy api kaunteya
뿌루샤샤 비빠스찌따하 puruṣasya vipaścitaḥ
인드리야니 쁘라마티니 indriyāṇi pramāthīni
하란띠 쁘라사밤 마나하 haranti prasabhaṁ manaḥ

동의어

야따따하: 노력하는 동안, 히: 확실히, 아삐: 불구하고,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뿌루샤샤: 사람의, 비빠스찌따하: 분별 있는 지식으로 가득한, 인드리야니: 감각들, 쁘라마티니: 동요하는, 하란띠: 던지다, 쁘라사밤: 강제로, 마나하: 마음.

번역

감각은 너무도 강하고 충동적이기에 오 아르주나, 그것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분별 있는 자의 마음도 강제로 데려가 버린다.

주석

감각을 정복하고자 노력하는 성자, 철학자, 초월주의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조차도 동요된 마음 때문에 물질적 감각 즐김의 희생양이 된다. 위대한 성자이며 완벽한 요기인 비스바미뜨라(Viśvāmitra)는 혹독한 고행과 요가 수행으로 감각을 통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메나카(Menakā)에게 잘못 이끌려 성적 쾌락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세계 역사에는 이와 유사한 예가 아주 많이 있다. 그러므로 완전히 끄리쉬나 의식이 되지 않고서는 마음과 감각을 통제하기란 무척 어렵다. 마음을 끄리쉬나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물질적 기호를 끊을 수 없다. 위대한 성인이며 헌애자인 스리 야무나짜리아(Śrī Yāmunācārya)께서 실용적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얃-아바디 마마 쩨따 끄리쉬나-빠다라빈데 yad-avadhi mama cetaḥ kṛṣṇa-pādāravinde
나바-나바-라사-다마니 우댜땀 란뚬 아싯 nava-nava-rasa-dhāmany udyataṁ rantum āsīt
딷-아바디 바따 나리-상가메 스마랴마네 tad-avadhi bata nārī-saṅgame smaryamāne
바바띠 무카-비까라 수쉬투 니쉬티바남 짜 bhavati mukha-vikāraḥ suṣṭhu niṣṭhīvanaṁ ca

“내 마음이 주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을 향한 봉사에 종사하고 항상 새롭고 초월적인 유머를 즐기고 있기에, 나는 여인과 성생활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즉시 얼굴을 돌려 그 생각에 침을 뱉는다.”

끄리쉬나 의식은 그런 초월적으로 좋은 맛이어서 물질적 즐거움은 저절로 맛을 잃게 된다. 그것은 배고픈 자가 충분한 양의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과 같다. 마하라자 암바리샤(Mahārāja Ambarīṣa) 역시 그의 마음을 오직 끄리쉬나 의식에만 뒀기 때문에 위대한 요기, 두르바사 무니(Durvāsā Muni)를 정복할 수 있었다. 사 바이 마나 끄리쉬나-빠다라빈다요르 바짬시 바이꾼타-구나누바르나네(sa vai manaḥ kṛṣṇa-padāravindayor vacāṁsi vaikuṇṭha-guṇānuvarṇane).

원문

따니 사르바니 삼얌야 tāni sarvāṇi saṁyamya
육따 아시따 맛-빠라하yukta āsīta mat-paraḥ
바셰 히 야셴드리야니 vaśe hi yasyendriyāṇi
따샤 쁘라갸 쁘라띠쉬티따 tasya prajñā pratiṣṭhitā

동의어

따니: 그러한 감각들, 사르바니: 모든, 삼얌야: 억제하다, 육따하: 종사하다, 아시따: 상황에 처해야 한다, 맛-빠라하: 나와의 관계에서, 바셰: 완전한 항복으로, 히: 확실히, 야샤: 하는 자, 인드리야니: 감각들, 따샤: 그의, 쁘라갸: 의식, 쁘라띠쉬티따: 확고한.

번역

감각을 절제하여 완전히 통제하고 의식을 나에게 전념하는 자를 일컬어 한결같은 지성을  지닌 자라고 하느니라. 

주석

요가의 완성에 있어 가장 높은 개념은 끄리쉬나 의식이라는 것이 이 절에서 분명히 설명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이 되지 않는 한, 감각을 통제하는 것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위대한 현인 두르바사 무니는 암바리샤 마하라자에게 시비를 걸었고 자만심으로 인해 불필요하게 화를 내게 되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감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반면에 암바리샤 왕은 그 현인처럼 강력한 요기는 아니었지만 주님의 헌애자였기에 조용하게 현인의 부당함을 인내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 왕은 스리마드 바가바땀(9.4.18~20)에 언급된 다음의 자질들을 따름으로써 자기 감각을 통제할 수 있었다.

사 바이 마나 끄리쉬나-빠다라빈다요르 sa vai manaḥ kṛṣṇa-padāravindayor
바짬시 바이꾼타-구나누바르나네 vacāṁsi vaikuṇṭha-guṇānuvarṇane
까라우 하레르 만디라-마르자나디슈 karau harer mandira-mārjanādiṣu
스루띰 짜까라쮸따-삿-까토다예 śrutiṁ cakārācyuta-sat-kathodaye
무꾼다-링갈라야-다르샤네 드리샤우 mukunda-liṅgālaya-darśane dṛśau
딷-브리땨-가뜨라-스빠르솅가-상가맘 tad-bhṛtya-gātra-sparśe ’ṅga-saṅgamam
그라남 짜 땃-빠다-사로자-사우라베 ghrāṇaṁ ca tat-pāda-saroja-saurabhe
스리맛-뚤라샤 라사남 딷-아르삐떼 śrīmat-tulasyā rasanāṁ tad-arpite
빠다우 하레 끄쉐뜨라-빠다누사르빠네 pādau hareḥ kṣetra-padānusarpaṇe
시로 흐리쉬께샤-빠다비반다네 śiro hṛṣīkeśa-padābhivandane
까맘 짜 다셰 나 뚜 까마-깜야야 kāmaṁ ca dāsye na tu kāma-kāmyayā
야톳따마-슬로까-자나스라야 라띠히 yathottama-śloka-janāśrayā ratiḥ

“왕 암바리샤는 자기 마음을 주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에 고정하고, 자기 말은 주가 계시는 곳을 묘사하는 데 쓰고, 자기 손으로 주의 사원을 청소하고, 자기 귀로 주의 유희를 듣고, 자기 눈으로 주의 형상을 바라보며, 자기 몸으로 헌애자의 몸과 가까이하며, 자기 코로 주의 연꽃 같은 발에 바쳐진 꽃들의 향기를 맡고, 자기 입으로 주께 바쳐진 뚤라시 잎을 맛보고, 자기 다리로 주의 사원이 세워진 신성한 곳으로 여행하고, 자기 머리로 주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자기 욕망을 주의 욕망을 이루는 데 두고… 그리고 이 모든 특징으로 볼 때 그는 주의 맛-빠라(mat-para) 헌애자가 되기에 적합하다.”

“맛-빠라”라는 말은 이 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맛-빠라가 되는지는 왕 암바리샤의 생에서 묘사되고 있다. 맛-빠라 계열의 위대한 학자이자 스승, 스릴라 발라데바 비댜부사나(Śrīla Baladeva Vidyābhūṣaṇa)께서 맏-박띠-쁘라바베나 사르벤드리야-비자야-뿌르비까 스바뜨마-드리쉬띠 술라베띠 바바하(mad-bhakti-prabhāvena sarvendriya-vijaya-pūrvikā svātma-dṛṣṭiḥ su-labheti bhāvaḥ)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끄리쉬나를 향한 봉헌의 힘으로만 감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 또한 가끔 불에 비유하기도 하셨다. “훨훨 타오르는 불이 방안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듯 요기의 가슴에 계시는 주 비쉬누께서는 모든 종류의 불순함을 완전히 태워버리신다.” 요가 수뜨라 또한 허공에 명상하지 말고, 비쉬누에 명상하도록 지시한다. 비쉬누가 아닌 다른 것에 명상하는 소위 요기라는 자들은 어떠한 환영을 좇아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한다. 우리는 끄리쉬나 의식이 되어 최고인격신께 우리를 바쳐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요가의 목적이다.

원문

디아야또 비샤얀 뿜사하 dhyāyato viṣayān puṁsaḥ
상가스 떼슈빠자야떼 saṅgas teṣūpajāyate
상갓 산자야떼 까마하 saṅgāt sañjāyate kāmaḥ
까맛 끄로도’비자야떼 kāmāt krodho ’bhijāyate

동의어

디아야따하: 숙고하는 동안, 비샤얀: 감각의 대상들, 뿜사하: 사람의, 상가하: 집착, 떼슈: 감각의 대상에서, 우빠자야떼: 발전하다, 상갓: 집착에서, 산자야떼: 생긴다, 까마하: 욕망, 까맛: 욕망에서, 끄로다하: 분노, 아비자야떼: 발현하게 된다.

번역

감각의 대상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그것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그 집착으로부터 욕망이 생기며, 그 욕망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주석

끄리쉬나 의식이 아닌 사람은 감각의 대상을 깊이 생각하면서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감각은 진정으로 쓰일 곳이 있어야 하는데, 주의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쓰이지 않으면 반드시 물질적인 일을 찾을 것이다. 물질계에서는 천국의 다른 데바들은 말할 것도 없이 시바와 브라흐마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감각 대상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물질적 존재의 이 수수께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끄리쉬나 의식이 되는 것이다. 시바가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을 때 빠르바티(Pārvatī)가 감각 만족을 위해 그를 부추기자 시바는 그 제안에 동의했고, 그 결과 까르띠께야(Kārtikeya)가 태어났다. 주의 헌애자 하리다사 타꾸라(Haridāsa Ṭhākura)가 청년이었을 때 마찬가지로 마야 데비(Māyā-devī)의 화신에게서 유혹받았지만 그는 주 끄리쉬나를 향한 순수한 봉헌으로 그 시험을 쉽게 통과했다. 위에 언급된 스리 야무나짜리아(Śrī Yāmunācārya)의 구절에서 설명되었듯이, 주의 충실한 헌애자는 주와의 교제에서 오는 영적 즐거움이라는 고차원의 맛 덕분에 어떠한 물질적 감각 만족도 가까이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따라서 끄리쉬나 의식이 없는 자는 인위적 억압으로 아무리 강력하게 감각을 통제하려 해도 궁극적으로 실패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감각 만족을 원하는 아주 작은 생각이라도 그 욕망을 채우도록 끊임없이 부추길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끄로닫 바바띠 삼모하하 krodhād bhavati sammohaḥ
삼모핫 스므리띠-비브흐라마하 sammohāt smṛti-vibhramaḥ
스므리띠-브람샫 붇디-나쇼 smṛti-bhraṁśād buddhi-nāśo
붇디-나샷 쁘라나샤띠 buddhi-nāśāt praṇaśyati

동의어

끄로닷: 분노에서, 바바띠: 일어나다, 삼모하: 완전한 환영, 삼모핫: 환영으로부터, 스므리띠: 기억의, 비브흐라마하: 당황, 스므리띠-브람샷: 기억의 혼란 이후에, 붇디-나샤하: 지성을 잃어버림, 붇디-나샷: 지성이 사라진 뒤에, 쁘라나샤띠: 타락하게 된다.

번역

분노에서 완전한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에서 기억의 혼란이 생긴다. 기억이 혼란해지면 지성이 사라지고, 지성이 사라지면 물질계의 늪으로 다시 떨어진다.

주석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셨다.

쁘라빤찌까따야 붇댜 prāpañcikatayā buddhyā
하리 -삼반디-바스뚜나하 hari-sambandhi-vastunaḥ
무묵슈비 빠리띠아고 mumukṣubhiḥ parityāgo
바이라걈 팔구 까탸떼 vairāgyaṁ phalgu kathyate

(박띠 라삼리따 신두Bhakti-rasāmṛta-sindhu 1.2.258)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키면 모든 것을 주의 봉사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에 관한 지식이 없는 자들은 인위적으로 물질적 대상들을 회피하고 그 결과로서 물질적 속박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지만 버림의 완벽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소위 그들의 버림은 팔구(phalgu), 즉 하찮은 것으로 불린다. 반면에,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주의 봉사에 모든 것을 활용하는 법을 안다. 따라서 그는 물질적 의식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비인성주의자는 주, 즉 절대 진리는 인성이 없으니까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비인성주의자는 좋은 음식을 피하려고 하지만, 헌애자는 끄리쉬나가 지고의 향유자이며 당신께 봉헌으로 바친 모든 것을 드신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주께 좋은 음식을 올리고 난 다음, 헌애자는 쁘라사담(prasādam), 즉 주가 남기신 음식을 먹는다. 결국 모든 것이 영적으로 변해 타락의 위험은 전혀 없다. 헌애자는 끄리쉬나 의식의 쁘라사담을 먹지만 비인성주의자는 그것을 거부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비인성주의자는 인위적 버림 때문에 삶을 즐길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마음의 작은 동요로도 그들은 물질적 존재의 늪에 다시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영혼은 해방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도 봉헌이 뒷받침하지 않기에 다시 떨어진다고 한다.

원문

라가-드베샤-비묵따이스 뚜 rāga-dveṣa-vimuktais tu
비샤얀 인드리야이스 짜란 viṣayān indriyaiś caran
아뜨마-바샤이르 비데야뜨마 ātma-vaśyair vidheyātmā
쁘라사담 아디갓차띠 prasādam adhigacchati

동의어

라가: 집착, 드베샤: 그리고 집착 없음, 비묵따이히: 벗어나게 된 자의, 뚜: 그러나, 비샤얀: 감각 대상, 인드리야이: 감각들에 의해, 짜란: 따라 행동하다, 아뜨마-바샤이히: 행위자의 통제 아래, 비데야-아뜨마: 절제된 자유를 따르는 자, 쁘라사담: 주의 자비, 아디갓차띠: 얻는다.

번역

그러나 모든 집착과 혐오에서 벗어나 규정 원칙이라는 자유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통제할 수 있는 자는 주의 완전한 자비를 받을 수 있다.

주석

우리가 인위적 과정을 통해 감각을 외부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감각들이 주의 초월적 봉사에 쓰이지 않으면 항상 타락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되었다.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이 실제로 감각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끄리쉬나 의식이므로  감각 활동에 전혀 집착이 없다.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오직 끄리쉬나를 만족시키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집착과 초연함에서 벗어난다. 끄리쉬나께서 원하시면 헌애자는 상식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끄리쉬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자기만족을 위해 평소 했음 직한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헌애자는 오직 끄리쉬나의 지도에 따라 행동하므로 행위와 무위를 통제할 수 있다. 육체적 감각을 사용하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헌애자가 성취할 수 있는 이러한 의식은 주의 원인 없는 자비 덕분이다.

원문

쁘라사데 사르바-두카남 prasāde sarva-duḥkhānāṁ
하니르 아쇼빠자야떼 hānir asyopajāyate
쁘라산나-쩨따소 햐슈 prasanna-cetaso hy āśu
붇디 빠르야바띠쉬타떼 buddhiḥ paryavatiṣṭhate

동의어

쁘라사데: 주의 원인 없는 자비를 받음, 사르바: 모든 것의, 두카남: 물질적인 불행, 하니: 파괴, 아샤: 그의, 우빠자야떼: 일어나다, 쁘라산나-쩨따사하: 행복한 마음으로, 히: 확실히, 아슈: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붇디히: 지성, 빠리: 충분히, 아바띠쉬타떼: 확립하게 된다.

번역

따라서 (끄리쉬나 의식으로) 만족한 자에게 물질계의 세 가지 고통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만족한 의식 안에 지성은 곧 확립된다.

원문

나스띠 붇디르 아육따샤 nāsti buddhir ayuktasya
나 짜육따샤 바바나 na cāyuktasya bhāvanā
나 짜바뱌따 샨띠르 na cābhāvayataḥ śāntir
아샨따샤 꾸따 수캄 aśāntasya kutaḥ sukham

동의어

나 아스띠: 있을 수 없다, 붇디히: 초월적 지성, 아육따샤: 연결되지 않은 자(끄리쉬나 의식으로), 나: 아니다, 짜: 그리고, 아육따샤: 끄리쉬나 의식이 없는 자, 바바나: 고정된 마음(행복으로), 나: 아니다, 짜: 그리고, 아바뱌따하: 고정되지 않은 자의, 샨띠히: 평화, 아샨따샤: 평화롭지 않은, 꾸따하: 어디에 존재하다, 수캄: 행복.

번역

(끄리쉬나 의식으로) 절대자와 연결되지 않은 자는 초월적 지성도, 꾸준한 마음도 가질 수 없으며 이러한 지성과 마음 없이 평온할 수 없다. 그리고 평온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주석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에 있지 않은 한, 평온할 수 없다. 그래서 제5장 29절에서 확증되었듯이, 끄리쉬나가 모든 희생과 고행으로 생긴 결과의 유일한 향유자이자 모든 우주적 발현의 소유자이며, 모든 생명체의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깨달을 때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끄리쉬나 의식이 없으면 마음의 궁극적 목표가 있을 수 없다. 마음의 혼란은 궁극적 목표가 없기 때문이며 끄리쉬나가 향유자이자, 주인, 모든 이의 친구이며, 모든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끄리쉬나와 무관하게 일하는 자는 아무리 삶의 평화와 영적 진보를 이룬 체해도 항상 불행하고 평온하지 않다. 끄리쉬나 의식은 오직 끄리쉬나와의 관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연 발생적 평화 상태이다.

원문

인드리야남 히 짜라땀 indriyāṇāṁ hi caratāṁ
얀 마노’누비디야떼 yan mano ’nuvidhīyate
딷 아샤 하라띠 쁘라걈 tad asya harati prajñāṁ
바유르 나밤 이밤바시 vāyur nāvam ivāmbhasi

동의어

인드리야남: 감각들, 히: 확실히, 짜라땀: 떠돌아다니는 동안, 얏: 그것으로, 마나하: 마음, 아누비디야떼: 항상 종사하는: 땃: 그것, 아샤: 그의, 하라띠: 빼앗아 간다, 쁘라걈: 지성, 바유후: 바람, 나밤: 배, 이바: 처럼, 암바시: 물 위의.

번역

강한 바람으로 수면에 떠 있는 배가 흔들리듯, 배회하는 감각 중 단 하나에도 마음을 뺏기면 지성은 멀리 사라지느니라.

주석

모든 감각이 주를 향한 봉사에 종사하지 않으면 감각 만족에 쓰인 감각 중 단 하나에 의해서도 초월적 진보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다. 암바리샤 왕의 삶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감각은 끄리쉬나 의식에 전적으로 쓰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만이 마음을 다스리는 올바른 기술이기 때문이다.

원문

따스맏 야샤 마하-바호 tasmād yasya mahā-bāho
니그리히따니 사르바샤하 nigṛhītāni sarvaśaḥ
인드리야니인드리야르테뱌스  indriyāṇīndriyārthebhyas
따샤 쁘라갸 쁘라띠쉬티따 tasya prajñā pratiṣṭhitā

동의어

따스맛: 그러므로, 야샤: 하는 자의, 마하-바호: 오 강력히 무장한 자여, 니그리히따니: 그렇게 억제하게 된, 사르바샤하: 전반적으로, 인드리야니: 감각들, 인드리야-아르테뱌하: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따샤: 그의, 쁘라갸: 지성, 쁘라띠쉬티따: 고정된.

번역

그러므로, 오 강력히 무장한 자여,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감각을 억제하는 자는 분명 꾸준한 지성을 가진 자이다.

주석

우리는 감각 만족의 욕구를 오직 끄리쉬나 의식, 즉 모든 감각을 주의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종사함으로써 억제할 수 있다. 적이 우월한 힘으로 정복되듯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주의 봉헌에 감각을 전념하게 하는 것만으로 감각은 억제될 수 있다. 오직 끄리쉬나 의식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지성이 확고히 자리할 수 있고, 또한 진정한 영적 스승의 지도를 받아 이 기술을 연마해야 해야 하며 이러한 자를 사다까(sādhaka), 즉 해방에 적합한 자라 한다.

원문

야 니샤 사르바-부따남 yā niśā sarva-bhūtānāṁ
따샴 자가르띠 삼야미 tasyāṁ jāgarti saṁyamī
야샴 자그라띠 부따니 yasyāṁ jāgrati bhūtāni
사 니샤 빠샤또 무네헤 sā niśā paśyato muneḥ

동의어

야: 무엇, 니샤: 밤, 사르바: 모든, 부따남: 생명체의, 따샴: 그것에, 자가르띠: 깨어있는, 삼야미: 절제하는, 야샴: 그것에, 자그라띠: 깨어있는, 부따니: 모든 존재, 사: 존재하다, 니샤: 밤, 빠샤따하: 자기 성찰의, 무네헤: 성인.

번역

절제하는 자에게 모든 생명이 잠든 밤은 깨어있는 시간이고 모든 존재가 깨어있는 시간은 자기 성찰의 성인에게는 밤이니라.

주석

두 부류의 총명한 자가 있다. 한 부류는 감각 만족을 위한 물질적 활동에 총명하고, 다른 부류는 자기성찰과 자아 인식의 배양에 눈뜬다. 자기성찰의 성인, 즉 사려 깊은 성인의 활동은 물질적인 것에 몰두하는 자에게는 밤이다. 물질적 인간은 자아 인식에 관해 무지한 탓에 그러한 밤에 잠들어 있다. 자기성찰 하는 성인은 물질적 인간의 “밤”에도 항상 깨어있다. 성인은 영적 문화의 점진적 발전에 초월적 즐거움을 느끼지만 잠에 빠진 상태의, 물질적 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감각 만족의 다양한 꿈속에서 때로는 행복을, 때로는 불행을 느낀다. 자기 성찰 하는 자는 물질적 행복과 불행에 항상 초연하다. 그는 물질적 결과에 동요하지 않고 자아 인식의 길을 간다.

원문

아뿌럄아남 아짤라-쁘라띠쉬탐 āpūryamāṇam acala-pratiṣṭhaṁ
삼우드람 아빠 쁘라비샨띠 야드밧 samudram āpaḥ praviśanti yadvat
따드밧 까마 얌 쁘라비샨띠 사르베 tadvat kāmā yaṁ praviśanti sarve
사 샨띰 압노띠 나 까마-까미 sa śāntim āpnoti na kāma-kāmī

동의어

아뿌럄아남: 항상 채워지는, 아짤라-쁘라띠쉬탐: 꾸준한 상황의, 삼우드람: 대양(大洋), 아빠하: 물, 쁘라비샨띠: 들어가다, 야드밧: 처럼, 따드밧: 그렇게, 까마하: 욕망들, 얌: 그에게, 쁘라비샨띠: 들어가다, 사르베: 모든, 사하: 그 사람, 샨띰: 평화, 압노띠: 달성하다, 나: 아니다, 까마-까미: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자.

번역

항상 채워져도 늘 그대로 있는 대양으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드는 욕망에 동요하지 않는 자만이 평온을 얻을 수 있지만,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려 애쓰는 자는 평온하지 못하다.

주석

넓은 대양은 항상 바닷물로 가득한데 특히 우기에는 훨씬 더 많은 물이 계속해서 채워진다. 그러나 대양은 여전히 똑같으며 꾸준하다. 동요되지 않으며 그 끝의 경계가 넘지도 않는다. 끄리쉬나 의식에 확고한 자도 이와 같다. 우리에게 육신이 있는 한, 감각 만족을 위한 육체의 요구는 계속된다. 그러나 헌애자는 내면의 충만함으로 이러한 욕망에 동요되지 않는다. 주께서 모든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기에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어느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안에서 항상 충만한 대양과 같다. 대양으로 흘러가는 강물의 물결처럼 욕망이 다가오지만 그는 자기 일에 꾸준하며 감각 만족을 위한 욕망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사람, 즉 욕망이 있더라도 물질적 감각 만족을 위한 모든 맛을 잃어버린 사람의 징후이다. 그는 주를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늘 만족하기 때문에 대양처럼 꾸준할 수 있고, 따라서 완전한 평화를 누린다. 그러나 해방의 경지마저 원하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자들은 물질적 성공은 물론이고 평화 또한 절대 얻을 수 없다. 결과 지향적 노동자들, 복음 전도자들, 신비로운 힘을 좇는 요기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탓에 모두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주를 향한 봉헌으로 항상 행복하고, 채워야 할 어떠한 욕망도 없다. 실제로 그는 소위 물질적 속박에서의 해방조차 바라지 않는다. 끄리쉬나의 헌애자는 어떠한 물질적 욕망도 없기에 완벽한 평화 안에 있다.

원문

비하야 까만 야 사르반 vihāya kāmān yaḥ sarvān
뿌맘스 짜라띠 니히스쁘리하하 pumāṁś carati niḥspṛhaḥ
니르마모 니라항까라하 nirmamo nirahaṅkāraḥ
사 샨띰 아디갓차띠 sa śāntim adhigacchati

동의어

비하야: 포기하다, 까만: 감각 만족을 위한 물질적 욕망, 야하: 하는 자, 사르반: 모든, 뿌만: 사람, 짜라띠: 살다, 니히스쁘리하: 욕심 없는, 니르마나하: 소유 의식 없이, 니라항까라하: 거짓 자아 없이, 사하: 그, 샨띰: 완벽한 평화, 아디갓차띠: 얻는다.

번역

감각 만족을 위한 모든 소원을 버리고, 욕망 없이 생활하며, 모든 소유 의식을 버리고, 거짓 자아가 없는 자, 오직 그러한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주석

욕망이 없게 된다는 것은 감각 만족을 위한 어떠한 것도 원치 않음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끄리쉬나 의식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무욕(無慾)이다. 자기의 근본 위치를 끄리쉬나의 영원한 종으로 알고, 육신을 진정한 자아라고 잘못 주장하지 않으며, 이 세상 어떤 것에도 헛되이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끄리쉬나 의식의 완벽한 경지이다. 이 완벽의 경지에 도달한 자는 끄리쉬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기에 모든 것은 끄리쉬나의 만족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아르주나는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해 싸우지 않으려 했지만, 완전히 끄리쉬나 의식이 된 후에는 끄리쉬나께서 전쟁을 원하셨기에 그 전쟁에 임했다. 자기를 위해서는 싸울 의사가 없었지만 끄리쉬나를 위해서 아르주나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 진정한 무욕은 욕망을 없애려는 인위적 노력이 아니라 끄리쉬나를 만족시키려는 욕망이다. 우리는 욕망이 전혀 없거나 무감각이 될 수 없기에 욕망의 질을 바꾸어야 한다. 물질적 욕망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끄리쉬나께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이샤바샴 이담 사르밤 īśāvāsyam idaṁ sarvam) 어떠한 것에도 헛되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 초월적 지식은 모든 생명체는 영적 정체성의 측면에서 끄리쉬나의 영원한 부분이므로 생명체의 영원한 위치가 끄리쉬나와 같아지거나 더 높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아는 것, 즉 자아 인식에 기초한다. 끄리쉬나 의식에 관한 이러한 이해가 진정한 평화의 근본 원칙이다.

원문

에샤 브라흐미 스티띠 빠르타 eṣā brāhmī sthitiḥ pārtha
나이남 쁘라뺘 비무햐띠 naināṁ prāpya vimuhyati
스팃바샴 안따-깔레’삐 sthitvāsyām anta-kāle ’pi
브라흐마-니르바남 릿차띠 brahma-nirvāṇam ṛcchati

동의어

에샤: 이것, 브라흐미: 영적인, 스티띠: 상황,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나: 결코 않다, 에남: 이것, 쁘라뺘: 달성하는, 비무햐띠: 당황하는 자, 스팃바: 상황에 부닥치게 되는, 아샴: 이것에, 안따-깔레: 삶의 마지막 순간에, 아삐: 또한, 브라흐마-니르바남: 절대신의 영적인 왕국, 릿차띠: 얻는다.

번역

그것이 영적이고 신성한 삶의 길이며, 그 경지에 이른 다음에는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이로써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절대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주석

우리는 끄리쉬나 의식, 즉 신성한 삶을 일 초 만에 즉각 얻을 수도 있고, 수백만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렸을 뿐이다. 카뜨방가 왕(Khaṭvāṅga Mahārāja)은 죽기 몇 분 전에 끄리쉬나께 항복함으로써 이러한 삶의 경지를 얻었다. 니르바나(Nirvāṇa)란 물질적 삶의 과정을 끝냄을 의미한다. 불교 철학에 따르면 물질적 삶을 끝내고 난 다음에는 오직 공(空)하다고 하지만, 바가바드 기따의 가르침은 다르다. 이 물질적 삶이 끝난 후 실제적 삶이 시작된다. 아주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에게는 이 물질적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이 물질적 삶 이후 또 다른 삶이 있다. 이 삶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다행히 끄리쉬나 의식이 되면 즉시 브라흐마 니르바나 경지에 이른다. 절대신의 왕국과 절대신을 향한 봉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둘 다 절대적 경지여서 주를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전념하는 것이 바로 영적 왕국을 얻는 것이다. 물질계에는 감각 만족의 활동이 있지만, 영적 세계에는 끄리쉬나 의식의 활동이 있다. 바로 이생에 끄리쉬나 의식을 달성하는 것이 곧 브라흐만을 달성하는 것이며, 끄리쉬나 의식에 오른 자는 이미 절대신의 왕국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다.

브라흐만은 물질과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브라흐미 스티띠는 “물질적 활동이 아님”을 의미한다. 주를 향한 봉헌은 바가바드 기따에서 해방된 상태라고 인정된다(사 구난 사마띠땨이딴 브라흐마-부야야 깔빠떼 sa guṇān samatītyaitān brahma-bhūyāya kalpate). 그러므로 브라흐마 스티띠는 물질적 속박에서의 해방이다.

스릴라 박띠비노다 타꾸라께서는 이 바가바드 기따의 제2장을 전체 내용에 대한 요약이라고 말씀하셨다. 바가바드 기따의 핵심 주제는 까르마 요가와 갸나 요가, 그리고 박띠 요가이다. 제2장에서 까르마 요가, 갸나 요가가 명백하게 거론되었고, 약간의 박띠 요가 또한 요약 설명되었다.

이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드 기따의 제2장, 기따 내용의 요약에 대한 박띠베단따의 주석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