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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결론: 버림의 완성

원문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산냐사샤 마하-바호 sannyāsasya mahā-bāho
땃뜨밤 잇차미 베디뚬 tattvam icchāmi veditum
띠아가샤 짜 흐리쉬께샤 tyāgasya ca hṛṣīkeśa
쁘리탁 께쉬-니슈다나 pṛthak keśi-niṣūdana

동의어

아르주나 우바짜: 아르주나가 말했다, 산냐사샤: 버림의, 마하-바호: 오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여, 땃뜨밤: 진실, 잇차미: 나는 바란다, 베디뚬: 이해하다, 띠아가샤: 버림의, 짜: 또한, 흐리쉬께샤: 오 감각의 주인이시여, 쁘리탁: 다르게, 께시-니슈다나: 오 께시 악마를 죽이신 분이여.

번역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오 강력한 힘을 가진 분이시여, 저는 버림(띠아가)과 버리는 삶 (산냐사)의 목적을 알고 싶습니다, 오 께시 악마를 죽이신 분이여, 오 감각의 주인이시여.

주석

사실 바가바드 기따는 제17장에서 끝난다. 제18장은 앞서 논의된 주제들에 관한 보충적 요약이다. 바가바드 기따의 모든 장에서 주 끄리쉬나께서 최고인격신을 향한 봉헌이 삶의 궁극적 목표라고 강조하신다. 같은 요지가 제18장에서 지식의 가장 은밀한 길로서 요약된다. 전반부 여섯 장에서 봉헌을 강조했다. “요기남 아삐 사르베샴… 모든 요기나 초월주의자 중에서 자기 안에서 항상 나를 생각하는 자가 최고이다.” 다음 여섯 장에서 순수한 봉헌과 그 본성 및 행위가 논의되었다. 후반부 여섯 장에서 지식, 버림, 물질적 본성의 행위들, 초월적 본성, 그리고 봉헌이 설명되었다. 결론은 모든 행위가 옴 땃 삿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지고한 주, 즉 최고인격인 비쉬누와 관련되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의 세 번째 부분은 오직 봉헌만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여러 아짜리아와 브라흐마 수뜨라, 베단따 수뜨라의 인용을 통해 확고해졌다. 일부 비인성주의자들은 베단따 수뜨라에 관한 지식을 자기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베단따 수뜨라는 봉헌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주께서 직접 베단따 수뜨라를 지으셨고, 바로 당신이 그것을 진정으로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15장에 설명되었다. 모든 경전, 모든 베다에서 봉헌이 목적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고,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에도 설명되었다.

제2장에서 바가바드 기따의 주제 전체가 개괄되었듯이, 제18장에서 또한 모든 가르침에 대한 요약이 제공되었다. 삶의 목적은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를 넘어선 버림과 그 초월적 경지에 오르는 것임이 드러났다. 아르주나는 바가바드 기따의 이 두 가지 명백한 주제, 즉 버림(띠아가)과 버리는 삶(산냐사)을 명백히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두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이 절에서 지고한 주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두 단어, 흐리쉬께샤와 께시 니슈다나가 매우 중요하다. 흐리쉬께샤는 우리가 정신적 평온을 얻을 수 있게 우리를 항상 도와주시는, 모든 감각의 주인 끄리쉬나이시다. 아르주나는 자기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께서 모든 것을 요약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약간의 의심이 드는데, 이러한 의심은 항상 악마로 비유된다. 따라서 끄리쉬나를 께시 니슈다나라고 부르고 있다. 께시는 주께서 죽이신 가장 강력한 악마 중 하나인데 이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께서 악마 같은 의심을 죽여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원문

스리-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깜야남 까르마남 니아삼 kāmyānāṁ karmaṇāṁ nyāsaṁ
산냐삼 까바요 비두후 sannyāsaṁ kavayo viduḥ
사르바-까르마-팔라-띠아감 sarva-karma-phala-tyāgaṁ
쁘라후스 띠아감 비짝샤나하 prāhus tyāgaṁ vicakṣaṇāḥ

동의어

스리-바가반 우바짜: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했습니다, 깜야남: 욕망으로, 까르마남: 활동의, 니아삼: 버림, 산냐삼: 버리는 삶, 까바야하: 학식있는 사람의, 비두후: 알다, 사르바: 모든 것의, 까르마: 행위들, 팔라: 결과의, 띠아감: 버림, 쁘라후후: 부르다, 띠아감: 버림, 비짝샤나하: 경험있는 사람.

번역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적 욕망에 기초한 행위를 그만두는 것을 학식있는 자들은 버리는 삶(산냐사)이라고 한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를 버리는 것을 현인들은 버림(띠아가)이라고 하느니라.

주석

결과를 바라고 하는 행위는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고차원의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포기해서 안 된다. 이것은 다음 구절에서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베다 문헌에는 특정 목적을 위해 실행하는 희생에 관한 여러 규정 방식이 있다. 좋은 아들을 얻기 위해서나 더 높은 행성들에 오르기 위해 실행하는 특정한 희생 방식이 있지만, 이렇게 욕망에 끌려 하는 희생은 멈춰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나 영적 과학의 발전을 위한 희생은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원문

땨쟘 도샤-받디뗴께 tyājyaṁ doṣa-vad ity eke
까르마 쁘라후르 마니쉬나하 karma prāhur manīṣiṇaḥ
야갸-다나-따빠-까르마 yajña-dāna-tapaḥ-karma
나 띠아쟘 이띠 짜빠레 na tyājyam iti cāpare

동의어

땨쟘: 반드시 그만두어야 한다, 도샤-밧: 악마로서, 이띠: 따라서, 에께: 한 종류, 까르마: 일, 쁘라후후: 그들은 말하다, 마니쉬나하: 위대한 사상가들, 야갸: 희생, 다나: 자선, 따빠하: 그리고 고행, 까르마: 일, 나: 결코, 띠아쟘: 버려야만 하는, 이띠: 그래서, 짜: 그리고, 아빠레: 다른 사람들.

번역

일부 학식 있는 자는 모든 종류의 결실적 행위는 헛된 것이어서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다른 현인들은 희생, 자선, 고행의 행위는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느니라.

주석

논쟁의 주제가 되는 여러 행위가 베다 문헌에 나온다. 예를 들어, 동물을 희생제의에 희생시킬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일부는 동물을 죽이는 것은 아주 추악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비록 베다 문헌에서 희생제의를 위해 동물을 죽일 수 있다고 하지만 동물이 죽임을 당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 동물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다. 때때로 제사에 희생된 동물이 새로운 동물의 생명을 얻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바로 인간의 몸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현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다. 일부는 동물 희생은 항상 피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일부는 특정한 제사를 위해서는 허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희생에 관해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은 이제 주께서 직접 명료히 밝히실 것이다.

원문

니스짜얌 스리누 메 따뜨라 niścayaṁ śṛṇu me tatra
띠아게 바라따-삿따마 tyāge bharata-sattama
띠아고 히 뿌루샤-비아그라 tyāgo hi puruṣa-vyāghra
뜨리-비다 삼쁘라끼르띠따하 tri-vidhaḥ samprakīrtitaḥ

동의어

니스짜얌: 확실성, 스리누: 듣다, 메: 나로부터, 따뜨라: 거기에, 띠아게: 버림의 문제에서, 바라따-삿-따마: 오 바라따 중의 최고여, 띠아가하: 버림, 히: 확실히, 뿌루샤-비아그라: 오 인간 중의 호랑이여, 뜨리-비다하: 세 가지 종류의, 삼쁘라끼르띠따하: 선언되다.

번역

오 바라따 중의 최고여, 이제 버림에 관한 내 판단을 들어라. 오 인간 중의 호랑이여, 여러 경전에서 버림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선언한다.

주석

버림에 관해 여러 다른 의견이 있지만, 여기에서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께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신다. 결국 베다란 주께서 내려 주신 여러 가지 법이다. 여기에 주께서 친히 자리하고 계시므로 당신의 말씀을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께서 버림의 과정은 물질적 본성이 작용하는 양태의 관점에서 숙고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원문

야갸-다나-따빠-까르마 yajña-dāna-tapaḥ-karma
나 띠아쟘 까르얌 에바 땃 na tyājyaṁ kāryam eva tat
야교 다남 따빠스 짜이바 yajño dānaṁ tapaś caiva
빠바나니 마니쉬남 pāvanāni manīṣiṇām

동의어

야갸: 희생의, 다나: 자선, 따빠하: 그리고 고행, 까르마: 행위, 나: 결코, 띠아쟘: 버려야 하는, 까르얌: 반드시 행해야 하는, 에바: 분명히, 땃: 그것, 야갸하: 희생, 다남: 자선, 따빠하: 고행, 짜: 또는, 에바: 분명히, 빠바나니: 정화하는, 마니쉬남: 위대한 영혼들조차.

번역

희생, 자선, 고행의 행위는 버려서는 안 되느니라, 이것들을 반드시 실천하여라. 실제로, 희생, 자선, 고행은 위대한 영혼들조차 정화하느니라.

주석

요기들은 인간사회의 발전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인간이 영적 삶에 나아가게 하는 많은 정화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결혼식도 이러한 희생의 하나로 여겨지며 이는 비바하-야갸(vivāha-yajña)라고 한다. 가족 관계를 끊고 버리는 삶에 들어간 산냐시가 결혼식을 권장해야 하는가? 주께서 여기에서 인간의 복지를 위한 어떠한 희생도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비바하-야갸, 즉 결혼식은 인간의 마음을 통제해 영적 생활을 평화롭게 할 수 있게 하려고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비바하-야갸는 권장되어야 하며, 심지어 버리는 삶의 사람들도 이를 권장해야 한다. 산냐시는 여자들과 절대 어울려서는 안 되지만, 이것이 삶의 초기 단계에 있는 젊은 남자가 결혼해서 부인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규정된 모든 희생은 지고한 주를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러한 희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자선은 마음의 정화를 위한 것이다. 올바른 사람에게 자선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적 삶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원문

에따니 아삐 뚜 까르마니 etāny api tu karmāṇi
상감 땩뜨바 팔라니 짜 saṅgaṁ tyaktvā phalāni ca
까르따비아니띠 메 빠르타 kartavyānīti me pārtha
니스찌땀 마땀 웃따맘 niścitaṁ matam uttamam

동의어

에따니: 이 모든, 아삐: 분명히, 뚜: 그러나, 까르마니: 행위들, 상감: 어울림, 땩뜨바: 버리는, 팔라니: 결과들, 짜: 또한, 까르따비아니: 의무로서 해야 하는, 이띠: 따라서, 메: 나의,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니스찌땀: 확실한, 마땀: 의견, 웃따맘: 최고.

번역

이 모든 행위는 어떠한 집착이나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행해야 하느니라. 오 쁘리타의 아들아, 의무로서 이것들은 행하거라. 이것이 나의 최종 의견이니라.

주석

비록 모든 희생이 마음을 정화하지만 그러한 희생을 통해 어떠한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삶의 물질적 발전을 꾀하는 모든 희생은 그만두어야 하지만 우리의 존재를 정화하고 영적인 단계로 고양시키는 희생은 멈추어서는 안 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이끌어 주는 모든 것은 장려되어야 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서도 주를 향한 봉헌으로 이끌어 주는 어떠한 행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의 가장 높은 기준이다. 주의 헌애자는 주를 향한 봉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일이든, 희생이든, 자선이든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원문

니야따샤 뚜 산냐사하 niyatasya tu sannyāsaḥ
까르마노 노빠빠댜떼 karmaṇo nopapadyate
모핫 따샤 빠리띠아가스 mohāt tasya parityāgas
따마사 빠리끼르띠따하 tāmasaḥ parikīrtitaḥ

동의어

니야따샤: 규정된, 뚜: 그러나, 산냐사하: 버림, 까르마나하: 행위의, 나: 결코, 우빠빠댜떼: 마땅한, 모핫: 환영에 의해, 따샤: 그들의, 빠리띠아가하: 버림, 따마사하: 암성에 있는, 빠리끼르띠따하: 선언되다.

번역

규정된 의무를 절대 저버려서는 안 된다. 환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규정된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버림은 암성에 있다고 하느니라.

주석

물질적 만족을 위한 일은 반드시 그만두어야 하지만, 지고한 주를 위해 요리하고, 그 요리를 바치고, 그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영적 활동을 촉진하는 행위는 장려된다. 버리는 삶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을 위해 요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요리는 금지되지만, 지고한 주를 위한 요리는 장려된다. 마찬가지로, 산냐시라도 자기 제자가 끄리쉬나 의식에서 발전하는 것을 도우려고 결혼식을 주례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행위들을 버린다면 그는 암성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원문

두캄 이뗴바 얏 까르마 duḥkham ity eva yat karma
까야-끌레샤-바얏 땨젯 kāya-kleśa-bhayāt tyajet
사 끄릿바 라자삼 띠아감 sa kṛtvā rājasaṁ tyāgaṁ
나이바 띠아가-팔람 라벳 naiva tyāga-phalaṁ labhet

동의어

두캄: 불행한, 이띠: 따라서, 에바: 분명히, 얏: 그것, 까르마: 행위, 까야: 신체를 위해, 끌레샤: 고통, 바얏: 두려움에서, 땨젯: 그만두다, 사하: 그는, 끄릿바: 한 다음에, 라자삼: 동성의 양태에서, 띠아감: 버림, 나: 아닌, 에바: 분명히, 띠아가: 버림의, 팔람: 결과들, 라벳: 얻다.

번역

귀찮다고 해서, 또는 육체적 불편함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규정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을 동성의 양태에 있는 버림이라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결코 진정한 버림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주석

끄리쉬나 의식을 한 사람은 결과적 행위를 두려워해서 돈 버는 행위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일해서 번 돈을 끄리쉬나 의식에 쓰는 것이든 아침 일찍 일어나 초월적 끄리쉬나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든 이러한 행위를 두려움이나 성가시다는 생각 때문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만둔다면 그것은 동성의 양태가 되는 것이다. 동성에서 한 일의 결과는 항상 고통스러운 것이다. 만약 어떤 자가 그러한 정신으로 일을 그만둔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버림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원문

까르얌 이뗴바 얏 까르마 kāryam ity eva yat karma
니야땀 끄리야떼’르주나 niyataṁ kriyate ’rjuna
상감 땩뜨바 팔람 짜이바 saṅgaṁ tyaktvā phalaṁ caiva
사 띠아가 삿뜨비꼬 마따하 sa tyāgaḥ sāttviko mataḥ

동의어

까르얌: 해야만 한다, 이띠: 따라서, 에바: 정말로, 얏: 그것, 까르마: 일, 니야땀: 규정된, 끄리야떼: 수행되는,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상감: 교제, 땩뜨바: 포기하는, 팔람: 결과, 짜: 또한, 에바: 분명히, 사하: 그것, 띠아가하: 버림, 삿뜨비까하: 선성의 양태에서, 마따하: 나의 의견으로는.

번역

오 아르주나, 자신의 규정된 의무를 오직 해야 된다는 의무감에서, 그리고 그 결과에 수반되는 모든 물질적 교류와 모든 집착을 버릴 때, 이러한 버림을 선성에 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주석

규정된 의무를 이러한 정신으로 수행해야 한다.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행동해야 하며, 일의 상태에서 받는 영향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공장의 일에 얽매여서도 안되고, 공장 노동자들과 사귀어서도 안 된다. 그는 그저 끄리쉬나를 위해 일할 뿐이다. 그리고 끄리쉬나를 위해 그 결과를 버릴 때, 초월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원문

나 드베쉬땨꾸샬람 까르마 na dveṣṭy akuśalaṁ karma
꾸샬레 나누샷자떼 kuśale nānuṣajjate
띠아기 삿뜨바-사마비쉬또 tyāgī sattva-samāviṣṭo
메다비 친나-삼샤야하 medhāvī chinna-saṁśayaḥ

동의어

나: 결코, 드베쉬띠: 증오하다, 아꾸샬람: 상서롭지 않은, 까르마: 일, 꾸샬레: 상서로움으로, 나: 아닌, 아누샷자떼: 집착하다, 띠아기: 버리는 자, 삿뜨바: 선성에, 사마비쉬따하: 몰두한, 베다비: 지성 있는, 친나: 끊어버린, 삼샤야하: 모든 의심.

번역

선성에 있는 총명한 버리는 자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싫어하지 않고, 상서로운 일이라고 집착하지 않으며, 일에 대한 의심이 없느니라.

주석

끄리쉬나 의식이나 선성에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나 일을 증오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의무에 수반된 성가신 영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른 때와 장소에서 일한다. 초월함에 위치한 사람은 가장 총명하며 자기 행위에 대한 모든 의심을 넘어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

나 히 데하-브리따 샤꺔 na hi deha-bhṛtā śakyaṁ
땩뚬 까르마냐셰샤따하 tyaktuṁ karmāṇy aśeṣataḥ
야스 뚜 까르마-팔라-띠아기 yas tu karma-phala-tyāgī
사 띠아기땨비디야떼 sa tyāgīty abhidhīyate

동의어

나: 결코, 히: 확실히, 데하-브리따: 육신에 갇힌, 샤꺔: 가능한, 땩뚬: 버려야 하는, 까르마니: 행위들, 아세샤따하: 완전히, 야하: 누구나, 뚜: 그러나, 까르마: 행위의, 팔라: 결과의, 띠아기: 버리는 자, 사하: 그는, 띠아기: 버리는 자, 이띠: 그래서, 아비디야떼: 라고 한다.

번역

육신에 갇힌 존재가 모든 행위를 버린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행위의 결실을 버린다면 그러한 자를 진정으로 버리는 자라고 하느니라.

주석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한 순간도 일을 멈출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끄리쉬나를 위해 일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끄리쉬나께 바치는 자가 진정으로 버리는 자이다. 사무실, 공장 또는 다른 곳에서 아주 열심히 일하면서 끄리쉬나 의식을 위한 국제 협회의 회원인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번 것이 얼마든 협회에 헌납한다. 이렇게 뛰어난 영혼들은 사실상 산냐시이며 버리는 삶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의 결과에 어떻게 초연하며, 무엇 때문에 결실을 버려야 하는지 여기에서 분명히 설명되었다.

원문

아니쉬땀 이쉬땀 미스람 짜 aniṣṭam iṣṭaṁ miśraṁ ca
뜨리-비담 까르마나 팔람 tri-vidhaṁ karmaṇaḥ phalam
바바땨띠아기남 쁘레땨 bhavaty atyāgināṁ pretya
나 뚜 산냐시남 끄바찟 na tu sannyāsināṁ kvacit

동의어

아니쉬땀: 지옥으로 가는, 이쉬땀: 천국으로 가는, 미스람: 섞인, 짜: 그리고, 뜨리-비담: 세 가지 종류의, 까르마나하: 행위의, 팔람: 결과, 바바띠: 되다, 아띠아기남: 버리지 않은 자들에게, 쁘레땨: 죽고 난 다음에, 나: 아니다, 뚜: 그러나, 샨냐시남: 버리는 삶의 질서, 끄바찟: 어떤 때라도.

번역

버리지 않은 자에게 행위의 세 가지 결과, 즉 바람직하고, 바람직하지 않고, 그 둘이 섞인 결과가 죽고 난 다음에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버리는 삶의 질서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즐겁거나 고통받아야 하는 결과가 없다.

주석

끄리쉬나와 자기 관계에 관한 지식을 갖고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항상 해방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죽은 후 자기가 행한 일의 결과 때문에 즐거워할 것도 고통받을 것도 없다.

원문

빤짜이따니 마하-바호 pañcaitāni mahā-bāho
까라나니 니보다 메 kāraṇāni nibodha me
상켸 끄리딴떼 쁘록따니 sāṅkhye kṛtānte proktāni
싣다예 사르바-까르마남 siddhaye sarva-karmaṇām

동의어

빤짜: 다섯, 에따니: 이러한, 마하-바호: 오 강력한 자여, 까라나니: 원인들, 니보다: 그저 이해하라, 메: 나로부터, 상켸: 베단따에, 끄리따-안떼: 결론에, 쁘록따니: 말했다, 싯다예: 완성을 위해, 사르바: 모두의, 까르마남: 행위들.

번역

오 강력한 힘을 지닌 아르주나여, 베단따에 따르면 모든 행위를 완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이제 나에게서 이것을 들어라.

주석

어떠한 행위를 하든 그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므로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어떻게 일의 반작용으로 고통받거나 즐거워하지 않는지에 관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고자 주께서 베단따 철학을 인용하시고 계시다. 모든 행위에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있으며, 모든 행동이 성공하려면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잘 고려해야 한다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상꺄는 지식의 줄기를 의미하고, 베단따는 뛰어난 아짜리아들 모두가 인정하는 지식의 마지막 줄기이다. 샹까라조차 베단따를 이렇게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권위를 고려해야 한다.

궁극적 통제는 초영혼이 한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하기를, “사르바샤 짜함 흐리디 산니비쉬따하(sarvasya cāhaṁ hṛdi sanniviṣṭaḥ).” 초영혼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한 과거 행위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하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초영혼의 지시로 행한 끄리쉬나 의식의 행위는 현생에서든 내생에서든 어떠한 반작용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

원문

아디쉬타남 따타 까르따 adhiṣṭhānaṁ tathā kartā
까라남 짜 쁘리탁-비담 karaṇaṁ ca pṛthag-vidham
비비다스 짜 쁘리탁 쩨쉬따 vividhāś ca pṛthak ceṣṭā
다이밤 짜이바뜨라 빤짜맘 daivaṁ caivātra pañcamam

동의어

아디쉬타남: 장소, 따타: 또한, 까르따: 행위자, 까라남: 도구, 짜: 그리고, 쁘리탁-비담: 여러 종류의, 비비다하: 다양한, 짜: 그리고, 쁘리탁: 분리된, 쩨쉬따하: 노력, 다이밤: 절대자, 짜: 또한, 에바: 분명히, 아뜨라: 여기에, 빤짜맘: 다섯 번째.

번역

행위의 장소(몸), 행위자, 다양한 감각, 여러 종류의 노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초영혼, 이것이 행위의 다섯 요소이니라.

주석

“아디쉬타남”이라는 말은 몸을 가리킨다. 몸 안에 있는 영혼은 행위의 결과를 낳도록 작용하기 때문에 까르따, 즉 “행위자”라고 한다. 영혼이 아는 자이며 행위하는 자라고 스루띠(śruti)는 말한다. “에샤 히 드라쉬따 스라쉬따(Eṣa hi draṣṭā sraṣṭā 《쁘라스나 우빠니샤드 4.9》). 베단따 수뜨라에서도 “교’따 에바(jño ’ta eva, 2.3.18)”와 “까르따 샤스뜨라르타밧뜨밧(kartā śāstrārthavattvāt, 2.3.33)”이라는 구절로 이것을 확증한다. 행위의 도구는 감각이며, 이 감각을 이용해 영혼은 여러 방식으로 행동한다. 각각의 행동에는 서로 다른 노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위는 친구로서 가슴속에 자리하시는 초영혼의 의지에 달렸다. 지고한 주가 바로 최고의 원인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슴속에 계시는 초영혼의 지도를 받아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자는 어떠한 행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자기한 어떠한 행위에도 책임이 없다. 모든 것은 초영혼, 최고인격신의 최고 의지에 달렸기 때문이다.

원문

샤리라-반-마노비럇 śarīra-vāṅ-manobhir yat
까르마 쁘라라바떼 나라하 karma prārabhate naraḥ
냐이얌 바 비빠리땀 바 nyāyyaṁ vā viparītaṁ vā
빤짜이떼 따샤 헤따바하 pañcaite tasya hetavaḥ

동의어

샤리라: 육체로, 박: 말, 마노비히: 그리고 마음, 얏: 그것, 까르마: 일, 쁘라라바떼: 시작하다, 나라하: 사람, 냐이얌: 올바른, 바: 또는, 비빠리땀: 정반대, 바: 또는, 빤짜: 다섯, 에떼: 이 모든, 따샤: 그것의, 헤따바하: 원인들.

번역

옳든 그르든 인간이 몸과 마음 혹은 말로 행하는 모든 것은 이 다섯 가지 요소에 의해 초래된다.

주석

“옳다”, “그르다”라는 말이 이 절에서 아주 중요하다. 옳은 일은 경전들에 규정된 지시에 따라 행하는 일이며, 그른 일은 경전적 지시 사항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떠한 일을 하든 그 일을 완성하려면 이 다섯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원문

따뜨라이밤 사띠 까르따람 tatraivaṁ sati kartāram
아뜨마남 께발람 뚜 야하 ātmānaṁ kevalaṁ tu yaḥ
빠샤땨끄리따-붇디뜨반 paśyaty akṛta-buddhitvān
나 사 빠샤띠 두르마띠히 na sa paśyati durmatiḥ

동의어

따뜨라: 거기에, 에밤: 따라서, 사띠: 존재, 까르따람: 행위자, 아뜨마남: 자신, 께발람: 오직, 뚜: 그러나, 야하: 누구나, 빠샤띠: 보다, 악리따-붇디뜨밧: 어리석음 때문에, 나: 결코, 사하: 그는, 빠샤띠: 보다, 두르마띠히: 어리석은.

번역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유일한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어리석음이 틀림없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느니라.

주석

어리석은 자는 초영혼이 우리 안에 친구로서 함께하고 있으며, 우리의 행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물질적 원인은 장소, 행위자, 노력, 그리고 감각이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절대자, 최고인격신이다. 따라서 우리는 네 가지 물질적 요소는 물론이고 최상의 동인(動因)도 보아야 한다. 이 절대자를 보지 못하는 자는 자기를 행위자로 생각한다.

원문

야샤 나항끄리또 바보 yasya nāhaṅkṛto bhāvo
붇디르 야샤 나 리뺘떼 buddhir yasya na lipyate
하뜨바삐 사 이말 로깐 hatvāpi sa imāḻ lokān
나 한띠 나 니바댜떼 na hanti na nibadhyate

동의어

야샤: 하는 자의, 나: 결코, 아항끄리따하: 거짓 자아의, 바바하: 본성, 붇디히: 지성, 야샤: 하는 자의, 나: 결코, 리뺘떼: 집착하는, 하뜨바: 죽이는, 아삐: 심지어, 사하: 그는, 이만: 이것, 로깐: 세계, 나: 결코, 한띠: 죽이다, 나: 결코, 니바댜떼: 얽히게 되다.

번역

거짓 자아에 휘둘리지 않고, 지성이 얽히지 않은 자는 이 세상 사람을 죽이더라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 행위에 구속되지 않느니라.

주석

주께서는 이 절에서 아르주나에게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거짓 자아에서 일어난 생각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르주나는 자기가 행위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안팎으로 계시는 지고의 허가는 고려하지 않았다. 지고의 허락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왜 행동해야 하는가? 그러나 일의 도구를 알고, 자기는 행위자, 그리고 지고한 주는 최상의 인가자란 것을 아는 자가 하는 모든 일은 완벽하다. 그런 사람은 환영에 빠지는 법이 없다. 개인적 행위와 책임은 거짓 자아와 신성성의 부족, 즉 끄리쉬나 의식의 부족에서 생긴다. 초영혼이나 최고인격신의 지시를 받으며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자는 비록 죽이는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살인으로 인한 어떠한 반작용도 받지 않는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군인이 자기 개인적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면 분명히 법에 따른 재판을 받게 된다.

원문

갸남 계얌 빠리갸따 jñānaṁ jñeyaṁ parijñātā
뜨리-비다 까르마-쪼다나 tri-vidhā karma-codanā
까라남 까르마 까르떼띠 karaṇaṁ karma karteti
뜨리-비다 까르마-상그라하하 tri-vidhaḥ karma-saṅgrahaḥ

동의어

갸남: 지식, 계얌: 지식의 목적, 빠리갸따: 아는 자, 뜨리-비다: 세 가지 종류의, 까르마: 행위의, 쪼다나: 충동, 까라남: 감각들, 까르마: 행위, 까르따: 행위자, 이띠: 따라서, 뜨리-비다하: 세 가지 종류의, 까르마: 일의, 상그라하하: 축적.

번역

지식, 지식의 대상, 지식을 아는 자가 행위를 유발하는 세 가지 요인이고, 감각, 행위, 행위자는 행위의 세 가지 구성 요소이니라.

주석

일상적인 일에는 세 가지 동인이 있다. 그것은 지식, 지식의 목적, 그리고 지식을 아는 자이다. 행위의 도구와 행위 그 자체, 행위자는 일의 구성 요소라 한다. 인간이 하는 어떠한 일도 이 요소를 지닌다. 인간이 행동하기 전 영감이라 불리는 일종의 동인이 있다. 일이 실현되기에 앞서 떠오르는 어떠한 해결책도 일의 미세한 형태다. 그 다음 일이 행위의 형태를 띠게 된다. 우선 인간은  느끼고, 생각하고, 뜻하는 심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이 동인이다. 끄리쉬나 의식에 관한 한, 경전을 통해 얻는 영감이나 영적 스승의 지도로 받는 영감은 같다. 영감이 있고, 행위자가 있을 때, 모든 감각의 중심인 마음을 포함한 여러 감각의 도움으로 실제 행위가 일어난다. 행위의 모든 구성 요소를 통틀어 일의 축적물이라 한다.

원문

갸남 까르마 짜 까르따 짜 jñānaṁ karma ca kartā ca
뜨리다이바 구나-베다따하 tridhaiva guṇa-bhedataḥ
쁘로쨔떼 구나-상캬네 procyate guṇa-saṅkhyāne
야타밧 츠리누 따냐삐 yathāvac chṛṇu tāny api

동의어

갸남: 지식, 까르마: 행위, 짜: 또한, 까르따: 행위자, 짜: 또한, 뜨리다: 세 가지 종류의, 에바: 분명히, 구나-베다따하: 물질적 본성의 서로 다른 양태의 견지에서, 쁘로쨔떼: 라고 말한다, 구나-상캬네: 서로 다른 양태의 견지에서, 야타-밧: 있는 그대로, 스리누: 듣다, 따니: 그들 모두, 아삐: 또한.

번역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에 따라 세 가지 종류의 지식, 행위, 그리고 행위자가 있느니라. 이제 나로부터 이것에 관해 들어라.

주석

제14장에서 물질적 본성이 세 가지 양태로 구분된다는 것에 관해 자세히 설명되었다. 그 장에서 선성은 빛나는 것이며, 동성은 물질적이고, 암성은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물질적 본성은 구속한다. 그것은 해방의 원천이 아니다. 선성에서조차 속박된다. 제17장에서 서로 다른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있는 여러 다른 인간이 행하는 숭배의 종류가 설명되었다. 이 절에서 주께서는 세 가지 물질적 본성에 따른 여러 형태의 지식, 행위자, 그리고 행위 그 자체에 관해서 말씀하시고자 한다.

원문

사르바-부떼슈 예나이깜 sarva-bhūteṣu yenaikaṁ
바밤 아뱌얌 익샤떼 bhāvam avyayam īkṣate
아비박땀 비박떼슈 avibhaktaṁ vibhakteṣu
땃 갸남 빋디 삿뜨비깜 taj jñānaṁ viddhi sāttvikam

동의어

사르바-부떼슈: 모든 생명체에, 예나: 그것에 의한, 에깜: 하나, 바밤: 상황, 아뱌얌: 소멸하지 않는, 익샤떼: 보다, 아비박땀: 나뉘지 않는, 비박떼슈: 무수하게 나뉘어진, 땃: 그것, 갸남: 지식, 빋디: 알다, 삿뜨비깜: 선성에.

번역

수없이 많은 형상으로 나누어진 모든 생명체 안에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의 영적 본성을 보게 하는 지식, 바로 그것이 선성의 지식임을 이해하여라.

주석

데바든, 인간이든, 동물, 새, 짐승, 물고기, 식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서 하나의 영혼을 보는 자는 선성의 지식을 가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전생의 행위에 따라 서로 다른 몸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하나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제7장에서 설명했듯, 모든 육체에 나타나는 생명력은 지고한 주의 상위 본성 때문이다. 따라서 그 하나의 상위 본성, 즉 모든 육신에 있는 생명력을 본다는 것은 선성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그 생명력은 육신이 사라지더라도 소멸하지 않는다. 육신의 다름에서 오는 차이만을 느낄 뿐이다. 속박된 삶에는 많은 형태의 물질적 존재가 있기에 생명력이 나뉜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비인성적 지식은 자아 인식의 또 다른 측면이다.

원문

쁘리탁뜨베나 뚜 얏 갸남 pṛthaktvena tu yaj jñānaṁ
나나-바반 쁘리탁-비단 nānā-bhāvān pṛthag-vidhān
벳띠 사르베슈 부떼슈 vetti sarveṣu bhūteṣu
땃 갸남 빋디 라자삼 taj jñānaṁ viddhi rājasam

동의어

쁘리탁뜨베나: 나누어짐 때문에, 뚜: 그러나, 얏: 어느 것, 갸남: 지식, 나나-바반: 다양한 상황들, 쁘리탁-비단: 다른, 벳띠: 알다, 사르베슈: 모든 것에, 부떼슈: 생명체, 땃: 그것, 갸남: 지식, 빋디: 알아야만 한다, 라자삼: 동성의 견지에서.

번역

서로 다른 육체에 각기 다른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보는 지식은 동성에 있는 것이니라.

주석

물질적 몸이 생명체이고, 육신의 소멸로 의식도 같이 사라진다는 개념은 동성의 양태에 있는 지식이라고 한다. 그러한 지식에 따르면, 각 생명체는 서로 다른 형태의 의식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각기 다른 육신을 하고 있지만, 의식을 발현하는 독립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몸 그 자체가 영혼이며, 몸을 초월한 독립된 영혼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식에 따르면 의식은 일시적이다. 혹은 어떠한 개별 영혼도 존재하지 않지만  지식으로 가득 찬 절대 영혼이 편재하며, 이 몸은 무지의 일시적 현현이라고도 한다. 또는 이 몸을 초월한 특별한 개별 영혼이나 지고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개념은 동성의 산물로 여겨진다.

원문

얏 뚜 끄릿스나-받 에까스민 yat tu kṛtsna-vad ekasmin
까르예 삭땀 아하이뚜깜 kārye saktam ahaitukam
아땃뜨바르타-바달빰 짜 atattvārtha-vad alpaṁ ca
땃 따마삼 우다흐리땀 tat tāmasam udāhṛtam

동의어

얏: 그것, 뚜: 그러나, 끄릿스나-밧: 전체로, 에까스민: 하나에, 까르예: 일, 삭땀: 집착하는, 아하이뚜깜: 원인 없이, 아땃뜨바-아르타-밧: 현실에 대한 지식 없이, 알빰: 아주 보잘것 없는, 짜: 그리고, 땃: 그것, 따마삼: 암성에 있는, 우다리땀: 라고 한다.

번역

한 가지 일에 집착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하는 지식, 그리고 진리를 외면하는 아주 가치 없는 지식을 암성에 있다고 하느니라.

주석

속박된 삶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암성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지식”이란 항상 암흑 혹은 무지 속에 있다. 권위자들이나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지식을 발전시키지 않는 자는 육신에 한정된 지식을 갖는다. 그런 자는 경전의 지시대로 행동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에게 돈이 신이며, 지식이란 육체적 요구의 충족이다. 그러한 지식은 절대 진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보통 동물들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마찬가지이다: 먹고, 자고, 싸우고, 짝짓기 하는 지식. 그러한 지식은 여기에서 암성의 산물로 묘사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육신을 초월한 영혼에 관한 지식을 선성의 지식이라 하고, 세속적 논리와 관념적 사색에 의한 여러 이론과 주의를 낳는 지식은 동성의 산물이며, 육체적 안위에만 관심 있는 지식은 암성에 있다고 한다.

원문

니야땀 상가-라히땀 niyataṁ saṅga-rahitam
아라가-드베샤따 끄리땀 arāga-dveṣataḥ kṛtam
아팔라-쁘렙수나 까르마 aphala-prepsunā karma
얏 땃 삿뜨비깜 우쨔떼 yat tat sāttvikam ucyate

동의어

니야땀: 규정된, 상가-라히땀: 집착 없이, 아라가-드베샤따하: 사랑이나 증오 없이, 끄리땀: 행한, 아팔라-쁘렙수나: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자에 의한, 까르마: 행위, 얏: 그것, 땃: 저것, 삿뜨비깜: 선성에서,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규제되었고, 집착과 사랑, 미움 없이, 그리고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한 행위는 선성에 있다고 하느니라.

주석

사회의 여러 질서와 계층에 관해 경전들이 규정한 대로 직업적 의무를 집착이나 소유 의식 없이 수행하며, 그래서 어떠한 사랑이나 미움도 없이, 자기를 위한 만족이 아닌 절대자의 만족을 위해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하는 것을 선성에 있는 행위라고 한다.

원문

얏 뚜 까멥수나 까르마 yat tu kāmepsunā karma
사항까레나 바 뿌나하 sāhaṅkāreṇa vā punaḥ
끄리야떼 바훌라야삼 kriyate bahulāyāsaṁ
딷 라자삼 우다흐리땀 tad rājasam udāhṛtam

동의어

얏: 그것, 뚜: 그러나, 까마-입수나: 결과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 자의, 까르마: 행위, 사-아항까레나: 에고를 가지고, 바: 또는, 뿌나하: 다시, 끄리야떼: 행하는, 바훌라-아야삼: 큰 노력으로, 땃: 저것, 라자삼: 동성에 있는, 우다흐리땀: 라고 한다.

번역

그러나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고, 거짓 자아의 개념에서 기인하며, 무척 애써서 한 행위를 동성에 있는 행위라고 하느니라.

원문

아누반담 끄샤얌 힘삼 anubandhaṁ kṣayaṁ hiṁsām
아나뻭샤 짜 빠우루샴 anapekṣya ca pauruṣam
모하다라뱌떼 까르마 mohād ārabhyate karma
얏 땃 따마삼 우쨔떼 yat tat tāmasam ucyate

동의어

아누반담: 장래의 구속, 끄샤얌: 파괴, 힘삼: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아나뻭샤: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짜: 또한, 빠우루샴: 제멋대로의, 모핫: 환영에 의해, 아라뱌떼: 시작된, 까르마: 행위, 얏: 그것, 땃: 저것, 따마삼: 암성에 있는,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경전적 지시 사항을 무시하고 환영에 빠져 행동하고, 다가올 속박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행위를 암성에 있다고 하느니라.

주석

우리는 우리가 한 행위에 대해 정부에 설명해야 하거나, 아니면 야마두따(Yamadūtas)라고 하는 지고한 주의 대리인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무책임한 행위는 경전적 지시 사항이 가르치는 규정 원칙들을 파괴하므로 파멸적이다. 그러한 행위는 종종 폭력에 기초하고 다른 생명체에 고통을 가한다. 무책임한 행위는 자기만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행해진다. 이것을 환영이라고 한다. 그러한 환영에 빠진 모든 행위는 암성의 산물이다.

원문

묵따-상고’나함-바디 mukta-saṅgo ’nahaṁ-vādī
드리뜟사하-사만비따하 dhṛty-utsāha-samanvitaḥ
싣댜싣됴르 니르비까라하 siddhy-asiddhyor nirvikāraḥ
까르따 삿뜨비까 우쨔떼 kartā sāttvika ucyate

동의어

묵따-상가하: 모든 물질적 교류에서 해방된, 아나함-바디: 거짓 자아 없이, 드리띠: 굳은 결심으로, 웃사하: 그리고 커다란 열정으로, 사만비따하: 자격 있는, 싣디: 완벽함, 아싣됴호: 그리고 실패, 니르비까라하: 변화 없이, 까르따: 행위자, 삿뜨비까하: 선성의 양태에,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물질적 본성의 여러 양태와의 교류 없이, 거짓 자아 없이, 굳은 결심과 열정으로 성공과 실패에 흔들림 없이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자는 선성에 있는 행위자라고 하느니라.

주석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은 항상 물질적 본성의 양태를 초월한다. 그는 거짓 자아와 자만심을 초월하기에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어떠한 결과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일을 마칠 때까지 항상 열정적이다. 그는 일에 따르는 고통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항상 열정적이다. 그는 성공과 실패에 좌우되지 않으며, 고통과 행복에 한결같다. 그러한 행위자가 선성에 있는 것이다.

원문

라기 까르마-팔라-쁘렙수르 rāgī karma-phala-prepsur
룹도 힘사뜨마꼬’슈찌히 lubdho hiṁsātmako ’śuciḥ
하르샤-쇼깐비따 까르따 harṣa-śokānvitaḥ kartā
라자사 빠리끼르띠따하 rājasaḥ parikīrtitaḥ

동의어

라기: 아주 집착하는, 까르마-팔라: 일의 결과, 쁘렙수후: 바라는, 룹다하: 욕심 많은, 힘사-아뜨마까하: 항상 시기하는, 아슈찌히: 깨끗하지 않은, 하르샤-쇼까-안비따하: 기쁨과 슬픔에 좌우되는, 까르따: 이러한 행위자, 라자사하: 동성에 있는, 빠리끼르띠따하: 선언된.

번역

일과 일의 결과에 집착해 그 결실을 즐기고자 하며, 욕심 많고, 항상 시기하며, 불결하고, 기쁨과 슬픔에 좌우되는 행위자는 동성에 있다고 하느니라.

주석

사람들은 물질 혹은 가정, 아내와 자식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특정한 일이나 그 일의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러한 사람은 더 높은 삶으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단지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아주 편하고자 할 뿐이다. 이들은 대부분 욕심이 많고, 자신이 획득한 것이 영원하고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른 사람을 시기하며 감각 만족을 위해서 어떤 잘못된 행동이라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불결하며, 돈을 버는 데 있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 사업이 성공하면 아주 기뻐하고, 실패하면 크게 슬퍼한다. 이런 사람들은 동성의 양태에 있다.

원문

아육따 쁘라끄리따 스땁다하 ayuktaḥ prākṛtaḥ stabdhaḥ
샤토 나이쉬끄리띠꼬’라사하 śaṭho naiṣkṛtiko ’lasaḥ
비샤디 디르가-수뜨리 짜 viṣādī dīrgha-sūtrī ca
까르따 따마사 우쨔떼 kartā tāmasa ucyate

동의어

아육따하: 경전적 지시 사항을 참고하지 않고, 쁘라끄리따하: 물질주의적, 스땁다하: 완고한, 샤타하: 기만하는, 나이쉬끄리띠까하: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데 능숙한, 알라사하: 게으른, 비샤디: 침울한, 디르가-수뜨리: 질질 끄는, 짜: 또한, 까르따: 행위자, 따마사하: 암성의,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항상 경전의 지시 사항에 어긋난 일을 하며, 물질주의적이고, 완고하며, 남을 속이고, 쉽게 남을 모욕하며, 게으르고, 항상 침울하며, 무엇을 일을 미루는 행위자는 암성에 있다고 하느니라.

주석

경전의 지시 사항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일을 해야 하며, 어떤 일은 해서 안 되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무시하는 자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며, 대부분 물질주의적이다. 그들은 경전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물질의 양태에 따라 행동한다. 이러한 자들은 온순하지 않고, 대부분 교활하며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데 능숙하다. 그들은 아주 게으르며, 어떤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항상 미룬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침울해 보인다. 그들은 일을 질질 끌어서 한 시간 만에 할 일을 몇 년 동안 미적거린다. 이러한 행위자를 암성에 있다고 한다.

원문

붇데르 베담 드리떼스 짜이바 buddher bhedaṁ dhṛteś caiva
구나따스 뜨리-비담 스리누 guṇatas tri-vidhaṁ śṛṇu
쁘로쨔마남 아세쉐나 procyamānam aśeṣeṇa
쁘리탁뜨베나 다난자야 pṛthaktvena dhanañ-jaya

동의어

붇데헤: 지성의, 베담: 차이, 드리떼헤: 꾸준한, 짜: 또한, 에바: 분명히, 구나따하: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의해서, 뜨리-비담: 세 가지 종류의, 스리누: 이제 들어라, 쁘로쨔마남: 내가 설명하는, 아세쉐나: 자세히, 쁘리탁뜨베나: 다르게, 다난자야: 오 부의 정복자여.

번역

오 부의 정복자여, 이제 세 가지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이해와 결심에 관해 내가 자세히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주석

주께서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따른 세 가지 구분으로 지식, 지식의 대상, 그리고 지식을 아는 자를 설명하신 후, 이제 지성과 행위자의 결심에 관해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고 계신다.

원문

쁘라브릿띰 짜 니브릿띰 짜 pravṛttiṁ ca nivṛttiṁ ca
까르야까르예 바야바예 kāryākārye bhayābhaye
반담 목샴 짜 야 벳띠 bandhaṁ mokṣaṁ ca yā vetti
붇디 사 빠르타 삿뜨비끼 buddhiḥ sā pārtha sāttvikī

동의어

쁘라브릿띰: 행하는, 짜: 또한, 니브릿띰: 해서는 안 되는, 짜: 그리고, 까르야: 의무로 해야 하는, 아까르예: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바야: 두려움, 아바예: 그리고 두려움 없음, 반담: 구속, 목샴: 해방, 짜: 그리고, 야: 그것, 벳띠: 알다, 붇디히: 이해하는, 사: 저것,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삿뜨비끼: 선성에 있는.

번역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반드시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 구속하는 것과 해방시키는 것을 알게 하는 이해는 선성에 있는 것이니라.

주석

경전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쁘라브릿띠(pravṛtti), 즉 해야 마땅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시가 없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경전적 지시를 모르는 자는 일의 작용과 반작용에 얽매이게 된다. 지성을 활용해 분별할 수 있는 이해는 선성에 있다.

원문

야야 다르맘 아다르맘 짜 yayā dharmam adharmaṁ ca
까르얌 짜까르얌 에바 짜 kāryaṁ cākāryam eva ca
아야타밧 쁘라자나띠 ayathāvat prajānāti
붇디 사 빠르타 라자시 buddhiḥ sā pārtha rājasī

동의어

야야: 그것에 의해, 다르맘: 종교 원칙들, 아다르맘: 비종교, 짜: 그리고, 까르얌: 해야 하는 것, 짜: 또한, 아까르얌: 해서는 안 되는 것, 에바: 분명히, 짜: 또한, 아야타-밧: 불완전하게, 쁘라자나띠: 알다, 붇디히: 지성, 사: 저것,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라자시: 동성에 있는.

번역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종교와 비종교를 분별하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구분할 수 없는 이해는 동성에 있느니라.

원문

아다르맘 다르맘 이띠 야 adharmaṁ dharmam iti yā
만야떼 따마사브리따 manyate tamasāvṛtā
사르바르탄 비빠리땀스 짜 sarvārthān viparītāṁś ca
붇디 사 빠르타 따마시 buddhiḥ sā pārtha tāmasī

동의어

아다르맘: 비종교, 다르맘: 종교, 이띠: 따라서, 야: 어느 것, 만야떼: 생각하다, 따마사: 환영에 의해, 아브리따: 가려진, 사르바-아르탄: 모든 것, 비빠리딴: 잘못된 방향으로, 짜: 또한, 붇디히: 지성, 사: 저것,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따마시: 암성에.

번역

환영과 어둠의 영향으로 비종교를 종교로, 종교를 비종교로 생각하고, 항상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이해는, 오 빠르타여, 암성에 있다.

주석

암성에 있는 지성은 올바른 방향과 항상 반대로 작용한다. 즉 종교가 아닌 것을 종교로 받아들이고, 진정한 종교를 거부한다. 무지한 자들은 위대한 영혼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고, 보통 사람을 위대한 영혼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진리를 진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행동에서 잘못된 길만을 택하기 때문에 그들의 지성은 암성에 있다.

원문

드리땨 야야 다라야떼 dhṛtyā yayā dhārayate
마나-쁘라넨드리야-끄리야하 manaḥ-prāṇendriya-kriyāḥ
요게나뱌비짜리냐 yogenāvyabhicāriṇyā
드리띠 사 빠르타 삿뜨비끼 dhṛtiḥ sā pārtha sāttvikī

동의어

드리땨: 결심, 야야: 그것으로, 다라야떼: 유지하다, 마나하: 마음의, 쁘라나: 생명, 인드리야: 그리고 감각, 끄리야하: 행위, 요게나: 요가 수행으로, 아뱌비짜리냐: 중단 없이, 드리띠히: 결심, 사: 저것,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삿뜨비끼: 선성에 있는.

번역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요가 수행을 통해 확고함을 꾸준히 지속하며, 마음과 생명, 그리고 감각 활동을 다스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선성에 있는 결심이라고 하느니라.

주석

요가는 초영혼을 이해하는 수단이다. 굳은 결심으로 초영혼에 자기 마음과 생명, 그리고 감각 활동을 꾸준히 집중하는 자는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종류의 결심은 선성에 있는 것이다. 아뱌비짜리냐(avyabhicāriṇyā)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데, 그 이유는 끄리쉬나 의식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행위 때문에 절대 일탈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원문

야야 뚜 다르마­-까마르탄 yayā tu dharma-kāmārthān
드리땨 다라야떼’르주나 dhṛtyā dhārayate ’rjuna
쁘라상게나 팔라깡시 prasaṅgena phalākāṅkṣī
드리띠 사 빠르타 라자시 dhṛtiḥ sā pārtha rājasī

동의어

야야: 그것에 의해, 뚜: 그러나, 다르마: 종교적임, 까마: 감각 만족, 아르탄: 그리고 경제 발전, 드리땨: 결심으로, 다라야떼: 유지하다,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쁘라상게나: 집착 때문에, 팔라-아깡시: 결과를 바라는, 드리띠히: 결심, 사: 저것,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라자시: 동성에 있는.

번역

종교적 결실과 경제 발전, 그리고 감각 만족을 추구하는 결심은 동성에 있는 것이니라, 오 아르주나여.

주석

종교나 경제 활동에서 생기는 결실을 항상 바라고  오직 감각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의 마음과 생명, 그리고 감각은 따라서 동성에 있다.

원문

야야 스밥남 바얌 쇼깜 yayā svapnaṁ bhayaṁ śokaṁ
비샤담 마담 에바 짜 viṣādaṁ madam eva ca
나 비문짜띠 두르메다 na vimuñcati durmedhā
드리띠 사 빠르타 따마시 dhṛtiḥ sā pārtha tāmasī

동의어

야야: 그것으로, 스밥남: 꿈꾸는, 바얌: 두려움, 쇼깜: 비탄, 비샤담: 침울함, 마담: 환영, 에바: 분명히, 짜: 또한, 나: 결코, 비문짜띠: 포기하다, 두르메다: 어리석은, 드리띠히: 결심, 사: 그것,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따마시: 암성에 있는.

번역

그리고 꿈을 넘어서지 못하고, 두려움, 비탄, 침울함과 환영에 빠진 결심, 즉 어리석은 결심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암성에 있는 것이니라.

주석

선성에 있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꿈”이란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것을 의미한다. 꿈을 꾸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며 선성이든, 동성이든, 암성이든 꿈은 자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과도한 잠을 피하지 못하는 자, 물질적 대상을 즐기는 데서 오는 자만심을 피할 수 없는 자, 항상 세상을 지배하려 하는 자, 그리고 그렇게 생명과 마음, 그리고 감각을 움직이는 자는 따라서 암성에 있는 결심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문

수캄 뜨비다님 뜨리-비담 sukhaṁ tv idānīṁ tri-vidhaṁ
스리누 메 바라따르샤바 śṛṇu me bharatarṣabha
아뱌삳 라마떼 야뜨라 abhyāsād ramate yatra
두칸땀 짜 니갓차띠 duḥkhāntaṁ ca nigacchati

동의어

수캄: 행복, 뚜: 그러나, 이다님: 이제, 뜨리-비담: 세 가지 종류의, 스리누: 듣다, 메: 나로부터, 바라따-리샤바: 오 바라따 중에서 최고여, 아뱌삿: 실천함으로써, 라마떼: 즐기다, 야뜨라: 그곳에, 두카: 불행의, 안땀: 끝, 짜: 또한, 니갓차띠: 얻다.

번역

오 바라따 중 최고여, 이제 나에게서 속박된 영혼들이 즐기지만, 가끔은 오직 고통으로 끝을 맺게 되는 세 가지 종류의 행복에 관해 들어라.

주석

속박된 영혼은 물질적 행복을 계속해서 누리려고 한다. 그래서 씹은 것을 또 씹는다. 그러나 때때로 그러한 즐거움을 쫓는 과정에서 위대한 영혼과의 교류로 물질적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속박된 영혼은 항상 어떤 감각 만족에 몰두하지만, 좋은 교류 덕분에 그 행복이란 것이 단지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자신의 진정한 끄리쉬나 의식이 깨어나게 되며 그러한 반복적인, 소위 행복이라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원문

얏 따다그레 비샴 이바 yat tad agre viṣam iva
빠리나메’므리또빠맘 pariṇāme ’mṛtopamam
땃 수캄 삿뜨비깜 쁘록땀 tat sukhaṁ sāttvikaṁ proktam
아뜨마-붇디-쁘라사다-잠 ātma-buddhi-prasāda-jam

동의어

얏: 그것, 땃: 저것, 아그레: 처음에, 비샴 이바: 독약처럼, 빠리나메: 끝에, 암리따: 감로수, 우빠맘: 비교되는, 땃: 저것, 수캄: 행복, 삿뜨비깜: 선성에, 쁘록땀: 라고 한다, 아뜨마: 자아에, 붇디: 지성의, 쁘라사다-잠: 만족에서 생긴.

번역

처음에는 독약과 같지만 결국에는 감로수 같고 우리를 자아 인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선성에 있는 행복이라고 한다.

주석

자아 인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음과 감각을 통제하기 위해 많은 규칙과 규정을 따라야 하고, 마음을 자아에  집중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몹시 어렵고 독약처럼 쓰지만 규정들을 성공적으로 따라 초월적 위치에 오르게 되면 진정한 감로수를 마시기 시작하며 삶을 즐기게 된다.

원문

비샤옌드리야-삼요갇 viṣayendriya-saṁyogād
얏 따다그레’므리또빠맘 yat tad agre ’mṛtopamam
빠리나메 비샴 이바 pariṇāme viṣam iva
땃 수캄 라자삼 스므리땀 tat sukhaṁ rājasaṁ smṛtam

동의어

비샤야: 감각 대상들의, 인드리야: 그리고 감각들, 삼요갓: 결합으로부터, 얏: 그것, 땃: 저것, 아그레: 처음에, 암리따-우빠맘: 감로수처럼, 빠리나메: 끝에는, 비샴 이바: 독약처럼, 땃: 저것, 수캄: 행복, 라자삼: 동성에 있는, 스므리땀: 여겨진다.

번역

감각과 그 대상과의 접촉에서 초래되며 처음에는 감로수 같지만 결국에는 독약과 같은 행복은 동성에 있다고 하느니라.

주석

젊은 남녀가 만나면 남자의 감각이 여자를 보고 만지고 성교하도록 부추긴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감각에 아주 만족스럽지만, 결국에는, 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독약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헤어지거나, 이혼하며, 한탄과 비통함을 겪게 된다. 그러한 행복은 항상 동성에 있는 것이다. 감각과 감각 대상과의 결합으로 생긴 행복은 항상 괴로움의 원인이며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한다.

원문

야다그레 짜누반데 짜 yad agre cānubandhe ca
수캄 모하남 아뜨마나하 sukhaṁ mohanam ātmanaḥ
니드랄라샤-쁘라마돗탐 nidrālasya-pramādotthaṁ
땃 따마삼 우다흐리땀 tat tāmasam udāhṛtam

동의어

얏: 그것, 아그레: 처음에, 짜: 또한, 아누반데: 끝에, 짜: 또한, 수캄: 행복, 모하남: 환영의, 아뜨마나하: 자아의, 니드라: 잠, 알라샤: 게으름, 쁘라마다: 그리고 환영, 웃탐: 생겨난, 땃: 그것, 따마삼: 암성에, 우다흐리땀: 라고 한다.

번역

자아 인식에 관해 무지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망상에 빠져 있으며, 잠과 게으름, 그리고 환영에서 비롯된 행복은 암성에 있는 행복이라고 하느니라.

주석

게으름과 잠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자는 분명 암흑과 무지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는 자 또한 암성에 있다. 암성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환영이다. 처음에도 끝에도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동성에 있는 자에게는 결국 괴로움이 되겠지만 처음에는 덧없는 행복이 있기도 하지만 암성에 있는 자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괴로움만이 있다.

원문

나 따다스띠 쁘리티비암 바 na tad asti pṛthivyāṁ vā
디비 데베슈 바 뿌나하 divi deveṣu vā punaḥ
삿뜨밤 쁘라끄리띠-자이르 묵땀 sattvaṁ prakṛti-jair muktaṁ
야데비 샷 뜨리비르 구나이히 yad ebhiḥ syāt tribhir guṇaiḥ

동의어

나: 아닌, 땃: 저것, 아스띠: 존재하다, 쁘리티비암: 지구에, 바: 또는, 디비: 더 높은 행성계에, 데베슈: 데바들 사이에, 바: 또는, 뿌나하: 다시, 삿뜨밤: 존재, 쁘라끄리띠-자이히: 물질적 본성에서 태어난, 묵땀: 해방된, 얏: 그것, 에비히: 이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샷: 이다, 뜨리비히: 세 가지, 구나이히: 물질적 본성의 양태.

번역

이 지상에도, 더 높은 행성계에 있는 데바 중에서도, 물질적 본성에서 생겨난 이 세 가지 양태에서 벗어난 존재는 있지 않다.

주석

주께서 여기에서 전 우주가 받는 물질적 본성의 총체적 영향을 요약하신다.

원문

브라흐마나-끄샤뜨리야-비샴 brāhmaṇa-kṣatriya-viśāṁ
슈드라남 짜 빠란따빠 śūdrāṇāṁ ca paran-tapa
까르마니 쁘라비박따니 karmāṇi pravibhaktāni
스바바바-쁘라바바이르 구나이히 svabhāva-prabhavair guṇaiḥ

동의어

브라흐마나: 브라흐마나들의, 끄샤뜨리야: 끄샤뜨리야들, 비샴: 그리고 바이샤들, 슈드라남: 슈드라들의, 짜: 그리고, 빠람따빠: 오 적을 무찌르는 자여, 까르마니: 행위, 쁘라비박따니: 나뉜, 스바바바: 그들의 본성, 쁘라바바이히: 태어난, 구나이히: 물질적 본성의 양태에 의해서.

번역

브라흐마나, 끄샤뜨리야, 바이샤, 그리고 슈드라는 물질적 양태에 따라 그들의 고유한 본성이 가진 자질에 따라 구분된다, 오 적을 무찌르는 자여.

원문

샤모 다마스 따빠 샤우짬 śamo damas tapaḥ śaucaṁ
끄샨띠라르자밤 에바 짜 kṣāntir ārjavam eva ca
갸남 비갸남 아스띠꺔 jñānaṁ vijñānam āstikyaṁ
브라흐마-까르마 스바바바-잠 brahma-karma svabhāva-jam

동의어

사마하: 평화로움, 다마하: 자기 통제, 따빠하: 고행, 샤우짬: 순수함, 끄샨띠히: 인내심, 아르자밤: 정직, 에바: 분명히, 짜: 그리고, 갸남: 지식, 비갸남: 지혜, 아스띠꺔: 종교적임, 브라흐마: 브라흐마나의, 까르마: 의무, 스바바바-잠: 본성적으로 갖고 태어난.

번역

평화로움, 자기 통제, 고행, 순수함, 인내심, 정직함, 지식, 지혜, 그리고 깊은 신앙심 이러한 것은 브라흐마들이 가진 본성이니라.

원문

샤우럄 떼조 드리띠르 닥샴 śauryaṁ tejo dhṛtir dākṣyaṁ
윳데 짜뺘빨라야남 yuddhe cāpy apalāyanam
다남 이스바라-바바스 짜 dānam īśvara-bhāvaś ca
끄샤뜨람 까르마 스바바바-잠 kṣātraṁ karma svabhāva-jam

동의어

샤우럄: 영웅다움, 떼자하: 힘, 드리띠히: 결심, 닥샴: 지략, 윧데: 전쟁에서, 짜: 그리고, 아삐: 또한, 아빨라야남: 도망가지 않는, 다남: 관대함, 이스바라: 지도력의, 바바하: 본성, 짜: 그리고, 끄샤뜨람: 끄샤뜨리야의, 까르마: 의무, 스바바바-잠: 본성적으로 가진.

번역

영웅다움, 힘, 결심, 지략, 용기, 관대함, 그리고 지도력은 끄샤뜨리야가 지니는 본성이니라.

원문

끄리시-고-락샤-바니쟘 kṛṣi-go-rakṣya-vāṇijyaṁ
바이샤-까르마 스바바바-잠 vaiśya-karma svabhāva-jam
빠리짜랴뜨마깜 까르마 paricaryātmakaṁ karma
슈드라샤삐 스바바바-잠 śūdrasyāpi svabhāva-jam

동의어

끄리시: 땅을 가는, 고: 소(牛), 락샤: 보호, 바니쟘: 무역, 바이샤: 바이샤의, 까르마: 의무, 스바바바-잠: 자신의 본성이 지닌, 빠리짜랴: 봉사, 아뜨마깜: 구성하는, 까르마: 의무, 슈드라샤: 슈드라의, 아삐: 또한, 스바바바-잠: 본성적으로 지닌.

번역

농업과 소보호, 그리고 사업은 바이샤의 자연스러운 일이며, 슈드라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노동하고 봉사하느니라.

원문

스베 스베 까르마냐비라따하 sve sve karmaṇy abhirataḥ
삼싣딤 라바떼 나라하 saṁsiddhiṁ labhate naraḥ
스바-까르마-니라따 싣딤 sva-karma-nirataḥ siddhiṁ
야타 빈다띠 땃 츠리누 yathā vindati tac chṛṇu

동의어

스베 스베: 각자의, 까르마니: 일, 아비라따하: 따르는, 삼싣딤: 완성, 라바떼: 달성하다, 나라하: 사람, 스바-까르마: 자신의 고유한 의무, 니라따하: 종사하는, 싣딤: 완성, 야타: 처럼, 빈다띠: 달성하다, 땃: 그것, 스리누: 듣다.

번역

자신이 타고난 자질에 맞는 일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완벽해질 수 있다. 이제 나에게서 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지 들어라.

원문

야타 쁘라브릿띠르 부따남 yataḥ pravṛttir bhūtānāṁ
예나 사르밤 이담 따땀 yena sarvam idaṁ tatam
스바-까르마나 땀 아뱌르쨔 sva-karmaṇā tam abhyarcya
싣딤 빈다띠 마나바하 siddhiṁ vindati mānavaḥ

동의어

야따하: 그로부터, 쁘라브릿띠히: 발산, 부따남: 모든 생명체의, 예나: 그에 의해, 사르밤: 모든, 이담: 이것, 따땀: 만연하는, 스바-까르마나: 자신의 고유한 의무, 땀: 그를, 아뱌르쨔: 숭배함으로써, 싣딤: 완벽함, 빈다띠: 달성하다, 마나바하: 사람.

번역

모든 존재의 원천이며 모든 곳에 계시는 주를 숭배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에게 부여된 고유한 일을 통해 완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주석

제15장에서 말했듯이, 모든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파편적 부분이다. 따라서 지고한 주가 모든 생명체의 시작이다. 이것은 베단따 수뜨라에서 “잔마댜샤 야따하(janmādy asya yataḥ)”라고 확증되었다. 그러므로 지고한 주는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시작이다. 바가바드 기따의 제7장에서 말했듯이, 지고한 주께서는 당신의 두 에너지, 즉 외적 에너지와 내적 에너지로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에너지를 가지신 지고한  주를 숭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바이쉬나바 헌애자는 내적 에너지 측면의 지고한 주를 숭배한다. 주의 외적 에너지는 내적 에너지의 왜곡된 투영이다. 외적 에너지는 배경이지만, 지고한 주께서는 당신의 전체적 확장인 빠람아뜨마로서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신다. 당신은 모든 데바, 모든 인간, 모든 동물의 초영혼으로서 모든 곳에 계신다. 따라서 지고한 주의 부분으로서 우리는 절대자를 섬길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으로 주께 봉헌해야 한다. 이것이 이 절에서 권장되었다.

누구나 흐리쉬께샤, 즉 감각의 주인에 의해 자신의 특정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의 결실로,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를 숭배해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꽉 차 늘 이렇게 생각한다면 주의 은총으로 모든 것을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삶의 완성이다. 주께서 바가바드 기따(12.7)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떼샴 아함 사묻다르따(teṣām ahaṁ samuddhartā).” 지고한 주께서 직접 이런 헌애자의 해방을 책임지신다. 이것이 삶의 가장 높은 완성이다.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든, 지고한 주를 섬긴다면 우리는 삶의 가장 높은 완성을 이룰 것이다.

원문

스레얀 스바-다르모 비구나하 śreyān sva-dharmo viguṇaḥ
빠라-다르맛 스바누쉬티땃 para-dharmāt sv-anuṣṭhitāt
스바바-니야땀 까르마 svabhāva-niyataṁ karma
꾸르반 납노띠 낄비샴 kurvan nāpnoti kilbiṣam

동의어

스레얀: 더 나은, 스바-다르마하: 자신의 고유한 직업, 비구나하: 불완전하게 행한, 빠라-다르맛: 다른 사람의 직업, 수-아누쉬티땃: 완벽히 행한, 스바바바-니야땀: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규정된, 까르마: 일, 꾸르반: 행하는, 나: 결코, 압노띠: 달성하다, 낄비샴: 죄업.

번역

비록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기에게 규정된 의무를 다하는 것이 타인의 의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자기 본성에 따라 규정된 의무를 다하면 절대 죄업에 영향받지 않느니라.

주석

우리의 직무가 바가바드 기따에 규정되어 있다. 앞절에서 이미 논의했듯이, 브라흐마나, 끄샤뜨리야, 바이샤, 슈드라의 의무가 그들의 특정한 본성에 따라 규정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무를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천성적으로 슈드라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자가 브라흐마나 가문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브라흐마나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 본성에 따라 일해야 하며, 이러한 일이 지고한 주를 향한 봉헌으로 행해질 때, 일의 귀천은 없다. 브라흐마나의 직무는 분명 선성에 있지만, 만약 어떤 자의 본성이 선성에 있지 않다면 브라흐마나의 직무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 끄샤뜨리야, 즉 행정관들에게는 여러 끔찍한 의무가 있다. 그들은 적을 죽이기 위해 때로는 폭력적이어야 하고 외교를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정치적 행위에 수반되는 그러한 폭력과 이중성은 끄샤뜨리야의 직무이므로 이것을 버리고 브라흐마나의 직무를 행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고한 주께서 만족하시게끔 행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르주나는 끄샤뜨리야였다. 그는 상대편과 싸우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그러한 싸움이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를 위한 것이라면  불명예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떠한 혜택도 있을 수 없다. 때때로 상인들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 “당신에게는 특별히 아무 이윤도 남기지 않고 드립니다.”라고 말하지만  이윤 없이 상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인이 이윤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악의 없는 단순한 거짓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 상인이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게 싫어서 자기 일을 버리고 브라흐마나의 직업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대 권장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일로 최고인격신을 섬긴다면 끄샤뜨리야든, 바이샤든, 슈드라든 문제 되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제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브라흐마나들조차 때때로 동물을 죽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간혹 특정 동물이 그러한 제사에 희생되는 것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끄샤뜨리야가 자기 직무상 적을 죽인다면 어떠한 죄업도 생기지 않는다. 제3장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명료하고 자세히 설명되었다. 모든 사람은 야갸, 즉 최고인격신 비쉬누를 위해 일해야 한다. 개인적 감각 만족을 위해 한 어떤 일이든 속박의 원인이 된다. 결론은 모든 사람은 자기가 획득한 특정한 본성에 따라 일해야 하고 오직 지고한 주의 지고한 대의를 받들기 위해 일해야 한다.

원문

사하-잠 까르마 까운떼야 saha-jaṁ karma kaunteya
사-도샴 아삐 나 땨젯 sa-doṣam api na tyajet
사르바람바 히 도쉐나 sarvārambhā hi doṣeṇa
두메나그니르 이바브리따하 dhūmenāgnir ivāvṛtāḥ

동의어

사하-잠: 동시에 태어난, 까르마: 일,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사-도샴: 잘못으로, 아삐: 비록, 나: 결코, 땨젯: 포기해야 한다, 사르바-아람바: 모든 모험, 히: 확실히, 도쉐나: 잘못하여, 두메나: 연기와, 아그니: 불, 이바: 처럼, 아브리따: 덮이다.

번역

불이 연기에 덮이듯, 모든 노력은 어떠한 잘못으로 덮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 본성에 맞는 일을 하는 데 무수한 잘못이 따르더라도 그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되느니라, 오 꾼띠의 아들이여.

주석

속박된 삶에서 모든 일은 물질적 본성에 오염되어 있다. 브라흐마나라 할지라도 동물 희생이 필요한 제사를 지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끄샤뜨리야가 아무리 경건한 성품을 지녔다 하더라도 적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또한 상인이 아무리 경건하다 할지라도 상업 유지를 위해 이윤을 숨겨야 하거나 암거래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필요하며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슈드라가 나쁜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옳지 않은 명령이라도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각자 규정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의무가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좋은 예가 제시되었다. 불은 순수하지만 여전히 연기가 난다. 그렇지만 연기는 불을 더럽히지 않는다. 비록 연기가 나더라도 불은 모든 구성요소 중에서 가장 순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어떤 자가 끄샤뜨리야의 일을 포기하고 브라흐마나의 직업을 택한다고 해도, 브라흐마나의 직무에 불쾌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물질계에는 그 누구도 물질적 본성의 오염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연기와 불의 예는 매우 적합하다. 겨울에 불을 지필 때 가끔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만, 이러한 불편에도 불을 피워야만 한다. 이처럼 일부 장애 요소가 있다고 해서 자기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직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굳은 결심으로 자기 직무를 끄리쉬나 의식 속에서 행함으로써 지고한 주를 섬겨야 한다. 그것이 완성의 경지이다. 특정한 직무가 지고한 주의 만족을 위해 행해지면 그 직무에서 비롯된 모든 결점은 정화된다. 일의 결과가 정화되어 봉헌에 연결될 때, 우리 안의 자아를 보는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이를 자아 인식이라고 한다.

원문

아삭따-붇디 사르바뜨라 asakta-buddhiḥ sarvatra
지따뜨마 비가따-스쁘리하하 jitātmā vigata-spṛhaḥ
나이쉬까르먀-싣딤 빠라맘 naiṣkarmya-siddhiṁ paramāṁ
산냐세나디갓차띠 sannyāsenādhigacchati

동의어

아삭따-붇디히: 집착 없는 지성을 가진, 사르바뜨라: 모든 곳에, 지따-아뜨마: 마음을 다스리는, 비가따-스쁘리하하: 물질적 욕망 없이, 나이쉬까르먀-싣딤: 과보 없는 완성, 빠라맘: 최고의, 산냐세나: 버리는 삶의 질서로, 아디갓차띠: 달성하다.

번역

자기를 통제할 줄 알고, 집착이 없으며, 모든 물질적 즐거움을 버린 자는 버림을 실천함으로써 반작용에서 벗어난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를 달성할 수 있다.

주석

진정한 버림이란 자기 자신을 지고한 주의 파편으로 항상 생각하고, 따라서 항상 스스로  자기 일에 대한 결과를 즐길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고한 주의 파편이므로 우리 일의 결과는 지고한 주께서 즐기셔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끄리쉬나 의식이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진정한 산냐시, 즉 버리는 삶의 질서에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정신을 갖게 되면 실제로 절대자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항상 만족하게 된다. 따라서 물질적인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며 주를 향한 봉사에서 생기는 초월적 행복을 제외한 어떠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지 않는 데 익숙하게 된다. 산냐시는 과거 행위의 반작용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소위 버리는 삶을 택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이 완성의 경지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마음 상태를 요가루다(yogārūḍha), 즉 요가의 완성 단계라고 한다. 이것은 제3장에서 “야스뜨바뜨마 라띠르 에바 샷(yas tv ātma-ratir eva syāt)”, 즉 자기 자신에 만족한 자는 자기 행위에서 생긴 어떠한 반작용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원문

싣딤 쁘랍또 야타 브라흐마 siddhiṁ prāpto yathā brahma
따탑노띠 니보다 메 tathāpnoti nibodha me
사마세나이바 까운떼야 samāsenaiva kaunteya
니쉬타 갸나샤 야 빠라 niṣṭhā jñānasya yā parā

동의어

싣딤: 완성, 쁘랍따하: 달성하는, 야타: 마치, 브라흐마: 절대자, 따타: 그렇게, 압노띠: 달성하다, 니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메: 나로부터, 사마세나: 요약해서, 에바: 분명히,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니쉬타: 단계, 갸나샤: 지식의, 야: 그것, 빠라: 초월적인.

번역

오 꾼띠의 아들이여, 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자가 어떻게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 브라흐만, 즉 가장 높은 지식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지 나에게서 들어라. 내가 이제 그것을 요약할 것이다.

주석

주께서 아르주나를 위해  그저 직업적 의무에만 종사함으로써, 그 의무를 최고인격신을 위해 수행함으로써 어떻게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설명하고 계신다. 지고한 주의 만족을 위해 그저 자기 일의 결과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최상의 브라흐만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자아 인식의 과정이다. 지식의 진정한 완성은 순수한 끄리쉬나 의식을 달성하는 데 있다. 이것이 다음 절에서 설명된다.

원문

붇댜 비슏다야 육또 buddhyā viśuddhayā yukto
드리땨뜨마남 니얌야 짜 dhṛtyātmānaṁ niyamya ca
샵다딘 비샤얌스 땩뜨바 śabdādīn viṣayāṁs tyaktvā
라가-드베샤우 비유다샤 짜 rāga-dveṣau vyudasya ca
비빅따-세비 라구바시 vivikta-sevī laghv-āśī
야따-박-까야-마나사하 yata-vāk-kāya-mānasaḥ
댜나-요가-빠로 니땸 dhyāna-yoga-paro nityaṁ
바이라걈 삼우빠스리따하 vairāgyaṁ samupāśritaḥ
아항까람 발람 다르빰 ahaṅkāraṁ balaṁ darpaṁ
까맘 끄로담 빠리그라함 kāmaṁ krodhaṁ parigraham
빔우쨔 니르마마 샨또 vimucya nirmamaḥ śānto
브라흐마-부야야 깔빠떼 brahma-bhūyāya kalpate

동의어

붇댜: 지성으로, 비슏다야: 완전히 정화된, 육따하: 종사하는, 드리땨: 결심으로, 아뜨마남: 자아, 니얌야: 규제하는, 짜: 또는, 샤브다-아딘: 소리와 같이, 비샤얀: 감각의 대상들, 땩뜨바: 버리는, 라가: 집착, 드베샤우: 그리고 증오, 비유다샤: 제쳐놓고, 짜: 또한, 비빅따-세비: 외딴 곳에 사는, 라구-아시: 소식(小食)하는, 야따: 통제받는, 박: 연설, 까야: 몸, 마나사하: 그리고 마음, 댜나-요가-빠라하: 삼매경에 몰입한, 니땸: 하루 24시간 동안, 바이라걈: 초연함, 삼우빠스리따하: 은신처로 삼은, 아항까람: 거짓 자아, 발람: 거짓 힘, 다르빰: 거짓 자만, 까맘: 욕망, 끄로담: 성냄, 빠리그라함: 그리고 물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빔우쨔: 해방하게 되는, 니르마마하: 소유의식 없이, 샨따하: 평화로운, 브라흐마-부야야: 자아 인식을 위해서, 깔빠떼: 자격 있는.

번역

지성으로 정화되고, 굳은 결심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감각 만족의 대상을 포기하고, 집착과 증오에서 벗어나며, 한적한 곳에 살며, 적게 먹고, 몸과 마음과 말을 통제하며, 항상 삼매경에 있고, 초연하며,거짓 자아, 헛된 힘과 자만, 욕망, 성냄,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헛된 소유의식을 가지지 않으며 평온한 사람은 분명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것이니라.

주석

지성으로 정화될 때 우리는 선성의 양태로 남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통제자가 되며 항상 삼매경에 있게 된다. 또한 감각 만족의 대상에 초연해지며 자기 행위에 집착과 증오를 하지 않게 된다. 그런 초연한 사람은 자연히 한적한 곳에 살기를 선호하고 필요 이상으로 먹지 않으며 자기 몸과 마음의 활동을 통제한다. 그러한 자들은 육신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거짓 자아를 가지지 않는다. 또한 여러 물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육신을 살찌우고 강하게 하려는 욕망도 없다. 그는 육체적 개념의 삶을 살지 않으므로 헛되이 자만하지도 않는다. 주의 은총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어떠한 것에도 만족하며, 감각 만족의 부재로 인해 결코 화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의 대상을 얻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렇게 거짓 자아에서 완전히 벗어나 모든 물질적인 것에 초연할 때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 깨달음의 경지이다. 그러한 경지를 브라흐마-부따(brahma-bhūta)경지라고 한다. 삶의 물질적 개념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평화로워지고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2.70)에서 설명되었다.

아뿌럄아남 아짤라-쁘라띠쉬탐 āpūryamāṇam acala-pratiṣṭhaṁ
삼우드람 아빠하 쁘라비샨띠 얏밧 samudram āpaḥ praviśanti yadvat
땃밧 까마 얌 쁘라비샨띠 사르베 tadvat kāmā yaṁ praviśanti sarve
사 샨띰 압노띠 나 까마-까미 sa śāntim āpnoti na kāma-kām

항상 채워져도 늘 그대로 있는 대양으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드는 욕망에 동요되지 않는 자만이 평온을 얻을 수 있지만,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려 애쓰는 자는 평온하지 못하다.

원문

브라흐마-부따 쁘라산나뜨마 brahma-bhūtaḥ prasannātmā
나 쇼짜띠 나 깡샤띠 na śocati na kāṅkṣati
사마 사르베슈 부떼슈 samaḥ sarveṣu bhūteṣu
맏-박띰 라바떼 빠람 mad-bhaktiṁ labhate parām

동의어

브라흐마-부따하: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쁘라산나-아뜨마: 완전히 즐거운, 나: 결코, 쇼짜띠: 한탄하는, 나: 결코, 깡샤띠: 소망하다, 사마하: 평정을 지키는, 사르베슈: 모든 것에, 부떼슈: 생명체, 맛-박띰: 나에게의  봉헌, 라바떼: 얻다, 빠람: 초월적.

번역

따라서 초월적 경지에 오른 자는 즉시 지고한 브라흐만을 깨닫게 되며 완전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는 어떠한 것에도 더는 한탄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지도 않으며 모든 생명체를 똑같이 대하느니라. 바로 이러한 경지에 올라야 나를 향한 순수한 봉헌을 하게 되느니라.

주석

비인성주의자들에게는 브라흐마 부따 경지에 이르러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그러나 인성주의자들, 즉 순수한 헌애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순수한 봉헌에 종사하게 된다. 이것은 지고한 주를 위한 순수한 봉헌에 종사하는 사람은 브라흐마-부따라고 불리는 절대자와 하나 되는 해방의 경지에 이미 올랐음을 의미한다. 지고한 절대자와 하나가 되지 않고서 봉헌할 수 없다. 절대적 개념에서는 주인과 종의 차이가 없지만 더 높은 영적 의미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질적 개념의 삶에서,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해 일할 때는 고통이 따르지만 절대적 세계에서 순수한 봉헌에 종사할 때는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끄리쉬나 의식의 헌애자에게는 슬퍼할 것도, 더 바랄 것도 없다. 절대신은 완전하므로 끄리쉬나 의식으로 절대신을 향한 봉헌에 종사하는 생명체 역시 완전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는 모든 더러운 물을 정화한 강과 같다. 순수한 헌애자는 끄리쉬나를 제외한 어떠한 다른 생각도 없어서 자연히 항상 기쁨에 차 있다. 그는 어떠한 물질적 손실에 슬퍼하지 않으며, 이득을 갈망하지도 않는데, 그 이유는 그는 주를 향한 봉헌으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파편이자 영원한 종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물질적 즐거움에 대한 어떠한 욕망도 없다. 그는 물질계에서 누가 높거나 누가 낮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높고 낮은 지위는 덧없는 것이고 헌애자는 이 덧없는 것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에게 돌과 황금은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브라흐마 부따 경지이며 순수한 헌애자는 이러한 경지를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한 경지에 오른 존재에게 지고의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어 자기 개별성을 잃어버린다는 개념은 지옥과도 같고 천국을 얻고자 하는 것은 주마등과 같으며 모든 감각은 독 든 이빨이 부서진 뱀과 같다. 부러진 이빨을 가진 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듯, 감각이 저절로 통제될 때 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질적으로 감염된 사람에게 세상은 고통스럽지만 헌애자에게 온 세상은 바이꾼타, 즉 영적 세계와도 같다. 이 물질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헌애자에게 그는 개미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경지는 바로 이 시대에 순수한 봉헌을 전파한 주 짜이따냐의 자비로 달성될 수 있다.

원문

박땨 맘 아비자나띠 bhaktyā mām abhijānāti
야반 야스 짜스미 땃뜨바따하 yāvān yaś cāsmi tattvataḥ
따또 맘 땃뜨바또 갸뜨바 tato māṁ tattvato jñātvā
비샤떼 따다난따람 viśate tad-anantaram

동의어

박땨: 순수한 봉헌으로, 맘: 나에게, 아비자나띠: 알 수 있다, 야반: 하는 만큼, 야 짜 아스미: 있는 그대로의 나, 땃뜨바따하: 진실로, 따따하: 그 이후로, 맘: 나에게, 땃뜨바따하: 진실로, 갸뜨바: 아는, 비샤떼: 그는 들어간다, 땃-아난따람: 그 이후.

번역

오직 봉헌으로써 나, 최고인격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봉헌으로 나에 관한 의식으로 가득할 때 절대신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느니라.

주석

최고인격신 끄리쉬나와 그의 절대적 부분들은 관념적 추론이나 헌애자가 아닌 자들에 의해 이해될 수 없다. 최고인격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순수한 헌애자의 지도를 받아 순수한 봉헌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고인격신의 진리는 항상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7.25)에서 “나함 쁘라까샤 사르바샤”라고 이미 언급되었다. 즉, 끄리쉬나는 아무에게나 현현하지 않으신다. 그 누구도 학위나 사색으로 절대신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끄리쉬나 의식과 봉헌에 실제로 종사하는 자만이 끄리쉬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대학 학위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끄리쉬나 과학에 정통한 자는 영계, 즉 끄리쉬나의 보금자리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된다. 브라흐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다. 봉헌은 실제하고, 봉헌이 있는 한  절대신과 헌애자, 그리고 봉헌의 과정이 존재한다. 이러한 지식은 해방을 이룬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해방은 물질적 삶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반한다. 영적 삶에서도 개별성과 각자의 구분이 있지만, 모두 순수한 끄리쉬나 의식 안에서 존재한다. 비샤떼(viśate)라는 말, 즉 “나에게 들어온다”를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같아지게 되는 일원론을 의미한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샤떼란 지고한 주의 보금자리에 들어가 자기 개별성을 잃지 않고 주와 교류하며 당신께 봉헌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초록 새가 초록 나무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은 그 나무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의 열매를 즐기기 위함이다. 비인성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강이 대양으로 흘러들어 합쳐지는 예를 든다. 이것이 비인성주의자들에게는 행복의 원천이 될지 모르나, 인성주의자들은 대양에 있는 수생동물처럼 자기 개별성을 유지한다. 우리는 깊은 대양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를 볼 수 있다. 대양의 표면에 관한 지식은 불충분하다. 우리는 대양 깊은 곳에 사는 여러 생물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순수한 봉헌으로 헌애자는 지고한 주의 초월적 자질들과 풍요로움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제11장에서 말했듯이 오직 봉헌으로써만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말이 여기에서 확증되었다. 봉헌으로 최고인격신을 이해할 수 있고 당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

물질적 개념에서 벗어난 브라흐마 부따 단계에 도달한 다음, 주에 관해 들음으로써 봉헌이 시작된다. 지고한 주에 관해 듣게 되면 저절로 브라흐마 부따 경지에 들어서고, 감각 만족을 위한 탐욕 및 욕망과 같은 물질적 더러움이 사라진다. 욕망과 욕구가 헌애자의 마음에서 사라져 주를 향한 봉헌에 더욱더 애착하게 되며, 그러한 애착으로 물질적 더러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바로 그러한 삶의 상태에서 헌애자는 지고한 주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스리마드 바가바땀의 진술이기도 하다. 해방을 이룬 후에도 박띠, 즉 초월적 봉사의 과정은 계속된다. 베단따 수뜨라(4.1.12)가 이것을 확증한다. “아쁘라야낫 따뜨라삐 히 드리쉬땀(ā-prāyaṇāt tatrāpi hi dṛṣṭam).” 이 말은 해방 후에도 봉헌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서 봉헌을 통한 진정한 해방이란 생명체의 고유한 정체성, 즉 자신의 근원적 위치 회복이라고 규정한다. 그 근원적 위치란 이미 설명한 바이다. 모든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파편적 부분이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근원적 위치는 주를 섬기는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이러한 봉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진정한 해방이란 삶의 잘못된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원문

사르바-까르마냐삐 사다 sarva-karmāṇy api sadā
꾸르바노 맏-뱌빠스라야하 kurvāṇo mad-vyapāśrayaḥ
맛-쁘라사다다밥노띠 mat-prasādād avāpnoti
샤스바땀 빠담 아뱌얌 śāśvataṁ padam avyayam

동의어

사르바: 모든, 까르마니: 행위, 아삐: 비록, 사다: 항상, 꾸르바나하: 수행하는, 맛-뱌빠스라야하: 나의 보호 아래, 맛-쁘라사닷: 나의 자비로, 아밥노띠: 달성하다, 샤스바땀: 영원, 빠담: 보금자리, 아뱌얌: 소멸하지 않는.

번역

나의 보호 안에 있는 순수한 헌애자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나의 은총으로 영원하며 소멸하지 않는 내 보금자리로 올 것이다.

주석

맏-뱌빠스라야하(mad-vyapāśrayaḥ)라는 말은 지고한 주의 보호 안에 있다는 뜻이다. 물질적 더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수한 헌애자는 지고한 주나 당신의 대리인인 영적 스승의 가르침대로 행동한다. 순수한 헌애자에게는 시간 제약이라는 것이 없다. 그는 항상, 하루 스물네 시간, 백 퍼센트 지고한 주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끄리쉬나 의식에 종사하고 있는 헌애자는 주께 아주 많이 소중하다. 모든 어려움에도 헌애자는 결국 초월적 보금자리 끄리쉬나로까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보장되었으며 이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이 지고한 왕국에는 변화라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영원하고 소멸하지 않으며 지식으로 가득하다.

원문

쩨따사 사르바-까르마니 cetasā sarva-karmāṇi
마이 산냐샤 맛-빠라하 mayi sannyasya mat-paraḥ
붇디-요감 우빠스리땨 buddhi-yogam upāśritya
맛-찟따 사따땀 바바 mac-cittaḥ satataṁ bhava

동의어

쩨따사: 지성으로, 사르바-까르마니: 모든 종류의 행위들, 마이: 나에게, 산냐샤: 버리는, 맛-빠라하: 내 보호 아래, 붇디-요감: 봉헌, 우빠스리땨: 은신하는, 맛-찟따하: 나에 관한 의식으로, 사따땀: 하루 스물네 시간, 바바: 단지 되어라.

번역

모든 행위를 하는 데 오직 나에게만 의존할 것이며 항상 나의 보호 안에서 일하라. 그러한 봉헌 속에서 나를 완전히 의식하라.

주석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종처럼 지고한 주의 지시대로만 행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종은 개인적 독립성이 없다. 그저 주인의 지시만 따를 뿐이다. 지고한 주인을 위해 일하는 종은 이득과 손실에 영향받지 않는다. 그저 주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고 있었지만, 끄리쉬나가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이 책에 있는 끄리쉬나의 지시와 끄리쉬나의 대리인의 지도에 따라 행동한다면 결과는 같을 것이다. 산스끄리뜨어 “맛-빠라하(mat-para)”라는 말이 이 절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은 오직 끄리쉬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삶에 다른 어떠한 목표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일하며 우리는 오직 끄리쉬나만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끄리쉬나께 이 특별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임명받았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끄리쉬나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완벽한 끄리쉬나 의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한 다음, 그 결과를 지고한 주께 바쳐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의무는 끄리쉬나 의식의 봉헌이 아니다. 우리는 끄리쉬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다. 그 끄리쉬나의 명령은 사제전수를 통해 영적 스승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영적 스승의 명령을 삶의 최우선 의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한 영적 스승을 얻을 수 있어 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면 끄리쉬나 의식으로 사는 삶의 완성이 보장된다.

원문

맛-찟따 사르바-두르가니 mac-cittaḥ sarva-durgāṇi
맛-쁘라사닷 따리샤시 mat-prasādāt tariṣyasi
아타 쩻 뜨밤 아항까란 atha cet tvam ahaṅkārān
나 스로샤시 비낭샤시 na śroṣyasi vinaṅkṣyasi

동의어

맛: 나의, 찟따하: 의식하는, 사르바: 모든, 두르가니: 장애, 맛-쁘라사닷: 나의 자비로, 따리샤시: 너는 극복할 것이다, 아타: 그러나, 쩻: 만약, 뜨밤: 너, 아항까랏: 거짓 자아로, 나 스로샤시: 듣지 않다, 비낭샤시: 너는 패배할 것이다.

번역

네가 나를 의식하게 되면 내 은총으로 속박된 삶의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의식하지 않고 네 거짓 자아를 통해 행동하며 나를 듣지 않으면 너는 길을 잃을 것이다.

주석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인 사람은 자기 존재가 떠맡고 있는 의무를 수행하는 데 지나친 걱정을 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모든 근심에서 벗어난 이러한 위대한 자유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 끄리쉬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끄리쉬나께서는 당신 친구의 안위를 항상 보살피고, 주를 기쁘게 하고자 하루 스물네 시간 열심히 일하는 당신 친구에게 당신을 준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육체적 개념에서 오는 거짓 자아에 절대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가 물질적 본성의 법칙에서 독립된 존재이며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해서도 안 된다. 모든 생명체는 이미 엄격한 물질의 법칙에 통제받고 있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자마자 해방을 이루게 되고 물질적 당혹에서 벗어나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자는 삶과 죽음의 대양 속, 물질적 소용돌이에서 길을 잃는다는 사실을 매우 주의 깊게 명심해야 한다. 속박된 영혼은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르지만,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자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우리 안에 계신 끄리쉬나를 통해 촉발되고 영적 스승을 통해 확증되기 때문이다.

원문

야다항까람 아스리땨 yad ahaṅkāram āśritya
나 욧샤 이띠 만야세 na yotsya iti manyase
미탸이샤 뱌바사야스 떼 mithyaiṣa vyavasāyas te
쁘라끄리띠스 뜨밤 니욕샤띠 prakṛtis tvāṁ niyokṣyati

동의어

얏: 만약, 아항까람: 거짓 자아의, 아스리땨: 은신하는, 나 욧셰: 나는 싸우지 않을 것이다, 이띠: 따라서, 만야세: 너는 생각하다, 미탸 에샤하: 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 뱌바사야하: 결심, 떼: 너의, 쁘라끄리띠히: 물질적 본성, 뜨밤: 너, 니욕샤띠: 종사할 것이다.

번역

네가 만약 나의 지시대로 행동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면, 너는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네 본성에 따라 너는 전쟁에 가담해야 하느니라.

주석

아르주나는 군인이었고, 끄샤뜨리야의 본성을 타고났다. 따라서 그의 자연스러운 의무는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짓 자아에 이끌려 자기 스승과 할아버지, 그리고 친구들을 죽임으로써 생기는 죄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실 아르주나는 자기가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 일의 옳고 그른 결과를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최고인격신께서 현장에서 싸움을 지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이것이 바로 속박된 영혼의 망각이다. 최고인격신께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해 가르침을 주시므로 우리는 삶의 완성을 달성하려면 끄리쉬나 의식으로 그것을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그 누구도 지고한 주께서 정하신 운명을 확인할 길이 없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지고한 주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최고인격신의 명령이나 절대신의 대리인인 영적 스승의 명령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저 없이 최고인격신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며, 그것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다.

원문

스바바바-제나 까운떼야 svabhāva-jena kaunteya
니받다 스베나 까르마나 nibaddhaḥ svena karmaṇā
까르뚬 넷차시 얀 모핫 kartuṁ necchasi yan mohāt
까리샤샤바쇼’삐 땃 kariṣyasy avaśo ’pi tat

동의어

스바바바-제나: 너의 고유한 본성을 타고난,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니받다하: 속박된, 스베나: 너 자신에 의해, 까르마나: 행위들, 까르뚬: 하다, 나: 아닌, 잇차시: 네가 좋아하다, 얏: 그것, 모핫: 환영으로, 까리샤시: 너는 할 것이다, 아바샤하: 뜻하지 않게, 아삐: 심지어, 땃: 그것.

번역

환영에 이끌려 너는 지금 내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타고난 고유한 본성의 힘에 이끌려 너는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어 있느니라, 오 꾼띠의 아들이여.

주석

지고한 주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면 자기가 처해 있는 물질적 양태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특정 물질적 양태의 영향에 좌우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지고한 주의 가르침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자는 영예롭게 된다.

원문

이스바라 사르바-부따남 īśvaraḥ sarva-bhūtānāṁ
흐릿-데셰’르주나 띠쉬타띠 hṛd-deśe ’rjuna tiṣṭhati
브라흐마얀 사르바-부따니 bhrāmayan sarva-bhūtāni
얀뜨라루다니 마야야 yantrārūḍhāni māyayā

동의어

이스바라하: 지고한 주, 사르바-부따남: 모든 생명체의, 흐릿-데셰: 가슴속에 있는,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띠쉬타띠: 거주하다, 브라흐마얀: 이동하게 하는, 사르바-부따니: 모든 생명체, 얀뜨라: 기계 위에, 아루다니: 위치한, 마야야: 물질적 에너지의 영향 아래.

번역

지고한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계시며, 오 아르주나, 물질적 에너지로 만들어진 기계 위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감독하느니라.

주석

아르주나는 최고의 아는 자가 아니므로 싸울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한 결정은 그의 제한된 분별력에 국한되어 있었다. 주 끄리쉬나께서는 개개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최고인격신, 즉 국부화된 초영혼인 끄리쉬나는 모든 생명체의 가슴속에 앉아 계시면서 지시를 내리고 계신다. 생명체는 몸을 바꾼 후에 자신의 과거 행위를 잊지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시는 초영혼은 모든 행위의 증인으로 남으신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모든 행위는 바로 이 초영혼이 지휘하고 있다. 생명체는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고 있으며, 초영혼의 지시로 물질적 에너지로 만들어진 육신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생명체가 특정 형태의 몸에 놓이자마자, 그 육신의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생명체인 운전자는 똑같다고 해도, 빠른 속력을 내는 차에 탄 자는 느린 차에 탄 자보다 더 빨리 갈 수 있다. 이처럼, 지고한 영혼의 명령으로 물질적 본성은 특정 형태의 몸을 특정한 생명체에 부여해 그의 과거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생명체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최고인격신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은 늘 주의 통제하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의무는 항복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다음 절의 가르침이다.

원문

땀 에바 샤라남 갓차 tam eva śaraṇaṁ gaccha
사르바-바베나 바라따 sarva-bhāvena bhārata
땃-쁘라사닷 빠람 샨띰 tat-prasādāt parāṁ śāntiṁ
스타남 쁘랍샤시 샤스바땀 sthānaṁ prāpsyasi śāśvatam

동의어

땀: 그에게, 에바: 분명히, 샤라남 갓차: 항복하다, 사르바-바베나: 모든 점에서, 바라따: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땃-쁘라사닷: 그의 은총으로, 빠람: 초월적인, 샨띰: 평화, 스타남: 보금자리, 쁘랍샤시: 너는 얻을 것이다, 샤스바땀: 영원한.

번역

오 바라따의 자손이여, 그에게 완전히 항복하여라. 그의 은총으로 너는 초월적 평화와 최상의, 그리고 영원한 보금자리를 얻을 것이니라.

주석

그러므로 생명체는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 계시는 최고인격신께 항복해야 하고, 그것이 이 물질적 존재의 모든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러한 항복으로 현생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 지고한 주께 도달하게 된다. 베다 문헌(리그베다 1.22.20)에서 초월적 세계를 “딷 비시노 빠라맘 빠담(tad viṣṇoḥ paramaṁ padam)”이라고 묘사한다. 창조된 모든 것은 절대신의 왕국이므로 물질적인 모든 것도 사실 영적이지만, 빠라맘 빠담은 영계, 즉 바이꾼타로 불리는 영원한 보금자리를 특별히 의미한다.

바가바드 기따 제15장에서 “사르바샤 짜함 흐리디 산니비쉬따하(sarvasya cāhaṁ hṛdi sanniviṣṭaḥ)”라고 말했다. 이 말은 주께서는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 앉아 계신 초영혼께 항복해야 한다는 권고는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께 항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르주나가 끄리쉬나를 최고인격신,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최고 보금자리로 받아들인 이유는 그의 개인적 경험 때문만이 아니라 나라다, 아시따, 데발라, 그리고 비아사 같은 위대한 권위자의 증명 때문이다.

원문

이띠 떼 갸남 아캬땀 iti te jñānam ākhyātaṁ
구햗 구햐따람 마야 guhyād guhya-taraṁ mayā
비므리샤이따다세쉐나 vimṛśyaitad aśeṣeṇa
야텟차시 따타 꾸루 yathecchasi tathā kuru

동의어

이띠: 따라서, 떼: 네게, 갸남: 지식, 아캬땀: 설명한, 구햣: 비밀보다, 구햐-따람: 훨씬 더 비밀의, 마야: 나에 의해, 비므리샤: 숙고하다, 에땃: 이것에 대해, 아세쉐나: 완전히, 야타: 그렇게, 잇차시: 네가 좋아하다, 따타: 그것, 꾸루: 행하다.

번역

이로써 나는 너에게 더 비밀스러운 지식을 설명하였다. 이것을 완전히 숙고한 후, 네가 원하는 바대로 하여라.

주석

주께서 이미 브라흐마 부따에 관한 지식을 아르주나에게 설명하셨다. 브라흐마 부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즐겁고, 결코 한탄하거나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끄리쉬나께서는 초영혼에 관한 지식도 밝히신다. 이것 역시 브라흐만 지식, 즉 브라흐만에 관한 지식이지만 더 높은 지식이다.

여기에서 야텟차시 따타 꾸루, “네가 원하는 바대로 하여라”라는 말은 절대신께서는 생명체의 작은 독립성에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주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를 모두 설명하셨다. 아르주나에게 전해진 최고의 충고는 그의 가슴 안에 계신 초영혼께 항복하라는 것이다. 옳은 분별력으로 우리는 초영혼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 삶의 가장 완벽한 경지인 끄리쉬나 의식으로 항상 지낼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르주나는 최고인격신께 직접 싸우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최고인격신께의 항복은 생명체에게 가장 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자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항복하기 전 우리의 지성이 닫는 한, 이 주제에 관해 숙고해도 좋다. 그것이 최고인격신의 가르침을 받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끄리쉬나의 진정한 대리인 영적 스승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원문

사르바-구햐따맘 부야하 sarva-guhyatamaṁ bhūyaḥ
스리누 메 빠라맘 바짜하 śṛṇu me paramaṁ vacaḥ
이쉬또’시 메 드리담 이띠 iṣṭo ’si me dṛḍham iti
따또 박샤미 떼 히땀 tato vakṣyāmi te hitam

동의어

사르바-구햐-따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것, 부야하: 다시, 스리누: 그저 듣거라, 메: 나로부터, 빠라맘: 최상의, 바짜하: 가르침, 이쉬따하 아시: 너는 소중하다, 메: 나에게, 드리담: 아주, 이띠: 따라서, 따따하: 그러므로, 박샤미: 나는 말하고 있다, 떼: 너의, 히땀: 이득.

번역

너는 나의 아주 소중한 친구이기에 최상의 가르침, 즉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지식을 네게 지금 말하고 있느니라. 이것은 네게 득이 되므로 나에게서 잘 들어라.

주석

주께서 아르주나에게 비밀스러운 지식(브라흐만에 관한 지식)과 더 비밀스러운 지식(모든 이의 가슴속에 계신 초영혼에 관한 지식), 그리고 가장 비밀스러운 지식(그저 최고인격신께 항복하는 것)을 주셨다. 제9장의 마지막에 주께서 만-마나하, “그저 늘 나를 생각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바가바드 기따 가르침의 핵심을 강조하시려고 똑같은 가르침이 여기에 되풀이되고 있다. 보통 사람은 이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끄리쉬나께 실제로 아주 소중한 순수한 헌애자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베다 문헌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점에 관해 끄리쉬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지식의 가장 핵심적 부분이고, 이것은 아르주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알아야 하는 지식이다.

원문

만-마나 바바 맏-박또 man-manā bhava mad-bhakto
맏-야지 맘 나마스꾸루 mad-yājī māṁ namaskuru
맘 에바이샤시 사땀 떼 mām evaiṣyasi satyaṁ te
쁘라띠자네 쁘리요’시 메 pratijāne priyo ’si me

동의어

맛-마나하: 나를 생각하는, 바바: 그저 되어라, 맛-박따하: 나의 헌애자, 맛-야지: 나의 숭배자, 맘: 나에게, 나마스꾸루: 경배하다, 맘: 나에게, 에바: 분명히, 에샤시: 너는 될 것이다, 사땸: 진정으로, 떼: 네게, 쁘라띠자네: 내가 약속한다, 쁘리야하: 소중한, 아시: 너는, 메: 나에게.

번역

항상 나를 생각하고 내 헌애자가 되어 나를 숭배하며, 내게 경의를 표하라. 그러면 너는 틀림없이 나에게로 올 것이다. 너는 나의 아주 소중한 친구이기에 내가 이것을 약속하느니라.

주석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에 해당하는 지식은 우리가 끄리쉬나의 헌애자가 되어야 하며 항상 그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표면적인 명상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항상 끄리쉬나를 생각할 기회가 있도록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 일상이 항상 끄리쉬나와 관련되도록 행동해야 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오직 끄리쉬나만을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한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자는 누구나 끄리쉬나와 직접 얼굴을 맞이할 수 있는 교류가 가능한 끄리쉬나 보금자리에 분명히 돌아갈 수 있다고 주께서 약속하신다. 이것은 아르주나에게 전해진 가장 비밀스러운 지식으로, 그가 끄리쉬나의 소중한 친구이기에 전해진 것이다. 아르주나의 길을 따르는 누구라도  끄리쉬나의 소중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아르주나와 똑같은 완성을 달성할 수 있다.

이러한 말은 우리의 마음을 두 손으로 피리를 불며, 머리칼에는 공작 깃털을 꽂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의 푸른 빛나는 소년 끄리쉬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브라흐마 삼히따와 다른 문헌들에 끄리쉬나에 관한 묘사가 드러난다. 우리는 원초적 신, 끄리쉬나의 원래 모습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주의 다른 형상에 마음을 돌려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비쉬누, 나라야나, 라마, 바라하 등의 여러 모습을 하시지만 헌애자는 아르주나 앞에 현현하신 주의 형상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끄리쉬나의 형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의 지식이고, 아르주나가 끄리쉬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기에 이것이 그에게 밝혀졌다.

원문

사르바-다르만 빠리땨쟈 sarva-dharmān parityajya
에깜 샤라남 브라자 mām ekaṁ śaraṇaṁ vraja
아함 뜨밤 사르바-빠뻬뵤 ahaṁ tvāṁ sarva-pāpebhyo
목샤이샤미 슈짜하 mokṣayiṣyāmi mā śucaḥ

동의어

사르바-다르만: 모든 형태의 종교, 빠리땨쟈: 버리는, 맘: 나에게, 에깜: 오직, 샤라남: 항복을 위해, 브라자: 가다, 아함: 나는, 뜨밤: 너, 사르바: 모든, 빠뻬뱌하: 죄업으로부터, 목샤이샤미: 구할 것이다, 마: 말라, 슈짜하: 걱정하다.

번역

모든 형태의 종교를 버리고 그저 나에게 항복하여라. 내가 모든 죄업에서 너를 구할 것이니라. 두려워 말라.

주석

주께서 다양한 지식과 종교의 과정, 즉 지고의 브라흐만에 관한 지식, 초영혼에 관한 지식, 사회적 삶의 서로 다른 질서와 신분, 버리는 삶의 질서에 관한 지식, 초연함에 관한 지식, 감각과 마음의 통제, 그리고 명상에 관한 지식 등을 설명하셨다. 당신은 여러 다른 형태의 종교에 관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셨다. 이제 바가바드 기따를 요약하시면서 아르주나에게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과정을 버리고 그저 끄리쉬나께 항복하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 항복이 아르주나를 모든 죄업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주께서 친히 그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제7장에서 모든 죄업에서 벗어난 자만이 주 끄리쉬나를 향한 숭배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누군가는 죄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항복의 과정을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기에서 말하기를, 설령 모든 죄업에서 벗어나지 않았더라도, 그저 스리 끄리쉬나께 항복함으로써 우리는 저절로 죄업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자기가 지은 죄업에서 벗어나려고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주저 없이 끄리쉬나를 모든 생명체의 최고 구원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는 그에게 항복해야 한다.

끄리쉬나께 항복하는 과정이 하리 박띠 빌라사(Hari-bhakti-vilāsa, 11.676)에 설명되어 있다.

아누쿨야샤 산깔빠하 ānukūlyasya saṅkalpaḥ
쁘라띠꿀야샤 바르자남 prātikūlyasya varjanam
락쉬샤띠띠 비스바소 rakṣiṣyatīti viśvāso
곱뜨릿베 바라남 따타 goptṛtve varaṇaṁ tathā
아뜨마-닉쉐빠-까르빤예 ātma-nikṣepa-kārpaṇye
삳-비다 샤라나가띠히 ṣaḍ-vidhā śaraṇāgatiḥ

봉헌의 과정에 따르면, 주의 봉헌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게 이끌어 주는 종교 원칙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특정한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의무 수행 때문에 끄리쉬나 의식이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의 모든 행위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된다. 끄리쉬나 의식의 완성 단계로 이끌어 주지 못하는 어떠한 것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끄리쉬나께서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어떻게 몸과 마음을 유지해야 할지 근심할 필요가 없다. 끄리쉬나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무력하다고 항상 생각해야 하고 오직 끄리쉬나만이 우리가 삶의 진전을 이루게 하는 기본이라고 여겨야 한다.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으로 주를 향한 봉헌에 진지하게 종사하는 즉시, 인간은 물질적 본성의 모든 오염에서 벗어나게 된다. 세상에는 여러 다른 종교 과정과 지식의 배양, 신비주의 요가 과정 안의 명상 등을 통한 여러 정화 과정이 있지만, 끄리쉬나께 항복한 자는 너무나 많은 방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저 끄리쉬나께 항복하는 것만으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즉시 끄리쉬나 의식으로 나아감으로써 모든 죄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끄리쉬나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혹되어야 한다. 주는 모든 면에서 매력적이므로 당신의 이름은 끄리쉬나다. 아름답고, 강력하고, 전능하신 끄리쉬나의 모습에 끌리는 자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초월주의자가 있고, 그중 일부는 비인성적 브라흐만 측면에 끌리고, 다른 일부는 초영혼의 측면 등에 끌리지만, 최고인격신의 인격적 특징, 특히 끄리쉬나로서의 최고인격신에게 매혹된 자가 가장 완벽한 초월주의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완전한 의식으로 끄리쉬나께 봉헌하는 것이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의 지식이며, 바로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 전체의 핵심이다. 까르마 요기, 경험주의 철학자, 신비주의자,  그리고 헌애자들 모두 초월주의자로 불리지만 순수한 헌애자가 그중 최고다. 여기에 쓰인 “마 슈짜하”라고 특정적으로 쓰인 말, 즉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라는 말이 지닌 의미는 아주 크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종교를 버리고 그저 끄리쉬나께 항복할 수 있는지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러한 걱정은 쓸모없다는 뜻이다.

원문

이담 떼 나따빠스까야 idaṁ te nātapaskāya
나박따야 까다짜나 nābhaktāya kadācana
나 짜슈스루샤베 바쨤 na cāśuśrūṣave vācyaṁ
나 짜 맘 요’뱌수야띠 na ca māṁ yo ’bhyasūyati

동의어

이담: 이것, 떼: 너에 의해, 나: 결코, 아따빠스까야: 고행하지 않는 자에게, 나: 결코, 아박따야: 헌애자가 아닌 자에게, 까다짜나: 어떠한 때라도, 나: 결코, 짜: 또한, 아슈스루샤베: 봉헌에 종사하지 않는 자에게, 바쨤: 말해진, 나: 결코, 짜: 또한, 맘: 나에게, 야하: 누구나, 아뱌수야띠: 시기하는.

번역

이 비밀스러운 지식은 고행하지 않거나 헌신하지 않거나 봉헌에 종사하지 않거나 나를 시기하는 자에게는 절대 설명될 수 없느니라.

주석

종교 과정의 고행을 경험하지 않은 자, 끄리쉬나 의식으로 봉헌을 행한 적 없는 자, 순수한 헌애자를 섬긴 적 없는 사람들과 특히 끄리쉬나를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거나 끄리쉬나의 위대함을 시기하는 자들에게 이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의 지식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끄리쉬나를 시기하는 악마 같은 자들이나 끄리쉬나를 다른 방식으로 숭배하는 자들이 돈을 벌려고 바가바드 기따를 직업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끄리쉬나를 실제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형태의 바가바드 기따 논평을 피해야 한다. 사실 바가바드 기따의 목적은 그러한 향락적인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다. 설령 향락적이지 않고 베다 경전들의 규율을 엄격히 따른다고 하더라도, 헌애자가 되지 않으면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끄리쉬나의 헌애자라고 자칭하더라도 끄리쉬나 의식 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그 역시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가 가장 높으며, 그 누구도 당신보다 높거나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끄리쉬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끄리쉬나를 시기한다. 그러한 자들은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할 수 없기에 바가바드 기따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 믿음 없는 자들이 바가바드 기따와 끄리쉬나를 이해할 가능성은 없다. 순수한 헌애자의 권위를 통해 끄리쉬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논평하려 해서는 안 된다.

원문

야 이담 빠라맘 구햠 ya idaṁ paramaṁ guhyaṁ
맏-박떼슈바비다샤띠 mad-bhakteṣv abhidhāsyati
박띰 마이 빠람 끄릿바 bhaktiṁ mayi parāṁ kṛtvā
맘 에바이샤땨삼샤야하 mām evaiṣyaty asaṁśayaḥ

동의어

야하: 누구나, 이담: 이것, 빠라맘: 가장, 구햠: 은밀한 비밀, 맛: 내 것의, 박떼슈: 헌애자들 가운데, 아비다샤띠: 설명하다, 박띰: 봉헌, 마이: 나에게, 빠람: 초월적인, 끄릿바: 행하는, 맘: 나에게, 에바: 분명히, 에샤띠: 오다, 아삼샤야하: 의심의 여지 없이.

번역

이 최고의 비밀을 헌애자에게 설명하는 자에게는 순수한 봉헌이 보장되며 결국 나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주석

일반적으로 바가바드 기따는 헌애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헌애자가 아니면 끄리쉬나도 바가바드 기따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끄리쉬나와 바가바드 기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바가바드 기따를 설명하려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바가바드 기따는 끄리쉬나를 최고인격신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헌애자들을 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철학적 관념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가바드 기따를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보여주려는 자는 누구나 봉헌에 앞서갈 것이고 순수한 봉헌의 삶에 이를 것이다. 그러한 순수한 봉헌의 결과로 그는 틀림없이 영원한 고향, 절대신께로 돌아갈 것이다.

원문

나 짜 따스만 마누쉐슈 na ca tasmān manuṣyeṣu
까스찐 메 쁘리야-끄릿따마하 kaścin me priya-kṛttamaḥ
바비따 나 짜 메 따스맏 bhavitā na ca me tasmād
안야 쁘리야-따로 부비 anyaḥ priya-taro bhuvi

동의어

나: 결코, 짜: 그리고, 따스맛: 그보다, 마누쉐슈: 사람들 가운데, 까스찟: 누구나, 메: 나에게, 쁘리야-끄릿-따마하: 더 소중한, 바비따: 될 것이다, 나: 아니다, 짜: 그리고, 메: 나에게, 따스맛: 그보다, 안야하: 또 다른, 쁘리야-따라하: 더 소중한, 부비: 이 세상에서.

번역

이 세상에서 그보다 나에게 더 소중한 종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원문

아뎨샤떼 짜 야 이맘 adhyeṣyate ca ya imaṁ
다르먐 삼바담 아바요호 dharmyaṁ saṁvādam āvayoḥ
갸나-야계나 떼나함 jñāna-yajñena tenāham
이쉬따 샴 이띠 메 마띠히 iṣṭaḥ syām iti me matiḥ

동의어

아뎨샤떼: 공부할 것이다, 짜: 또한, 야하: 하는 자, 이맘: 이, 다르먐: 신성한, 삼바담: 대화, 아바요호: 우리의, 갸나: 지식의, 야계나: 희생으로, 떼나: 그에 의한, 아함: 나는, 이쉬따하: 숭배하는, 샴: 될 것이다, 이띠: 따라서, 메: 나의, 마띠히: 의견.

번역

그리고 너와 나의 이 신성한 대화를 공부하는 자는 그의 지성으로 나를 숭배하는 것임을 내가 선언하노라.

원문

스랃다반 아나수야스 짜 śraddhāvān anasūyaś ca
스리누야다삐 요 나라하 śṛṇuyād api yo naraḥ
소’삐 묵따 슈발 로깐 so ’pi muktaḥ śubhāḻ lokān
쁘랍누얏 뿐야-까르마남 prāpnuyāt puṇya-karmaṇām

동의어

스랃다-반: 믿음 있는, 아나수야하: 시기하지 않는, 짜: 그리고, 스리누얏: 듣다, 아삐: 분명히, 야하: 하는 자, 나라하: 인간, 사하: 그는, 아삐: 또한, 묵따하: 해방되는, 슈반: 상서로운, 로깐: 행성, 쁘랍누얏: 달성하다, 뿐야-까르마남: 경건한 자들의.

번역

시기심 없이 믿음을 가지고 듣는 자는 죄업에서 벗어나며, 경건한 자들이 거주하는 상서로운 행성들에 이를 것이니라.

주석

이 장의 제67절에서, 주를 시기하는 자들에게 기따를 이야기하는 것을 주께서 엄격히 금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바가바드 기따는 오직 헌애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헌애자가 공개 강연을 할 때, 그곳에 참가한 모든 학생이 헌애자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면 왜 공개 강연을 하는가? 여기에서 설명하기를, 모든 사람이 헌애자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끄리쉬나를 시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진정한 헌애자에게서 주에 관해 듣게 되면 즉시 모든 죄업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다음에는 고결한 사람들만이 거주하는 행성 체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저 바가바드 기따를 들음으로써, 순수한 헌애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마저도 고결한 행위의 결과를 얻게 된다. 따라서 주의 순수한 헌애자는 모든 사람에게 죄업에서 벗어나 주의 헌애자가 될 기회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죄업에서 벗어난 자들과 고결한 자들은 아주 쉽게 끄리쉬나 의식을 받아들인다. “뿐야-까르마남”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베다 문헌들에 언급된 아스바메다-야갸(aśvamedha-yajña) 같은 큰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봉헌을 수행하고 있지만 순수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고결한 자들은 두르바 마하라자(Dhruva Mahārāja)가 거주하는 두르바로까, 즉 북극성에 이르게 된다. 두르바 마하라자는 주의 위대한 헌애자며이며, 북극성이라고 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행성을 갖고 있다.

원문

깟찓 에땃츠루땀 빠르타 kaccid etac chrutaṁ pārtha
뜨바야이까그레나 쩨따사 tvayaikāgreṇa cetasā
깟찓 아갸나-삼모하하 kaccid ajñāna-sammohaḥ
쁘라나쉬따스 떼 다난자야 praṇaṣṭas te dhanañ-jaya

동의어

깟찟: 인지 아닌지, 에땃: 이것, 스루땀: 듣다, 빠르타: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뜨바야: 너에 의해, 에까-아그레나: 완전히 집중해서, 쩨따사: 마음으로, 깟찟: 인지 아닌지, 아갸나: 무지의, 삼모하: 환영, 쁘라나쉬따하: 떨쳐버리다, 떼: 너의, 다난자야: 오 부의 정복자여(아르주나).

번역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오 부의 정복자여, 너는 이것을 주의 깊게 들었느냐? 이제 너의 무지와 환영이 사라졌느냐?

주석

주께서 아르주나의 영적 스승 역할을 맡고 계신다. 따라서 아르주나에게 바가바드 기따 전체를 올바른 관점에서 이해했는지 묻는 것은 당신의 의무이다. 주께서는 아르주나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다시 설명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필요하다면 바가바드 기따 전체를 반복하셨을 것이다. 사실 끄리쉬나와 같은 진정한 영적 스승이나 당신의 대리인에게서 바가바드 기따를 듣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모든 무지가 사라짐을 느낄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보통책이 아니라 최고인격신께서 하신 말씀이다. 끄리쉬나나 당신의 진정한 영적 대리인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들을 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은 반드시 해방을 이루어 무지의 어둠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원문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나쉬또 모하 스므리띠르 랍다 naṣṭo mohaḥ smṛtir labdhā
뜨밧-쁘라사단 마야쮸따 tvat-prasādān mayācyuta
스티또’스미 가따-산데하하 sthito ’smi gata-sandehaḥ
까리쉐 바짜남 따바 kariṣye vacanaṁ tava

동의어

아르주나 우바짜: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나시따하: 떨쳐버린, 모하: 환영, 스므리띠히: 기억, 랍다: 다시 얻다, 뜨밧-쁘라사닷: 당신의 자비로, 마야: 나의, 아쮸따: 오 오류가 없는 끄리쉬나여, 스티따하: 위치한, 아스미: 나는, 가따: 제거한, 산데하: 모든 의심, 까리쉐: 저는 수행할 것입니다, 바짜남: 명령, 따바: 당신의.

번역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나의 소중한 끄리쉬나여, 오 오류 없는 분이시여, 제 환영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당신의 자비로 저는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저는 이제 의심에서 벗어나 확고하며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석

아르주나로 대표되는 생명체의 근원적 위치는 지고한 주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자기 규율을 의미한다.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 생명체의 실제적 위치는 지고한 주의 영원한 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원칙을 잊고 생명체는 물질적 본성에 속박되지만, 지고한 주께 봉헌함으로써 절대신의 해방된 종이 된다. 생명체의 근원적 위치는 종이다, 생명체는 환영의 마야이든 지고한 주이든 둘 중 하나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만약 지고한 주를 섬긴다면 생명체는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만, 환영의 외적 에너지를 섬기고자 하면 반드시 속박될 것이다. 환영에 빠져 생명체들은 이 물질계 안에서 섬기고 있다.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속박되어 생명체는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환영이라고 한다. 해방을 이룰 때, 이 환영은 사라지고 자발적으로 절대자에게 항복해 주의 뜻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마지막 환영, 즉 생명체를 옭아매는 마야의 최후의 덫은 자기가 바로 신이라는 명제이다. 생명체는 자기가 더는 속박된 영혼이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어리석게도 자기가 신이라면 어떻게 의문에 빠질 수 있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가 신이라는 생각이 환영의 마지막 덫이다. 사실 이러한 환영 에너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를 이해하고, 당신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행동하는 것이다.

“모하”라는 말이 이 절에서 아주 중요하다. 모하란 지식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진정한 지식이란 모든 생명체가 주의 영원한 종임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생명체는 이러한 위치를 거부하고 자기는 종이 아니라 이 물질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물질적 본성을 다스리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환영이다. 이 환영은 주의 자비나 순수한 헌애자의 자비로 극복될 수 있다. 이 환영을 극복하게 될 때,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하는 데 동의하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이란 끄리쉬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의 외적 에너지 때문에 환영에 빠진 속박된 영혼은 지고한 주가 지식이 가득하며 모든 것의 소유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주께서 원하시는 어떤 것이든 당신의 헌애자에게 선사하실 수 있다. 주는 모든 이의 친구이며 특히 당신의 헌애자에게 특히 이끌리신다. 주는 당신의 물질적 본성과 모든 생명체의 통제자이시다. 또한 소멸하지 않는 시간의 통제자이며 모든 풍요와 능력으로 가득하시다. 최고인격신은 심지어 당신을 헌애자에게 주실 수도 있다. 주를 모르는 자는 환영의 영향 아래 있고 그런 자는 헌애자가 아닌 환영의 종이 된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최고인격신께 바가바드 기따를 들은 후 모든 환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끄리쉬나가 자기 친구일 뿐만 아니라 최고인격신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끄리쉬나를 진실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따를 공부하는 목적은 끄리쉬나를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될 때, 자연히 끄리쉬나께 항복하게 된다. 아르주나가 전쟁이 불필요한 인구를 줄이기 위한 끄리쉬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끄리쉬나의 뜻에 따라 싸우기로 했다. 그는 최고인격신의 명령에 따라 싸우기 위해 다시 자신의 무기인 활과 화살을 집어 들었다.

원문

산자야 우바짜 sañjaya uvāca
이땨함 바아수데바샤 ity ahaṁ vāsudevasya
빠르타샤 짜 마하뜨마나하 pārthasya ca mahātmanaḥ
삼바담 이맘 아스라우샴 saṁvādam imam aśrauṣam
아드부땀 로마-하르샤남 adbhutaṁ roma-harṣaṇam

동의어

산자야 우바짜: 산자야가 말했다, 이띠: 따라서, 아함: 나는, 바아수데바샤: 끄리쉬나의, 빠르타샤: 그리고 아르주나, 짜: 또한, 마하-아뜨마나하: 위대한 영혼의, 삼바담: 토론, 이맘: 이것, 아스라우샴: 들었다, 아드부땀: 멋진, 로마-하르샤남: 머리칼을 쭈뼛 서게 하는.

번역

산자야가 말했다: 두 위대한 영혼 끄리쉬나와 아르주나의 이러한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너무나 훌륭해 제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있습니다.

주석

바가바드 기따의 서두에 드리따라쉬뜨라는 그의 비서관 산자야에게 “꾸룩쉐뜨라 전쟁터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라고 질문했다. 자기 영적 스승, 비아사의 은총으로 산자야의 가슴속에 이 모든 가르침이 연결되었다. 따라서 그는 전장의 주제를 설명할 수 있었다. 두 위대한 영혼이 나눈 이 중요한 대화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경이롭다. 이것이 경이로운 또 다른 이유는 최고인격신께서 직접 당신과 당신의 에너지에 관해 주의 위대한 헌애자이자 한 생명체인 아르주나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끄리쉬나를 이해하기 위해 아르주나의 발자국을 따른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하고 성공적일 것이다. 산자야는 이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대화를 드리따라쉬뜨라에게 전했다. 이제 끄리쉬나와 아르주나가 계신 곳은 어디든 승리가 따른다는 결론이 났다.

원문

비아사-쁘라사닷 츠루따반 vyāsa-prasādāc chrutavān
에딷 구햠 아함 빠람 etad guhyam ahaṁ param
요감 요게스바랏 끄리쉬낫 yogaṁ yogeśvarāt kṛṣṇāt
삭샷 까타야따 스바얌 sākṣāt kathayataḥ svayam

동의어

비아사-쁘라사닷: 비아사데바의 자비로, 스루따반: 들었다, 에땃: 이것, 구햠: 비밀스러운, 아함: 나는, 빠람: 최상의, 요감: 신비주의, 요가-이스바랏: 모든 신비주의의 최고 스승에게서, 끄리쉬낫: 끄리쉬나로부터, 삭샷: 직접, 까타야따하: 말하는, 스바얌: 친히.

번역

비아사의 자비로 모든 신비주의 최고 스승인 끄리쉬나께서 친히 아르주나에게 말씀하시는 이 가장 비밀스러운 대화를 직접 들었습니다.

주석

비아사는 산자야의 영적 스승이며, 산자야가 최고인격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비아사의 자비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힘으로 직접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스승이라는 매체를 통해 끄리쉬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 스승은 투명한 매체와 같아 그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직접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사제 전수의 신비다. 영적 스승이 진짜면 우리는 아르주나가 들은 것처럼 바가바드 기따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신비주의자와 요기가 많이 있지만, 끄리쉬나가 모든 요가 체계의 스승이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명백히 드러난 끄리쉬나의 가르침은 “끄리쉬나께 항복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자가 가장 높은 요기이다. 이것은 제6장의 마지막 절에서 확증되었다. “요기남 아삐 사르베샴(Yoginām api sarveṣām).

나라다는 끄리쉬나의 직계 제자이며 비아사의 영적 스승이다. 그러므로 비아사는 사제 전수 계보에 있으므로 아르주나처럼 진짜이다. 산자야는 비아사의 직계 제자이다. 그러므로 비아사의 은총으로 산자야의 감각은 정화되어 끄리쉬나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끄리쉬나께 직접 듣는 자는 이 비밀스러운 지식을 이해할 수 있다. 사제 전수의 계보를 따르지 않는 자는 끄리쉬나를 들을 수 없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의 지식은 항상 불완전하다.

모든 종류의 요가 체계, 즉 까르마 요가, 갸나 요가, 그리고 박띠 요가 모두 바가바드 기따에 설명되었다. 끄리쉬나는 이러한 모든 신비주의의 최고 스승이다. 아르주나가 끄리쉬나께 직접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행운이었던 것처럼, 산자야 역시 비아사의 은총으로 끄리쉬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끄리쉬나께 직접 듣는 것과 비아사와 같은 진정한 영적 스승을 통해 끄리쉬나를 듣는 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영적 스승 역시 비아사데바의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베다 체계에 따르면 영적 스승의 생신 때 제자들이 모여 비아사-뿌자(Vyāsa-pūjā)라고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원문

라잔 삼스므리땨 삼스므리땨 rājan saṁsmṛtya saṁsmṛtya
삼바담 이맘 아드부땀 saṁvādam imam adbhutam
께샤바르주나요 뿐얌 keśavārjunayoḥ puṇyaṁ
흐리샤미 짜 무후르 무후후 hṛṣyāmi ca muhur muhuḥ

동의어

라잔: 오 왕이시여, 삼스므리땨: 기억하는, 삼스므리땨: 기억하는, 삼바담: 메시지, 이맘: 이것, 아드부땀: 경이로운, 께샤바: 주 끄리쉬나의, 아르주나요호: 그리고 아르주나, 뿐얌: 경건한, 흐리샤미: 나는 기쁨을 얻는다, 짜: 또한, 무후 무후후: 반복해서.

번역

오 왕이시여, 저는 끄리쉬나와 아르주나의 이 경이롭고 신성한 대화를 거듭 떠올림으로써 매 순간 전율하는 듯한 기쁨을 느낍니다.

주석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초월적이므로 아르주나와 끄리쉬나의 주제에 정통하게 되는 자는 누구나 고결해지며, 그러한 대화를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초월적 위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올바른 근원, 즉 끄리쉬나로부터 직접 기따를 듣는 자는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을 얻게 된다. 끄리쉬나 의식의 결과는 점점 더 깨달음을 얻게 되며, 잠깐이 아닌 매 순간 전율을 느끼는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원문

땃 짜 삼스므리땨 삼스므리땨 tac ca saṁsmṛtya saṁsmṛtya
루빰 아땯부땀 하레헤 rūpam aty-adbhutaṁ hareḥ
비스마요 메 마한 라잔 vismayo me mahān rājan
흐리샤미 짜 뿌나 뿌나하 hṛṣyāmi ca punaḥ punaḥ

동의어

땃: 그것, 짜: 또한, 삼스므리땨: 기억하는, 삼스므리땨: 기억하는, 루빰: 형상, 아띠: 크게, 아드부땀: 훌륭한, 하레헤: 주 끄리쉬나의, 비스마야하: 경이로움, 메: 나의, 마한: 위대한, 라잔: 오 왕이시여, 흐리샤미: 나는 즐기고 있다, 짜: 또한, 뿌나 뿌나하: 계속해서.

번역

오 왕이시여, 저는 주 끄리쉬나의 경이로운 형상을 기억할수록 점점 더 경탄하게 되며, 계속해서 기쁨을 느낍니다.

주석

비아사의 은총으로 산자야 역시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보여주신 우주적 형상을 볼 수 있었던 듯하다. 물론, 주 끄리쉬나께서 그러한 형상을 전에는 보여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오직 아르주나에게만 드러내셨지만 몇몇 위대한 헌애자들도 끄리쉬나의 우주적 형상이 아르주나에게 드러났을 때, 그것을 보았고 비아사도 그중 한 명이다. 비아사는 주의 위대한 헌애자 중 하나며 끄리쉬나의 강력한 화신으로 여겨진다. 비아사는 이것을 자신의 제자 산자야에게 드러냈고, 산자야는 아르주나가 본 끄리쉬나의 경이로운 형상을 기억함으로써 계속해서 즐거움을 느꼈다.

원문

야뜨라 요게스바라 끄리쉬노 yatra yogeśvaraḥ kṛṣṇo
야뜨라 빠르토 다누르-다라하 yatra pārtho dhanur-dharaḥ
따뜨라 스리르 비자요 부띠르 tatra śrīr vijayo bhūtir
드루바 니띠르 마띠르 마마 dhruvā nītir matir mama

동의어

야뜨라: 어디에, 요가-이스바라하: 요가의 최고 스승, 끄리쉬나하: 주 끄리쉬나, 야뜨라: 어디에, 빠르타하: 쁘리타의 아들, 다누후-다라하: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니는 자, 따뜨라: 그곳에, 스리히: 풍요로움, 비자야하: 승리, 부띠히: 놀라운 힘, 드루바: 확실한, 니띠히: 도덕성, 마띠히 마마: 나의 의견.

번역

모든 신비론자의 최고 스승, 끄리쉬나가 계신 곳은 어디에나, 그리고 최고의 궁수 아르주나가 가는 곳은 어디에나 반드시 풍요, 승리, 놀라운 힘과 도덕성이 함께 따릅니다. 이것이 제 의견입니다.

주석

바가바드 기따는 드리따라쉬뜨라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그는 비쉬마, 드로나, 까르나와 같은 위대한 전사의 지원을 받는 자기 아들의 승리를 희망했다. 그는 승리가 자기 아들 편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전쟁터의 상황을 설명한 다음 산자야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승리를 꿈꾸고 있지만, 제 의견으로는 끄리쉬나와 아르주나가 계신 곳에 모든 행운이 따를 것입니다.” 그는 드리따라쉬뜨라에게 자기 아들 측의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확언했다. 아르주나측의 승리가 확실한 이유는 끄리쉬나가 계시기 때문이었다. 끄리쉬나가 아르주나를 위해 마부 역할을 받아들인 것은 풍요로움의 또 다른 표시이다. 끄리쉬나는 모든 풍요로 가득하시고 버림은 그중의 하나다. 그러한 버림의 예가 많이 있고, 끄리쉬나는 이 버림의 최고 스승이시다.

전쟁은 사실 듀로다나와 유디쉬티라 사이에 벌어졌다. 아르주나는 큰형, 유디쉬티라를 대신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끄리쉬나와 아르주나가 유디쉬티라 편이었기에 유디쉬티라의 승리는 확실했다. 그 전쟁은 누가 세상을 통치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산자야는 권력이 유디쉬티라에게 넘어갈 것을 예견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유디쉬티라는 더더욱 번영하리라는 것도 여기에서 예견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정의롭고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엄격한 도덕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바가바드 기따를 전쟁터에서 벌어진 두 친구 간의 대화라고 간주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대화록이 경전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자들은 끄리쉬나가 아르주나가 싸우도록 부추겼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라고 항의할지도 모르지만, 벌어진 상황의 진실성이 분명히 규명되었다. 바가바드 기따는 도덕성에 관한 최고의 가르침이다. 최고의 도덕적 교훈은 제9장 34절에 명시되었다. “만-마나 맏-박따하.” 우리는 반드시 끄리쉬나의 헌애자가 되어야 하며, 모든 종교의 핵심은 끄리쉬나께 항복하는 것이다(사르바-다르만 빠리땨쟈 맘 에깜 샤라남 브라자). 바가바드 기따의 가르침은 종교와 도덕성의 최고 과정이다. 다른 여러 과정은 인간을 정화하게 하거나 이 과정으로 인도할 수도 있겠지만, 기따의 궁극적 가르침이 모든 도덕과 종교의 결론이다. 끄리쉬나께 항복하라. 이것이 제18장의 최종 결론이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우리는 철학적 사색이나 명상으로 자아를 깨닫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지만, 끄리쉬나께 전적으로 항복하는 것이 최고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가 가르치는 핵심이다. 사회 질서나 다른 여러 종교의 규정 원칙을 따르는 것이 지식의 비밀스러운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의식들이 비밀스럽다고 하더라도, 명상과 지식의 배양은 훨씬 더 은밀하다. 그리고 봉헌을 통한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으로 끄리쉬나께 항복하는 것은 가장 은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제18장의 핵심이다.

바가바드 기따의 또 다른 특징은 진정한 진리가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라는 사실이다. 절대 진리는 세 가지 특징, 즉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국부화된 빠람아뜨마, 그리고 궁극적으로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로 깨달을 수 있다. 절대 진리에 관한 완벽한 이해란 끄리쉬나에 관한 완벽한 이해를 의미한다. 끄리쉬나를 이해하면 모든 지식은 그 이해에 대한 부분 혹은 일부일 뿐이다. 끄리쉬나는 항상 당신의 영원한 내적 에너지 안에 계시므로 초월적이다. 생명체는 끄리쉬나의 에너지가 발현된 것이며, 이는 영원히 속박된 부류와 영원히 해방된 부류 두 종류로 나뉜다. 이러한 생명체는 무수히 많고, 그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끄리쉬나의 파편으로 여겨진다. 물질적 에너지는 스물네 종류로 발현된다. 창조는 영원한 시간에 영향받으며, 외적 에너지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된다. 우주의 이러한 발현은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을 반복한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다섯 가지 주요 주제가 논의되었다. 그것은 최고인격신, 물질적 본성, 생명체, 영원한 시간, 그리고 모든 종류의 행위이다. 이 모든 것은 최고인격신 끄리쉬나에 의존한다. 절대 진리에 관한 모든 개념, 즉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국부화된 빠람아뜨마, 그리고 다른 초월적 개념은 최고인격신을 이해하는 범주 안에 속한다. 비록 겉보기에는 최고인격신, 생명체, 물질, 그리고 시간이 달라 보이지만, 어느 것도 절대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절대자는 항상 모든 것과 다르다. 주 짜이따냐의 철학은 “이해 불가한 하나이면서 서로 다름”이다. 바로 이 철학이 절대 진리의 완벽한 이해이다.

생명체는 그 근원적 위치로 볼 때 순수한 영혼이다. 그는 지고한 영혼의 원자적 입자와 같다. 따라서 주 끄리쉬나는 태양에 비유되고, 생명체는 햇빛에 비유될 수 있다. 생명체는 끄리쉬나의 경계 에너지이므로 물질적 에너지와 영적 에너지 둘 다와 접촉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체는 주의 두 에너지 사이에 위치하고, 주의 상위 에너지에 속하기 때문에 극소의 독립성도 가지고 있다. 이 독립성을 올바로 사용하게 되면 끄리쉬나의 직접적 명령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의 평소 위치인 즐거움을 주는 능력(pleasure-giving potency)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드 기따의 제18장, 결론: 버림의 완성에 대한 박띠베단따 주석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