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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

원문

스리-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빠람 부야 쁘라박샤미 paraṁ bhūyaḥ pravakṣyāmi
갸나남 갸남 웃따맘 jñānānāṁ jñānam uttamam
얏 갸뜨바 무나야 사르베 yaj jñātvā munayaḥ sarve
빠람 싣딤 이또 가따하 parāṁ siddhim ito gatāḥ

동의어

스리-바가반 우바짜: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다, 빠람: 초월적인, 부야하: 다시, 쁘라박샤미: 내가 말할 것이니라, 갸나남: 모든 지식 가운데, 갸남: 지식, 웃따맘: 절대자, 얏: 그것, 갸뜨바: 아는, 무나야하: 성현들, 사르베: 모든, 빠람: 초월적인, 싣딤: 완성, 이따하: 이 세계로부터, 가따하: 달성하다.

번역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나는 너에게 이 최상의 지혜, 모든 지식 가운데 최고를 밝힐 것인데, 성현들은 이것을 알아 지고한 완성을 이루었느니라.

주석

제7장에서 제12장의 끝에 이르기까지 스리 끄리쉬나께서 절대 진리, 최고인격신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셨다. 이제, 주는 아르주나를 더욱더 깨우치고 계신다. 이 장을 철학적 사색 과정을 통해 이해하면 봉헌을 이해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제13장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겸손하게 지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는 물질적 얽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생명체가 이 물질계에 얽매이게 된 이유는 물질의 여러 양태와의 접촉 때문이라는 것도 설명되었다. 이 장에서는 이제 최고인격신께서 물질의 양태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고,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며, 어떻게 해방에 이르게 하는지 설명하신다. 이 장에서 설명되는 지식은 지고한 주께서 지금까지 다른 장에서 주신 지식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지식을 이해함으로써 여러 위대한 성현들은 완성을 이루고 영계로 올라갔다. 이제 주께서 똑같은 지식을 보다 나은 방식으로 설명하신다. 이 지식은 지금까지 설명된 다른 모든 과정의 지식보다 훨씬 더 높고, 이것을 앎으로써 많은 사람이 완성을 이루었다. 따라서 이 14장을 이해하는 자는 완성을 달성하리라 예상된다.

원문

이담 갸남 우빠스리땨 idaṁ jñānam upāśritya
마마 사다르먐 아가따하 mama sādharmyam āgatāḥ
사르게’삐 노빠자얀떼 sarge ’pi nopajāyante
쁘랄라예 나 뱌탄띠 짜 pralaye na vyathanti ca

동의어

이담: 이것, 갸남: 지식, 우빠스리땨: 은신하는, 마마: 나의, 사다르먐: 같은 본성, 아가따하: 얻게 된다, 사르게 아삐: 창조에서조차, 나: 결코, 우빠자얀떼: 태어난, 쁘랄라예: 소멸에서, 나: 아닌, 뱌탄띠: 마음이 동요하는, 짜: 또한.

번역

이 지식에 확고함으로써 생명체는 나와 같은 초월적 본성을 얻을 수 있느니라. 이를 확립함으로써 창조 때에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며, 파괴 때에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주석

완벽한 초월적 지식을 얻은 후, 우리는 최고인격신과 질적으로 동일하게 되어 생사의 반복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개별 영혼으로서 우리는 우리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베다 문헌을 통해 영적 하늘의 초월적 행성에 이른 해방된 영혼들은 항상 지고한 주의 연꽃 같은 발을 바라보며, 당신을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해방을 이룬 후에도 헌애자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물질계에서 우리가 얻는 지식은 무엇이든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로 오염되어 있다. 물질의 세 가지 양태에 오염되지 않은 지식을 초월적 지식이라고 한다. 우리가 초월적 지식에 이르는 즉시, 지고한 인간과 같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영적 하늘에 관한 지식이 없는 자들은 물질적 형태를 갖춘 물질적 행위에서 벗어난 다음, 어떠한 다양성도 없는 무형의 영적 정체성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물질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영계에도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영적 존재는 물질적 다양성과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영적 하늘에서 우리는 영적 형상을 얻게 된다. 그곳에는 영적 행위가 존재하고, 이 영적 상황을 헌애적 삶이라고 한다. 그 환경은 더러움이 없으며 그곳 거주자들은 지고한 주와 질적으로 같게 된다. 이러한 지식을 얻으려면 반드시 모든 영적 자질을 계발해야 한다. 따라서 영적 자질을 계발하는 자는 물질계의 창조에도,  파괴에도 영향받지 않게 된다.

원문

마마 요니르 마핟 브라흐마 mama yonir mahad brahma
따스민 가르밤 다다먀함 tasmin garbhaṁ dadhāmy aham
삼바바 사르바-부따남 sambhavaḥ sarva-bhūtānāṁ
따또 바바띠 바라따 tato bhavati bhārata

동의어

마마: 나의, 요니히: 생의 원천, 마핫: 전체 물질적 존재, 브라흐마: 최상의, 따스민: 그것에서, 가르밤: 잉태, 다다미: 창조하다, 아함: 나는, 삼바바하: 가능성, 사르바-부따남: 모든 생명체의, 따따하: 그 이후로, 바바띠: 되다, 바라따: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번역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모든 물질의 실체가 출생의 원천이며, 내가 수태시키는 것이 바로 이 브라흐만으로, 이로써 모든 생명체의 탄생이 가능해진다,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주석

이것이 세상에 대한 설명이다.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끄쉐뜨라와 끄쉐뜨라 갸, 즉 몸과 영혼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이 물질적 본성과 생명체의 결합은 지고한 주에 의해 가능하다. 마하 땃뜨바는 모든 우주 발현의 근본 원인이다, 이 물질적 원인의 본질을 때때로 브라흐만이라고 하며, 그 안에 물질의 세 가지 양태가 존재한다. 최고인격신께서 바로 그 전체 본질을 수태시키셔서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게 된다. 이 본질, 마하 땃뜨바를 베다 문헌에서는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따스맏 에딷 브라흐마 나마-루빰 안남 짜 자야떼(tasmād etad brahma nāma-rūpam annaṁ ca jāyate《문다까 우빠니샤드 1.1.19》). 지고의 인간이 모든 생명체의 씨앗과 함께 이 브라흐만을 수태시킨다. 흙, 물, 불, 그리고 공기로 시작하는 스물네 가지 요소는 모두 물질 에너지이며, 이것들이 마핟 브라흐마, 즉 위대한 브라흐만이라 불리는 물질적 본성이 된다. 제7장에서 설명했듯이 이것을 넘어 또 다른 상위의 본성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체이다. 최고인격신의 뜻으로 이 상위의 본성이 물질적 본성에 섞이게 되고, 그 이후 모든 생명체는 이 물질적 본성에서 태어난다.

스콜피온이 쌀더미에 알을 낳고, 때로는 스콜피온이 쌀에서 태어났다고들 한다. 그러나 쌀이 스콜피온을 낳게 한 원인이 아니다. 사실 스콜피온의 어미가 알을 낳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본성이 생명체 탄생의 원인이 아니다. 최고인격신이 씨를 내리신 것이고, 생명체는 물질적 본성의 산물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과거 행위에 따라 이 물질적 본성으로 만들어진 서로 다른 몸을 가지며, 이로써 각자의 지난 행위에 따라 즐기기도 고통받기도 하는 것이다. 주는 이 물질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발현하게 한 원인이다.

원문

사르바-요니슈 까운떼야 sarva-yoniṣu kaunteya
무르따야 삼바반띠 야하 mūrtayaḥ sambhavanti yāḥ
따샴 브라흐마 마핟 요니르 tāsāṁ brahma mahad yonir
아함 비자-쁘라다 삐따 ahaṁ bīja-pradaḥ pitā

동의어

사르바-요니슈: 모든 종의 생명에서,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무르따야하: 형태들, 삼바반띠: 그들은 나타나다, 야하: 그것, 따샴: 그들 모두, 브라흐마: 절대자, 마핫 요니히: 물질의 실체 안에서 출생한 원천, 아함: 나는, 비자-쁘라다하: 씨앗을 내리는, 삐따: 아버지.

번역

오, 꾼띠의 아들이여, 모든 종의 삶은 이 물질적 본성 속에서 태어남으로 그 존재가 가능해진 것이며, 내가 그 씨를 내리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라.

주석

이 절에서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께서 모든 생명체의 원래 아버지라는 것이 명백히 설명되었다. 생명체는 물질적 본성과 영적 본성의 결합이다. 이러한 생명체는 이 지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성과 브라흐마가 거주하는 가장 높은 행성까지도 존재한다. 모든 곳에 생명체가 있다. 흙 속에도 생명체가 있고, 물 속에도, 불 속에도 있다. 이 모든 발현은 어머니인 물질적 본성과 끄리쉬나의 씨 내리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 의미는 물질계가 생명체를 잉태하고 창조가 일어날 때 생명체는 자기가 한 과거 행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오게 된다는 뜻이다.

원문

삿뜨밤 라자스 따마 이띠 sattvaṁ rajas tama iti
구나 쁘라끄리띠-삼바바하 guṇāḥ prakṛti-sambhavāḥ
니바드난띠 마하-바호 nibadhnanti mahā-bāho
데헤 데히남 아뱌얌 dehe dehinam avyayam

동의어

삿뜨밤: 선성(善性), 라자하: 동성(動性), 따마하: 암성(暗性), 이띠: 따라서, 구나하: 특성, 쁘라끄리띠: 물질적 본성, 삼바바하: 생산된, 니바드난띠: 속박하다, 마하-바호: 오 강력히 무장한 자여, 데헤: 이 몸에서, 데히남: 생명체, 아뱌얌: 영원한.

번역

물질적 본성은 세 가지 양태, 즉 선성, 동성, 암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체가 물질에 접촉하는 순간, 이 양태에 속박되게 된다, 오 힘센 아르주나여.

주석

생명체는 초월적이어서 물질적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물질계 안에 속박되어버려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의 마력 아래서 행동한다. 생명체는 이 본성의 다양한 측면 때문에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그러한 특성에 맞게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다양한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원문

따뜨라 삿뜨밤 니르말라뜨밧 tatra sattvaṁ nirmalatvāt
쁘라까샤깜 아나마얌 prakāśakam anāmayam
수카-상게나 바드나띠 sukha-saṅgena badhnāti
갸나-상게나 짜나가 jñāna-saṅgena cānagha

동의어

따뜨라: 거기에, 삿뜨밤: 선성, 니르말라뜨밧: 물질계에서 가장 순수한, 쁘라까샤깜: 빛나는, 아나마얌: 어떠한 죄업도 없이, 수카: 행복으로, 상게나: 만남으로, 바드나띠: 조건들, 갸나: 지식으로, 상게나: 만남으로, 짜: 또한, 아나가: 오 죄 없는 자여.

번역

오 죄 없는 자여,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순수한 선성은 빛을 밝혀 우리를 모든 죄업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곳에 이른 자들은 행복감과 지식으로 속박되느니라.

주석

물질적 본성에 의해 속박된 생명체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자는 행복하고, 어떤 자는 매우 활동적이며, 또 어떤 자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 모든 형태의 심리적 현상은 생명체가 물질에 속박된 상태의 원인이다. 그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상태로 속박되는지 바가바드 기따의 이 장이 설명한다. 선성이 가장 먼저 설명된다. 물질계에서 선성을 계발시킨 결과로 인간은 다른 양태에 있는 자들보다 더 현명하게 된다. 선성에 있는 자는 물질적 불행에 크게 영향받지 않으며, 물질적 지식의 발전도 갖추고 있다. 그 전형은 선성에 위치해야 마땅한 브라흐마나다. 행복감이란 선성에 위치한 자가 죄 많은 행위의 반작용(죄업)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이해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베다 문헌에서 선성이란 더 높은 지식과 커다란 행복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어려운 점은 생명체가 선성에 위치하면 자기가 지식이 높고, 다른 자들보다 낫다는 생각에 속박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속박된다. 가장 좋은 예는 과학자와 철학자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삶의 수준을 향상해서 자기 지식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일종의 물질적 행복감을 느낀다. 속박된 삶에서 느끼는 이러한 진보한 행복감이 그들을 물질적 본성의 선성에 속박되게 한다. 이처럼 그들은 선성에서 일하는 데 매료되며, 이런 식으로 일하는 데 끌리는 한, 이 물질적 양태에 맞는 형태의 몸을 받게 된다. 따라서 해방, 즉 영계로 올라갈 가능성은 매우 드물다. 계속해서 철학자, 과학자, 또는 시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반복되는 생사윤회의 고리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지만 물질적 에너지에서 비롯된 환영 탓에 인간은 그러한 삶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원문

라조 라가뜨마깜 빋디 rajo rāgātmakaṁ viddhi
뜨리쉬나-상가-삼욷바밤 tṛṣṇā-saṅga-samudbhavam
딴 니바드나띠 까운떼야 tan nibadhnāti kaunteya
까르마-상게나 데히남 karma-saṅgena dehinam

동의어

라자하: 동성, 라가-아뜨마깜: 탐욕과 욕망에서 태어난, 빋디: 알다, 뜨리쉬나: 갈망으로, 상가: 만남, 삼욷바밤: 생산된, 땃: 그것, 니바드나띠: 구속하다,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까르마-상게나: 결과적 행위와의 만남으로, 데히남: 몸을 받은 자들.

번역

동성은 무한한 갈망과 욕망에서 태어났다. 오 꾼띠의 아들이여, 이것 때문에 육신이 부여된 생명체는 결실을 바라는 물질적 행위에 얽매이게 된다.

주석

동성(mode of passion)은 남녀 간의 끌림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끌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끌린다. 이것을 동성이라 한다. 이 동성이 증가할 때, 인간은 물질적 즐거움을 위한 욕망을 발전시킨다. 즉 감각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감각 만족을 위해 동성에 있는 인간은 사회나 국가에서 어떤 명예를 원하고, 자식과 아내를 얻어 행복한 가정을 갖고자 한다. 이러한 것들이 동성의 산물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좇게 되면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결부되고 그것에 구속되게 된다고 여기서 분명히 말한다. 아내와 자식, 그리고 사회를 만족시키고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동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문명은 동성의 기준에서 매우 발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앞서, 진보한 상태는 선성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선성에 있는 자들도 해방을 이룰 수 없다면 동성에 얽매인 자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원문

따마스 뚜바갸나-잠 빋디 tamas tv ajñāna-jaṁ viddhi
모하남 사르바-데히남 mohanaṁ sarva-dehinām
쁘라마달라샤-니드라비스 pramādālasya-nidrābhis
딴 니바드나띠 바라따 tan nibadhnāti bhārata

동의어

따마하: 암성(暗性), 뚜: 그러나, 아갸나-잠: 무지에서 생긴, 빋디: 알다, 모하남: 망상, 사르바-데히남: 육신을 지닌 모든 생명체, 쁘라마다: 미친, 알라샤: 게으름, 니드라비히: 잠, 땃: 그것, 니바드나띠: 묶다, 바라따: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번역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무지에서 태어난 암성은 육신에 갇힌 모든 생명체의 망상이라는 것을 알아라. 이 양태의 결과는 속박된 영혼을 구속하는 광기와 나태, 그리고 잠이니라.

주석

이 절에서 “뚜(tu)”라는 특정 용어의 사용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무지라는 것이 몸을 받은 영혼의 아주 특이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암성은 선성과는 정반대이다. 지식의 발전으로 이르게 되는 선성에서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지만, 암성에서는 정반대이다. 암성의 마력 아래 있는 자는 누구나 미치게 마련이고, 미친 자는 무엇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암성에서는 진보하지 않고 타락하게 된다. 암성의 정의는 베다 문헌에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바스뚜-유타뜨먀-갸나바라깜 비빠랴야-갸나-자나깜 따마하(Vastu-yāthātmya-jñānāvarakaṁ viparyaya-jñāna-janakaṁ tamaḥ). 무지의 마력 때문에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구나 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자기 역시 죽을 것이며,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 자기가 낳은 자식들도 역시 죽을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모으려고 밤낮으로 미친 듯이 일하며, 영원한 혼에 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이것이 광기이다. 이 광기 탓에 그들은 영적 이해에의 발전을 꺼린다. 그러한 자들은 아주 게으른 것이다. 그들은 영적 이해에 관해 들으라고 초대해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암성에 있는 자들은 동성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만큼 활동적이지도 못하다. 따라서 암성에 갇힌 자들의 또 다른 징후는 필요 이상으로 잠을 잔다는 것이다. 여섯 시간만 자도 충분하지만, 암성에 있는 자들은 하루 10~12시간 잔다. 그러한 자들은 항상 기운 없어 보이며, 취해 있거나 잠에 빠져 있다. 이러한 것들이 암성의 양태에 속박된 인간의 징후이다.

원문

삿뜨밤 수케 산자야띠 sattvaṁ sukhe sañjayati
라자 까르마니 바라따 rajaḥ karmaṇi bhārata
갸남 아브리땨 뚜 따마하 jñānam āvṛtya tu tamaḥ
쁘라마데 산자야뜌따 pramāde sañjayaty uta

동의어

삿뜨밤: 선성, 수케: 행복한, 산자야띠: 묶다, 라자하: 동성, 까르마니: 결실적 행위로, 바라따: 바라따의 아들이여, 갸남: 지식, 아브리땨: 덮고 있는, 뚜: 그러나, 따마하: 암성, 쁘라마데 :광기 속에서, 산자야띠: 묶다, 우따: 라고 한다.

번역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선성은 인간을 행복으로 속박하고, 동성은 결실적 행위로 속박하며 인간의 지식을 덮는 암성은 인간을 광기로 속박한다.

주석

선성에 있는 사람은 자기 일이나 지적 추구에 만족하는데, 이것은 철학자나 과학자, 또는 교육자들이 특별한 지식의 장에 종사하며 거기에 만족하는 것과 같다. 동성에 있는 자는 결실적 행위에 종사하며, 가능한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좋은 명분을 위해 돈을 쓰기도 한다. 그들은 때때로 병원을 세우거나 여러 기관에 기부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동성에 있는 자들의 징후이다. 그리고 암성은 지식을 가린다. 암성에서 하는 어떠한 것이든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좋지 않다.

원문

라자스 따마스 짜비부야 rajas tamaś cābhibhūya
삿뜨밤 바바띠 바라따 sattvaṁ bhavati bhārata
라자 삿뜨밤 따마스 짜이바 rajaḥ sattvaṁ tamaś caiva
따마 삿뜨밤 라자스 따타 tamaḥ sattvaṁ rajas tathā

동의어

라자하: 동성, 따마하: 암성, 짜: 또한, 아비부야: 능가하는, 삿뜨밤: 선성, 바바띠: 두드러지게 되다, 바라따: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라자하: 동성, 삿뜨밤: 선성, 따마하: 암성, 짜 :또한, 에바: 그처럼, 따마하: 암성, 삿뜨밤: 선성, 라자하: 동성, 따타: 따라서.

번역

때때로 선성이 동성과 암성을 물리치고 우세하다,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때때로 동성이 선성과 암성을 물리치고, 그리고 어떤 때에는 암성이 선성과 동성을 물리친다. 이런 식으로 항상 우위를 두고 서로 경쟁하느니라.

주석

동성이 현저할 때, 선성과 암성이 제압된다. 선성이 현저할 때, 동성과 암성이 제압된다. 그리고 암성이 우세할 때 동성과 선성이 제압된다. 이러한 경쟁은 항상 일어난다. 그러므로 끄리쉬나 의식에서 진정 진보하고자 하는 자는 이러한 세 가지 양태를 초월해야만 한다. 특정 물질적 양태의 우세함은 우리의 관계, 행위, 먹는 것 등에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뒤에 오는 장들에서 설명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면 수행을 통해 선성을 계발시켜 암성과 동성을 물리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동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선성과 암성을 물리칠 수도 있다. 또는 암성을 발전시킴으로써 선성과 동성을 물리칠 수도 있다. 물질적 본성에는 세 가지 양태가 있지만, 우리가 굳은 결심을 하면 선성의 도움으로 그 선성을 초월한 순수 선성에 이를 수 있는데, 이것을 바수데바(vasudeva) 상태라고 하며, 바로 이 상태에서 절대신의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특정 행위가 나타나는지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물질의 양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원문

사르바-드바레슈 데헤’스민 sarva-dvāreṣu dehe ’smin
쁘라까샤 우빠자야떼 prakāśa upajāyate
갸남 야다 따다 비댣 jñānaṁ yadā tadā vidyād
비브릳담 삿뜨밤 이뜌따 vivṛddhaṁ sattvam ity uta

동의어

사르바-드바레슈: 모든 문에서, 데헤 아스민: 이 몸에 있는, 쁘라까샤하: 빛의 질, 우빠자야떼: 발전하다, 갸남: 지식, 야다: 할 때, 따다: 그때, 비댯: 알다, 비브릳담: 증가하는, 삿뜨밤: 선성, 이띠 우따: 따라서 말한다.

번역

몸에 있는 모든 문이 지식으로 빛날 때, 선성의 발현을 경험할 수 있다.

주석

몸에는 아홉 개의 문이 있다. 그것은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입, 성기, 그리고 항문이다. 모든 문이 선성의 징후로 빛날 때, 우리는 선성을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선성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올바르게 볼 수 있고, 올바로 들을 수 있으며, 올바로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안팎으로 깨끗해진다. 모든 문에 행복의 징후가 발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선성의 위치다.

원문

로바 쁘라브릿띠라람바하 lobhaḥ pravṛttir ārambhaḥ
까르마남 아샤마 스쁘리하 karmaṇām aśamaḥ spṛhā
라자셰따니 자얀떼 rajasy etāni jāyante
비브릳데 바라따르샤바 vivṛddhe bharatarṣabha

동의어

로바하: 욕심, 쁘라브릿띠히: 행위, 아람바하: 노력, 까르마남: 활동에서, 아샤마하: 통제할 수 없는, 스쁘리하: 욕망, 라자시: 동성의, 에따니: 이 모든 것, 자얀떼: 계발하다, 비브릳데: 과도할 때, 바라따-리샤바: 오 바라따의 후손 중 최고여.

번역

오 바라따 중 최고여, 동성이 증가할 때 지나친 집착과 결실적 행위, 극심한 노력,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욕망과 갈망의 징후가 나타난다.

주석

동성에 있는 자는 자기가 획득한 위치에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위치를 향상하고자 갈망한다. 집을 짓고자 하면 그 집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궁궐 같은 집을 지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감각 만족을 크게 갈망한다. 이 감각 만족에는 끝이 없다. 그는 항상 가정과 집에 남기를 원하고 감각 만족의 과정을 계속 누리기를 바란다. 이런 것에는 끝이 없다. 이 모든 징후가 동성의 특징이다.

원문

아쁘라까쇼’쁘라브릿띠스 짜 aprakāśo ’pravṛttiś ca
쁘라마도 모하 에바 짜 pramādo moha eva ca
따마시 에따니 자얀떼 tamasy etāni jāyante
비브릳데 꾸루-난다나 vivṛddhe kuru-nandana

동의어

아쁘라까샤하: 어둠, 아쁘라브릿띠히: 무기력, 짜: 그리고, 쁘라마다하: 광기, 모하: 망상, 에바: 분명히, 짜: 또한, 따마시: 암성, 에따니: 이것들, 자얀떼: 발현되다, 비브릳데: 발현할 때, 꾸루-난다나: 오 꾸루의 아들이여.

번역

암성이 증가할 때, 오 꾸루의 아들이여, 암흑과 무기력, 광기, 그리고 망상이 발현한다.

주석

빛이 없으면 지식은 없다. 암성에 있는 자는 규정 원칙에 따라 일하지 않고 어떠한 목적 없이 내키는 대로 하려 한다. 그는 일할 능력이 있지만,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의식은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삶은 무기력하다. 이러한 것이 암성에 있는 자의 징후이다.

원문

야다 삿뜨베 쁘라브릳데 뚜 yadā sattve pravṛddhe tu
쁘랄라얌 야띠 데하-브릿 pralayaṁ yāti deha-bhṛt
따돗따마-비담 로깐 tadottama-vidāṁ lokān
아말란 쁘라띠빠댜떼 amalān pratipadyate

동의어

야다: 때, 삿뜨베: 선성, 쁘라브릳데: 발전된, 뚜: 그러나, 쁘랄라얌: 소멸, 야띠: 가다, 데하-브릿: 육신에 갇힌, 따다: 그때, 웃따마-비담: 위대한 성인의, 로깐: 행성들, 아말란: 순수한, 쁘라띠빠댜떼: 이르다.

번역

선성에서 죽는 자는 아주 높고 순수한 위대한 성인들의 행성에 이른다.

주석

선성에 이른 자는 브라흐마로까 또는 자나로까(Janaloka) 같은 더 높은 행성 체계로 올라가서 천상의 행복을 누린다. “아말란”이라는 말이 여기서 중요하다. 이것은 “동성과 암성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물질계는 불결함이 있는 곳이지만, 선성은 물질계 안에서 가장 순수한 존재의 형태다. 서로 다른 생명체에 맞는 여러 행성이 존재한다. 선성에서 죽는 자들은 위대한 성인들과 헌애자들이 사는 행성으로 올라간다.

원문

라자시 쁘랄라얌 가뜨바 rajasi pralayaṁ gatvā
까르마-상기슈 자야떼 karma-saṅgiṣu jāyate
따타 쁘랄리나스 따마시 tathā pralīnas tamasi
무다-요니슈 자야떼 mūḍha-yoniṣu jāyate

동의어

라자시: 동성에서, 쁘랄라얌: 소멸, 가뜨바: 얻는, 까르마-상기슈: 결실적 행위에 종사하는 자들과 교류하는, 자야떼: 태어나다, 따타: 마찬가지로, 쁘랄리나하: 소멸해 가는, 따마시: 무지에서, 무다-요니슈: 동물로, 자야떼: 태어나다.

번역

동성의 상태에서 죽는 자는 결실적 행위에 종사하는 자들 사이에 태어난다. 그리고 암성 속에서 죽는 자는 동물의 세계에 태어나느니라.

주석

어떤 사람들은 영혼이 인간의 위치에 이르게 되면 다시는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가 암성을 발전시키면 죽은 후에 동물의 삶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인간 형태의 삶을 다시 얻으려면 그곳에서부터 진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을 향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한 자들은 선성을 키우고, 좋은 교류 속에서 물질의 양태를 초월해 끄리쉬나 의식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다시 인간의 위치를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원문

까르마나 수끄리따샤후후 karmaṇaḥ sukṛtasyāhuḥ
삿뜨비깜 니르말람 팔람 sāttvikaṁ nirmalaṁ phalam
라자사스 뚜 팔람 두캄 rajasas tu phalaṁ duḥkham
아갸남 따마사 팔람 ajñānaṁ tamasaḥ phalam

동의어

까르마나하: 일의, 수-끄리따샤: 경건한, 아후후: 라고 하다, 삿뜨비깜: 선성에서, 니르말람: 정화된, 팔람: 결과, 라자사하: 동성의, 뚜: 그러나, 팔람: 결과, 두캄: 불행, 아갸남: 어리석음, 따마사하: 암성의, 팔람: 결과.

번역

경건한 행위의 결과는 순수하고 선성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성에서 한 행위는 고통을 낳고, 암성에서 한 행위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주석

선성에서 한 경건한 행위의 결과는 순수하다. 따라서 모든 환영에서 벗어난 성자들은 행복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동성에서 한 행위는 괴로움을 초래할 뿐이다. 물질적 행복을 위한 어떠한 행위도 패배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고층 건물을 소유하려고 하면, 그 건물을 짓기까지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 금융업자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써야 하고, 건설인부들은 육체적 수고를 해야만 한다. 고통은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따는 동성으로 한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 집도 있고 돈도 있다”라고 느끼는 소위 어느 정도의 행복감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전정한 행복은 아니다.

암성은 행위자가 지식이 없기에 그의 모든 행위는 현실적 고통으로 직결되며 그 이후에는 동물의 삶을 살게 된다. 동물의 삶은 항상 불행한데, 그들은 마야, 즉 환영적 에너지의 마력에 지배받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엾은 동물을 도살하는 것 역시 암성에서 비롯된다. 도살자들은 죽임을 당한 동물들이 미래에 자기를 죽이기에 적합한 몸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 사회에서 살인을 하면 교수형을 당한다. 이것이 국가의 법이다. 무지 탓에 사람들은 지고한 주께서 다스리는 온전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모든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자식이며 주께서는 개미 한 마리조차 죽임당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것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입맛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짓은 가장 미개한 무지이다. 절대신께서 인간에게 아주 좋은 것을 많이 공급하셨기 때문에 동물을 죽일 필요가 없다. 인간이 고기 먹는 데 탐닉하게 되면 무지에서 행동하는 것이며 자신의 장래를 매우 어둡게 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동물 도살 중에서 소를 도살하는 것은 가장 사악한데, 그 까닭은 소는 우유를 공급함으로써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소 도살은 가장 미개한 형태의 무지로 한 행위이다. 베다 문헌(리그베다 9.46.4)에서 “고비 쁘리니따-맛사람(gobhiḥ prīṇita-matsaram)”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우유를 마시고 배부른 자가 소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가장 미개한 무지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베다 문헌에 이것을 말하는 또 다른 기도문이 있다.

나모 브라흐마냐-데바야 namo brahmaṇya-devāya
고- 브라흐마나-히따야 짜 go-brāhmaṇa-hitāya ca
자갇-디따야 끄리쉬나야 jagad-dhitāya kṛṣṇāya
고빈다야 나모 나마하 govindāya namo namaḥ

“주님, 당신은 소와 브라흐마나의 행복을 바라는 자이며 모든 인간 사회와 세계의 행복을 바라는 분이십니다(비쉬누 뿌라나 1.19.65).” 이 기도의 취지는 소와 브라흐마나의 보호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이다. 브라흐마나는 영적 교육의 상징이고, 소는 가장 귀중한 음식을 공급해주는 대상의 상징이다. 이 두 생명체, 브라흐마나와 소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이것이 문명의 진정한 발전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영적 지식이 경시되고, 소 도살이 장려된다. 따라서 인간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국민을 다음 생에서 동물로 태어나게 인도하는 문명은 분명 인류 문명이 아니다. 물론 현재의 인류 문명은 동성과 암성으로 크게 오도되고 있다. 현시대는 매우 위험한 시대이므로 모든 국가는 인류를 가장 큰 위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 끄리쉬나 의식을 제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원문

삿뜨밧 산자야떼 갸남 sattvāt sañjāyate jñānaṁ
라자소 로바 에바 짜 rajaso lobha eva ca
쁘라마다-모하우 따마소 pramāda-mohau tamaso
바바또’갸남 에바 짜 bhavato ’jñānam eva ca

동의어

삿뜨밧: 선성으로부터, 산자야떼: 발전하다, 갸남: 지식, 라자사하: 동성으로부터, 로바하: 욕심, 에바: 분명히, 짜: 또한, 쁘라마다: 광기, 모하우: 그리고 망상, 따마사하: 암성으로부터, 바바따하: 발전하다, 아갸남: 어리석음, 에바: 분명히, 짜: 또한.

번역

선성에서 진정한 지식이 발전하고, 동성에서 탐욕이 발전하며, 암성에서 어리석음과 광기, 그리고 망상이 발전한다.

주석

현 문명은 생명체에게 별로 맞는 환경이 아니기에 끄리쉬나 의식이 권장된다. 끄리쉬나 의식을 통해 사회는 선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선성이 발전할 때, 사람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다. 암성에서 사람들은 그저 동물과 같고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암성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죽인 동물에게 다음 생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정한 지식에 관한 교육을 받지 않아서 무책임해지고 있다. 이러한 무책임함을 멈추려면 대중에게 선성을 발전시키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들이 진정한 선성의 교육을 받게 되면, 분별력이 생기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완전한 지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번영을 누릴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 번영하지 않더라도, 전체 인구의 일부가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켜 선성에 있게 되면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의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 세계가 동성과 암성에 빠져 평화도, 번영도 있을 수 없다. 동성에서 사람들은 탐욕스러워지고,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한 갈망이 끝이 없다. 사람들이 충분한 돈과 감각 만족에 적합한 편의를 갖추고 있더라도,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동성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돈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끄리쉬나 의식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선성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동성에 있으면 정신적으로 불행할 뿐만 아니라, 하는 일과 직업도 아주 수고스럽다. 현상 유지를 하기에 충분한 돈을 버는 데 많은 궁리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모두 고통스럽다. 암성에서 사람들은 미친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괴로워하며 취하게 하는 것에 의지하고, 따라서 더욱더 깊은 무지에 빠져든다. 앞으로의 그들 삶은 무척 어둡다.

원문

우르드밤 갓찬띠 삿뜨바-스타 ūrdhvaṁ gacchanti sattva-sthā
마뎨 띠쉬탄띠 라자사하 madhye tiṣṭhanti rājasāḥ
자간야-구나-브릿띠-스타 jaghanya-guṇa-vṛtti-sthā
아도 갓찬띠 따마사하 adho gacchanti tāmasāḥ

동의어

우르드밤: 위로, 갓찬띠: 가다, 삿뜨바-스타하: 선성에 위치한 자들, 마뎨: 중간에, 띠쉬탄띠: 거주하다, 라자사하: 동성에 위치한 자들, 자간야: 혐오스러운, 구나: 자질, 브릿띠-스타하: 그들의 직업, 아다하: 아래로, 갓찬띠: 가다, 따마사하: 암성에 있는 사람들.

번역

선성에 있는 자들은 점점 위로 올라가 상계에 이르고, 동성에 있는 자들은 지구에 머물며, 혐오스러운 암성에 있는 자들은 지옥계로 떨어지느니라.

주석

이 절에서 물질의 세 가지 양태에서 한 행위의 결과가 더욱 명백히 진술되었다. 천국이라고 하는 상계(上界)에서는 모든 이가 매우 높은 존재이다. 선성의 발전 정도에 따라 생명체는 이 체계의 다양한 행성으로 옮겨질 수 있다. 가장 높은 행성은 사땨로카(Satyaloka), 즉 브라흐마로까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이 우주의 으뜸 인간, 주 브라흐마가 있다. 브라흐마로까의 경이로운 삶의 상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선성으로 우리는 이 최상의 삶의 상태에 갈 수 있다.

동성은 선성과 암성의 중간으로, 이 둘이 섞인 것이다. 사람은 늘 순수하지 않고, 만약 순수하게 동성에만 있다고 하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왕이나 부자로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동성은 암성과 섞여 있어서 하계로 내려갈 수 있다. 동성과 암성에 있는 지구상의 인간은 기계의 힘으로 상계에 억지로 들어갈 수 없다. 동성에서는 다음 생에 정신이상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가장 낮은 본성인 암성은 여기에서 혐오스러운 것으로 묘사되었다. 무지를 발전시킨 결과는 몹시 위험하다. 이것은 물질적 본성의 가장 낮은 자질이다. 인간 밑에 800만 종의 생명체가 있고 그것은 새, 짐승, 파충류, 나무 등이다. 그리고 암성의 발전 정도에 따라 사람들은 이 끔찍한 상태로 떨어진다. “따마사하”라는 말이 여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마사하란 더 높은 양태로 올라오지 않고 계속해서 암성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의 장래는 아주 어둡다.

암성과 동성의 양태에 섞여 있는 인간에게는 선성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고, 이것이 바로 끄리쉬나 의식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더 낮은 양태에 계속 머물 것이다.

원문

난얌 구네뱌 까르따람 nānyaṁ guṇebhyaḥ kartāraṁ
야다 드라쉬따누빠샤띠 yadā draṣṭānupaśyati
구네뱌스 짜 빠람 벳띠 guṇebhyaś ca paraṁ vetti
맏-바밤 소’디갓차띠 mad-bhāvaṁ so ’dhigacchati

동의어

나: 아니다, 안얌: 다른, 구네뱌하: 특징들보다, 까르따람: 행위자, 야다: 때, 드라쉬따: 보는 자, 아누빠샤띠: 올바로 보다, 구네뱌하: 물질의 양태에, 짜: 그리고, 빠람: 초월적인, 벳띠: 알다, 맛-바밤: 나의 영적 본성, 사하: 그는, 아디갓차띠: 오르다.

번역

모든 행위에서 이 물질의 양태가 실질적 행위자라는 것을 바르게 보고, 지고한 주는 이 모든 양태를 초월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나의 영적 본성에 이르게 된다.

주석

우리는 적합한 영혼에게서 바르게 배워 물질적 본성의 양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행위를 초월할 수 있다. 진정한 영적 스승은 끄리쉬나이며, 그가 영적 지식을 아르주나에게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의 양태와 관련된 이 행위의 과학도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을 갖춘 자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오도될 것이다. 진정한 영적 스승의 가르침으로, 한 생명체는 자신의 영적 위치와 육신, 감각,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속박되었으며 어떻게 물질적 본성에 영향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양태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한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보게 되면 영적 삶이라는 초월적 위치에 이를 수 있다. 실제로 생명체는 여러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그는 특정한 물질의 양태에 지배받아 행동하는 특정 형태의 몸을 갖고 있어서 그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영적 권위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실제로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진정한 영적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이해를 통해 끄리쉬나 의식에 완전히 전념할 수 있다. 끄리쉬나 의식인 사람은 물질의 양태에 영향을 입지 않는다. 끄리쉬나께 항복한 자는 물질적 본성으로 하는 행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제7장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에게는 물질적 본성의 영향이 점차 사라진다.

원문

구난 에딴 아띠땨 뜨린 guṇān etān atītya trīn
데히 데하-삼욷바반 dehī deha-samudbhavān
잔마-므리뜌-자라-두카이르 janma-mṛtyu-jarā-duḥkhair
빔욱또’므리땀 아스누떼 vimukto ’mṛtam aśnute

동의어

구난: 자질, 에딴: 이 모든 것들, 아띠땨: 초월하는, 뜨린: 세 가지, 데히: 몸을 받은 자, 데하: 육신, 삼욷바반: 생산된, 잔마: 출생의, 므리뜌: 죽음, 자라: 그리고 노년, 두카이히 :불행들, 빔욱따하: 벗어나는, 암리땀: 감로수, 아스누떼: 그는 즐긴다.

번역

육체에 갇힌 생명체가 물질적 몸에 결부된 세 가지 양태를 초월할 수 있을 때, 그는 삶과 죽음, 늙음, 그리고 다른 여러 고통에서 벗어나 이생에서도 감로수를 즐길 수 있다.

주석

우리가 어떻게 이 육신으로도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이 되어 초월적 상태에 있을 수 있는지 이 절에서 설명되었다. 산스끄리뜨어 “데히”는 “육체에 갇힌”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가 이 물질적 육신 안에 갇혀 있지만, 영적 지식의 향상을 이룸으로써 물질적 본성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몸을 버린 다음, 영계로 올라갈 것이 확실하기에 현재의 몸을 하고서도 영적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바로 이 몸으로도 영적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다른 말로, 끄리쉬나 의식으로 하는 봉헌은 물질적 얽매임에서 해방된 표시이고, 이것은 제18장에서 설명될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 본성의 영향에서 벗어날 때 봉헌을 시작할 수 있다.

원문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까이르 링가이스 뜨린 구난 에딴 kair liṅgais trīn guṇān etān
아띠또 바바띠 쁘라보 atīto bhavati prabho
낌 아짜라 까탐 짜이땀스 kim-ācāraḥ kathaṁ caitāṁs
뜨린 구난 아띠바르따떼 trīn guṇān ativartate

동의어

아르주나 우바짜: 아르주나가 말했다, 까이히: 그것으로, 링가이히: 징후들, 뜨린: 세 가지, 구난: 자질들, 에딴: 이 모든 것들, 아띠따하: 초월한, 바바띠: 이다, 쁘라보: 오 나의 주님, 낌: 무엇, 아짜라하: 행위, 까탐: 어떻게, 짜: 또한, 에딴: 이것들, 뜨린: 세 가지, 구난: 자질들, 아띠바르따떼: 초월하다.

번역

아르주나가 여쭈었습니다: 오 나의 소중한 주님, 어떠한 징후로 이 세 가지 양태를 초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런 자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이 물질의 양태를 초월합니까?

주석

이 절에서 아르주나가 한 질문은 매우 적절하다. 그는 물질의 양태를 이미 초월한 자의 징후를 알고자 한다. 그는 우선 그러한 초월한 자의 징후가 어떠한지 묻는다. 어떤 사람이 물질적 본성의 양태를 이미 초월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번째 질문은 그런 사람은 어떻게 살며 그의 행동은 어떠한지이다. 그들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그다음 아르주나는 어떠한 수단으로 초월적 본성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항상 초월적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직접적 방법을 모르는 한, 초월함의 징후를 보일 수 없다. 그래서 아르주나가 한 이 모든 질문은 매우 중요하고 주께서 그것에 답하신다.

원문

스리-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쁘라까샴 짜 쁘라브릿띰 짜 prakāśaṁ ca pravṛttiṁ ca
모함 에바 짜 빤다바 moham eva ca pāṇḍava
나 드베쉬띠 삼쁘라브릿따니 na dveṣṭi sampravṛttāni
나 니브릿따니 깡샤띠 na nivṛttāni kāṅkṣati
우다시나-바다시노 udāsīna-vad āsīno
구나이료 나 비짤야떼 guṇair yo na vicālyate
구나 바르딴따 이뗴밤 guṇā vartanta ity evaṁ
요’바띠쉬타띠 넹가떼 yo ’vatiṣṭhati neṅgate
사마-두카-수카 스바-스타하 sama-duḥkha-sukhaḥ sva-sthaḥ
사마-로쉬따스마-깐짜나하 sama-loṣṭāśma-kāñcanaḥ
뚤랴-쁘리야쁘리요 디라스 tulya-priyāpriyo dhīras
뚤랴-닌다뜨마-삼스뚜띠히 tulya-nindātma-saṁstutiḥ
마나빠마나요스 뚤랴스 mānāpamānayos tulyas
뚤료 미뜨라리-빡샤요호 tulyo mitrāri-pakṣayoḥ
사르바람바-빠리띠아기 sarvārambha-parityāgī
구나띠따 사 우쨔떼 guṇātītaḥ sa ucyate

동의어

스리-바가반 우바짜: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다, 쁘라까샴: 밝음, 짜: 그리고, 쁘라브릿띰: 집착, 짜: 그리고, 모함: 망상, 에바 짜: 또한, 빤다바: 오 빤두의 아들이여, 나 드베쉬띠: 증오하지 않는다, 삼쁘라브릿따니: 발전하더라도, 나 니브릿따니: 발전을 멈추지 않는, 깡샤띠: 바라다, 우다시나-밧: 중립적인 것처럼, 아시나하: 위치한, 구나이히: 자질들에 의해, 야하: 하는 자, 나: 결코, 비짤야떼: 동요된, 구나하: 자질들, 바르딴떼: 행동하다, 이띠 에밤: 그렇게 알아서, 야하: 하는 자, 아바띠쉬타띠: 유지하다, 나: 결코, 잉가떼: 흔들리다, 사마: 동등한, 두카: 불행에서, 수카: 그리고 행복, 스바-스타하: 자아에 위치한, 사마: 동등하게, 로쉬따:  흙덩이, 아스마: 돌, 깐짜나하: 황금, 뚤랴: 똑같은 자세로, 쁘리야: 소중한 자에게, 아쁘리야하: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디라하: 꾸준한, 뚤랴: 동등한, 닌다: 비난에, 아뜨마-삼스뚜띠히: 그리고 자신에 대한 칭찬에, 마나: 명예에, 아빠마나요호: 그리고 불명예, 뚤랴하: 동등한, 뚤랴하: 동등한, 미뜨라: 친구들의, 아리: 그리고 적들, 빡샤요호: 집단에, 사르바: 모든, 아람바: 노력하다, 빠리띠아기: 버리는 자, 구나-아띠따하: 물질의 양태를 초월한, 사하: 그는,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 빤두의 아들이여, 밝음과 집착, 그리고 망상이 있을 때 그것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이 사라질 때 갈구하지 않으며, 물질적 자질의 이러한 여러 반응에도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지키며, 초월적이고, 물질의 양태만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자아에 위치하여 행복과 불행을 똑같이 보며, 흙덩이와 돌, 그리고 황금을 똑같은 눈으로 보며, 바람직한 것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공평하며, 꾸준하고, 칭찬이나 비난, 명예나 불명예에도 한결같으며, 친구든 적이든 똑같이 대하며, 모든 물질적 행위를 버린 자, 그런 자를 물질적 본성을 초월했다고 하느니라.

주석

아르주나는 세 가지 다른 질문을 했고, 주께서는 그것에 차례대로 답하신다. 이 구절에서 끄리쉬나는 우선 초월적인 사람은 시기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갈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신다. 생명체가 이 물질계에서 육신에 갇히게 될 때, 그는 세 가지 물질적 본성의 양태 중 하나에 통제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가 실제로 육신을 떠나게 될 때, 물질적 본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육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중립을 지켜야만 한다. 주를 향한 봉헌에 종사함으로써 물질적 몸에 대한 정체성은 저절로 잊힐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의식하면 오직 감각 만족을 위해 행동할 뿐이지만, 그 의식을 끄리쉬나를 향하면 감각 만족은 저절로 멈추게 된다. 우리는 이 육신이 필요 없고 육신의 명령 또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몸 안의 물질적 양태가 작용할 것이지만, 영적 자아로서의 우리는 그러한 행위에 초연하다. 우리가 어떻게 초연하다는 말인가? 자아는 육신을 즐기려고도, 그것에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초월적 위치에 오른 헌애자는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는 물질적 본성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다음 질문은 초월한 위치에 있는 자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세속적인 자들은 몸과 결부된 소위 명예나 불명예에 영향을 받지만, 초월적인 사람은 그러한 헛된 명예와 불명예에 영향을 입지 않는다. 그는 끄리쉬나 의식으로 자기 의무를 수행할 뿐, 명예든 불명예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끄리쉬나 의식을 위한 자신의 의무에 도움이 되는 것만 받아들이며, 돌이든 황금이든 어떠한 물질적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을 끄리쉬나 의식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는 친구로 여기며, 소위 자신의 적을 증오하지 않는다. 그는 평정을 유지하며, 자신은 물질적 존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모든 것을 똑같이 바라본다. 사회적, 정치적 문제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그것은 일시적 격변이나 소란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끄리쉬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시도라도 하지만, 자기 개인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꾀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간은 실제로 초월적 위치에 오르게 된다.

원문

맘 짜 요’뱌비짜레나 māṁ ca yo ’vyabhicāreṇa
박띠-요게나 세바떼 bhakti-yogena sevate
사 구난 사마띠땨이딴 sa guṇān samatītyaitān
브라흐마-부야야 깔빠떼 brahma-bhūyāya kalpate

동의어

맘: 나에게, 짜: 또한, 야하: 하는 자, 아뱌비짜레나: 끊임없이, 박띠-요게나: 봉헌으로, 세바떼: 봉사하다, 사하: 그는, 구난: 물질적 본성의 양태들, 사마띠땨: 초월하는, 에딴: 이 모든 것들, 브라흐마-부야야: 브라흐만 단계에 오르는, 깔빠떼: 되다.

번역

항상 완전한 봉헌에 종사하고, 모든 상황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자는 즉시 물질적 본성을 초월해 브라흐만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주석

이 절은 아르주나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초월적 위치에 도달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앞서 설명했듯이, 물질계는 물질적 본성의 지배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 본성의 활동에 동요해서는 안 되며 우리 의식을 그러한 행위에 두는 대신에, 끄리쉬나를 위한 행위로 전환할 수 있다. 항상 끄리쉬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박띠 요가라고 한다. 이것은 끄리쉬나뿐만 아니라, 당신의 여러 완전한 확장인 라마나 나라야나 등을 포함한다. 끄리쉬나는 무한하게 확장하신다. 끄리쉬나의 어떠한 형상이나 당신의 완전한 확장에 봉헌하더라도 초월적 경지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또한 끄리쉬나의 모든 형상은 완전히 초월적이며, 축복과 지식으로 가득하고, 영원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절대신의 인격체들은 전지전능하며 모든 초월적 특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끄리쉬나나 당신의 완전한 확장들께 흔들림 없는 결심으로 봉헌한다면 물질적 본성의 여러 양태가 극복하기가 어렵더라도 쉽게 이겨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제7장에서 설명되었다. 끄리쉬나께 항복하는 자는 즉시 물질적 본성의 영향을 초월한다. 끄리쉬나 의식이거나 봉헌을 한다는 것은 끄리쉬나와 같은 자질을 얻음을 의미한다. 주께서 당신의 본성은 영원하고 축복과 지식으로 가득하며, 마치 금광의 금 입자들처럼 생명체는 절대자의 부분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생명체는 영적 위치에서 보면 금만큼이나, 끄리쉬나만큼이나 질적으로 좋다. 개별성의 차이가 지속되는데 그렇지 않다면 박띠 요가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박띠 요가란 주가 있고, 헌애자가 있으며 주와 헌애자간의 사랑의 교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개별성은 최고인격신과 개인 간에도 존재하며 그렇지 않다면 박띠 요가는 무의미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주와 똑같은 초월적 위치에 있다면 지고한 주를 섬길 수 없다. 왕의 개인 보조가 되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그 자격이 브라흐만이 되는 것, 즉 물질적 더러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베다 문헌에서 “브라흐마이바 산 브라흐마뼤띠(brahmaiva san brahmāpy eti)”라고 한다. 우리는 브라흐만이 됨으로써 지고의 브라흐만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질적으로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브라흐만에 이른다고 해서 개별 영혼으로서의 영원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원문

브라흐마노 히 쁘라띠쉬타함  brahmaṇo hi pratiṣṭhāham
암리따샤뱌야샤 짜 amṛtasyāvyayasya ca
샤스바따샤 짜 다르마샤 śāśvatasya ca dharmasya
수카샤이깐띠까샤 짜 sukhasyaikāntikasya ca

동의어

브라흐마나하: 비인성의 브라흐마죠띠, 히: 확실히, 쁘라띠쉬타: 나머지, 아함: 나는, 암리따샤: 불멸의, 아뱌야샤: 불후의, 짜: 또한, 샤스바따샤: 영원한, 짜: 그리고, 다르마샤: 근원적 위치의, 수카샤: 행복의, 아이깐띠까샤: 궁극적인, 짜: 또한.

번역

그리고 나는 불멸하고, 불후하며, 영원한 비인성적 브라흐만의 토대이자 궁극적 행복의 본질적 위치이다.

주석

브라흐만의 특징은 불멸, 불후, 영원, 그리고 행복이다. 브라흐만은 초월적 깨달음의 시작이다. 빠람아뜨마, 즉 초영혼은 초월적 깨달음의 두 번째이자 중간 단계이고, 최고인격신은 절대 진리의 궁극적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지고의 인격 안에 빠람아뜨마와 비인성적 브라흐만이 존재한다. 제7장에서 물질적 본성은 지고한 주의 하위 에너지가 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는 상위 에너지의 입자로 하위 에너지인 물질적 본성을 낳으시고 이는 물질적 본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접촉이다. 물질적 본성에 속박된 생명체가 영적 지식을 배양하면 물질적 존재의 위치에서 자신을 향상하고 점점 절대자의 브라흐만 개념에까지 오르게 된다. 삶에 관한 브라흐만 개념을 갖는 것은 자아 인식의 첫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브라흐만 깨달음을 얻은 자는 물질적 위치를 초월하게 되지만, 브라흐만 깨달음으로 자신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한다면 브라흐만의 위치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지만 점차 빠람아뜨마 깨달음으로 올라가서 결국 최고인격신에 관한 깨달음까지 이를 수도 있다. 베다 문헌에는 이에 관한 많은 예가 있다. 네 꾸마라(Kumāra)는 진리에 관한 비인성적 개념을 먼저 가졌지만 나중에 점차 봉헌의 단계에까지 오르게 된다. 비인성적 브라흐만 개념을 넘어 자신을 향상하지 않는 자는 더 낮은 위치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스라마드 바가바땀에서 비인성적 브라흐만의 단계에까지 오른 자라도 지고의 인격에 관해 모르고, 더 나아가지 않으면, 그의 지성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브라흐만 단계에까지 올랐음에도 주를 향한 봉헌에 종사하지 않으면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베다에서 말하기를, “라조 바이 사, 라삼 혜바얌 랍드바난디 바바띠(raso vai saḥ, rasaṁ hy evāyaṁ labdhvānandī bhavati), 즉 즐거움의 저장소,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를 이해하게 될 때 진정으로 초월적 행복을 느낀다(따잇띠리야 우빠니샤드 2.7.1).” 지고한 주는 여섯 가지 풍요로 가득하며, 헌애자가 당신께 다가가면 이 여섯 가지 풍요로움의 교환이 있다. 왕의 종은 왕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즐긴다. 이처럼 영원하고, 소멸하지 않는 행복과 영원한 삶이 봉헌과 함께한다. 그러므로 브라흐만 깨달음, 즉 영원성이나 불멸성은 봉헌에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이미 봉헌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가진 것이다.

본원적으로 브라흐만이지만, 생명체는 물질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바로 이것 때문에 떨어진다. 본원적 위치에서 생명체는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를 초월하지만, 물질과의 접촉으로 서로 다른 물질적 본성, 즉 선성과 동성, 그리고 암성에 얽매이게 된다. 이 세 가지 양태와의 접촉으로, 물질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으로 봉헌에 종사함으로써, 인간은 즉시 초월적 위치에 오르게 되고,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부당한 욕망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듣기와 구송, 기억하기로 시작되는 봉헌의 아홉 가지 과정은 반드시 헌애자들과의 교제 속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제와 영적 스승의 영향으로 지배하려는 물질적 욕망은 점차 사라지고, 주를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헌에 확고히 위치하게 된다. 이 방법은 이 장의 제22절에서부터 마지막 절을 통해 설명되었다. 주를 향한 봉헌은 아주 간단하다. 항상 주를 향한 봉사에 종사하고, 신상에 바친 음식을 먹고, 주의 연꽃 같은 발에 올린 꽃의 향기를 맡고, 주께서 초월적 유희를 즐기신 곳을 찾아가 보고, 주의 여러 행위와 헌애자와 나눈 사랑의 교류에 관해 읽고, 초월적 진동,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항상 구송하며, 주와 당신의 헌애자들의 현신일과 기일을 기리며 단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모든 물질적 행위에서 완전히 초연할 수 있다. 따라서 브라흐마죠띠나 다양한 브라흐만 개념에 이른 자는 질적으로 최고인격신과 같게 된다.

이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드 기따의 제14장, 물질의 세 가지 양태에 대한 박띠베단따 주석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