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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물질과 향유자, 그리고 의식

원문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쁘라끄리띰 뿌루샴 짜이바 prakṛtiṁ puruṣaṁ caiva
끄쉐뜨람 끄쉐뜨라-걈 에바 짜 kṣetraṁ kṣetra-jñam eva ca
에딷 베디뚬 잇차미 etad veditum icchāmi
갸남 계얌 짜 께샤바 jñānaṁ jñeyaṁ ca keśava
스리-바가반 우바짜 śrī-bhagavān uvāca
이담 샤리람 까운떼야 idaṁ śarīraṁ kaunteya
끄쉐뜨람 이땨비디야떼 kṣetram ity abhidhīyate
에딷 요 벳띠 땀 쁘라후후 etad yo vetti taṁ prāhuḥ
끄쉐뜨라-갸 이띠 딷-비다하 kṣetra-jña iti tad-vidaḥ

동의어

아르주나 우바짜: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쁘라끄리띰: 물질, 뿌루샴: 향유자, 짜: 또한, 에바: 분명히, 끄쉐뜨람: 터, 끄쉐뜨라-걈: 그 터를 아는 자, 에바: 분명히, 짜: 또한, 에땃: 이 모든 것, 베디뚬: 이해하다, 잇차미: 나는 소망한다, 갸남: 지식, 계얌: 지식의 대상, 짜: 또한, 께샤바: 오 끄리쉬나, 스리-바가반 우바짜: 최고인격신께서 말했다, 이담: 이것, 샤리람: 육체,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끄쉐뜨람: 그 터, 이띠: 따라서, 아비디야떼: 라고 한다, 에땃: 이것, 야하: 하는 자, 벳띠: 알다, 땀: 그는, 쁘라후: 라고 한다, 끄쉐뜨라-갸: 그 터에 관한 지식, 이띠: 따라서, 땃-비다하: 이것을 아는 자들에 의해서.

번역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오 제 소중한 끄리쉬나여, 저는 쁘라끄리띠(물질)와 뿌루샤(향유자), 그리고 터와 이 터를 아는 자, 그리고 지식과 지식의 대상에 관해서 알고 싶습니다.
최고인격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 꾼띠의 아들이여, 이 육신을 터라 하고 이 육신을 아는 자를 터를 아는 자라고 하느니라.

주석

아르주나는 쁘라끄리띠(물질), 뿌루샤(향유자), 끄쉐뜨라(터), 끄쉐뜨라-갸(이 터를 아는 자), 그리고 지식과 지식의 대상을 알고 싶어 했다. 그가 이 모든 것에 관해 질문했을 때, 끄리쉬나는 이 육신을 터라 하셨으며, 이 육신을 아는 자를 터를 아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 육신은 속박된 영혼이 활동하는 장이다. 속박된 영혼은 물질적 존재 안에 갇혀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물질적 본성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각각 행위의 터를 획득하게 된다. 이 행위의 터가 육신이다. 육신이란 무엇인가? 육신은 감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속박된 영혼은 감각 만족을 원하며, 감각을 즐길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육신, 즉 행위의 터를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이 육신을 터, 즉 속박된 영혼이 행동하는 터라 한다. 다음으로, 자기를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을 끄쉐뜨라-갸, 터를 아는 자라고 한다. 이 터와 그것을 아는 자, 즉 육신과 그 주체(영혼)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동기에서 노년기로 육신은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지만, 여전히 같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의 장을 아는 자와 실제적 행위의 장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속박된 살아 있는 영혼은 자기가 육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서두에 "데히노 스민(dehino ’smin)", 즉 생명체가 몸 안에 살고 있으며, 그 몸은 아기에서 어린이, 어린이에서 젊은이, 젊은이에서 늙은이로 변해가며, 육신을 가진 자는 그 육신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설명했다. 몸의 주인이 바로 끄쉐뜨라-갸이다. 우리는 때때로 “나는 행복하다”,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나는 개다”, “나는 고양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영혼에 대한 육체적 개념이다. 하지만 영혼은 육체와는 다르다. 비록 우리가 옷과 같은 여러 물건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물건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이처럼, 우리는 약간의 숙고로 우리가 이 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가진 누구나 끄쉐뜨라-갸, 행위의 장을 아는 자이며, 그 몸을 끄쉐뜨라, 즉 행위의 장이라고 한다.

바가바드 기따의 처음 여섯 장에서 몸의 주인(생명체)과 지고한 주를 이해할 수 있는 위치가 설명되었다. 바가바드 기따의 중간 여섯 장에서 최고인격신, 봉헌과 관련한 개별 영혼과 초영혼의 관계가 설명되었다. 상위의 최고인격신과 여기에 종속된 개별 영혼이 이 장들에서 명확히 기술되었다. 생명체는 어떤 상황에도 종속되어 있지만,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어서 고통받고 있다. 경건한 행위들로 계몽되면 그들은 각기 다른 동기로 즉, 괴로움으로, 돈을 원해서, 호기심에, 지식을 찾아 지고한 주께 다가간다. 이것 역시 설명되었다. 이제 제13장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생명체가 물질적 본성과 접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결실적 행위, 지식의 배양, 봉헌을 통해 지고한 주께 구원받는지 설명한다. 생명체는 물질적 육신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어떠한 연유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것 역시 설명될 것이다.

원문

끄쉐뜨라-걈 짜삐 맘 빋디 kṣetra-jñaṁ cāpi māṁ viddhi
사르바-끄쉐뜨레슈 바라따 sarva-kṣetreṣu bhārata
끄쉐뜨라-끄쉐뜨라갸요르 갸남 kṣetra-kṣetrajñayor jñānaṁ
얏 땃 갸남 마땀 마마 yat taj jñānaṁ mataṁ mama

동의어

끄쉐뜨라-걈: 터를 아는 자, 짜: 또한, 아삐: 확실히, 맘: 나를, 빋디: 알다, 사르바: 모든, 끄쉐뜨레슈: 육체라는 터에서, 바라따: 오 바라따의 아들아, 끄쉐뜨라: 행위의 장(육체), 끄쉐뜨라-갸요호: 터를 아는 자(영혼), 갸남: 그 지식, 얏: 그러한 것, 땃: 그것, 갸남: 지식, 마땀: 의견, 마마: 나의.

번역

오 바라따의 후손이여, 내가 모든 육신 안에서 그 육신들을 아는 자라는 사실 또한 이해해야 하느니라. 육신과 그것을 아는 자를 이해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 뜻이니라.

주석

육체와 영혼, 그리고 초영혼을 논하면서, 우리는 세 가지 다른 주제를 발견할 것이다. 주와 생명체, 그리고 물질이 그것이다. 모든 행위의 장, 즉 모든 이의 몸에는 두 영혼이 있다. 하나는 개별 영혼이고 다른 하나는 초영혼이다. 초영혼은 끄리쉬나 즉 최고인격신의 전체적 확장이므로 끄리쉬나께서는 “나도 아는 자이지만, 개별 육신을 아는 자(그 육신의 주체)는 아니다. 나는 초영혼이다. 나는 모든 육신에 빠람아뜨마, 즉 초영혼으로 자리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행위의 장과 그 장을 아는 자를 바가바드 기따의 관점에서 아주 자세히 공부하는 자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모든 개별 육신 속에서 그들의 모든 행위를 아는 자이다”라고 주는 말씀하신다. 개별 생명체는 각자 자기 몸은 알지만 다른 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모든 육신에 초영혼으로 계시는 최고인격신은 그들 육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신다. 당신은 모든 생명체의 서로 다른 몸을 전부 아신다. 농부는 자신의 작은 땅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왕은 자기 왕궁을 비롯해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 전체를 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별 육신의 소유자이지만, 지고한 주는 모든 육신의 소유자이다. 왕은 왕국의 원래 소유자이고, 백성은 이차적 소유자이다. 이처럼, 지고한 주는 모든 육신의 최고 소유자이시다.

육신은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고한 주를 흐리쉬께샤라고 하며, 그 의미는 “모든 감각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이다. 당신은 모든 감각의 원래 주인인데, 왕이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의 원래 주인이며, 백성은 이차적 주인인 것과 같다. 주께서 “나는 또한 아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주께서는 최상의 아는 자이시며, 개별 영혼은 오직 자기 몸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다의 문헌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끄쉐뜨라니 히 샤리라니 kṣetrāṇi hi śarīrāṇi
비잠 짜삐 슈바슈베 bījaṁ cāpi śubhāśubhe
따니 벳띠 사 요가뜨마 tāni vetti sa yogātmā
따따 끄쉐뜨라-갸 우쨔떼 tataḥ kṣetra-jña ucyate

이 몸을 끄쉐뜨라(터)라고 하고, 그 안에 몸의 주인이 살고 있고, 지고한 주는 몸과 몸의 주인을 모두 아신다. 따라서 그를 모든 터를 아시는 자라고 부른다. 행위의 장, 행위를 아는 자, 그리고 모든 행위를 모두 아는 최고 존재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몸과 개별 영혼, 그리고 초영혼의 본질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베다 문헌에서는 갸나라고 한다. 그것은 끄리쉬나의 말씀이다. 영혼과 초영혼이 하나지만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이다. 행위의 장과 행위를 아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완벽한 지식을 갖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쁘라끄리띠(물질), 뿌루샤(물질의향유자), 그리고 이스바라(물질과 개별 영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아는 자)의 위치를 이해해야 한다. 이 세 가지의 서로 다른 능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화가, 그림 그리고 화가(畵架, 이젤)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행위의 장인 이 물질계가 물질이고, 물질의 향유자는 생명체이며, 이 둘을 초월한 최상의 통치자가 최고인격신이다. 베다(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1.12)가 이렇게 명시한다. “복따 보걈 쁘레리따람 짜 마뜨바 / 사르밤 쁘록땀 뜨리-비담 브라흐맘 에땃(bhoktā bhogyaṁ preritāraṁ ca matvā / sarvaṁ proktaṁ tri-vidhaṁ brahmam etat).” 브라흐만의 세 가지 개념이 있다. 쁘라끄리띠는 행위의 장으로서의 브라흐만이며, 지바(개별 영혼)도 브라흐만으로서 물질적 본성을 통제하려고 하며, 이들 모두를 다스리는 자 역시 브라흐만인데, 이 브라흐만이 실제적 통제자이다.

이 장에서 두 주체 중에서 하나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다른 하나는 절대 오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하나는 상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종속되어 있다. 이 두 주체를 하나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자는 최고인격신의 말씀 “나 또한 행위의 장을 아는 자이다”라고 여기에 명백히 밝히신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다. 밧줄을 뱀으로 오인하는 자는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육신이 있으며, 그 육신의 서로 다른 주체가 있다. 각각의 영혼은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는 서로 다른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다양한 육신이 존재한다. 그런데 절대자 역시 통제자로서 그들 안에 존재하신다. 짜(ca)라는 말이 중요한데, 그것은 육신의 전체 수를 나타낸다. 이는 스릴라 발라데바 비댜부샤나의 의견이다. 끄리쉬나는 모든 몸에 각기 존재하는 개별 영혼과 함께 존재하는 초영혼이시다. 그리고 끄리쉬나께서는 참지식이란 초영혼이 행위의 장과 그 유한한 향유자를 다스린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여기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원문

땃 끄쉐뜨람 얏 짜 야드릭 짜 tat kṣetraṁ yac ca yādṛk ca
얃-비까리 야따스 짜 얏 yad-vikāri yataś ca yat
사 짜 요 얏-쁘라바바스 짜 sa ca yo yat-prabhāvaś ca
땃 사마세나 메 스리누 tat samāsena me śṛṇu

동의어

땃: 그것, 끄쉐뜨람: 행위의 장, 얏: 무엇, 짜: 또한, 야드릭: 있는 그대로, 짜: 또한, 얏: 무엇을 가지고, 비까리: 변하다, 야따하: 그것으로부터, 짜: 또한, 얏: 무엇, 사하: 그는, 짜: 또한, 야하: 누구, 얏: 무엇을 가지고, 쁘라바바하: 영향, 짜: 또한, 땃: 그것, 사마세나: 요약해서, 메: 나로부터, 스리누: 이해하다.

번역

자, 이제부터 이 행위의 장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고, 어디에서 생겨났으며, 이 행위의 장을 아는 자는 누구며, 그의 영향은 어떠한지에 관한 간략한 내 설명을 들어라.

주석

주께서 행위의 장과 그 행위의 장을 아는 자의 근원적 위치에 관해 설명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몸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떠한 물질로 만들어졌으며, 누구의 통제를 받아 작동하며, 그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고, 어디서부터 변화가 생기며, 그 원인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이며, 개별 영혼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며, 개별 영혼의 실제적 형상은 어떠한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개별 영혼과 초영혼의 차이와 서로 다른 영향력, 능력 등을 알아야 한다.여기 바가바드 기따에서 최고인격신께서 직접 설명하신 것을 이해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명료히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육신 안에 계시는 최고인격신께서 개별 영혼, 즉 지바와 하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원문

리쉬비르 바후다 기땀 ṛṣibhir bahudhā gītaṁ
찬도비르 비비다이 쁘리탁 chandobhir vividhaiḥ pṛthak
브라흐마-수뜨라-빠다이스 짜이바 brahma-sūtra-padaiś caiva
헤뚜맏비르 비니스찌따이히 hetumadbhir viniścitaiḥ

동의어

리쉬비히: 현명한 성인들에 의해, 바후다: 여러 방법으로, 기땀: 묘사된, 찬도비히: 베다의 경전에, 비비다이: 다양한, 쁘리탁: 여러 가지로, 브라흐마-수뜨라: 베단따의, 빠다이히: 경구로, 짜: 또한, 에바: 분명히, 헤뚜-맏비히: 원인과 결과로, 비니스찌따이히: 확실한.

번역

행위의 장과 그 행위를 아는 자에 관한 지식은 여러 베다 문헌에서 많은 성인이 설명하였다. 특히 베단따 수뜨라에 그 원인과 결과에 관한 모든 논리가 제시되어 있느니라.

주석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가 이 지식을 설명하는 데 가장 높은 권위자이다. 여전히 많은 학자와 권위자들은 항상 그들보다 먼저 존재한 권위자에게서 얻은 증거를 제시한다. 끄리쉬나께서는 가장 많은 논쟁이 일어나는 영혼과 초영혼의 이원론과 일원론에 관해 권위로 받아들여진 경전 베단따를 언급하며 설명하고 계신다. 우선 “여러 성인에 따르면 이것은 이러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를 제외하고 성인들에 관해 보자면, 비아사데바(베단따 수뜨라의 저자)가 훌륭한 성인이고, 그의 저서 베단따 수뜨라에 이원론이 완벽히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비아사데바의 아버지, 빠라샤라(Parāśara)도 훌륭한 성인으로, 그의 종교서에 “아함 뜨밤 짜 따탄예…(aham tvaṁ ca tathānye…), 즉 우리, 너와 나,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모두 물질적 육신 속에 있지만 초월적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여러 까르마에 따라 물질계의 세 가지 본성 속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누군가는 높은 수준에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낮은 수준에 있다. 높고 낮은 본성은 무지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며 무수한 수의 생명체로 발현된다. 그러나 오류가 없는 초영혼은 세 가지 본성에 오염되지 않으며 초월적이다.”라고 썼다. 이처럼 원래 베다에서, 특히 까타 우빠니샤드에 영혼과 초영혼, 그리고 육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많은 성인이 이것을 설명했고, 빠라샤라는 그 중 핵심인물이다.

찬도비히(chandobhiḥ)라는 말은 여러 베다 문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야주르베다의 한 부분인 따잇띠리야 우빠니샤드(Taittirīya Upaniṣad)는 자연과 생명체, 그리고 지고의 생명체를 설명한다.

앞서 끄쉐뜨라가 행동의 장이라고 했는데, 끄쉐뜨라-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개별 생명체이고, 다른 하나는 지고의 생명체이다. 따잇띠리야 우빠니샤드(2.5)에 “브라흐마 뿟참 쁘라띠쉬타(brahma pucchaṁ pratiṣṭhā)”라고 명시되어 있다. 안나-마야(anna-maya)라고 하는, 즉 존재하기 위해 음식에 의존함이라는 뜻을 가진 지고한 주의 에너지가 있다. 이것은 절대자에 관한 물질주의적 깨달음이다. 음식에서 지고한 절대 진리를 깨달은 다음, 쁘라나-마야(prāṇa-maya)로, 생명의 징후에서나 다양한 생명체에서 절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다음 갸나-마야(jñāna-maya)로, 깨달음이 생명의 징후를 넘어서 생각, 느낌 그리고 의지의 단계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다음 비갸나-마야(vijñāna-maya)라 불리는 브라흐만 깨달음이 있고, 이것은 생명체의 마음과 생명의 징후가 생명체 그 자체와 구별되는 경지이다. 그다음 최상의 단계인 아난다-마야(ānanda-maya)는 완전히 행복한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다섯 단계가 브라흐마 뿟참(brahma puccham)이라고 하는 브라흐만 깨달음의 단계이다. 이들 중에서 첫 세 단계, 안나-마야, 쁘라나-마야, 그리고 갸나-마야가 생명체가 펼치는 행동의 장을 의미한다. 이 모든 행위의 장을 지고한 주께서는 초월하시며 당신은 아난다-마야라고 불린다. 베단따 수뜨라에서 지고한 주를 묘사하기를, “아난다-마요 ’비아삿(ānanda-mayo ’bhyāsāt), 즉 최고인격신은 본성이 기쁨으로 가득하다.” 이 초월적 기쁨을 즐기려고 주께서는 비갸나-마야, 쁘라나-마야, 갸나-마야, 안나-마야로 당신을 확장하신다. 행위의 장에서 생명체는 즐기는 자로 여겨지지만, 이는 아난다-마야와는 다르다. 그 말은 생명체가 아난다-마야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즐기고자 결심하면 비로소 완벽해짐을 의미한다. 이것이 행위의 장을 아시는 지고한 주와 그에 종속되어 아는 자인 생명체에 관한 진정한 설명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베단따 수뜨라나 브라흐마 수뜨라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언급했듯이 브라흐마 수뜨라 법전은 원인과 결과에 관해 아주 훌륭히 설명한다. 이에 관한 몇몇 수뜨라, 즉 경구는 “나 비얃 아스루떼헤(na viyad aśruteḥ 2.3.2)”와 “나뜨마 스루떼헤(nātmā śruteḥ 2.3.18)”, 그리고 “빠랏 뚜 땃-츠루떼헤(parāt tu tac-chruteḥ 2.3.40)”이다. 첫 경구는 행위의 장을 나타내고, 두 번째는 생명체를 나타내며, 세 번째는 발현된 모든 생명체의 최고선, 지고한 주를 나타낸다.

원문

마하-부따냐항까로 mahā-bhūtāny ahaṅkāro
붇디르 아뱍땀 에바 짜 buddhir avyaktam eva ca
인드리야니 다샤이깜 짜 indriyāṇi daśaikaṁ ca
빤짜 쩬드리야-고짜라하 pañca cendriya-gocarāḥ
잇차 드베샤 수캄 두캄 icchā dveṣaḥ sukhaṁ duḥkhaṁ
상가따스 쩨따나 드리띠히 saṅghātaś cetanā dhṛtiḥ
에땃 끄세뜨람 사마세나 etat kṣetraṁ samāsena
사-비까람 우다흐리땀 sa-vikāram udāhṛtam

동의어

마하-부따니: 위대한 구성요소들, 아항까라하: 거짓 자아, 붇디히: 지성, 아뱍땀: 비발현, 에바: 분명히, 짜: 또한, 인드리야니: 감각들, 다샤-에깜: 열하나, 짜: 또한, 빤짜: 다섯, 짜: 또한, 인드리야-고-짜라하: 감각의 대상들, 잇차: 바라다, 드베샤: 증오, 수캄: 행복, 두캄: 불행, 상가따하: 모두 합한 것, 쩨따나: 살아있는 징후, 드리띠히: 확신, 에땃: 이 모든, 끄세뜨람: 행위의 장, 사마세나: 요약해서, 사-비까람: 상호작용으로, 우다흐리땀: 예가 되다.

번역

다섯 가지 큰 구성요소, 거짓 자아, 지성, 발현되지 않은 것, 열 가지의 감각과 마음, 다섯 가지의 감각 대상, 욕망, 증오, 행복, 불행, 총집합, 생명의 징후, 그리고 확신, 요약해서 이 모든 것이 행위의 장과 그 상호작용으로 여겨진다.

주석

위대한 성인들의 권위 있는 말씀, 베다의 찬가들과 베단따 수뜨라의 경구들에 따르면 이 세계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먼저 흙, 물, 불, 공기 그리고 하늘(空)이 있고, 이들이 다섯 가지 큰 구성요소(마하 부따 mahā-bhūta)이다. 그다음이 거짓 자아와 지성, 그리고 발현되지 않은 세 가지 물질계의 본성이다. 그다음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오관이 있다. 눈, 코, 혀, 귀 그리고 피부가 그것이다. 그다음이 다섯 가지 작용하는 감각으로 목소리, 팔, 다리, 항문과 생식기이다. 그다음 모든 감각 위에 있으며 몸 안에 존재하는 내면의 감각이라 불리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합해서 모두 열 한 개의 감각이 있다. 그다음 다섯 감각의 대상이 있다. 그것은 냄새, 맛, 형상, 촉감과 소리이다. 이 스물네 개의 구성요소의 총집합을 행위의 장이라 한다. 이 스물네 개의 주제를 분석적으로 연구하면 행위의 장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다음에 욕망, 증오, 행복과 불행이 있는데, 이것들은 총체 육신 안에서 다섯 개의 큰 구성요소가 상호작용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의식과 확신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징후는 미세 육신, 즉 마음과 거짓 자아, 그리고 지성의 발현이다. 이 미세 육신의 구성요소 역시 행위의 장에 포함된다.

다섯 가지 큰 구성요소는 거짓 자아의 총체적 표시로서, 이 거짓 자아를 학술 용어로 따마사-붇디(tāmasa-buddhi 무지 속의 지성)라고 하며 물질주의적 개념을 의미한다. 다섯 가지 큰 구성요소가 거짓 자아의 초기 단계를 차례로 대표한다. 이것은 또한 발현하지 않은 단계에 있는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를 나타낸다. 발현하지 않은 상태의 물질적 본성을 쁘라다나(pradhāna)라고 한다.

이 스물네 가지 구성요소와 그들의 상호작용을 자세히 알고자 하는 자는 더 상세히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는 그 대강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몸은 이 모든 요소의 대표이며 몸은 여섯 단계로 변해간다. 태어나서, 자라고, 한동안 유지되고, 부산물을 생산하고, 그다음 쇠퇴하고 마침내 소멸한다. 그러므로 이 행위의 장은 영원성이 없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끄쉐뜨라-갸, 이 행위의 장을 아는 자, 즉 그 소유자는 행위의 장과 다르다.

원문

아마니뜨밤 아담비뜨밤 amānitvam adambhitvam
아힘사 끄샨띠르 아르자밤 ahiṁsā kṣāntir ārjavam
아짜르요빠사남 샤우짬 ācāryopāsanaṁ śaucaṁ
스타이럄 아뜨마-비니그라하하 sthairyam ātma-vinigrahaḥ
인드리야르테슈 바이라걈 indriyārtheṣu vairāgyam
아나항까라 에바 짜 anahaṅkāra eva ca
잔마-므리뜌-자라-비아디 janma-mṛtyu-jarā-vyādhi-
두카-도샨우다르샤남 duḥkha-doṣānudarśanam
아삭띠르 아나비쉬방가하 asaktir anabhiṣvaṅgaḥ
뿌뜨라-다라-그리하디슈 putra-dāra-gṛhādiṣu
니땸 짜 사마-찟따뜨밤 nityaṁ ca sama-cittatvam
이쉬따니쉬또빠빳띠슈 iṣṭāniṣṭopapattiṣu
마이 짜난야-요게나 mayi cānanya-yogena
박띠르 아뱌비짜리니 bhaktir avyabhicāriṇī
비빅따-데샤-세비뜨밤 vivikta-deśa-sevitvam
아라띠르 자나-삼사디 aratir jana-saṁsadi
아댜뜨마-갸나-니땨뜨밤 adhyātma-jñāna-nityatvaṁ
땃뜨바-갸나르타-다르샤남 tattva-jñānārtha-darśanam
에땃 갸남 이띠 쁘록땀 etaj jñānam iti proktam
아갸남 야다똔’야타 ajñānaṁ yad ato ’nyathā

동의어

아마니뜨밤: 겸손함, 아담비뜨밤: 겸허함, 아힘사: 비폭력, 끄샨띠히: 인내, 아르자밤: 꾸밈없음, 아짜르야-우빠사남: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 다가가는, 샤우짬: 청결함, 스타이럄: 확고함, 아뜨마-비니그라하: 자기 통제, 인드리야-아르테슈: 감각과 관련해, 바이라걈: 버림, 아나항까라하: 거짓 자아 없이, 에바: 분명히, 짜: 또한, 잔마: 출생, 므리뜌: 죽음, 자라: 늙음, 비아디: 그리고 병, 두카: 불행, 도샤: 잘못, 아누다르샤남: 관찰하는, 아삭띠히: 집착하지 않고, 아나비쉬방가하: 만나지 않고, 뿌뜨라: 아들, 다라: 아내, 그리하-아디슈: 집 등의, 니땸: 계속된, 짜: 또한, 사마-찟따뜨밤: 평정, 이쉬따: 바람직한 것, 아니쉬따: 바람직하지 않은 것, 우빠빳띠슈: 얻고서, 마이: 나에게, 짜: 또한, 아난야-요게나: 순수한 봉헌으로, 박띠히: 봉헌, 아뱌비짜리니: 쉼 없이, 비빅따: 혼자의, 데샤: 장소, 세비뜨밤: 갈망하는, 아라띠히: 집착하지 않고, 자나-삼사디: 보통 사람들에게, 아댜뜨마: 자아에 관한, 갸나: 지식, 니땨뜨밤: 지속성, 땃뜨바-갸나: 진리에 관한 지식, 아르타: 목적을 위해, 다르샤남: 철학, 에땃: 이 모든, 갸남: 지식, 이띠: 따라서, 쁘록땀: 선언하다, 아갸남: 무지, 얏: 그것, 아따하: 이것으로부터, 아냐타: 다른 것.

번역

겸손함, 자만하지 않음, 비폭력, 인내, 꾸밈없음, 진정한 영적 스승에게 다가감, 청결함, 꾸준함, 자기 통제, 감각 만족 대상을 포기함, 거짓 자아의 사라짐, 생로병사라는 불행에 대한 인식, 집착 없음, 자식과 아내, 가정, 그리고 그 나머지의 구속에서 벗어남, 기쁘고 슬픈 사건 가운데 평정을 지킴, 나를 향한 지속적이고 순수한 봉헌, 외딴곳에 살고자 함, 일반 대중에게 초연함, 자아인식의 중요성을 받아들임, 그리고 절대 진리를 향한 철학적 탐구, 이 모든 것이 지식이라고 나는 선언하노라. 그리고 이 밖의 모든 것은 무지이니라.

주석

때때로 지적이지 못한 자들은 이 지식의 과정이 행위의 장과 상호작용인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진짜 지식의 과정이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절대 진리에 접근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절대 진리는 앞서 언급한 스물네 요소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이 요소들의 굴레에서 실제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을 받은 영혼은 스물네 요소로 이루어진 새장과 같은 몸에 갇힌 것이며, 위에 설명된 지식의 과정은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수단이다. 모든 지식의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11절의 첫째 줄에 설명되었다. “마이 짜난야-요게나”, 즉 주를 향한 순수한 봉헌이 지식 전 과정의 종착역이다. 그래서 주의 초월적 봉헌에 도달하지 않거나, 도달할 수 없다면 다른 열아홉 개의 항목은 특별한 가치가 없다. 하지만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으로 봉헌에 종사하면 이 열아홉 개의 다른 항목은 우리 안에서 자연히 발전하게 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5.18.12)에서 말하기를, “야샤스띠 박띠르 바가바땨낀짜나 사르바이르 구나이스 따뜨라 삼아사떼 수라하(yasyāsti bhaktir bhagavaty akiñcanā sarvair guṇais tatra samāsate surāḥ).” 즉 지식으로 얻는 모든 좋은 자질이 봉헌의 단계에 이른 자에게 나타난다. 제8절에서 언급된 영적 스승을 받아들이는 원칙은 필수적이다. 봉헌에 종사하는 자에게조차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초월적 삶은 진정한 스승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한다.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는 여기에서 이 지식의 과정이 진정한 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을 넘어서 추론하는 어떠한 것도 무의미하다.

여기에 약술된 지식의 여러 항목은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겸손함이란 남에게 존경받기를 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 개념의 삶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무척 존경받고자 갈망하게 하지만, 완벽한 지식을 소유한 자의 관점에서, 즉 자기가 이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 이 육신과 관련한 어떠한 것, 즉 명예든 불명예든 소용없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적 허상을 좇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기 종교에서 아주 유명해지고자 하는데, 때때로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종교 원칙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집단에 들어가 종교 지도자로 행세하는 자를 볼 수 있다. 진정한 영적 과학의 발전에서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전진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이 항목들로 평가할 수 있다.

비폭력은 일반적으로 다른 몸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비폭력이란 다른 자들을 불행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적 개념의 삶이라는 무지에 갇혀 물질적 고통을 영원히 겪고 있다. 우리가 이들을 영적 지식으로 끌어올리지 않는 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진정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비폭력이다.

인내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모욕과 불명예를 참아야 함을 의미한다. 영적 지식의 배양에 종사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모욕과 불명예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예상 가능한 것으로, 물질적 본성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이 쁘라흘라다조차 영적 지식의 배양에 전념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봉헌에 적대적이어서 위험에 처했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방법으로 쁘라흘라다를 죽이려고 했지만 쁘라흘라다는 아버지의 이런 시도를 참아냈다. 이처럼 영적 지식을 수행하는 데는 많은 장애가 있겠지만 모든 것을 참고 굳은 결심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꾸밈없음이란 외교 수완 없이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적에게조차 진실을 말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영적 스승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수인데 그 이유는 진정한 영적 스승의 가르침 없이 영적 과학의 발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공손하게 스승을 진심으로 섬기면 스승은 제자에게 기꺼이 축복을 내릴 것이다. 진정한 영적 스승은 끄리쉬나의 대표자이므로 스승이 제자에게 축복을 내리면 제자는 규정 원칙들을 따르지 않더라도 곧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진심으로 스승을 섬긴 자는 규정 원칙을 쉽게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청결함은 영적 삶을 나아감에 있어 필수적이다. 청결함은 내적 청결함과 외적 청결함으로 두 종류가 있고, 외적인 것은 목욕을 의미하고, 내적인 것은 항상 끄리쉬나를 생각하며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구송하는 것이다. 이 과정으로 마음에 쌓인 지난 까르마의 먼지를 씻어내게 된다.

확고함이란 영적 삶에 전진하고자 굳게 결심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심 없이 실질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자기 통제란 영적 삶의 전진에 장애가 되는 어떤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에 익숙해져서 영적 진보의 길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버림이다. 감각은 너무나 강해 감각 만족에 항상 안달이 나 있다. 불필요한 욕망을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 감각은 몸을 건강히 유지해 영적 삶을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만 만족시켜야 한다. 가장 중요하며 또한 다스리기 어려운 감각은 혀이다. 혀를 다스릴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감각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혀의 기능은 말하고 맛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체계적인 규정을 통해 혀는 항상 끄리쉬나께 먼저 바친 음식을 먹고, 하레 끄리쉬나를 구송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눈에 관해서 보자면, 눈은 끄리쉬나의 아름다운 형상을 제외한 어떠한 것을 보는 것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눈을 다스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귀는 끄리쉬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데 사용되어야 하고, 코는 끄리쉬나께 바친 꽃의 향기를 맡는 데 쓰여야 한다. 이것이 봉헌의 과정이며 여기에서 바가바드 기따는 이 봉헌의 과학만을 상술하고 있다. 봉헌이 핵심이며 유일한 목적이다. 바가바드 기따를 논평하는 일부 지성이 부족한 자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지만, 바가바드 기따는 봉헌을 제외한 어떤 주제도 다루지 않는다.

거짓 자아란 육신을 자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몸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자아는 우리와 함께 있다. 거짓 자아는 잘못이지만 진정한 자아는 그렇지 않다. 베다의 문헌에서 말하기를, “아함 브라흐마스미, 즉 나는 브라흐만이다, 나는 영혼이다(브리핟 아란야까 우빠니샤드 Bṛhad-āraṇyaka Upaniṣad 1.4.10)”, 여기에서 말하는 “나는”이라는 자아의 개념은 자아 인식의 길에서 해방을 이룬 경지에도 존재한다. 여기에서 “나는”의 개념이 자아이지만 이 “나는”의 개념이 이 거짓 육신에 적용될 때, 이것은 거짓 자아이다. “나”라는 개념이 실재에 적용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자아이다. 일부 철학자들은 우리의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에고는 정체성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에고를 버릴 수 없다. 물론 육신과 동일시하는 거짓 자아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이해해야 한다. 여러 베다 문헌에 출생에 관한 묘사가 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 산모의 자궁 안에서 지내는 상태와 그 고통 등 이에 관한 모든 것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출생은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생사의 반복을 해결하려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순간에도 온갖 종류의 고통을 겪으며 이것 역시 권위 있는 경전들에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논의해야 한다. 늙고 병드는 것은 누구나 실제로 경험한다. 아무도 늙고 병들고 싶어 하지 않지만, 이것을 피할 수는 없다. 생로병사의 고통에 관한 비관적 시각을 가지지 않는 한, 영적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원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자식, 아내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초연하다는 것은 이것들에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한 애정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 진보에 도움 되지 않을 때 그들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최고의 과정은 끄리쉬나 의식이다. 우리가 완전한 끄리쉬나 의식이 되면 가정을 무척 화목하게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구송하고, 끄리쉬나께 바친 음식을 먹고, 바가바드 기따와 스리마드 바가바땀과 같은 책을 토론하며 신상 숭배를 하면 될 뿐이다. 이 네 가지는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가족 구성원을 이런 식으로 훈련해야 한다. 가족이 아침과 저녁에 함께 앉아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같이 구송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규칙을 따르면서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키는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다면 가정인의 삶에서 버리는 삶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맞지 않고 영적 진보에 호의적이지 않으면 가정생활을 버려야 마땅하다. 아르주나가 그랬던 것처럼 끄리쉬나를 깨닫고 봉사하려면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한다. 아르주나는 자기 가족 구성원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들이 끄리쉬나를 깨닫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끄리쉬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마침내 그들과 싸워 없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우리는 가정생활의 행복과 불행에 초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행복할 수도 완전히 불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은 물질적 삶과 공존하는 요소이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조언하는 바와 같이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행복과 불행의 오고 감은 막을 길이 없기에 물질주의적 삶의 방식에서 초연해야 하고 두 상황에서 저절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으면 즐거워하고, 원치 않는 것이 닥치면 괴로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경지에 실제로 이르게 되면 이러한 것들로 동요하지 않는다.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흔들림 없는 봉헌을 연습해야 한다. 벗어남 없이 끄리쉬나께 봉헌한다는 것은 봉헌의 아홉 과정에 종사함을 의미한다. 제9장의 마지막 절에서 설명된 구송, 듣기, 숭배, 경의를 표하기 등, 이 과정들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 삶에 익숙해지면 자연히 우리의 성미와 맞지 않는 물질주의적 성향의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만큼 불필요한 교제가 없는 외딴곳에 살기 원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검사해 볼 수 있다. 당연히 헌애자는 불필요한 스포츠, 영화 관람 또는 사회적 기능 등에 흥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단지 시간 낭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생활이나 다른 주제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와 철학자들이 많이 있는데,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그러한 연구와 철학적 사색은 어떠한 가치도 없다. 그것은 대부분 무의미하다.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인간은 철학적 분별력으로 영혼의 특성에 관해 탐구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자아를 이해하는 탐구를 해야 한다. 이것이 여기에서 권고된다.

자아 인식에 관한 한, 박띠 요가가 특히 실용적이라고 여기에서 분명히 언급되었다. 헌애를 이야기할 때, 초영혼과 개별 영혼의 관계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박띠, 즉 헌애의 삶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 개별 영혼과 초영혼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개별 영혼이 최고 영혼에게 바치는 봉사는 니땸(nityam), 즉 영원하다고 명백히 언급되었다. 그래서 박띠, 즉 봉헌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철학적 확신을 가져야 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1.2.11)에서 이것을 설명한다. “바단띠 땃 땃뜨바-비다스 땃뜨밤 야갸남 아드바얌 (Vadanti tat tattva-vidas tattvaṁ yaj jñānam advayam), 절대 진리를 진정으로 아는 자들은 지고의 자아에 관한 깨달음이 세 가지, 즉 브라흐만, 빠람아뜨마, 그리고 바가반이라는 것을 안다.” 바가반은 절대 진리에 관한 깨달음의 결론이다. 따라서 최고인격신을 알 수 있는 그러한 경지에 이른 다음 주께 봉헌해야 한다. 이것이 지식의 완성이다.

겸손함을 실천하는 것에서 시작해 절대 진리, 최고인격신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정은 바닥에서 맨 꼭대기에 이르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일 층, 이 층, 삼 층 정도에까지 도달했지만 마지막 끄리쉬나를 이해하는 데까지 올가가지 않으면 지식의 낮은 단계에 머무는 것이다. 절대신과 겨루고자 하면서 동시에 영적 지식의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좌절할 것이다. 겸손함 없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언급되었다. 자기를 신이라 생각하는 것은 가장 거만한 마음가짐이다. 물질적 본성의 냉혹한 법칙으로 항상 고통받으면서도 무지로 인해 “나는 신이다”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 따라서 지식의 시작은 겸손함(아마니뜨바)이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며, 지고한 주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고한 주께 대한 반항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 본성에 종속된다. 이 진실을 알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원문

계얌 얏 땃 쁘라박샤미 jñeyaṁ yat tat pravakṣyāmi
얏 갸뜨밤리땀 아스누떼 yaj jñātvāmṛtam aśnute
아나디 맛-빠람 브라흐마 anādi mat-paraṁ brahma
나 삿 딴 나삳 우쨔떼 na sat tan nāsad ucyate

동의어

계얌: 알아야 하는 것, 얏: 그것, 땃: 저것, 쁘라박샤미: 내가 이제 설명할 것이다, 얏: 그것, 갸뜨바: 아는, 암리땀: 감로수, 아스누떼: 맛보다, 아나디: 시작 없는, 맛-빠람: 내게 종속된, 브라흐마: 영혼, 나: 아니다, 삿: 원인, 땃: 저것, 나: 아니다, 아삿: 결과, 우쨔떼: 라고 하다.

번역

이제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설명할 것인데, 이를 알면 영원함을 맛볼 것이니라. 혼이며 시작이 없고 내게 종속된 브라흐만은 이 물질계의 인과를 넘어 존재한다.

주석

주께서 행위의 장과 그것을 아는 자를 설명하셨다. 그리고 행위의 장을 아는 자를 알아가는 과정 또한 설명하셨다. 이제 주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먼저 영혼과 그다음 초영혼을 설명하신다. 영혼과 초영혼을 아는 자에 관한 지식으로 우리는 삶의 감로수를 맛볼 수 있다. 제2장에서 설명했듯이 생명체는 영원하다. 이것 역시 여기에서 확증되었다. 지바가 태어난 특정 시점이라는 것은 없다. 또한 그 누구도 지바뜨마가 지고한 주에게서 발현된 역사를 추적할 수도 없다. 따라서 영혼은 시작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베다의 문헌은 이것을 확증한다. “나 자야떼 므리야떼 바 비빠스찟(na jāyate mriyate vā vipaścit《까타 우빠니샤드 1.2.18》).” 육신을 아는 자는 절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지식으로 가득하다.

초영혼으로서 지고한 주는 베다 문헌에서 “쁘라다나 끄쉐뜨라갸 빠띠르 구네샤하(pradhāna-kṣetrajña-patir guṇeśaḥ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즉 육신을 아는 자 중 최고이며 물질적 본성의 세 가지 양태의 주인으로 언급된다. 스므리띠에서 말하기를, “다사-부또 하레르 에바 나냐스바이바 까다짜나(dāsa-bhūto harer eva nānyasvaiva kadācana)”, 즉 생명체는 지고한 주께 영원히 봉사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주 짜이따냐의 가르침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이 절에서 언급된 브라흐만에 대한 설명은 개별 영혼에 관한 것이며, 이렇게 브라흐만이라는 말이 생명체에 적용될 때, 이것은 아난다-브라흐마와 상반되는 비갸나-브라흐마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난다-브라흐마란 최고 브라흐만 인격신이다.

원문

사르바따 빠니-빠담 땃 sarvataḥ pāṇi-pādaṁ tat
사르바똑’쉬-시로-무캄 sarvato ’kṣi-śiro-mukham
사르바따 스루띠말 로께 sarvataḥ śrutimal loke
사르밤 아브리땨 띠쉬타띠 sarvam āvṛtya tiṣṭhati

동의어

사르바따하: 모든 곳에, 빠니: 팔, 빠담: 다리, 땃: 그것, 사르바따하: 모든 곳에, 악시: 눈, 시라하: 머리, 무캄: 얼굴, 사르바따하: 모든 곳에, 스루띠-맛: 귀가 있는, 로께: 세상에, 사르밤: 모든 것, 아브리땨: 덮고 있는, 띠쉬타띠: 존재하다.

번역

모든 곳에 그의 손과 다리, 눈, 머리, 얼굴, 그리고 귀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초영혼은 모든 곳에 두루 퍼져 존재한다.

주석

태양의 존재로 무한한 빛이 나오듯 초영혼, 즉 최고인격신의 존재 또한 그러하다. 주는 편재(모든 곳에 있음)하는 형상으로 존재하시며 그 안에 최초의 위대한 스승 브라흐마에서 시작하여 작은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별 생명체가 존재한다. 주 안에는 무한한 머리와 다리, 손, 눈, 그리고 무한한 생명체가 있다. 이는 모두 초영혼의 안과 초영혼 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초영혼은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한다. 그러나 개별 영혼 자신의 손과 다리, 그리고 눈이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무지에 영향 받을 때는 자기 손과 다리가 모든 곳에 뻗칠 수 있다고 인지할 수 없지만, 적합한 지식을 획득하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 말은 물질적 본성에 속박된 개별 영혼은 절대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절대자는 개별 영혼과는 다르다. 지고한 주는 제한 없이 당신의 손을 뻗칠 수 있지만, 개별 영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주께서 당신께 꽃과 과일 또는 약간의 물이라도 바치면 받아들이신다고 말씀하신다. 주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받으실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주의 전능하심이다. 주께서는 지구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당신의 왕국에 계시더라도 누가 바친 것에라도 당신의 손을 뻗쳐 받으실 수 있다. 이것이 그의 힘이다. 브라흐마 삼히따(5.37)에서 말하기를, “골로까 에바 니바사땨킬라뜨마-부따하(goloka eva nivasaty akhilātma-bhūtaḥ)”, 이 말은 주는 초월적 행성에서 항상 유희를 즐기고 계시지만 모든 곳에 두루 계신다는 뜻이다. 개별 영혼은 자기가 모든 곳에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최고 영혼, 최고인격신을 묘사한 것이지 개별 영혼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원문

사르벤드리야-구나바삼 sarvendriya-guṇābhāsaṁ
사르벤드리야-비바르지땀 sarvendriya-vivarjitam
아삭땀 사르바-브릿 짜이바 asaktaṁ sarva-bhṛc caiva
니르구남 구나-복뜨리 짜 nirguṇaṁ guṇa-bhoktṛ ca

동의어

사르바: 모든 것의, 인드리야: 감각들의, 구나: 자질들의, 아바삼: 원천, 사르바: 모든, 인드리야: 감각들, 비바르지땀: 없는, 아삭땀: 집착하지 않는, 사르바-브릿: 모든 이의 유지자, 짜: 또한, 에바: 분명히, 니르구남: 물질적 자질 없이, 구나-복뜨리: 구나들의 주인, 짜: 또한.

번역

초영혼은 모든 감각의 원천이지만 그것들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모든 생명체의 유지자이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는 물질적 본성을 초월함과 동시에 그 모든 본성의 주인이니라.

주석

지고한 주께서는 생명체가 가진 모든 감각의 원천이시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감각을 갖고 계시지 않다. 사실 개별 영혼도 영적 감각이 있지만, 속박된 삶 속에서 물질적 요소들로 덮여 있어 감각 작용이 물질을 통해 드러난다. 지고한 주의 감각은 이렇게 덮여 있지 않다. 당신의 감각은 초월적이므로 니르구나(nirguṇa)라고 한다. 구나란 물질적 양태를 의미하지만, 주의 감각은 물질적 덮임이 없다. 당신의 감각은 우리와 같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주가 모든 감각 작용의 원천이지만, 당신은 순수하고 초월적 감각을 가지고 계신다. 이 점은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3.19)에서 아주 멋지게 설명되었는데, “아빠니-빠도 자바노 그라히따(apāṇi-pādo javano grahītā), 즉 최고인격신은 물질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손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손은 당신께 바쳐진 제사의 봉헌물을 모두 받으신다고 한다. 그것이 속박된 영혼과 초영혼의 차이다. 초영혼은 물질적 눈이 없지만 눈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보실 수 있겠는가? 당신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을 보신다. 당신은 우리의 가슴속에 계시며, 과거에 우리가 한 것, 현재 하는 것,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것들을 다 알고 계신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그는 모든 것을 알지만, 그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확증했다. 지고한 주는 우리와 같은 다리가 없지만, 영적 다리를 가지고 계시므로 전 우주를 여행하실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주는 인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는 눈과 다리, 손 그리고 모든 것이 있고, 우리는 당신의 부분이어서 우리 또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의 손과 다리, 눈 그리고 감각은 물질적 본성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

바가바드 기따는 또한 주께서 나타나실 때, 당신의 내적 힘으로 당신의 모습 그대로 현현하신다고 확증한다. 주는 물질적 에너지의 주인이셔서 물질적 에너지에 오염되지 않는다. 베다 문헌을 통해 주의 몸 전체가 영적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주는 삿-찓-아난다-비그라하라고 하는 영원한 형상을 하고 계시다. 당신은 모든 풍요로 가득하며, 모든 부와 에너지의 소유자이시다. 당신은 가장 총명하며 지식으로 가득하시다. 이러한 것들이 최고인격신을 나타내는 몇몇 특징이다. 당신은 모든 생명체의 유지자이며 모든 행위의 증인이시다. 베다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고한 주는 항상 초월적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당신의 머리와 얼굴, 손, 다리를 보지 못하더라도 주에게는 이것들이 있고 우리가 초월적 경지에 이르면 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물질적으로 오염된 감각들 때문에 우리는 주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여전히 물질의 영향을 받는 비인성주의자들은 인격신을 이해할 수 없다.

원문

바히란따스 짜 부따남 bahir antaś ca bhūtānām
아짜람 짜람 에바 짜 acaraṁ caram eva ca
숙쉬마뜨밧 딷 아비계얌 sūkṣmatvāt tad avijñeyaṁ
두라-스탐 짠띠께 짜 땃 dūra-sthaṁ cāntike ca tat

동의어

바히히: 바깥, 안따하: 안쪽, 짜: 역시, 부따남: 모든 생명체의, 아짜람: 움직이지 않는, 짜람: 움직이는, 에바: 또한, 짜: 그리고, 숙쉬마뜨밧: 미묘함 때문에, 땃: 그것, 아비계얌: 알 수 없는, 두라-스탐: 멀리 떨어진, 짜: 또한, 안띠께: 가까이, 짜: 그리고, 땃: 그것.

번역

지고의 진리는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모든 생명체의 안과 밖에 존재한다. 그는 미묘하므로 보거나 인지하는 물질적 감각의 능력을 초월한다. 그는 아주 멀리 있지만 또한 모두에 항상 가까이 있다.

주석

베다의 문헌을 통해 나라야나, 지고의 인간은 모든 생명체의 안과 밖 모두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영계와 물질계 모두에 존재한다. 그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있기도 하다. 베다 문헌에 이러한 진술이 있다. “아시노 두람 브라자띠 샤야노 야띠 사르바따하(Āsīno dūraṁ vrajati śayāno yāti sarvataḥ《까타 우빠니샤드 1.2.21》). 그리고 그는 항상 초월적 축복 속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가 어떻게 완전한 풍요로움을 누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이러한 물질적 감각으로는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따라서 베다에서 그를 이해하는 데 우리의 물질적 마음과 감각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을 연습함으로써 봉헌으로 마음과 감각을 정화한 자는 그를 계속 볼 수 있다.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지고의 신을 향한 사랑을 발전시킨 자는 중단 없이 항상 그를 볼 수 있다고 확증했다. 바가바드 기따(11.54)에서도 오직 봉헌을 통해 그를 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땨 뜨바난야야 샤꺄하(Bhaktyā tv ananyayā śakyaḥ).”

원문

아비박땀 짜 부떼슈 avibhaktaṁ ca bhūteṣu
비박땀 이바 짜 스티땀 vibhaktam iva ca sthitam
부따-바르뜨리 짜 땃 계얌 bhūta-bhartṛ ca taj jñeyaṁ
그라시쉬누 쁘라바비쉬누 짜 grasiṣṇu prabhaviṣṇu ca

동의어

아비박땀: 분할됨 없이, 짜: 또한, 부떼슈: 모든 생명체 안에, 비박땀: 분할된, 이바: 마치, 짜: 또한, 스티땀: 위치한, 부따-바르뜨리: 모든 생명체의 유지자, 짜: 또한, 땃: 그것, 계얌: 이해되어야 하는, 그라시쉬누: 삼키는, 쁘라바비쉬누: 발현하는, 짜: 또한.

번역

초영혼이 모든 존재에 분할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는 하나로 존재한다. 그가 모든 생명체의 유지자이지만 그들을 집어삼키고 발현시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주석

주는 초영혼으로서 모든 이의 가슴속에 계신다. 이것이 당신을 분할해 계신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그는 하나다. 자오선 위에 있는 태양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서쪽으로 오천 마일을 가 “태양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모든 사람이 태양은 머리 위에 있다고 답할 것이다. 이 예는 초영혼이 분할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나누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나타낸다. 태양이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베다 문헌은 한 분의 비쉬누께서 당신의 전능함으로 모든 곳에 계신다고 한다. 그리고 지고한 주는 모든 생명체의 유지자이시지만, 전멸의 시기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신다. 이것은 제11장에서 주께서 꾸룩쉐뜨라에 모인 모든 전사를 집어삼키기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확증되었다. 당신은 또한 시간의 모습으로서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고도 하셨다. 당신은 섬멸시키는 자이고, 모든 것을 죽이는 자이다. 창조가 일어났을 때 주는 모든 것을 그들의 원래 상태에서 발현시키시고, 소멸 때 그들을 집어삼키신다. 베다 찬가들은 주가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며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창조 후에 모든 것은 그의 전능하심에 안식하고 소멸 후 모든 것은 다시 당신께 돌아가 안식한다. 이러한 내용이 베다 찬가들이 확증하는 바이다. “야또 바 이마니 부따니 자얀떼 예나 자따니 지반띠 얏 빠라얀땨비삼 비샨띠 딷 브라흐마 딷 비지갸사스바(Yato vā imāni bhūtāni jāyante yena jātāni jīvanti yat prayanty abhisaṁ viśanti tad brahma tad vijijñāsasva《따잇띠리야 우빠니샤드3.1》).

원문

죠띠샴 아삐 땃 죠띠스 jyotiṣām api taj jyotis
따마사 빠람 우쨔떼 tamasaḥ param ucyate
갸남 계얌 갸나-감얌 jñānaṁ jñeyaṁ jñāna-gamyaṁ
흐리디 사르바샤 비쉬티땀 hṛdi sarvasya viṣṭhitam

동의어

죠띠샴: 모든 빛나는 대상 속에, 아삐: 또한, 땃: 그것, 죠띠히: 빛의 원천, 따마사하: 어둠, 빠람: 초월한, 우쨔떼: 라고 한다, 갸남: 지식, 계얌: 알려진, 갸나-감얌: 지식으로 접근하는, 흐리디: 가슴에, 사르바샤: 모든 사람의, 비쉬티땀: 위치한.

번역

그는 빛을 내는 모든 대상이 가진 빛의 원천이다. 그는 물질의 어둠을 초월하며 발현하지 않는다. 그는 지식이고, 그는 지식의 대상이며, 그리고 지식의 목표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있다.

주석

초영혼, 최고인격신은 태양과 달, 그리고 별과 같은 빛을 내는 대상이 가진 빛의 원천이다. 베다 문헌을 통해 우리는 영적 왕국에는 지고한 주의 광채 때문에 해나 달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질계에서는 주의 영적 광채, 브라흐마죠띠가 물질의 구성요소 마핫 땃뜨바(mahat-tattva)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물질계는 빛을 얻기 위해 태양, 달, 전기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계에는 이러한 것들이 필요 없다. 베다 문헌에 주의 광채로 모든 것이 빛난다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물질계에 계시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는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영계에 계신다. 이것 역시 베다에서 확인된다. “아디땨-바르남 따마사 빠라스땃(Āditya-varṇaṁ tamasaḥ parastāt《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3.8》). 그는 태양처럼 영원히 빛나지만 이 물질계의 어둠을 완전히 넘어서신다.

그의 지식은 초월적이다. 베다의 문헌은 브라흐만에 초월적 지식이 집중되어 있다고 확증한다. 모든 사람의 가슴에 계시는 지고한 주는 영계로 옮겨지고자 갈망하는 자들에게 지식을 주신다. 베다 만뜨라(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6.18)가 말한다. “땀 하 데밤 아뜨마-붇디-쁘라까샴 무묵슈르 바이 샤라남 아함 쁘라빠뎨(taṁ ha devam ātma-buddhi-prakāśaṁ mumukṣur vai śaraṇam ahaṁ prapadye), 즉 해방을 원한다면 최고인격신께 반드시 항복해야 한다.” 지식의 궁극적 목적에 관해서도 베다 문헌이 확증한다. “땀 에바 비디뜨바띠 므리뜜 에띠(tam eva viditvāti mṛtyum eti), 즉 오직 그를 앎으로써 생사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다(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3.8).”

주는 최고 통제자로서 모든 이의 가슴속에 계신다. 절대자는 모든 곳에 손과 발이 뻗지만 개별 영혼이 그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행위의 장을 아는 두 존재, 개별 영혼과 초영혼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손과 발은 국부적으로 뻗지만, 끄리쉬나의 손과 발은 모든 곳에 뻗는다. 이것은 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3.17)에서 확증된다. “사르바샤 쁘라붐 이샤남 사르바샤 샤라남 브리핫(sarvasya prabhum īśānaṁ sarvasya śaraṇaṁ bṛhat).” 최고인격신, 초영혼은 모든 생명체의 쁘라부, 즉 주인이다. 그러므로 그가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은신처이다. 그래서 지고한 초영혼과 개별 영혼이 항상 다르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원문

이띠 끄쉐뜨람 따타 갸남 iti kṣetraṁ tathā jñānaṁ
계얌 쪽땀 사마사따하 jñeyaṁ coktaṁ samāsataḥ
맏-박따 에딷 비갸야 mad-bhakta etad vijñāya
맏-바바요빠빠댜떼 mad-bhāvāyopapadyate

동의어

이띠: 그러므로, 끄쉐뜨람: 행위의 장(육신), 따타: 또한, 갸남: 지식, 계얌: 알 수 있는 것, 짜: 또한, 욱땀: 묘사하는, 사마사따하: 요약해서, 맛-박따하: 나의 헌애자, 에땃: 이 모든 것, 비갸야: 이해 아래, 맛-바바야: 나의 본성으로, 우빠빠댜떼: 달성하다.

번역

이로써 나는 행위의 장(육신)과 지식, 알 수 있는 것을 요약해 설명하였다. 오직 나의 헌애자들만이 이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나의 본성에 이를 수 있느니라.

주석

주께서는 간략히 육신과 지식, 그리고 알 수 있는 것에 관해 설명하셨다. 이 지식은 세 가지, 즉 앎의 주체, 알 수 있는 것, 앎의 과정이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비갸냐(vijñāna), 즉 지식의 과학이라고 한다. 완벽한 지식은 주의 순수한 헌애자들은 직접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일원론자들은 궁극적 단계에서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된다고 말하지만 헌애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식과 지식의 발전은 우리 자신을 끄리쉬나 의식 안에서 이해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재 물질적 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모든 의식을 끄리쉬나를 위한 행위로 전환하고 끄리쉬나가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즉시 진정한 지식을 얻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지식이란 봉헌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한 예비 단계에 불과하다. 제15장에서 이것은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이제 요약하면, “마하 부따니”로 시작해서 “쩨따나 드리띠히”로 이어지는 제6절과 7절은 물질의 구성요소와 생명의 징후가 발현되는 현상의 분석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 육신, 즉 행위의 장을 구성한다. 그리고 “아마니뜨밤”에서 “땃뜨바-갸나르타-다르샤남”에 이르는 제8절에서 12절은 행위의 장을 아는 두 주체, 영혼과 초영혼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의 과정을 설명한다. 그다음 “아나디 맛-빠람”으로 시작해 “흐리디 사르바샤 비쉬티땀”으로 이어지는 제13절에서 18절까지는 영혼과 지고한 주 혹은 초영혼을 설명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항목, 행위의 장(육신), 이해의 과정, 그리고 영혼과 초영혼이 모두 설명되었다. 특히 여기에서 오직 주의 순수한 헌애자들만이 이 세 가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헌애자들에게 바가바드 기따는 전적으로 유용하다. 최상의 목표, 지고한 주 끄리쉬나의 본성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다른 말로,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헌애자들만이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할 수 있으며,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원문

쁘라끄리띰 뿌루샴 짜이바 prakṛtiṁ puruṣaṁ caiva
빋댜나디 우바바삐 viddhy anādī ubhāv api
비까람스 짜 구남스 짜이바 vikārāṁś ca guṇāṁś caiva
빋디 쁘라끄리띠-삼바반 viddhi prakṛti-sambhavān

동의어

쁘라끄리띰: 물질적 본성, 뿌루샴: 생명체, 짜: 또한, 에바: 분명히, 빋디: 너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나디: 시작이 없는, 우바우: 모두, 아삐: 역시, 비까란: 변화, 짜: 또한, 구난: 세 가지 양태, 짜: 또한, 에바: 분명히, 빋디: 알다, 쁘라끄리띠: 물질, 삼바반: 생산된.

번역

물질적 본성과 생명체는 시작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물질의 양태와 그 변화는 물질적 본성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주석

이 장에 주어진 지식으로 우리는 육신(행위의 장)과 육신을 아는 자(개별 영혼과 초영혼)를 이해할 수 있다. 육신은 행위의 장이며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육신을 받아 그 육신의 행위를 즐기는 개별 영혼이 뿌루샤, 즉 생명체이다. 그가 바로 아는 자이며, 또 다른 아는 자는 초영혼이다. 물론 초영혼과 생명체는 최고인격신의 서로 다른 발현이다. 생명체는 주가 가진 에너지의 범주에 속하고, 초영혼은 당신의 개인적 확장의 범주에 속한다.

물질적 본성도, 생명체도 영원하다. 그 말은 이들은 창조 이전에 존재했다. 물질의 발현은 지고한 주의 에너지에서 나왔고, 생명체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생명체는 상위 에너지이다. 생명체와 물질적 본성 둘 다 이 우주가 발현되기 전에 존재했다. 물질적 본성은 최고인격신, 마하 비쉬누 안에 흡수되어 있었고, 필요시 마핫 땃뜨바를 통해 발현되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 또한 주 안에 있지만, 속박되어 있어 지고한 주를 섬기기 싫어한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발현되는 물질적 본성과 함께 이 생명체들에게 다시 물질계에서 행위를 할 기회가 주어지고 따라서 영적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물질적 창조의 신비다. 사실 생명체는 원래 지고한 주의 영적 부분이지만 반항하는 성향 때문에 이 물질적 본성 안에 속박되게 되었다. 이 생명체들이나 지고한 주의 고등한 존재들이 이 물질적 본성에 어떻게 닿게 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최고인격신께서는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아신다. 경전들을 통해 주께서는 이 물질적 본성에 사로잡힌 자들은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몇 구절의 설명을 통해 세 가지 양태를 지니는 물질적 본성의 변화와 영향 또한 물질적 본성의 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생명체에 관련된 모든 변이와 다양성은 육신 때문이다. 영혼의 측면에서 생명체는 모두 똑같다.

원문

까르야-까라나-까르뜨릿베 kārya-kāraṇa-kartṛtve
헤뚜 쁘라끄리띠루쨔떼 hetuḥ prakṛtir ucyate
뿌루샤 수카-두카남 puruṣaḥ sukha-duḥkhānāṁ
복뜨릿베 헤뚜루쨔떼 bhoktṛtve hetur ucyate

동의어

까르야: 결과의, 까라나: 원인, 까르뜨릿베: 창조에 있어서, 헤뚜후: 도구, 쁘라끄리띠히: 물질적 본성, 우쨔떼: 라고 한다, 뿌루샤하: 생명체, 수카: 행복, 두카남: 불행, 복뜨릿베: 즐기다, 헤뚜르: 도구, 우쨔떼: 라고 한다.

번역

자연이 모든 물질적 원인과 결과의 원인이라고 하는 반면, 생명체는 이 세상의 다양한 고통과 기쁨의 원인이다.

주석

생명체가 갖는 몸과 감각의 다양한 발현은 물질적 본성 때문이다. 8,400,000종의 다양한 생명체가 있고, 이 다양성은 물질적 본성의 창조물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이 몸, 저 몸에 살고자 하는 생명체들이 저마다 추구하는 감각적 즐거움으로 생긴 것이다. 생명체가 서로 다른 몸에 들어가면 서로 다른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 그가 느끼는 물질적 행복과 불행은 그의 몸 때문에 생긴 것이지, 자신의 진정한 자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의 원래 상태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행복하다. 따라서 바로 그것이 그의 참된 위치다.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생명체는 물질계에 있다. 영적 세계에는 그러한 욕망이 없다. 영계는 순수하지만, 물질계에서는 모두 다양한 육신의 즐거움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이 육신은 감각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더 분명하게 말하는 것일 것이다. 감각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육신과 그 도구인 감각은 물질적 본성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다음 절에서 분명해질 것이지만 생명체는 자신의 과거 욕망과 행위에 따라 얻게 된 상황으로 축복받기도 저주받기도 한다. 우리 욕망과 행위에 따라 물질적 본성이 우리를 다양한 거주지에 집어넣는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거주지와 그와 관련된 즐거움과 고통의 원인이다. 우리가 특정한 육신을 받는 즉시 자연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그 이유는 물질로 된 육신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생명체는 이 법칙을 바꿀 어떠한 힘도 없다. 생명체가 개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개의 몸을 받는 즉시, 개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와 달리 행동할 수 없다. 생명체가 돼지의 몸을 받으면 돼지처럼 행동하며 똥을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데바의 몸을 받으면 그러한 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도 초영혼은 개별 영혼과 함께한다. 베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드바 수빠르나 사유자 사카야하(dvā suparṇā sayujā sakhāyaḥ《문다까 우빠니샤드 3.1.1》).” 지고한 주는 생명체에게 너무도 친절하시어 개별 영혼과 항상 함께하시며, 모든 상황에서 초영혼, 즉 빠람아뜨마로 존재하신다.

원문

뿌루샤 쁘라끄리띠-스토 히 puruṣaḥ prakṛti-stho hi
붕떼 쁘라끄리띠-잔 구난 bhuṅkte prakṛti-jān guṇān
까라남 구나-상고’샤 kāraṇaṁ guṇa-saṅgo ’sya
삳-아삳-요니-잔마수 sad-asad-yoni-janmasu

동의어

뿌루샤하: 생명체, 쁘라끄리띠-스타하: 물질 속에 위치한, 히: 확실히, 붕떼: 즐기다, 쁘라끄리띠-잔: 물질에 의해 생산된, 구난: 물질의 양태, 까라남: 원인, 구나-상가하: 물질과의 접촉, 아샤: 생명체의, 삳-아삳: 선과 악, 요니: 여러 종의 생명, 잔마수: 여러 출생에서.

번역

이로써 물질에 갇힌 생명체는 물질의 세 가지 양태를 즐기는 삶을 살아가느니라. 이것은 물질과의 접촉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다양한 종 속에서 좋고 나쁨을 만난다.

주석

이 절은 어떻게 생명체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윤회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하다. 제2장에서 우리가 옷을 갈아입듯이 생명체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윤회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겉옷의 변화는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 발현에 사로잡히는 한, 계속 몸을 바꾸며 윤회할 수밖에 없다. 물질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우리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물질적 욕망의 영향으로 때로는 데바로, 때로는 사람으로, 때로는 짐승, 새, 벌레, 수생동물, 때로는 성자, 때로는 곤충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에서 생명체는 자기가 자신이 처한 환경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물질적 본성의 영향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몸에 갇히게 되는지 여기에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물질의 서로 다른 양태와의 접촉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의 세 가지 양태를 넘어서 초월적 위치에 올라야 한다. 이것을 끄리쉬나 의식이라고 한다.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에 위치하지 않는 한, 태곳적부터 있던 우리의 물질적 욕망으로 인해 물질적 의식이 우리를 이 몸 저 몸으로 옮겨 다니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권위 있는 출처에서 듣는 것으로만 효력을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예가 여기에 있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에게서 절대신의 과학을 듣고 있다. 생명체가 이 듣기 과정에 귀를 기울이면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오래된 욕망을 점점 버릴 수 있고, 그렇게 지배하고자 하는 오래된 욕망을 줄여나감에 따라 영적 행복을 누리게 된다. 베다 만뜨라에서 우리가 최고인격신과 교류하며 배워나감에 따라, 점차 영원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원문

우빠드라쉬따누만따 짜 upadraṣṭānumantā ca
바르따 복따 마헤스바라하 bhartā bhoktā maheśvaraḥ
빠람아뜨메띠 짜쀽또 paramātmeti cāpy ukto
데헤’스민 뿌루샤 빠라하 dehe ’smin puruṣaḥ paraḥ

동의어

우빠드라쉬따: 감독자, 아누만따: 허락하는 자, 짜: 또한, 바르따: 주인, 복따: 최고의 향유자, 마하-이스바라하: 지고한 주, 빠라마-아뜨마: 초영혼, 이띠: 또한, 짜: 그리고, 아삐: 실제로, 욱따하: 라고 하다, 데헤: 몸에서, 아스민: 이것, 뿌루샤하: 향유자, 빠라하: 초월적인.

번역

하지만 이 육신 안에 또 다른 존재, 즉 초월적 향유자이고 지고의 소유자이며 감독자이자 허가자인 초영혼으로 불리는 주(主)가 있다.

주석

개별 영혼과 항상 함께하는 초영혼은 지고한 주를 대표한다고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보통 생명체가 아니다. 일원론 철학자들은 육신을 아는 자가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초영혼과 개별 영혼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점을 명확히 하고자 주께서 당신은 모든 육신에 빠람아뜨마로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개별 영혼과는 다른 존재이다. 그는 빠라, 즉 초월적이다. 개별 영혼은 특정 장(場)의 행위를 즐기지만, 초영혼은 한정적 향유자나 육신의 행위에 가담하는 자가 아닌, 증인으로서, 감독하시는 분으로서, 허락하시는 분으로서, 지고의 향유자로 계신다. 그의 이름은 아뜨마가 아닌 빠람아뜨마이며, 그는 초월적이다. 아뜨마와 빠람아뜨마가 다르다는 것이 확실히 밝혀졌다. 초영혼 빠람아뜨마는 모든 곳에 손과 발이 뻗어 있지만, 개별 영혼은 그러하지 못하다. 그리고 빠람아뜨마는 지고한 주이므로 우리 안에 계시면서 개별 영혼이 물질적 즐거움을 느끼려는 욕망을 허가하신다. 절대 영혼의 허가 없이 개별 영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개개인은 북따(bhukta), 즉 유지되는 자이며, 주는 복따(bhoktā), 즉 유지하는 자이다. 무수한 생명체가 있고 그들 안에 주는 친구로서 계신다.

실제로 모든 개별 생명체가 지고한 주의 영원한 부분이고 이 둘은 서로 친구로서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제재를 거부하고 물질을 지배하고 싶어 독립적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경계적 에너지라고 불린다. 생명체는 물질 에너지로도, 영적 에너지로도 있을 수 있다. 생명체가 물질 에너지에 속박되어 있는 한, 지고한 주께서는 그가 영적 에너지로 돌아오도록 친구로서 초영혼으로 그와 함께하신다. 주께서는 항상 그가 영적 에너지로 돌아오시기를 갈망하시지만, 작은 독립성으로 인해 개별 생명체는 계속해서 영적 빛과의 교류를 거부한다. 이렇게 독립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속박된 상태 속에서 물질적으로 고군분투하게 된 원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안팎으로 우리에게 항상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밖에서는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주시고, 안으로는 물질적 장에서 생명체가 하는 행위는 그의 진정한 행복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하신다. “단지 그것을 버리고 네 믿음을 나에게 두어라. 그러면 너는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자신의 믿음을 빠람아뜨마 혹은 최고인격신에 두는 지성 있는 자는 영원하고 축복된 지식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원문

야 에밤 벳띠 뿌루샴 ya evaṁ vetti puruṣaṁ
쁘라끄리띰 짜 구나이 사하 prakṛtiṁ ca guṇaiḥ saha
사르바타 바르따마노’삐 sarvathā vartamāno ’pi
나 사 부요’비자야떼 na sa bhūyo ’bhijāyate

동의어

야: 누구나, 에밤: 이로써, 벳띠: 이해하다, 뿌루샴: 생명체, 쁘라끄리띰: 물질적 본성, 짜: 그리고, 구나이히: 물질의 양태, 사하: 함께, 사르바타: 모든 면에서, 바르따마나하: 위치한, 아삐: 불구하고, 나: 결코, 사하: 그는, 부야하: 다시, 아비자야떼: 태어나다.

번역

물질적 본성과 생명체, 그리고 본성의 양태가 상호작용하는 것에 관한 이 철학을 이해하는 자는 반드시 해방을 이룰 것이다. 그의 현 위치에 관계없이, 그는 다시 여기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주석

물질과 초영혼, 개별 영혼 그리고 그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명확한 이해로 우리는 해방될 수 있으며, 이 물질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영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지식의 결과다. 지식의 목적은 생명체가 어떤 연유로 이 물질계로 떨어지게 되었는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권위자들과 성현들, 그리고 영적 스승과의 교류를 통한 개인적 노력으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이해해야만 하며, 아울러 최고인격신께서 설명하신 바와 같이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함으로써 영적 의식, 즉 끄리쉬나 의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이 물질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영원과 축복, 그리고 지식의 삶을 위한 영계로 옮겨갈 것이다.

원문

댜네나뜨마니 빠샨띠 dhyānenātmani paśyanti
께찓 아뜨마남 아뜨마나 kecid ātmānam ātmanā
안예 상켸나 요게나 anye sāṅkhyena yogena
까르마-요게나 짜빠레 karma-yogena cāpare

동의어

댜네나: 명상으로, 아뜨마니: 자기 안에, 빠샨띠: 보다, 께찟: 일부, 아뜨마남: 초영혼, 아뜨마나: 마음으로, 안예: 다른 사람들, 상케나: 철학적 토론, 요게나: 요가 체계로, 까르마-요게나: 결실을 바라지 않는 행위로, 짜: 또한, 아빠레: 다른 사람들.

번역

어떤 이는 명상을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초영혼을 인식하고, 다른 이는 지식을 배양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이는 결실을 바라지 않고 일함으로써 초영혼을 인식한다.

주석

주께서 아르주나에게 자아 인식을 추구하는 속박된 영혼이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회의론자는 영적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다. 그러나 영적 삶을 이해하는 데 믿음이 있는 자들 가운데 자기 성찰하는 헌애자, 철학자, 일의 결실을 바라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있다. 일원론을 확립하려고 항상 노력하는 자들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범주에 속한다. 달리 말하면, 오직 최고인격신의 헌애자들이 영적 이해에 관해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이 물질계를 초월해 영계와 최고인격신이 존재함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인격신은 빠람아뜨마로 당신을 확장하시어, 모든 생명체 안에 초영혼으로 계시며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 물론 절대 진리를 지식의 배양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부류에 속한다. 상캬 철학자들은 이 물질계를 스물네 가지 구성요소로 분석하고, 개별 영혼을 스물 다섯째 항목으로 간주한다. 그들이 개별 영혼의 본질이 물질적 요소를 넘어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개별 영혼을 초월해 최고인격신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최고인격신은 스물여섯 번째 항목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그들도 첨차 끄리쉬나 의식의 봉헌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실을 바라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도 완벽한 태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끄리쉬나 의식으로 봉헌하는 수준에 이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순수한 의식으로 명상을 통해 초영혼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자기 안에서 초영혼을 발견하게 될 때, 초월적 위치에 오르게 된다고 여기에서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배양을 통해 지고의 영혼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하타 요가 체계를 배양하는 자들, 그리고 유치한 행위로 최고인격신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문

안예 뜨베밤 아자난따하 anye tv evam ajānantaḥ
스루뜨반예뱌 우빠사떼 śrutvānyebhya upāsate
떼’삐 짜띠따란뗴바 te ’pi cātitaranty eva
므리뜜 스루띠-빠라야나하 mṛtyuṁ śruti-parāyaṇāḥ

동의어

안예: 다른 사람들, 뚜: 그러나, 에밤: 따라서, 아자난따하: 영적 지식 없이, 스루뜨바: 들음으로써, 안예뱌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빠사떼: 숭배하기 시작하다, 떼: 그들은, 아삐: 또한, 짜: 그리고, 아띠따란띠: 초월하다, 에바: 분명히, 므리뜜: 죽음의 길, 스루띠-빠라야나하: 듣기 과정에 끌리는.

번역

영적 지식에 정통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최고인격신에 관해 듣고, 그를 숭배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위자들에게서 듣는 태도 때문에 그들 역시 생사의 길을 초월한다.

주석

이 절은 특히 현대 사회에 잘 들어맞는데, 그 이유는 현대 사회에는 영적인 문제에 관한 특별한 교육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무신론적이거나, 불가지론적이거나, 철학적이기도 하지만, 사실 어떠한 철학적 지식도 갖추고 있지 않다. 보통 사람으로서, 그가 착한 사람이라면 듣기를 통해 영적으로 진보할 기회가 있다. 이 듣기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현 세계에 끄리쉬나 의식을 설교하신 주 짜이따냐께서는 듣는 것을 크게 강조하셨는데 그 이유는 보통 사람도 권위 있는 원천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진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 짜이따냐께서는 우리가 초월적 소리,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들으면 그렇다고 하셨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깨달은 영혼에게서 적극적으로 들으려 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서서히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지고한 주에 대한 숭배는 의심의 여지 없이 생겨날 것이다. 주 짜이따냐께서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위치를 바꿀 필요가 없고, 철학적 논리로 절대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고한 주에 관한 지식이 있는 분들의 종이 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순수한 헌애자에게 은신하여 그에게서 자아 인식에 관해 듣고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만큼 운이 좋다면 우리는 점차 순수한 헌애자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절에서, 듣기의 과정이 크게 강조되었고, 이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소위 철학자들과 같은 능력이 없더라도  권위자에게서 믿음을 가지고 들으면 이 물질적 존재를 초월해 우리의 고향, 절대신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원문

야밧 산자야떼 낀찟 yāvat sañjāyate kiñcit
삿뜨밤 스타바라-장가맘 sattvaṁ sthāvara-jaṅgamam
끄쉐뜨라-끄쉐뜨라갸-삼요갓 kṣetra-kṣetrajña-saṁyogāt
딷 빋디 바라따르샤바 tad viddhi bharatarṣabha

동의어

야밧: 무엇이든지, 산자야떼: 존재하게 되다, 낀찟: 어느 것도, 삿뜨밤: 존재, 스타바라: 움직이지 않는, 장가맘: 움직이는, 끄쉐뜨라: 육신의, 끄쉐뜨라-갸: 그리고 육신을 아는 자, 삼요갓: 그들의 결합으로, 땃 빋디: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바라따-리샤바: 오 바라따의 수장이여.

번역

오 바라따의 수장이여,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행위의 장과 행위의 장을 아는 자의 결합일 뿐이다.

주석

우주의 창조 이전부터 존재해 온 물질적 본성과 생명체가 이 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창조된 무엇이든지 생명체와 물질적 본성의 결합일 뿐이다. 나무와 산, 그리고 언덕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여러 발현이 있고, 움직이는 여러 존재는 물질적 본성과 상위 본성, 즉 생명체와의 결합일 뿐이다. 상위 본성인 생명체와의 접촉 없이 어느 것도 자랄 수 없다. 물질적 본성과 영적 본성 사이의 상호 관계는 영원히 계속되며, 이러한 결합은 지고한 주에 의해 생겨난다. 따라서 당신은 상위 본성과 하위 본성 모두의 통제자이시다. 주께서 물질적 본성을 창조하시고, 이 물질적 본성 안에 상위 본성을 놓으심으로써, 이 모든 행위와 발현이 일어난다.

원문

사맘 사르베슈 부떼슈 samaṁ sarveṣu bhūteṣu
띠쉬탄땀 빠라메스바람 tiṣṭhantaṁ parameśvaram
비나샷스바비나샨땀 vinaśyatsv avinaśyantaṁ
야 빠샤띠 사 빠샤띠 yaḥ paśyati sa paśyati

동의어

사맘: 동등하게, 사르베슈: 모두에, 부떼슈: 생명체, 띠쉬탄-땀: 거주하는, 빠라마-이스바람: 초영혼, 비나샷수: 파괴되는 것에, 아비나샨땀: 파괴되지 않는, 야하: 누구나, 빠샤띠: 보다, 사하: 그는, 빠샤띠: 실제로 보다.

번역

모든 육신 속에서 개별 영혼과 함께 있는 초영혼을 보고, 소멸하는 육신 속에 있는 초영혼과 개별 영혼은 절대 소멸하지 않음을 이해하는 자가 진정으로 보는 것이다.

주석

좋은 교류를 통해 서로 결합한 세 가지, 즉 육신과 육신의 주인(개별 영혼), 그리고 개별 영혼의 친구(초영혼)를 볼 수 있는 자는 진정으로 지식 있는 자이다. 영적 주제를 진정으로 아는 자와 교류하지 않는 한, 이 세 가지를 볼 수 없다. 이러한 교류를 하지 못하는 자는 무지하다. 그들은 단지 몸만을 보며, 몸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몸이 없어진 다음에도 영혼과 초영혼은 모두 존재하며, 그들은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여러 형태 속에서 영원토록 함께 간다. 영혼이 몸의 주인이고 몸의 소멸 후 다른 형태로 옮겨지기에 “빠라메스바라”라는 산스끄리뜨어는 때때로 “개별 영혼”으로 번역된다. 여기에서는 그가 주인이다. 그러나 이 ‘빠라메스바라’를 초영혼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경우에든, 초영혼과 개별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 그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는 자가 일어나고 있는 제 현상을 실제로 볼 수 있다.

원문

사맘 빠샨 히 사르바뜨라 samaṁ paśyan hi sarvatra
사마바스티땀 이스바람 samavasthitam īśvaram
나 히나스땨뜨마나뜨마남 na hinasty ātmanātmānaṁ
따또 야띠 빠람 가띰tato yāti parāṁ gatim

동의어

사맘: 동등하게, 빠샨: 보는, 히: 확실히, 사르바뜨라: 모든 곳에, 사마바스티땀: 똑같이 위치한, 이스바람: 초영혼, 나: 아니다, 히나스띠: 타락하다, 아뜨마나: 마음에 의해, 아뜨마남: 영혼, 따따하: 그런데, 야띠: 도달하다, 빠람: 초월적인 것, 가띰: 목적지.

번역

모든 생명체에, 그리고 모든 곳에 똑같이 계시는 초영혼을 보는 자는 마음으로 인해 자신을 타락하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초월적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주석

물질적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 생명체는 자신의 영적 존재와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절대자께서 빠람아뜨마 형상으로 모든 곳에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모든 생명체 안에서 최고인격신의 존재를 볼 수 있다면 그는 해로운 정신상태 때문에 타락하지 않으며 점차 영적 세계로 나아간다. 마음은 일반적으로 감각을 만족시키는 과정에 집착한다. 그러나 마음이 초영혼을 향하게 되면 영적 이해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원문

쁘라끄리땨이바 짜 까르마니 prakṛtyaiva ca karmāṇi
끄리야마나니 사르바샤하 kriyamāṇāni sarvaśaḥ
야 빠샤띠 따타뜨마남 yaḥ paśyati tathātmānam
아까르따람 사 빠샤띠 akartāraṁ sa paśyati

동의어

쁘라끄리땨: 물질에 의해, 에바: 분명히, 짜: 또한, 까르마니: 활동, 끄리야마나니: 행하게 되는, 사르바샤하: 모든 점에서, 야하: 누구나, 빠샤띠: 보다, 따타: 또한, 아뜨마남: 자신을, 아까르따람: 비행위자, 사하: 그는, 빠샤띠: 완전히 본다.

번역

물질적 본성에 의해 창조된 육신이 모든 행위를 하며, 자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자가 진실로 보는 것이다.

주석

이 몸은 초영혼의 지시에 의해  물질적 본성으로 만들어졌고, 우리 몸으로 하는 어떠한 행위도 우리 자아가 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위해서든, 불행을 위해서든 우리가 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신체적 구조 때문에 강제된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이 모든 육체적 행위 밖에 있다. 이 육신은 우리 과거 욕망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려고 몸을 받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사실상, 육신은 욕망을 충족시키게 하려고 지고한 주께서 설계하신 기계이다. 욕망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거나 즐기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이 초월적 시각을 발전시키면 육체적 행위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그러한 시각을 갖춘 자가 진정으로 보는 자이다.

원문

야다 부따-쁘리탁-바밤 yadā bhūta-pṛthag-bhāvam
에까-스탐 아누빠샤띠 eka-stham anupaśyati
따따 에바 짜 비스따람 tata eva ca vistāraṁ
브라흐마 삼빠댜떼 따다 brahma sampadyate tadā

동의어

야다: 때, 부따: 생명체의, 쁘리탁-바밤: 분리된 정체성들, 에까-스탐: 하나에 위치한, 아누빠샤띠: 권위 있는 출처를 통해 보다, 따따하 에바: 그 이후에, 짜: 또한, 비스따람: 확장, 브라흐마: 절대자, 삼빠댜떼: 그는 달성한다, 따다: 그때.

번역

현명한 자가 서로 다른 물질적 육신 때문에 생긴 서로 다른 정체성을 보는 것을 멈출 때, 그리고 모든 존재가 어떻게 세상 모든 곳으로 뻗어 나갔는지를 이해할 때, 브라흐만 개념에 이른다.

주석

생명체의 여러 다른 몸이 개별 영혼의 서로 다른 욕망 때문에 생긴 것이며, 이것이 실제로 자아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보는 것이다. 물질적 개념의 삶 속에서 누구는 데바이고, 누구는 인간이며, 누구는 개, 고양이 등으로 보인다. 이것은 물질적 시각이지, 진정한 시각이 아니다. 이 물질적으로 다름은 삶에 대한 물질적 개념에서 비롯된다. 물질적 육신이 소멸하고 난 다음, 영혼은 하나다. 이 영혼이 물질적 본성과의 접촉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몸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볼 수 있을 때 영적 시각을 얻게 된다. 그러면 인간, 동물, 크고 작음 등의 다름에서 벗어나 우리 의식이 정화되고, 영적 동일성 속에서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 후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게 되는지는 다음 절이 설명한다.

원문

아나디뜨반 니르구나뜨밧 anāditvān nirguṇatvāt
빠람아뜨마얌 아뱌야하 paramātmāyam avyayaḥ
샤리라-스토’삐 까운떼야 śarīra-stho ’pi kaunteya
나 까로띠 나 리뺘떼 na karoti na lipyate

동의어

아나디뜨밧: 영원성 때문에, 니르구나뜨밧: 초월성 때문에, 빠라마: 물질을 넘어서, 아뜨마: 영혼, 아얌: 이것, 아뱌야하: 소멸하지 않는, 샤리라-스타하: 육신에 거주하는, 아삐: 비록, 까운떼야: 오 꾼띠의 아들이여, 나 까로띠: 어떠한 것도 하지 않다, 나 리뺘떼: 속박되지 않다.

번역

영원성에 관한 시각이 있는 자들은 불멸하는 영혼은 초월적이고 영원하며 물질의 양태를 넘어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오 아르주나, 물질적 육신과 접촉하고 있어도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또한 얽혀있지 않다.

주석

물질적 육신이 태어나기 때문에 생명체가 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생명체는 영원하다. 생명체는 물질적 육신 안에 있지만 태어나지 않으며 초월적이고 영원하다. 따라서 파괴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생명체는 축복으로 가득하다. 그는 어떠한 물질적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질적 육신과의 접촉으로 생긴 행위가 그를 얽매지 않는다.

원문

야타 사르바-가땀 사욱쉬미앋 yathā sarva-gataṁ saukṣmyād
아까샴 노빨리뺘떼 ākāśaṁ nopalipyate
사르바뜨라바스티또 데헤 sarvatrāvasthito dehe
따타뜨마 노빨리뺘떼 tathātmā nopalipyate

동의어

야타: 처럼, 사르바-가땀: 모든 곳에 존재하는, 사욱쉬먓: 미묘함 때문에, 아까샴: 하늘, 나: 결코, 우빨리뺘떼: 섞다, 사르바뜨라: 모든 곳에, 아바스티따하: 위치한, 데헤: 육신 안에, 따타: 그래서, 아뜨마: 자아, 나: 결코, 우빨리뺘떼: 섞는다.

번역

하늘은 그 미묘한 성질 때문에 모든 곳에 퍼져 존재하면서도 그 어느 것과 섞이지 않는다. 이처럼 브라흐만 시각을 갖춘 영혼은 육신 안에 있지만 그 육신과 섞이지 않는다.

주석

공기는 물과 진흙, 똥, 그리고 존재하는 그 무엇에도 있지만 그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생명체는 다양한 육신 안에 있더라도 그 미묘한 본성 때문에 그것들과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물질적 눈으로 어떻게 생명체가 이 몸에 들어오게 되었고, 몸이 다할 때 어떻게 그것에서 나가는지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과학자도 이것을 확인할 수 없다.

원문

야타 쁘라까샤야뗴까하 yathā prakāśayaty ekaḥ
끄릿스남 로깜 이맘 라비히 kṛtsnaṁ lokam imaṁ raviḥ
끄쉐뜨람 끄쉐뜨리 따타 끄릿스남 kṣetraṁ kṣetrī tathā kṛtsnaṁ
쁘라까샤야띠 바라따 prakāśayati bhārata

동의어

야타: 처럼, 쁘라까샤야띠: 빛나다, 에까하: 하나, 끄릿스남: 전체, 로깜: 우주, 이맘: 이것, 라비히: 태양, 끄쉐뜨람: 이 몸, 끄쉐뜨리: 영혼, 따타: 유사하게, 끄릿스남: 모든, 쁘라까샤야띠: 빛나다, 바라따: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번역

오 바라따의 아들이여, 오직 태양만이 전 우주를 비추듯이, 몸 안에 있는 하나, 생명체가 몸 전체를 의식으로 비추느니라.

주석

의식에 관한 많은 이론이 있다. 여기 바가바드 기따에서는 해와 햇빛의 예를 들고 있다. 태양은 한곳에 위치하지만 전 우주를 비추듯, 영혼이라는 작은 입자는 우리 몸의 가슴속에 있으면서 몸 전체를 의식으로 비추고 있다. 따라서 햇빛이 해가 존재하는 증거이듯 의식은 영혼이 존재하는 증거이다. 영혼이 몸 안에 있을 때, 몸 전체에 걸쳐 의식이 있고, 영혼이 몸을 떠나면 의식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성 있는 자는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은 물질이 결합하여 생긴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체의 징후이다. 생명체의 의식은 질적으로 지고의 의식과 하나이지만 지고하지  않은 이유는 특정 육신의 의식은 다른 육신의 의식과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영혼의 친구로서 모든 육신에 존재하고 있는 초영혼은 모든 육신에 대한 의식이 있다. 이것이 지고의 의식과 개별 의식 간의 차이다.

원문

끄쉐뜨라-끄쉐뜨라갸요르 에밤 kṣetra-kṣetrajñayor evam
안따람 갸나-짝수샤 antaraṁ jñāna-cakṣuṣā
부따-쁘라끄리띠-목샴 짜 bhūta-prakṛti-mokṣaṁ ca
예 비두르 얀띠 떼 빠람 ye vidur yānti te param

동의어

끄쉐뜨라: 육신의, 끄쉐뜨라-갸요호: 육신의 주인, 에밤: 따라서, 안따람: 차이, 갸나-짝슈샤: 지식의 시각으로, 부따: 생명체의, 쁘라끄리띠: 물질적 본성으로부터, 목샴: 해방, 짜: 또한, 예: 하는 자들, 비두후: 알다, 얀띠: 접근하다, 떼: 그들, 빠람: 절대자.

번역

지식의 눈으로 육신과 육신을 아는 자 사이의 차이점을 보고, 물질적 본성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최상의 목표를 달성한다.

주석

제13장의 취지는 육신과 육신의 소유자, 그리고 초영혼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8절에서 12절에까지 설명된 해방의 과정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최상의 목적지에 갈 수 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우선 절대신에 관해 듣기 위해 좋은 교류를 해야 하고, 이로써 점점 계몽된다. 영적 스승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물질과 영혼의 구분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이 더욱더 깊은 영적 깨달음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영적 스승은 여러 가르침으로 제자를 물질적 개념의 삶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를 들어,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가 물질적 고려에서 벗어나게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육신이 물질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육신은 스물네 요소로 분석될 수 있다. 육신은 거시적 발현이다. 그리고 미시적 발현은 마음과 심리적 영향이다. 그리고 생명의 징후는 이러한 요소 간의 상호작용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영혼이 있으며 초영혼도 있다. 영혼과 초영혼은 둘이다. 이 물질계는 영혼과 스물네 개의 물질 요소가 결합하여 작용하고 있다. 모든 물질적 발현의 구성이 이렇게 영혼과 물질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고 초영혼의 존재를 볼 수 있는 자는 영계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명상과 깨달음의 대상이고, 우리는 영적 스승의 도움을 받아 이 장을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

이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드 기따의 제13장, 물질과 향유자, 그리고 의식에 대한 박띠베단따 주석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