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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ントラ11

<strong>만뜨라 11</strong>

テキスト

원문

ヴィデャーン チャーヴィデャーン チャ ヤス
タドゥ ヴェードーバハヤン サハ
アヴィデャヤー ムリテュン ティールトゥヴァー
ヴィデャヤームリタン アシュヌテー
비댬 짜비댬 짜 야스 vidyāṁ cāvidyāṁ ca yas
딷 베도바얌 사하 tad vedobhayaṁ saha
아비댜야 므리뜜 띠르뜨바 avidyayā mṛtyuṁ tīrtvā
비댜이암리땀 아스누떼 vidyayāmṛtam aśnute

Synonyms

동의어

vidyām—正しい知識; ca—そして; avidyām—無知; ca—そして; yaḥ—である人物;tat—それ; veda—知っている; ubhayam—両方; saha—同時に; avidyayā—無知の修養によって; mṛtyum—繰りかえされる死; tīrtvā—超えること; vidyayā—知識の修養によって;amṛtam—不死; aśnute—楽しむ。

비댬(vidyām): 사실상의 지식, 짜(ca): 그리고, 아비댬(avidyām): 무지, 짜(ca): 그리고, 야하(yaḥ): ~하는 자, 땃(tat): 그것, 베다(knows): 알다, 우바얌(ubhayam): 둘 다, 사하(saha): 동시에, 아비댜야(avidyayā): 무지의 배양으로, 므리뜜(mṛtyum): 반복된 죽음, 띠르뜨바(tīrtvā): 초월하는, 비댜이아(vidyayā): 지식의 배양으로, 암리땀(amṛtam): 불사(不死), 아스누떼(aśnute): 즐긴다.

Translation

번역

無知の道と超越的知識の道を並行して学べる者のみが、生と死の繰りかえしの影響を超越し、不死の至福を満喫する。

초월적 지식 과정과 무지의 과정을 나란히 습득할 수 있는 자만이 반복된 생(生)과 사(死)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원히 불사하는 완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Purport

주석

物質界が創造されたときから、だれもが永遠の命を探し求めてきました。しかし自然の法則は冷酷で、誰一人死の手を逃れた者はありません。だれも死にたくないし、老人にも病気にもなりたくないと思っています。しかし厳格な自然の法則は、だれであっても老年、病気、死を免除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物質的知識がどれほど進歩しても、これらの問題を解決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物質科学は死の過程を早めるために核兵器を発明することはできましたが、病気、老年、死という冷酷な手から人類を守れるようなものはなに一つ作りだしていません。

물질계가 창조된 이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자연의 법칙은 너무나 엄격해 그 누구도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도 죽거나 늙고, 병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그 누구에게도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에서의 면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물질적 지식의 발전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았다. 물질과학은 죽음의 과정을 가속하는 핵폭탄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을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의 가혹한 손아귀에서 보호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プラーナの中にヒラニャカシプ(Hiraëyakaçipu)という、物質的にひじょうに進歩していた王の話があります。ヒラニャカシプ王は物質的に獲得した物や無知の力によって死を克服しようと望み、恐ろしいほどの厳しい瞑想をしました。その結果、王の体から発散される神秘力のために宇宙の全惑星の人々が混乱させられました。また王は、宇宙を創造したブラフマーが自分のところに降りてくることを余儀なくさせ、アマラ(amara)という不死身の体をくれるよう乞いました。しかしブラフマーは「すべての惑星を支配する物質界の創造者たる自分自身でさえアマラ(不死身)ではないのだから、おまえにアマラの恩寵を授けることはできない」と答えました。『バガヴァッド・ギーター』(第8章・第17節)でも言われているように、ブラフマーは相当長い寿命を持っていますが、死なないわけではありません。

뿌라나에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매우 진보했던 왕, 히란야까시뿌(Hiraṇyakaśipu)의 활약을 알게 된다. 그는 물질적 부와 무지의 힘으로 가혹한 죽음을 정복하려고 매우 혹독한 형태의 명상을 했고, 모든 행성계의 거주자들이 그가 지닌 마력 때문에 방해받게 되었다. 히란야까시뿌는 우주의 창조자, 데바(demigod) 브라흐마를 강제로 자기 앞에 내려오게 했다. 그런 다음 브라흐마에게 아마라(amara), 즉 불멸하게 되는 축복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브라흐마는 물질적 창조자이자 모든 행성의 지배자인 자신조차 아마라가 아니라서 그런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바가바드 기따(8.17)가 확증했듯이, 브라흐마가 오래 살지만 그렇다고 불멸한다는 뜻은 아니다.

ヒラニャ(hiraëya)は「黄金」、カシプ(kaçipu)は「柔らかいベッド」という意味です。この王は2つのもの――金と女――に興味があり、それを不死身になることで楽しみたいと思いました。それで王はブラフマーに自分の望みがかなえられ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遠まわしにいろいろなことを尋ねました。しかしブラフマーが不死の恩寵を授けられないことを知って、彼は、どのような人、どのような動物、どのような神、また840 万種類の中のどのような生物によっても殺されないことを頼みました。また、陸上でも、空中でも、水中でも、どんな武器によっても殺されないようにと頼みました。それがブラフマーによって保証されれば、自分は不死身になるはずだと愚かにも考えたのです。ブラフマーはそれらの願いを聞きとどけてはくれましたが、しかし、結局ヒラニャカシプは半人半獅子のナラシンハという姿の至高人格主神によって殺されました。しかも彼を殺すためには何も武器は使われませんでした。というのは、彼は主の爪によって裂き殺されたからです。さらにヒラニャカシプは陸上でも空中でも水中でも殺されませんでした。なぜなら彼の想像を絶する不思議な生物の「膝」の上で殺されたのですから。

히란야(Hiraṇya)는 ‘금’을 의미하고, 까시뿌(kaśipu)는 ‘부드러운 침대’를 의미한다. 이 교활한 신사 히란야까시뿌는 이 두 가지, 돈과 여자에 관심 있어 불멸해 그것을 영원토록 즐기고자 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간접적으로 브라흐마에게 여러 가지 소원을 빌었다. 브라흐마가 불사(不死)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히란야까시뿌는 어떠한 인간, 동물, 데바, 그리고 8,400,000종의 다른 생명체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땅에서, 공중에서, 물속에서 또는 어떠한 무기로도 죽음을 맞지 않도록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히란야까시뿌는 어리석게도 이런 보장이 자신을 죽음에서 모면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브라흐마가 이 모든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반인(半人) 반사자 형상의 최고인격신, 느리심하(Nṛsiṁha)께 죽임을 당하는데, 당신은 어떠한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당신의 손톱으로 히란야까시뿌를 죽이셨다. 또한 땅에서도, 공중에서도, 물속에서도 아닌,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주 느리심하의 무릎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

この話のポイントは、ヒラニャカシプほどの最強の物質主義者でさえも、どんな計画を企てようと不死身にはな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ならば――さまざまな計画を立てはするけれども、次から次へとことごとくつぶされてしまうような現代のちっぽけなヒラニャカシプにいったいなにができましょうか。

여기에서 전체 요지는 가장 강력한 물질주의자, 히란야까시뿌조차 그가 세운 다양한 계획으로 죽음을 모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매 순간 세워놓은 여러 계획이 좌절되고 마는 오늘날의 축소판 히란야까시뿌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シュリー・イーシャ・ウパニシャッド』は、生存競争に打ち勝つための片手落ちの計画は立てないよう私たちに教えています。だれもが生き抜くために悪戦苦闘していますが、物質自然の法則はじつに厳格であって、だれであろうとその自然の法則を超えることは許されません。永遠の命を手にいれるためには、神のもとへ帰る準備をし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す。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우리에게 존재를 위한 고군분투에서의 승리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누구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자연계의 법칙은 너무나 혹독하고 신속해 누구도 그 법칙을 능가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대신께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神のもとに帰る過程は別次元の知識であり、ウパニシャッド、『ヴェーダンタ・スートラ』、『バガヴァッド・ギーター』、『シュリーマド・バーガヴァタム』などのような啓示経典から学ばなくてはなりません。この世で幸福に暮らし、肉体を去ったのちも永遠に幸せな生活ができるようになるためには、神聖な文献になじみ、超越的な知識を獲得しなくてはなりません。条件づけられた魂は神との永遠の絆を忘れ、自分が生まれたかりそめの場所をすべてであると誤解しています。主は、真实を忘れている人々に、ほんとうの家はこの物質界にはないことを思い起こさせるため、上記のさまざまな経典をインドに伝え、また他の国々に同様の経典を伝えました。生物は精神的な存在であって、自分のほんとうの崇高なふるさとに戻っていくことによってのみ幸福になれます。

절대신께 돌아가는 과정은 이런 세속적 지식과는 다른 분야의 지식으로, 우빠니샤드, 베단따 수뜨라, 바가바드 기따, 스리마드 바가바땀 같은 밝혀진 베다 경전을 통해 배워야 한다. 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물질적 육신을 버리고 영원히 축복으로 가득한 삶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이런 신성한 문헌들을 공부하여 초월적 지식을 얻어야 한다. 속박된 생명체는 절대신과 자신의 영원한 관계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태어난 일시적 장소를 전부라 잘못 생각하게 되었다. 주는 망각에 빠진 인류에게 우리의 고향은 이 물질계가 아님을 상기시키기 위해 친절히 위에 언급된 경전들을 인도에 보이셨고, 다른 경전들을 다른 나라들에 보이셨다. 생명체는 영적 존재이고 본래의 영적 고향에 돌아갈 때에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人格主神は、自分の王国から真实のしもべを遣わし、人々が神のもとへ戻ることのできるメッセージを広めさせたり、ときには人格主神自ら降誕してその仕事をしたりします。あらゆる生物が主の愛しい子どもであり、主自身の部分体なので、主は私たちがこの物質的状態のなかで苦しみつづけているのを見て私たち以上に心を痛めています。こうした物質界での苦しみは、私たちは本来死んだ物体とは共存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間接的に思い知らせてくれます。知性のある生命体は、ふつうこれをきっかけにしてヴィデャー(超越的知識)を学びはじめます。人間生活は精神的知識を養うのに絶好の機会なのですが、この機会を活かさない人はナラーダマ(narädhama・最低の人間)と呼ばれます。

최고인격신은 당신의 왕국에서 진정한 종들을 보내어 절대신께 돌아가게 하는 이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고, 때로는 당신이 친히 이 일을 하러 내려오신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소중한 자식이고 당신의 부분이기에 절대신은 이 물질적 상태 속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욱 가엾게 여기신다. 이 물질계 속에서 겪는 불행은 생명이 없는 물질과는 양립할 수 없는 우리 존재를 간접적으로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총명한 생명체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고 비댜, 즉 초월적 지식의 배양에 전념한다. 인간의 삶은 영적 지식을 배양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고 인간이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나라다마(narādhama), 즉 가장 하등한 인간이라 불린다.

アヴィデャーの道、つまり感覚を満たすだけの物質的知識を開発させる道は、生と死の繰りかえしの道につながっています。生物は本来精神的な存在ですから、生まれも死にもしません。生と死という現象は精神的魂を包んでいるもの、すなわち肉体にだけ起こります。「誕生」は服を着ることに、「死」は着ていた服を脱ぐことにたとえられます。アヴィデャー(無知)の中に没頭しきっている愚かな人間は、この生と死という冷酷な過程をあまり気にしません。幻想エネルギーの美しさに惑わされ、生と死を何度も繰りかえし、冷酷な自然の法則からなんの教訓をつかもうとしないのです。

아비댜, 즉 감각 만족을 위한 물질적 지식의 향상은 반복된 삶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영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에게 출생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영혼의 껍데기, 즉 육신에 적용된다. 죽음은 이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것이고, 출생은 새 껍데기를 덮어쓰는 것에 비유된다. 아비댜, 즉 무지의 배양에 철저히 열중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가혹한 과정에 개의치 않는다. 이들은 환영적 에너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같은 불행을 반복해서 겪지만 자연의 법칙에서 어떤 교훈도 배우지 않는다.

ですから、ヴィデャー(超越的知識)は人類に欠かせません。病的ともいえる物質的状態の中での快楽は、できるだけ制限されるべきです。肉体の感覚を無制限に満足させることは、無知と死の道にほかなりません。生命体に精神的感覚はな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すべての生命体は、本来の精神的姿においてすべての感覚を持っていますが、今は肉体と心によって包まれているために、物質的な状態で表われています。物質的感覚の働きは、本来の精神的感覚の働きが歪められて表われたものです。こうした誤った病的状態において、精神的魂は物質に包まれた物質的活動をしています。ほんとうの感覚の楽しみは、物質主義という病気が治ったときに味わうことができます。物質的穢れのない本来の精神的な姿にもどるとき、ほんとうの感覚の楽しみを満喫できるのです。患者は、ふたたび感覚を楽しむために健康を取り戻さなくてはなりません。ですから、人間生活の目標は、歪められた感覚の喜びを味わうのではなく、まず病気を治すことに向けられるべきです。物質的病気の進行は知識の表われではなく、アヴィデャー(無知)の表われです。健康になるためには、体温を40 度から42 度に上げるのではなく、36.5 度の平熱に下げなくてはなりません。それが人間生活の目的です。しかし、現代の物質文化は、原子エネルギーによって42 度まで達した高熱状態をさらに悪化させる傾向にあります。そのいっぽうで、愚かな政治家たちが今にでも世界が地獄に変わるかもしれないと叫んでいます。これが、物質的知識の発達に気をとられ、精神的知識の修養という人生でもっとも大切なことをおろそかにした結果です。したがって、『シュリー・イーシャ・ウパニシャッド』はこのような死につながる危険な道を歩いてはいけないと私たちに警告します。私たちは、それとは反対に、死という残酷な手から完全に逃れるために精神的知識を学ばなくてはなりません。

그러므로 비댜, 즉 초월적 지식의 배양은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일종의 질병과 같은 물질적 상황 속에서 얻는 감각적 즐거움은 가능한 절제되어야 한다. 이 육체를 통해 느끼는 절제되지 않은 감각의 즐거움은 무지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생명체는 영적 감각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본래 모든 생명체는 모든 영적 감각을 지닌 영적 모습이지만, 현재 물질적 몸과 마음으로 덮여 물질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질적 감각으로 하는 활동은 본래의 영적 감각이 하는 활동의 왜곡된 투영이다. 병에 걸린 상태에서 영혼은 물질적 덮개를 쓰고 여러 물질적 행위에 종사한다. 진정한 감각적 즐거움은 물질주의라는 질병을 제거할 때만 느낄 수 있다. 순수한 영적 모습일 때의 우리는 모든 물질적 오염에서 벗어나 진정한 감각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다시 진정한 감각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환자는 먼저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 삶의 목적은 왜곡된 감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계적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있다. 물질계적 질병의 악화는 지식의 상징이 아니라 아비댜, 즉 무지의 상징이다. 건강해지려면 열이 40.5~41.6도까지 올라가서는 안 되고 37도로 체온을 낮추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현대 물질문명은 체온이 41.6도까지 오르는 고열의 물질적 상태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세상이 어느 순간에라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울부짖는다. 그것이 물질적 지식 향상의 결과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영적 지식의 배양을 게을리한 결과이다. 스리 이쇼빠니샤드는 죽음으로 이끄는 이 위험한 길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영적 지식을 배양하는 노력을 하면 죽음의 가혹한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しかしこのことは、肉体の維持に大切な活動までもすべてやめ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病気を治そうとするとき、高熱を下げて体温を0度にまでする必要がないように、すべての活動を止めてしまう必要はありません。ここでは「逆境に善処する」ということばが適切な表現です。精神的知識を育てるには肉体と心の助けも必要です。目標に到達するには、肉体と心を健全に維持することが大切です。体温はいつも36.5 度に保たれるべきですし、インドの偉大な聖者たちは精神的知識と物質的知識を巧みに均衡させた計画を立てて、健全な心身を維持してきました。人間の知性を歪んだ快楽のために誤って使うことは決してあり
ませんでした。

그렇다고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건강을 회복하려고 할 때 열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행위를 멈출 이유는 없다. “불리한 거래였지만 가장 좋게 활용하기”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영적지식의 배양은 몸과 마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몸과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평소의 체온이 37도가 되어야 하듯이, 인도의 위대한 성자와 성인들이 영적 지식과 물질적 지식의 균형 잡힌 계획으로 이렇게 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병든 감각 만족을 위해 인간의 지성을 오용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感覚満足によって堕落した人間の活動は、ヴェーダが説く救済の原則で制限される必要があります。この規制には、宗教、経済発展、感覚満足、罪からの解放などが含まれていますが、現代人は宗教にも罪からの解放にも関心がありません。現代人の人生唯一の目的は「感覚満足」であり、これを充分に満たすため、人々は経済発展に必要なさまざまな計画を立てます。そして誤って導かれた人々は、感覚を充分に満たすには経済発展が必要で、経済発展のために宗教が役に立つから維持されるべきだと考えます。したがって、死んだあとも天国で感覚満足が充分に得られる保証を得るために、宗教行事が用意されています。しかし、これは正しい救済の目標ではありません。正しい宗教の道は必ず自己の悟りに結びつくものであり、経済発展は肉体を健全な状態に保つために必要です。人生の目的であるヴィデャー(真の知識)を得るためにも、私たちは心身共に健康な生活を送らなくてはなりません。人生は単にロバのようにがむしゃらに働くためのものでもなく、感覚満足だけが目的のアヴィデャー(無知)を育てていくためにあ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

감각 만족 추구의 경향으로 하는 인간의 병든 행위는 베다가 구원의 원칙으로 규제해 왔다. 이 베다 제도는 종교, 경제 발전, 감각 만족, 구원을 다루지만 오늘날의 인간들은 종교나 구원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목적, 감각 만족이 있을 뿐이고 이를 달성하고자 경제 발전 계획을 세운다. 오도된 인간들은 종교가 감각을 만족시키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므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후에도 계속 감각 만족을 얻으려고 천국에 가게 하는 어떤 종교적 율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의 목적이 아니다. 종교의 길은 사실 자아 인식을 위해서이고 경제 발전은 그저 몸을 건전하고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필요할 뿐이다. 인간 삶의 목적인 비댜, 즉 진정한 지식을 깨달으려면 건전한 마음과 건강한 삶을 유지해야 한다. 감각 만족을 위해 노새처럼 일하거나 아비댜의 배양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ヴィデャーの道は『シュリーマド・バーガヴァタム』に完璧に説かれ、その教えは私たちを絶対真理者について尋ねる生活へと導いてくれます。絶対真理者は、ブラフマン、パラマートマー、人格主神として徐々に悟られます。絶対真理者は、マントラ10 の解説で示した『バガヴァッド・ギーター』の18 の原則に従って知識と無執着心を得た心の広い人物によって悟られます。この18 の原則の主な目的は、人格主神への超越的な献愛奉仕に辿りつくことにあります。ですから、どんな人であろうと、主への献愛奉仕の仕方を学ぶよう奨励されなくてはなりません。

비댜의 길은 인간이 절대 진리에 대해 질문하는 데 인생을 활용하도록 지도하는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가장 완벽히 제시되어 있다. 절대 진리는 브라흐만(Brahman), 빠람아뜨마(Paramātmā),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가반(Bhagavān), 즉 최고인격신에 대한 깨달음으로 단계별로 이뤄진다. 절대 진리는 만뜨라 10의 요지에 설명된 것처럼 바가바드 기따의 18가지 원칙을 따름으로써 지식을 얻고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이 넓은 자가 깨달을 수 있다. 18가지 원칙의 핵심 요지는 최고인격신께 초월적 봉헌을 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류의 사람이 주께 봉헌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ヴィデャーの獲得が保証された道はシュリーラ・ルーパ・ゴースヴァーミーが著わした『バクティ・ラサームリタ・シンドゥ』で述べられていますが、私はこの本をThe Nectar ofDevotion(『献愛奉仕の甘露』)という英語版で発行しています。ヴィデャーを育てる方法は『シュリーマド・バーガヴァタム』(第1編・第2章・第14 節)で次のようなことばに要約されています。

비댜를 목적으로 하는 보장된 길이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Śrīla Rūpa Gosvāmī)가 쓴 박띠-라삼리따-신두(Bhakti-rasāmṛta-sindhu)에 설명되어 있고 우리는 ‘헌애의 감로(The Nectar of Devotion)’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비댜를 배양하는 법이 스리마드 바가바땀(1.2.14)에 다음과 같은 구절로 요약되어 있다.

タスマードゥ エーケーナ マナサー
バハガヴァーン サートゥヴァターン パティヒ
シュロータヴャハ キールティタヴャシュ チャ
デェーヤハ プージャシュ チャ ニテャダー
따스맏 에께나 마나사 tasmād ekena manasā
바가반 사뜨바땀 빠띠히 bhagavān sātvatāṁ patiḥ
스로따뱌 끼르띠따뱌스 짜 śrotavyaḥ kīrtitavyaś ca
드예야 뿌쟈스 짜 니땨다 dhyeyaḥ pūjyaś ca nityadā

「ゆえに私たちは、献愛者の保護者である人格主神について一心不乱に聞き、主を讃え、思い、崇拝しなくてはならない」
宗教、経済発展、感覚満足

“그러므로 오직 한결같이 집중하여 헌애자들의 보호자인 최고인격신에 관해 끊임없이 듣고, 찬양하고, 기억하고, 숭배하라.”

宗教、経済発展、感覚満足は、主への献愛奉仕に向けられなければ、『シュリー・イーシャ・ウパニシャッド』の次のマントラが言うように、さまざまな形の無知にすぎません。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다음 만뜨라가 가리키는 것처럼 종교와 경제 발전, 그리고 감각 만족이 주를 향한 봉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은 그저 여러 다른 형태의 무지에 불과하다.